직할시 승격 50주년, 부산의 과거와 미래<연합>
"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은 2013년이 동북아 시대의 해양수도 실현은 물론 부산 미래 발전 100년의 단초를 제공하는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겁니다."
부산시가 제34회 시민의 날(10월 5일) 기념식에서 과거 50년 성장 원동력인 부산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의 계승과 실천을 위한 로드맵을 시민에게 알릴 예정이다.
과거 50년의 명과 암을 재조명하고 그간의 발전사를 밑천으로 미래 100년의 발전 전략을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부산의 과거 50년은 어떻게 평가받고 있을까.
'부산 발전 50년 역사 이야기' 책은 부산이 50년 전인 1963년 직할시 승격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 글로벌 국제도시로 발전했다고 적었다.
지난 50년 부산의 역사는 성장기, 정체기, 도약기로 나뉜다.
성장기는 1963년 직할시 승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부산시는 직할시 승격 이후 산업화 시대의 주역으로 국가경제성장을 주도했다.
특히 1970년 중반까지 신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입어 전국 수출 비중 26%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제2도시로서 기본 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정체기로 분류된다.
정부의 대도시 성장억제 정책에 따라 성장관리도시로서 지정되면서 부산은 제자리걸음을 해야만 했다.
더욱이 산업여건 변화에 대비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산업구조 개편에 실패하면서 부산은 성장동력을 상실한 도시로 전락했다.
또 과다한 그린벨트 규제로 말미암은 3난(용지난, 교통난, 재정난) 4장(매립장, 화장장, 분뇨처리장, 연탄하치장)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지역경제의 침체국면에 장기간 지속됐고 도시 발전은 그만큼 정체됐다.
그러나 민선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부산은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민선 시행 이후 광역도시로서 성장을 위한 도시 인프라가 대거 확충됐고 2002년 제14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한층 높아진 도시 브랜드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이후 우리나라 제1의 컨벤션 도시로 도약했고 광역교통망 구축과 산업용지 확충으로 새로운 미래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2011년 세계개발원조총회를 개최해 과거 원조를 받던 도시에서 원조를 주는 도시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면서 글로벌 도시로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종해 부산시 행정부시장은 "2013년은 부산이 광역도시로서 위상과 면모를 갖춘 지 꼭 50년이 되는 해"라며 "시민과 함께 변화해온 부산의 지난 50년을 뒤돌아보고 그동안 발전 원동력이 된 부산의 가치를 찾아 미래 부산 100년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직할시 승격 50주년인 2013년을 기점으로 미래 도약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동북아 시대의 해양수도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미래 부산 발전 10대 비전'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10대 비전은 동북아 허브항만, 국제 산업물류도시, 부산항 재개발, 영화·영상타운, 부산금융중심지, 동부산관광·컨벤션 클러스터, 부산 시민공원 조성사업과 동남권 광역교통망 구축, 김해공항 가덕 이전, 하계올림픽 부산유치 등 10가지.
현재 부산을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국내적으로 양극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부각, 부산시 내부적으로는 인구 고령화, 청년 일자리 부족과 동서 불균형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김 행정부시장은 "부산은 또다시 새로운 시대적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며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지난 50년 성과와 향후 미래에 펼쳐질 동북아시대 해양수도 부산에 대한 자긍심으로 부산의 내일을 열어 갈 수 있도록 많은 애정과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인구 136만명→357만명, 예산 7억4천만원→9조3천억원
'50년만의 상전벽해'
부산시가 올해로 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50년 동안 부산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을까.
1963년 직할시로 승격된 부산시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수출 관문으로써 급격한 도시 팽창과 함께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대한민국 제2도시이자 글로벌 거대도시로 '우뚝' = 50년 전 당시 부산시 시정 자료에는 360.25㎢의 면적에 인구는 136만630명, 행정구역은 6개 구·7개 출장소, 공무원 수는 2천449명으로 기록돼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2012년 말 기준으로 부산의 면적은 배 이상 늘어난 768㎢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인구도 357만7천344명이 거주하는 거대도시로 변모했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행정수요도 급격히 늘어 행정구역은 15개 구, 1개 군으로 확장됐고 공무원 수는 50년 전과 비교해 4배가량 증가한 1만6천356명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관문으로서 글로벌 도시로의 성장을 증명하듯 등록 외국인 수는 50년 전 4천213명에서 3만5천383명으로 늘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7억4천만원에 불과했던 부산시의 1년 예산(일반회계 기준)은 9조3천873억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절 연간 1억4천만원(전체 예산의 19.63%)이었던 복지·보건분야 예산은 2조3천878억원(전체예산의 29.1%)으로 늘었다.
◇중심항만·산업도시로서 국가경제 '견인' = 부산항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수출입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면서 1963년 각각 5천600만 달러와 2억2천400만 달러였던 수출과 수입은 50년 뒤 각각 145억6천200만 달러와 147억2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계 무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산업구조는 서비스업 78%, 제조업 9.3%, 건설업 3.7%, 농림어업 9.0%이던 것이 서비스업 71.3%, 제조업 19.3%, 건설업 5.9%, 농림어업 1,1%로 재편됐다.
항만시설은 단순 일반화물만 처리하던 제1∼4부두와 중앙부두에서 신항 건설로 연간 1천618만TEU를 처리하는 10개 부두, 42선석의 세계 5대 항만으로 발돋움했다.
금융기관 수와 예금액은 40개소 487억원에서 602개소 48조원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공항은 국내선만 운항하던 부산국제공항(수영비행장)을 연간 10만3천920명이 이용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874만9천153명의 내·외국인이 부산을 드나들고 있다.
각종 경제 관련 지표 중 50년 전 실업률이 22.8%(2012년 4.1%)에 달했다는 대목이 있다.
한국전쟁 후 피폐했던 부산지역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지를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난을 딛고 재기…풍요해진 삶 = 50년 전 18만732호(보급률 73.6%)였던 주택은 103만5천110호(보급률 108.6%)로 늘었다.
294㎞였던 총 도로연장은 3천724㎞로, 54.9%였던 상수도 보급률은 99.9%로, 28.53%였던 하수도 보급률은 99.1%로 달라졌다.
3천810대에 불과했던 등록 차량수는 117만2천11대로, 858대였던 자가 승용차는 무려 91만7천430대로 증가했다.
279대와 544대였던 시내버스와 택시는 2천511대와 2만5천60대로 늘었다.
초·중·고교 수는 250개에서 611개로, 대학수는 7개에서 23개로 증가했으며 병의원은 829개소에서 4천395개소를 증가했다.
재미난 사실은 현재 28개소인 영화관(극장)이 50년 전 50개소에 달했다는 사실. 부산국제영화제를 중심으로 영화·영상도시로서의 부흥을 꿈꾸는 부산이 되돌아봄 직한 대목이다.
부산시가 제34회 시민의 날(10월 5일) 기념식에서 과거 50년 성장 원동력인 부산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의 계승과 실천을 위한 로드맵을 시민에게 알릴 예정이다.
과거 50년의 명과 암을 재조명하고 그간의 발전사를 밑천으로 미래 100년의 발전 전략을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부산의 과거 50년은 어떻게 평가받고 있을까.
'부산 발전 50년 역사 이야기' 책은 부산이 50년 전인 1963년 직할시 승격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 글로벌 국제도시로 발전했다고 적었다.
지난 50년 부산의 역사는 성장기, 정체기, 도약기로 나뉜다.
성장기는 1963년 직할시 승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부산시는 직할시 승격 이후 산업화 시대의 주역으로 국가경제성장을 주도했다.
특히 1970년 중반까지 신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입어 전국 수출 비중 26%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제2도시로서 기본 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정체기로 분류된다.
정부의 대도시 성장억제 정책에 따라 성장관리도시로서 지정되면서 부산은 제자리걸음을 해야만 했다.
더욱이 산업여건 변화에 대비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산업구조 개편에 실패하면서 부산은 성장동력을 상실한 도시로 전락했다.
또 과다한 그린벨트 규제로 말미암은 3난(용지난, 교통난, 재정난) 4장(매립장, 화장장, 분뇨처리장, 연탄하치장)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지역경제의 침체국면에 장기간 지속됐고 도시 발전은 그만큼 정체됐다.
그러나 민선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부산은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민선 시행 이후 광역도시로서 성장을 위한 도시 인프라가 대거 확충됐고 2002년 제14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한층 높아진 도시 브랜드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이후 우리나라 제1의 컨벤션 도시로 도약했고 광역교통망 구축과 산업용지 확충으로 새로운 미래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2011년 세계개발원조총회를 개최해 과거 원조를 받던 도시에서 원조를 주는 도시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면서 글로벌 도시로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종해 부산시 행정부시장은 "2013년은 부산이 광역도시로서 위상과 면모를 갖춘 지 꼭 50년이 되는 해"라며 "시민과 함께 변화해온 부산의 지난 50년을 뒤돌아보고 그동안 발전 원동력이 된 부산의 가치를 찾아 미래 부산 100년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직할시 승격 50주년인 2013년을 기점으로 미래 도약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동북아 시대의 해양수도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미래 부산 발전 10대 비전'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10대 비전은 동북아 허브항만, 국제 산업물류도시, 부산항 재개발, 영화·영상타운, 부산금융중심지, 동부산관광·컨벤션 클러스터, 부산 시민공원 조성사업과 동남권 광역교통망 구축, 김해공항 가덕 이전, 하계올림픽 부산유치 등 10가지.
현재 부산을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국내적으로 양극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부각, 부산시 내부적으로는 인구 고령화, 청년 일자리 부족과 동서 불균형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김 행정부시장은 "부산은 또다시 새로운 시대적 변화와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며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지난 50년 성과와 향후 미래에 펼쳐질 동북아시대 해양수도 부산에 대한 자긍심으로 부산의 내일을 열어 갈 수 있도록 많은 애정과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1963년 직할시 승격 부산…'50년의 발전史'<연합>
인구 136만명→357만명, 예산 7억4천만원→9조3천억원
50년 전 실업률 22.8% '고단했던 시절 반영'
자가용車 858대→91만7천430대, 주택 18만호→103만5천호
세계일보 & Segye.com
부산 감만부두에서 화물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부산시가 올해로 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50년 동안 부산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을까.
1963년 직할시로 승격된 부산시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수출 관문으로써 급격한 도시 팽창과 함께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대한민국 제2도시이자 글로벌 거대도시로 '우뚝' = 50년 전 당시 부산시 시정 자료에는 360.25㎢의 면적에 인구는 136만630명, 행정구역은 6개 구·7개 출장소, 공무원 수는 2천449명으로 기록돼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2012년 말 기준으로 부산의 면적은 배 이상 늘어난 768㎢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인구도 357만7천344명이 거주하는 거대도시로 변모했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행정수요도 급격히 늘어 행정구역은 15개 구, 1개 군으로 확장됐고 공무원 수는 50년 전과 비교해 4배가량 증가한 1만6천356명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관문으로서 글로벌 도시로의 성장을 증명하듯 등록 외국인 수는 50년 전 4천213명에서 3만5천383명으로 늘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7억4천만원에 불과했던 부산시의 1년 예산(일반회계 기준)은 9조3천873억원으로 증가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절 연간 1억4천만원(전체 예산의 19.63%)이었던 복지·보건분야 예산은 2조3천878억원(전체예산의 29.1%)으로 늘었다.
◇중심항만·산업도시로서 국가경제 '견인' = 부산항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수출입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면서 1963년 각각 5천600만 달러와 2억2천400만 달러였던 수출과 수입은 50년 뒤 각각 145억6천200만 달러와 147억200만 달러에 달하는 세계 무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산업구조는 서비스업 78%, 제조업 9.3%, 건설업 3.7%, 농림어업 9.0%이던 것이 서비스업 71.3%, 제조업 19.3%, 건설업 5.9%, 농림어업 1,1%로 재편됐다.
항만시설은 단순 일반화물만 처리하던 제1∼4부두와 중앙부두에서 신항 건설로 연간 1천618만TEU를 처리하는 10개 부두, 42선석의 세계 5대 항만으로 발돋움했다.
금융기관 수와 예금액은 40개소 487억원에서 602개소 48조원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공항은 국내선만 운항하던 부산국제공항(수영비행장)을 연간 10만3천920명이 이용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874만9천153명의 내·외국인이 부산을 드나들고 있다.
각종 경제 관련 지표 중 50년 전 실업률이 22.8%(2012년 4.1%)에 달했다는 대목이 있다.
한국전쟁 후 피폐했던 부산지역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지를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난을 딛고 재기…풍요해진 삶 = 50년 전 18만732호(보급률 73.6%)였던 주택은 103만5천110호(보급률 108.6%)로 늘었다.
294㎞였던 총 도로연장은 3천724㎞로, 54.9%였던 상수도 보급률은 99.9%로, 28.53%였던 하수도 보급률은 99.1%로 달라졌다.
3천810대에 불과했던 등록 차량수는 117만2천11대로, 858대였던 자가 승용차는 무려 91만7천430대로 증가했다.
279대와 544대였던 시내버스와 택시는 2천511대와 2만5천60대로 늘었다.
초·중·고교 수는 250개에서 611개로, 대학수는 7개에서 23개로 증가했으며 병의원은 829개소에서 4천395개소를 증가했다.
재미난 사실은 현재 28개소인 영화관(극장)이 50년 전 50개소에 달했다는 사실. 부산국제영화제를 중심으로 영화·영상도시로서의 부흥을 꿈꾸는 부산이 되돌아봄 직한 대목이다.
'직할시 50년 부산'의 부침을 이끈 市長들<연합>
세계일보 & Segye.com
1963년 직할시 승격 이후 현재까지 부산시정을 이끈 시장은 제12,13대 김현옥 시장(1962년 4월∼1966년 3월)부터 제33대 허남식 시장(2004년 6월∼)에 이르기까지 모두 19명.
부산의 과거 50년 부침은 이들의 인생 부침과 함께했다.
'불도저 시장'을 알려진 초대 직할시장인 김현옥 시장은 직할시 승격의 일등공신이다. 5·16 당시 부산항만사령관으로 군복을 입은 채 취임했다가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한 뒤 부산시장에 임명됐다고 한다.
1962년 11월 11일, 최고회의에서 부산직할시 승격법률안이 부결되자 야간열차로 상경해 11월 12일 이를 재상정시킨 일화가 있다.
그는 도심 개발에 주력해 전국 처음으로 시역 전반에 걸친 도시계획 용도지역과 지구제를 관철해 부산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할시 2대 시장인 제14대 김대만 시장(1966년 3월∼1969년 4월) 역시 도시정비사업에 역점을 뒀는데 영주동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영주동 판자촌이 재개발돼 영주아파트가 건립됐고 교통량 증가에 따라 전차와 전차 궤도를 철거하고, 영도다리를 폐쇄된 것이 김대만 시장 때의 일이라고 한다.
제16대 최두열 시장(1970년 4월∼1971년 6월)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부산시장에 임명돼 화제를 모았던 인물. 고지대 주민을 위해 산복도로를 개통했고 대티터널, 만덕터널을 만드는 등 도로사업에 주력했다.
제17대는 박영수 시장(1971년 6월∼1977년 7월). 6년 1개월의 긴 재임기간을 통해 '부산의 도시기반을 확실하게 구축했다'고 평가를 받는 시장이다.
제1도시고속도로와 부산대교를 착공했고 부두도로를 확장해 빠르게 커가는 부산의 미래를 대비했다.
그는 문화방면에도 주력해 시민회관을 만들고 민속예술관과 시립박물관을 건립했으며 금정산성을 복원하고 충렬사를 성역화했다.
제18대 최석원 시장(1977년 7월∼1980년 1월)은 지하철 5개 노선 102㎞ 기본계획을 수립, 부산지하철 시대의 첫걸음을 내딛게 했다.
'위대한 시민, 위대한 부산'이라는 시정구호를 내건 제19대 손재식 시장(1980년 1월∼1981년 4월)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 승전일을 기념한 매년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했다.
제21대 최종호 시장(1982년 5월∼1985년 2월)은 '뜻 모아 푸른 부산, 뜻 모아 문화시민'이라는 시정구호를 정하고 동참, 화합, 안정을 강조한 시장이었다. 중앙로 교차로에 전자감응식 교통신호시설을 처음으로 설치했으며 버스 승차권 자동판매 설치, 시·구간 행정전산화를 추진했다.
제22대 정채진 시장(1985년 2월∼1986년 8월)은 '밝고 활기찬 부산'으로 정하고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역점을 뒀다.
날로 심각해지는 교통난을 해소를 위해 가야로 우회도로와 제2부산터널공사를 착공했고, 동서고가도로의 실시설계를 완료했다.
제26대 안상영 시장(1988년 5월∼1990년 12월)은 부산을 동남경제권의 경제수도로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용지난, 교통난, 재정난으로 집약되는 3대 현안 타개에 노력했고 용지난 해소를 위해 김해군 녹산, 가락면과 의창군 천가면 등 90㎢의 시역을 확장하고 강서구를 승격했다. 대대적인 교통체계개선사업을 추진했고 황령산 터널을 착공했다.
1990년대 들어 첫 취임한 제26대 김영환 시장(1990년 12월∼1992년 12월)은 부산이 21세기 주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 정착'과 '지역경제 중흥'을 역점시책으로 내걸었다.
명지, 녹산, 신호지구와 가덕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서낙동강권 종합개발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하였고 해운대 신시가지 구성 사업도 이때 기공됐다.
문민정부 시작과 함께 취임한 제28대 정문화 시장(1993년 3월∼1994년 9월)은 공직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시장 공관을 개방하고 군사작전지역이었던 몰운대, 태종대, 신선대 등 해안경관지역을 개방해 시민과 조직사회에 자율과 변화를 체감하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지방자치가 본격화됨에 따라 1995년 1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해 7월 1일 34년 만에 부활한 민선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승리한 제30대 문정수 시장(1995년 7월∼1998년 6월)이 시정을 이끌었다. 문 시장은 '가덕도 신항만개발계획' 등을 확정하는 등 '21세기 세계 첨단 해양도시 건설의 청사진'을 계획했다.
특히 1996년 9월 제1회 부산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던 부산을 국제적 영상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관선에 이어 민선시장으로 다시 한번 시정을 이끈 제31,32대 안상영 시장에 이어 2004년 4월부터 제33대 허남식 시장이 3선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그는 동부산과 서부산 지역개발을 위해 그린벨트 5만여 평을 해제해 본격적인 개발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UN교통장관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부산디자인센터와 부산테크노파크 등 산업기반시설 확충에도 주력하는 한편 부산불꽃축제 국제화와 남해안 크루즈운항 등 부산 브랜드 관광상품 개발을 추진했다.
서부산권 그린벨트 1천만평을 해제해 국제물류산업도시와 에코델타시티 건설을 추진하고 부산∼후쿠오카 초국경 경제권 형성, 지하철 다대선 착공, 부산도시철도망 확충 등이 그의 작품이다.
부산의 과거 50년 부침은 이들의 인생 부침과 함께했다.
'불도저 시장'을 알려진 초대 직할시장인 김현옥 시장은 직할시 승격의 일등공신이다. 5·16 당시 부산항만사령관으로 군복을 입은 채 취임했다가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한 뒤 부산시장에 임명됐다고 한다.
1962년 11월 11일, 최고회의에서 부산직할시 승격법률안이 부결되자 야간열차로 상경해 11월 12일 이를 재상정시킨 일화가 있다.
그는 도심 개발에 주력해 전국 처음으로 시역 전반에 걸친 도시계획 용도지역과 지구제를 관철해 부산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할시 2대 시장인 제14대 김대만 시장(1966년 3월∼1969년 4월) 역시 도시정비사업에 역점을 뒀는데 영주동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영주동 판자촌이 재개발돼 영주아파트가 건립됐고 교통량 증가에 따라 전차와 전차 궤도를 철거하고, 영도다리를 폐쇄된 것이 김대만 시장 때의 일이라고 한다.
제16대 최두열 시장(1970년 4월∼1971년 6월)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부산시장에 임명돼 화제를 모았던 인물. 고지대 주민을 위해 산복도로를 개통했고 대티터널, 만덕터널을 만드는 등 도로사업에 주력했다.
제17대는 박영수 시장(1971년 6월∼1977년 7월). 6년 1개월의 긴 재임기간을 통해 '부산의 도시기반을 확실하게 구축했다'고 평가를 받는 시장이다.
제1도시고속도로와 부산대교를 착공했고 부두도로를 확장해 빠르게 커가는 부산의 미래를 대비했다.
그는 문화방면에도 주력해 시민회관을 만들고 민속예술관과 시립박물관을 건립했으며 금정산성을 복원하고 충렬사를 성역화했다.
제18대 최석원 시장(1977년 7월∼1980년 1월)은 지하철 5개 노선 102㎞ 기본계획을 수립, 부산지하철 시대의 첫걸음을 내딛게 했다.
'위대한 시민, 위대한 부산'이라는 시정구호를 내건 제19대 손재식 시장(1980년 1월∼1981년 4월)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 승전일을 기념한 매년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했다.
제21대 최종호 시장(1982년 5월∼1985년 2월)은 '뜻 모아 푸른 부산, 뜻 모아 문화시민'이라는 시정구호를 정하고 동참, 화합, 안정을 강조한 시장이었다. 중앙로 교차로에 전자감응식 교통신호시설을 처음으로 설치했으며 버스 승차권 자동판매 설치, 시·구간 행정전산화를 추진했다.
제22대 정채진 시장(1985년 2월∼1986년 8월)은 '밝고 활기찬 부산'으로 정하고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역점을 뒀다.
날로 심각해지는 교통난을 해소를 위해 가야로 우회도로와 제2부산터널공사를 착공했고, 동서고가도로의 실시설계를 완료했다.
제26대 안상영 시장(1988년 5월∼1990년 12월)은 부산을 동남경제권의 경제수도로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용지난, 교통난, 재정난으로 집약되는 3대 현안 타개에 노력했고 용지난 해소를 위해 김해군 녹산, 가락면과 의창군 천가면 등 90㎢의 시역을 확장하고 강서구를 승격했다. 대대적인 교통체계개선사업을 추진했고 황령산 터널을 착공했다.
1990년대 들어 첫 취임한 제26대 김영환 시장(1990년 12월∼1992년 12월)은 부산이 21세기 주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 정착'과 '지역경제 중흥'을 역점시책으로 내걸었다.
명지, 녹산, 신호지구와 가덕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서낙동강권 종합개발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하였고 해운대 신시가지 구성 사업도 이때 기공됐다.
문민정부 시작과 함께 취임한 제28대 정문화 시장(1993년 3월∼1994년 9월)은 공직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시장 공관을 개방하고 군사작전지역이었던 몰운대, 태종대, 신선대 등 해안경관지역을 개방해 시민과 조직사회에 자율과 변화를 체감하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지방자치가 본격화됨에 따라 1995년 1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해 7월 1일 34년 만에 부활한 민선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승리한 제30대 문정수 시장(1995년 7월∼1998년 6월)이 시정을 이끌었다. 문 시장은 '가덕도 신항만개발계획' 등을 확정하는 등 '21세기 세계 첨단 해양도시 건설의 청사진'을 계획했다.
특히 1996년 9월 제1회 부산 국제영화제를 개최해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던 부산을 국제적 영상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관선에 이어 민선시장으로 다시 한번 시정을 이끈 제31,32대 안상영 시장에 이어 2004년 4월부터 제33대 허남식 시장이 3선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그는 동부산과 서부산 지역개발을 위해 그린벨트 5만여 평을 해제해 본격적인 개발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UN교통장관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부산디자인센터와 부산테크노파크 등 산업기반시설 확충에도 주력하는 한편 부산불꽃축제 국제화와 남해안 크루즈운항 등 부산 브랜드 관광상품 개발을 추진했다.
서부산권 그린벨트 1천만평을 해제해 국제물류산업도시와 에코델타시티 건설을 추진하고 부산∼후쿠오카 초국경 경제권 형성, 지하철 다대선 착공, 부산도시철도망 확충 등이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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