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의 이야기

해방이후 부산의 제조업 

해방이후 부산의 제조업

 

1. 1949년은 1948년 이루어진 바터무역의 본격화로 원료난, 자금난이 해결되면서 고무공업, 신발, 목재, 철강, 석유화학, 타월 공업 등 부산의 대표적 공업들이 본격생산에 착소하고 있었고 중소공장들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정기옥이 [흥아고무공장]을, 이연재가 [흥아다이야공장]을 본격 가동하는 등 생산증대에 나서고 있었다.

 

2. [조일고무(정진택)]는 미군정기에 일본에서 공장시설을 이전하여 생산하다가 전쟁기간 중 부산에서 공장을 가동하였다.  [조선이연고무(구필서)]는 인천에서 부산으로 공장시설을 이전 가동하였고, 대구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던 김예준은 [삼화고무(변연재)]에 부산 물주로 등장했다.  [동양고무] 권영일은 전쟁발발 직후 공장 생고무를 군용차량편으로 부산으로 수송하여 가져왔고, 현수덕은 생고무를 다량으로 구입하여 [동양고무]를 설립하였다.

 

3. 적산공장들도 본격 불하되고 가동되었다.  1949년 12월 [흥아타이야]에 이어 1950년 말의 [삼화고무], 1951년 3월의 [조선고무벨트]가 불하되었고 전쟁으로 이들 불하업체들이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4. 기존 조선소에서 나온 근무자들이 소규모공장을 다수 건설하였는데, 부산에 본부를 두고 해방 후 가장 먼저 결성된 '경남선박공업협회'회원을 보면 해방 다시 56개 업체였지만 2년 반 만에 20개 조선소가 새로 만들어졌다.  후에 '제비표페인트'로 사세를 넓힌 [건설화학공업], [문화]볼펜 등 9곳의 계열 자회사를 가진 [강남그룹]으로 성장하는 최초의 출발이었던 [남선도료상회], 그리고 1960년대 번영을 가져왔던 [조광페인트]도 각각 1945년 12월, 1947년 3월 설립되어 늘어난 인구와 주택 등의 생필품 시장을 겨냥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조광페인트 설립자인 양윤복은 해방 후 인구급증에 따라 페인트의 큰 수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집에 '조광페인트공업사' 공장을 직접 차렸지만 기술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페인트 기술을 개발하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부산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연재료를 사용하여 보았다.  그중 가장 좋은 것으로 개발한 것이 송진과 콩, 그리고 들기름을 원료로 하여 섞은 것이었는데 이 페인트는 써 본 사람들이 다른 페인트와 달리 역겨움이 없고 작업이 편리하다는 반응을 보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5. 1948년 이후 부산시내에는 신발공장이 우후축순처럼 생겨나서 이미 1948년말에는 무려 71개나 되었고 하루 3만 켤레 이상 생산업체만도 [삼화], [보생], [신라], [동양고무] 등 14개 업체나 되었으며, 1949년에는 [흥아타이어]공장의 본격생산 등이 가세하면서 부산의 고무공업이 한국공업의 중심산업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6. 1925년 설립된 [동명목재소]가 건축경기의 호황에 힘입어 [동명목재상사]로 회사명을 바꾸고 사업을 대폭 확장함으로써 부산의 목재산업이 전국 중심산업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1949년이었으며, [대동산업]이 밀양, 진주, 진해 등지에 있는 제사공장을 인수하고 강원도 춘성에 60만 정보의 뽕나무밭을 조성하여 규모를 대폭 확대하면서 본사를 서울로 옮김과 동시에 부산의 제사업이 전국 중심산업으로 새출발한 것도 바로 1949년이었다. 

 

7. 목재와 함께 부산 제조업의 대표산업인 신발공장으로 부산 경제의 최전성기인 '양진시대'를 만들은 양태진사장이 1948년 4월 만들어진 [국제고무공업사]를 [국제화학주식회사]로 확대하여 하루 6만 켤레 생산시스템을 갖추는 등 부산의 신발제조업이 왕성한 본격 생산을 보인 것도 1949년이었다.  또 사실상의 부산 석유화학공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개표석유(주)]와 [동아석유(주)]도 1949년에 설립되었다.  부산철강공업의 산증인이었던 [동국제강]의 모태인 [조선선재]가 철강업을 시작한 것도 1949년이었고 한국 로프산업을 만들어 온 [동양제강]이 창립된 것도,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인 [송월타월]이 [송월타월공업사]로 수건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1949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