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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이야기

낙동강 옛사진

낙동강 옛사진

 

 

낙동강에 관련된 사진을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일제 시대 수해로 침수된 경부선철로 

 

 

2. 낙동강전선

6.25때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 국군

그 어느 전투보다 격렬하고 처절했던 낙동강전투에 임했던 아군의 각오를 이 한마디처럼 잘 보여주는 말은 없다.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Walker) 장군은 낙동강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7월 29일 미 25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못 박았다.“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철수ㆍ후퇴는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각 부대는 역습으로 실지를 회복하고 그것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워커 장군의 이 사수 명령은 ‘Stand or Die’란 말로 요약돼 미 언론에 보도되면서 “지나치게 엄격한 명령이 아니냐”며 미국 내에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맥아더 원수는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사수 명령을 옹호하면서 논란을 일축했다.

◆ 낙동강 방어전의 시작

국군과 미군은 대전 함락 직후 낙동강에서 하천을 장애물로 활용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벌일 계획을 이미 마련했지만 막상 1950년 8월 낙동강으로의 방어선 이동은 돌발적으로 결정됐다.
워커 장군은 재편성 중이던 미 24사단을 7월 24일 진주ㆍ거창ㆍ함양 일대로 급하게 투입했다. 북한 4사단이 서부 경남 쪽으로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이어 생각지도 않던 북한 6사단이 서부 경남에 출현하자 경북 상주에 있던 25사단을 열차로 급하게 이동시켜 8월 3일까지 마산에 투입했다.

서부 경남이 뚫리면 마산ㆍ부산이 차례로 함락될 위험이 높지만 이 지역에 달리 아군 방어 병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 2개 사단이 서남쪽으로 빠져나간 만큼 소백산맥 선에 걸쳐 있던 방어선을 급하게 낙동강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다부동전투

낙동강 방어전이 시작된 1950년 8월 달 들어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대구 북쪽의 왜관 일대였다. 북한군은 낙동강에 전개한 10여 개 사단 중 절반에 해당하는 전력을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방어하는 대구방향으로 집중 투입했다. 하지만 대구 북방 다부동을 중심으로 328고지, 유학산 등에서 국군이 20여 일간에 걸친 격렬한 방어전 끝에 8월 말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서 낙동강전투 승리의 단초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미 1기병사단은 국군 1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아 연합작전이 한 차원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8월 16일 미 공군은 B-29 중폭격기 98대로 왜관 부근 낙동강변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하기도 했다. B-29 폭격기를 산업시설이나 군수시설 밀집지역이 아닌 최일선 병력집결 예상 지점에 투입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유례가 드문 극단적인 성격의 작전이었다.

미군의 판단 결과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많이 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물량 공세에 북한군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패배감이 확산돼 결과적으로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자료 : 국방일보에서)

 

 

6.25때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 국군

 

낙동강 철교와 낙동강 전선

 

4. 낙동강 옛 철교 

왜관은 한국전쟁 때 낙동강을 중심으로 남한군과 연합군이 설정한 최종 방어선인 소위 워커라인의 최전방으로 이곳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옛철교를 통하여 피난민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인민군이 바로 앞으로 당도하자 철교를 폭파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가 1950년 8월 3일이다.

다리가 끊어지자 강으로 물길을 헤치며 사람들이 건너오는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라 한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기세를 다시 잡은 연합군이 진격을 위해 임시로 다리를 이어서 진격작전에 사용하였다. 휴전을 하면서 다리를 정비하고 인도교로 사용해오다 오래되어 안전상에 문제가 생기자 1979년에 통행을 중지하고 철거를 하기로 하였으나, 한국전쟁의 상처가 새겨진 역사성을 인정받아 보수를 거쳐 보존하고 있다. 지금은 사람이 오가는 인도교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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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jh@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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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용 ysy@yeongnam.com >

[낙동강 전투 재조명](끝)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역사적 의미영남일보>사회 | 2011-09-15 07:26:44
...6·25전쟁 당시 최후의 방어선으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다음 몇가지 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우선 한·미가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해 방어작전을 실시했다는 것...
<임성수 s018@yeongn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