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범종. 종고 333㎝, 구경 227㎝. 국보 제29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771년(혜공왕 7)에 완성했다. 현존하는 최대의 거종으로써 각부양식이 아름답고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며, 상원사동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개념용어 |
목차
정의
법구사물 중의 하나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구.
개 설
우리 나라의 금속공예 전반에서도 그 규모와 각 부의 조각으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동종(銅鐘)이라고도 하는데, 동종이란 사찰에서 사용하는 동제(銅製)의 범종으로,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종이다.
이 범종은 다른 불구와 달리 그 규격이 크기 때문에 흔히 종루(鐘樓)나 종각(鐘閣)을 짓고 달아두며 중형이나 소형의 동종이면 현가(懸架)를 설치하여 매달기도 하므로 목조가구(木造架構)와도 연관된다.
범종의 기원 및 구조
범종의 기원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일반적 통설로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은(殷)나라 이후에 악기의 일종으로 사용되어 왔던 고동기(古銅器)의 종을 본떠 오늘날 불교사원에서 볼 수 있는 범종의 조형이 비롯되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고대중국의 종이나 탁(鐸)을 혼합한 형식이 점점 발전되어 범종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설에서 공통되는 것은 모두가 악기인 고동기의 일종인 종에서 시작되어 발전되었다고 보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은 용종(甬鐘)을 의미한다. 이 용종은 중국의 주대(周代)에 만들어져 성행하다가 주나라 말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다른 예기(禮器)와 같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악기의 일종이다. 이와 같은 용종을 모방하여 오늘날 한국종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용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이 8세기경에 들어와서 한국종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용종에서 용(甬)의 부분이 한국종의 용뉴(龍鈕)에 해당하며, 용종의 수두문(獸頭文)이 발전하여 용두(龍頭)로 변하였고, 종신(鐘身)에 해당하는 정부(鉦部)에 36개의 돌기를 나타낸 ‘매(枚)’가 한국종의 유두(乳頭)로 표현되었으며, 용종의 ‘수(隧)’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종의 당좌(撞座)라고 보는 것이 첫번째 설이 주장하는 대략이다.
그런데 용종의 각 부를 살펴보면 손잡이 부분에 용이 있고, 그 용은 형(衡)·시(施)·간(幹)이라는 세부적인 명칭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용의 밑으로는 무(舞)라고 일컫는 것이 있다. 그리고 종신에 해당하는 양면에는 ‘전(篆)’이라는 것으로 나누어서 매라고 불리는 돌기물들이 한 면에 18개씩, 전부 36개가 있는데 이것은 ‘정(鉦)’이라고 불리는 곳에 배치되어 있다.
종신의 양쪽 뾰족한 하단 부분은 ‘선(銑)’이라 하고, 이 양쪽 ‘선’ 사이에 안쪽으로 구부러진 부분의 선을 ‘우(于)’라고 부른다. 그 ‘우’의 중앙 상부에는 당좌와 비슷한, ‘수’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용종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종인데,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 비하여 가장 고식(古式)의 양식과 특수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국 범종의 특수한 구조를 살펴보면, 종의 정상에 있는 용뉴 옆에 용통(甬筒)이 첨가되었고, 유곽(乳廓)의 높이는 종신(鐘身) 높이의 약 4분의 1로 줄어들어 종견(鐘肩) 밑의 네 곳에 배치되었으며, 유곽 안에 장식된 유두의 수는 1개의 유곽에 9개씩 배치되어 전부 36개이다. 그리고 종신에는 넓은 간지(間地)를 남겨 그곳에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당좌가 대칭으로 배치되었으며, 간혹 명문(銘文)이 조각된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범종의 대표가 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상원사동종(국보, 1962년 지정)과 성덕대왕신종(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상원사동종은 종의 모양이 포탄의 머리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추형이며, 또한 우리 나라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장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종신의 밑부분 약 3분의 2쯤 되는 곳이 가장 넓고 그 밑은 조금 좁아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는 외형을 갖추고 있다.
이들 신라종의 종신 상단에는 상대(上帶)가 있고, 하단에는 하대(下帶)라고 불리는 문양대(文樣帶)가 돌려져 있는데, 상대에 붙은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종복(鐘腹)에는 2개의 당좌와 2군(群)의 비천상이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종신의 상부에는 용종의 ‘무’에 해당하는 천정판(天頂板), 즉 종정(鐘頂)을 두 발로 딛고 머리를 숙여서 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 듯한 용뉴를 만들어 놓았으며, 구부린 용의 몸뚱이에 철색을 끼워서 종뉴(鐘鈕)에 매달아 놓았다.
또한, 용뉴 옆 용종의 용에 해당하는 부분에 용통을 배치하였는데, 용종에서의 용은 내부를 뚫지 않아 손잡이밖에 되지 않았으나, 신라종의 용통은 내부를 뚫어 종신의 내면과 천판(天板)을 통하여 서로 맞뚫리게 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는 천판에 용통이 없고 용뉴도 한 마리의 용이 아니라 일체쌍두룡(一體雙頭龍)을 구부려서 배치하고 있으며, 종신에는 비천상을 배치하지 않고 종신 전부에 상하로 가득히 문양대를 장식하여 압박감을 주는 것이 한국종과 구별되는 다른 점이다.
한국종의 각 부 명칭을 살펴보면 종의 맨 윗부분부터 용통·용두·천판·상대·유곽·유두·비천·당좌·하대로 구분된다. 이상은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한 것으로, 고신라·고구려·백제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 한국종이 삼국시대부터 발전하여 온 과정은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1974년 8월에 실시된 익산미륵사지동탑지(益山彌勒寺址東塔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동제풍탁(金銅製風鐸)이 주목된다. 이 풍탁은 신라종에서 볼 수 있는 원형이 아니고 용종과 같이 평면이 타원형인데, 상대나 하대, 유곽 부분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소문대(素文帶)이며, 유곽 안에는 소문인 5개의 유두가 돌기되어 있다. 또한, 이 금동탁에도 신라종과 같이 당좌가 배치되었는데, 그 문양은 8판의 연판(蓮瓣)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연판당좌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시대의 범종 역시 신라의 범종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유물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고구려와 백제의 범종이 어떠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시대적 변천과 특징
한국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상원사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후 고려·조선시대 범종의 형태나 양식의 변천을 고찰함에는 이들을 기준으로 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 범종의 전형으로 대표가 되고 기본적인 양식을 갖춘 범종은 역시 신라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범종은 국내·외를 합쳐 10구를 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범종은 상원사동종(725,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성덕대왕신종(771년, 국립경주박물관)·청주 운천동출토동종(9세기 후반, 국립공주박물관)·선림원동종(禪林院銅鐘, 804, 1951년 소실)·실상사동종(實相寺銅鐘, 9세기 중반, 동국대학교 박물관) 등 5구인데, 선림원동종과 실상사동종은 파손되어 완형(完形)이 아니므로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3구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편, 일본에 건너간 신라시대의 범종은 6구가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4구만이 일본 국내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완형의 신라 범종은 국내외를 합하여 모두 7구인데, 이들 신라 범종의 형태와 각 부의 양식 수법을 종합하여 좀더 세밀히 고찰하고 각 부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특색을 들 수 있다.
① 상대(견대라고도 함) : 신라시대 범종들의 주된 문양 처리는 통계적으로 보아 반원권(半圓圈) 문양을 사용한 것이 가장 많다. 반원권의 문양들은 세부적인 차이점은 있으나 거의가 반원권이 중심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성덕대왕신종과 실상사파종만이 특수하게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주문양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다른 신라시대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으로 주목된다.
② 유곽 : 상대의 문양과 같은 반원권 문양대를 사용하였으며, 이 밖에 보상당초문·천인상(天人像)·천부상(天部像)·기타 화문(花文) 등으로 조각하고 있다.
③ 하대 : 성덕대왕신종 등 2·3구의 종에서는 보상당초문과 파상문(波狀文)을 사용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상대나 유곽의 문양과 같은 반원권 문양을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이 주문양대(主文樣帶)의 내부에 주악상(奏樂像)·보살상(菩薩像)·연화문(蓮花文)·당초문·운문(雲文) 등을 장식하는 세부적인 문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④ 비천상(飛天像) : 신라종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거나 세우고 앉거나, 또는 결가부좌한 자세로 천의(天衣)를 날리며 악기를 들고 주악하거나 또는 합장하면서 공양하는 상으로 일관되고 있다.
⑤ 용뉴와 용통 : 이 조각은 한국 범종의 용뉴 부분을 형성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특히 용통의 기원은 큰 연구 과제이다.
⑥ 당좌 : 일반적으로 2개의 원형 당좌를 종신에 배치하였는데, 이 당좌의 형태는 중심부에 자방을 갖춘 연화와 인동(忍冬)연화가 있고, 그 주위를 세각(細刻)한 연주문대(連珠文帶)나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당좌의 외곽부는 굵은 연주문대로 선각(線刻)하여 더욱 화려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국민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성행하였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던 고려 초기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적으로나 각 부의 수법에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고려시대는 12세기 초 몽고에 병란을 당할 때까지를 전기, 그 이후인 12세기 이후를 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구분인데, 범종도 전기와 후기에 따라 양식과 수법이 달라지고 있다. 전기는 북방(北方)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신라종의 전통을 이어오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려의 미술은 조각적인 것에서 공예적인 방향으로 흘러 공예미술에서 특색을 나타냈다. 통일신라는 물론 대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려청자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문화가 최성기를 이루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한편, 후기에 들어와서는 다른 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간지(干支)’로써 기명을 나타냈는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해지고 평민화되어 가는 쇠퇴기에 들어서는 시기로 범종 또한 신라종과는 달리 왜소해진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고려의 동종은 전기에는 신라시대의 형태를 본받아서 대체적으로 상대 위에 입상화문(立狀花文)이 없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대에 입상화문이 나타나고 종의 규모도 왜소해지기 시작한다.
고려시대의 범종은 신라의 경우와 달리 국외로 유출된 것도 많지만 국내에 보존되어 있는 것도 상당히 많다. 고려 전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범종으로 1010년작 성거산 천흥사동종(국보, 1993년 지정), 1058년작 여주 출토 동종(보물, 1993년 지정), 용주사 동종(국보, 1964년 지정)의 3구를 들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속하는 범종으로는 1157년작 정풍2년명동종(개인 소장), 1222년작 내소사동종(보물, 1963년 지정), 탑산사명 동종(보물, 1963년 지정), 1229년작 죽장사기축명동종(호암미술관) 등이 있다. 이들 4구의 동종은 역시 상대 위에 산형(山形)의 입상화문이 돌려져 있어 고려 후기 범종의 특징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 말기에 불교 그 자체의 쇠퇴와 요승(妖僧)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부패상이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급에 의하여 제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새로운 교화이념으로 유교가 숭상됨에 따라 신라와 고려를 통하여 800여년이나 국교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던 불교가 유교로 대체되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변화는 당시의 조형미술에도 크게 영향을 주어 자연히 불교미술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그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여세와 태조·세조 등 군주의 불교 귀의, 또는 보호에 따라 약간의 작품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1592)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는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 고려적인 조성 양식과 수법을 다소나마 간직한 작품들이 출현하여, 오늘날 실제로 그 유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인 후기에는 고려의 여운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전란 때문에 오랜 전통이 단절되어 조형미술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범종은 10여구에 불과한데, 이것은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많은 전재(戰災), 또는 한말 일본인들의 약탈에 의한 결과이다.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범종들은 그 규모가 거대한데, 이것은 당시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에서 주성(鑄成)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1462년작 흥천사명 동종(보물, 2006년 지정), 1469년작 봉선사 대종(보물, 1963년 지정), 1469년작 낙산사 동종(보물, 1968년 지정), 1491년작 해인사 동종(보물, 1997년 지정) 등이 있다.
이들 4구의 범종 가운데 해인사동종을 제외한 3구는 모두 왕실과 관련된 주성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역시 높이가 1.5m에서 2.8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조선 전기 범종들의 형태와 양식 수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종신의 단면은 견부(肩部)의 곡선을 제외하면 거의 장방형으로, 정상에는 쌍두(雙頭)의 용뉴가 있어 이 동체로 종을 매달게 하였다. 그리고 원주형(圓柱形)의 용통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해인사동종과 같이 용통 대신 하나의 원공(圓孔)이 뚫려 있는 예도 있다.
견부에는 복련대(覆蓮帶)가 돌려졌으며, 복련을 장식한 견대가 있을 때에는 그 밑에 범자열(梵字列)을 돌려서 상대를 표시하고 있다. 한편, 범자(梵字)의 양주(陽鑄)는 고려시대보다 더욱 성행하였다. 4개의 유곽은 윗변의 상대에서 떨어져서 완전하게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으며, 유곽 사이사이에는 1구씩의 보살상을 배치하고 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굵게 조각된 중대가 양주되고, 명문은 종신 전면에 새겨져 있는데 모두 해서(楷書)로 돋을새김되었다. 하대는 하단에서 약간 떨어진 윗부분에 마련되었고, 그 하대의 하선(下線) 밑으로 하단에 이르기까지는 약간 두드러져 무문대(無文帶)를 이루고 있다.
당좌는 마련되지 않아서 종신 하대부의 무문대를 두드려 타종하였기 때문에 그 흔적이 완연하다. 종의 구연부(口緣部)는 주물의 두께가 두툼하고 종신부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곧 한국범종의 고유한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일면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의 범종은 100구가 넘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은 수이다. 이들 후기의 범종들은 대개 주성연기(鑄成緣記)가 있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데 모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강희(康熙)·건륭(乾隆) 연간에 만들어진 동종으로 우리 나라의 ‘영조·정조시대’와 일치한다.
후기의 범종은 전기와 같이 규모가 큰 작품이 없고 장식 문양도 더욱 치졸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보광사숭정7년명동종(普光寺崇禎七年銘銅鐘, 1634, 경기도 양주), 직지사순치15년명동종(直指寺順治十五年銘銅鐘, 1658, 경상북도 김천), 통도사강희25년명동종(通度寺康熙二十五年銘銅鐘, 1686, 경상남도 양산), 범어사옹정6년명동종(梵魚寺雍正六年銘銅鐘, 1728, 부산광역시), 영국사건륭26년명동종(寧國寺乾隆二十六年銘銅鐘, 1761, 충청북도 영동) 등을 들 수 있다.
이 5구의 범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직지사종으로 높이가 1.5m이고, 통도사종은 1.47m이며, 보광사종은 65㎝이다. 역시 전기에 비하여 훨씬 규모가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범종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조형과 문양을 보이고 있다. 즉, 종신의 단면은 거의 장방형이고, 정상부에는 쌍룡두(雙龍頭)의 용뉴가 있으며, 용통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견부에는 연화문이나 또는 범자가 돌려져 있으며, 상대에도 대체로 범자가 돌려져 있다.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이 4좌 배치되었는데 그 유곽의 사이사이에는 4구의 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다.
종신 중앙부의 굵게 조각된 중대는 생략되었으며, 명문은 돋을새김 또는 오목새김되었거나 점선으로도 새겨져 있다. 하대는 대부분 구연부에 표시되었거나 생략되었고, 당좌가 없으므로 하단부에 타종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종의 구연부의 형태나 촉감은 고려시대와 같은데, 두께가 두툼하고 종신부의 위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 느낌을 주는 우리 나라 고유한 특성을 본받고 있다고 하겠다.
조각과 명문
종의 의장(意匠)은 각 부위의 특성에 따라 각기 환조(丸彫)·부조(浮彫)·양주(陽鑄)·오목새김[陰刻] 등 조각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종의 정부(頂部)에 설치된 용뉴는 용 한마리로 조각되었는데, 허리를 구부려 고리를 이루어 이 고리를 통하여 종을 매달게 되어 있다.
용두의 형태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신쌍두(一身雙頭)의 쌍룡으로 된 것이며, 또 하나는 상반신만 나타낸 한 마리의 용으로 된 것이다. 용두는 목을 구부려 아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용두의 주형(鑄型)은 정밀한 납형(蠟型) 등이 주조에 사용되었고, 재료도 지금(地金)의 질이 좋고 발색이 아름다운 청동(靑銅 : 일반적으로 唐金이라 불리고 있다.) 조각의 특성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용두는 그 형상이 복잡하게 구성되었음에 따라 여러 개로 분할된 거푸집, 즉 기형(寄型 : 모아 맞추기형)이 주로 쓰이며, 용두의 기능이 종을 걸어 매다는 고리를 형성하는 데 있으므로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 주조로 내부를 꽉 차게 주조하였다.
용두에 붙여서 음향 조절을 하는 원통형의 음관(音管)이 설치되어 있어 종의 내부와 관통되었는데, 그 형식은 주대(周代)의 종인 용종의 형식에서 유래된다. 이 용통은 3∼6단으로 구획하여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이 대상(帶狀)으로 돌려지고, 또 대상에는 연꽃 모양의 화문(花文)이 장식되었다.
용통의 의장 문양은 양주되어 매우 정치(精緻)하게 장식되었다. 종 상하 끝, 즉 종의 어깨와 주둥이 부분에는 문양대가 정교하게 장식되었다. 그 문양은 일반적으로 당초문형식(唐草文形式)이 쓰였다. 그 당초문은 구름을 상징적으로 장엄한 것으로 매우 유연한 곡선과 화려한 꽃무늬가 어우러져 한층 공교롭게 의장된다. 그 문양은 돋을새김으로 조식되며 상하 주연에 자잘한 주문대(珠文帶)가 장식되었다.
종견 문양대에 붙여서 대칭되는 네 곳에는 이른바 유곽이라 불리는 방형곽(方形廓)이 설치되어 그 안에는 각기 9개씩 모두 36개의 유(乳)가 배치되어 있다. 이 유곽의 둘레에는 역시 문양대가 돌려져 유곽대(乳廓帶)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문양도 주로 화려한 당초문을 돋을새김하여 장식하고, 또 주연에는 연주문(連珠文)이 돌려졌다.
고려시대의 동종에서는 종견 위에 입화(立花) 장식이 붙고 또 음관 위에 여러 개의 보주(寶珠)가 붙는 등 다소 양식적인 변화가 있으며, 종견 상하대의 당초문도 반화형(半花形)의 화문이나 비천문(飛天文) 또는 뇌문(雷文)으로 대체된 것을 볼 수 있다. 유는 연화를 양주한 유좌(乳座) 중앙부에 자방(子房)이 있는 단순한 연화좌(蓮花座)로 된 것과, 그 연화좌 중앙부에 연봉 모양이 돌출되어 커다란 꼭지를 이룬 두 가지 형식을 볼 수 있다.
상원사종을 비롯한 통일신라기의 범종은 대개 6∼8엽의 연화좌 중앙에 연봉이 돌출되어 있는데, 연봉에 연판(蓮瓣)과 여의두문(如意頭文)에 연자(蓮子) 등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의 경우에는 유가 돌출되지 않고 연꽃만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의 몸체는 네 곳의 유곽 이외에 많은 공간이 이루어져 이 공간에는 주로 비천상과 당좌가 설치되고, 때로는 종의 소속 사찰과 제작 연대, 제작 경위 등을 새긴 간단한 명문(銘文)이 있다.
한편, 통일신라기의 범종에는 주로 비천상이 부조된 데 비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여래상·보살상 등이 새겨지기도 하였다. 조각 수법도 신라시대에는 매우 사실적인 부조수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었으나 고려 이후로는 선조(線條)로 된 매우 졸렬한 표현의 돋을새김 문양으로 나타난다.
돋을새김 수법은 형상 외부를 깎아내려서 두께로 강조하는 제작 방법이다. 동종에 새겨진 명문은 돋을새김과 오목새김의 두 가지 방법이 쓰이는데, 이들 표현 형식은 사물을 선으로 표현하는 데 적합하므로 곧잘 명문이나 상징적인 도형 등에 사용되었다.
종의 문양은 당초문·연화문·연판문·연주문·뇌문·범문(梵文)·운문(雲文)·해파문(海波文)·능화문(菱花文) 등 부수적인 장식 문양과, 비천상·여래상·보살상·동자상(童子像) 등 상징적인 조상(彫像)으로 그 유형을 나눌 수 있다.
당초문은 무늬의 형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무늬의 형태는 시대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은 인동 덩굴이 뻗어나가는 형상을 도안한 무늬로, 그 형식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고대미술에서는 한대(漢代) 운문 형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다양하게 쓰였던 고식(古式)의 당초문이다.
보상당초문이란 당초 덩굴에 보상화(寶相華)를 결속하여 이룬 화문 형식으로 본래 팔메트(palmette)엽을 합성한 화문을 덩굴무늬에 결합한 것이다. 이 문양이 성립하기 전에는 여러 종교적 건축기념물에 장식물로 쓰였기 때문에 본래부터 불교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성행되었다.
이 시기의 모든 공예미술에서는 모란·국화·포도·석류 등 화문을 보상화문으로 변화시킨 다채롭고 다양한 당초문이 나타나며, 불교미술의 특징적 장식 요소를 이루게 되었다.
연판문 또한 보상화 형식으로 화려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또 서역적(西域的) 장식 요소인 연주문이 가미되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도 대체로 신라의 양식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점점 정교한 조각 수법을 떠나 오목새김·돋을새김 등 선적(線的)인 도형으로 형식화되었다.
비천상은 천의 자락이나 얼굴 표현, 몸체의 율동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부조 수법을 보여 주는데, 대개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주악상(奏樂像)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천상은 2구가 한 쌍으로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원사종의 예와, 비천 한 쌍이 종의 앞뒤에 각각 따로 배치된 성덕대왕신종의 예를 볼 수 있다. <林永周>
범종은 조성 연대가 명기된 것이 어느 미술품보다도 많아서 각 부의 조성 양식 및 조각 수법, 비천상이나 보살상 또는 각종 문양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상원사동종은 천판 상면의 용뉴 양측에 “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鐘成記之 都合鍮三千三百鋌云云(개원13년을축3월8일종성기지 도합유3천3백정운운)”이라 오목새김한 명문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동종은 개원 13년 3월 8일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개원13년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해당되는데, 이렇듯 뚜렷한 명문에 따라 조성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각 부의 양식이나 조각 수법 등은 모두 주종명(鑄鐘銘)의 절대연대인 성덕왕 24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연화문이나 당초문 등은 문양사연구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되며, 비천상은 물론 정상부의 용뉴는 한국의 용상(龍相)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다음, 성덕대왕신종은 종신 중간쯤의 간지(間地)에 1,000자가 넘는 명문을 돋을새김하였는데, 그 끝부분에 “大曆六年歲次辛亥十二月十四日鑄鐘 大博士大奈麻朴從鎰云云……(대력6년세차신해12월14일주종 대박사대나마박종익운운……)”이라고 종을 만든 연대를 밝히고 있다. 당나라의 대력6년은 신라 혜공왕 7년(771)에 해당하며, 앞에서 살펴본 상원사동종보다 46년이 뒤진다.
성덕대왕신종은 현재 남아 있는 한국종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거대한 범종이다. 이 종에 조각된 비천상이나 당좌, 8능형(稜形)의 종구(鐘口)와 상·하대, 유곽의 문양 등은 일찍부터 크게 주목되었는데, 특히 주성연기와 더불어 조성 절대연대가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범종을 살펴보면, 천흥사동종은 “聖居山天興寺鍾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성거산천흥사종명 통화28년경술2월일)”이라 돋을새김된 2행의 명문이 있어 이 동종이 고려 현종 1년(1010)에 주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동종에서는 정상부의 용뉴와 용통, 종신의 상대와 유곽내 8개의 유두, 당좌, 하대 등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데 비하여 비천상은 많은 변형을 보인다. 특히 명문을 새긴 것도 유곽 밑에 위패(位牌)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돋을새김하여, 이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출토된 청녕4년명동종은 종신 하부에 이르러 당좌 사이의 하대 한 곳에 연꽃으로 장식한 방액(方額)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명문을 오목새김하였는데, 그 명문 말미에 “淸寧四年戊戌五月日記(청녕4년무술5월일기)”라 하여 주종연대를 밝히고 있다. 청녕 4년은 고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되는데 천흥사동종보다 48년이 늦다.
이 동종도 비천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신라시대의 양식 수법을 따르고 있다. 즉, 네 곳의 유곽 밑에 가늘게 조각한 구름 위에 불보살을 각각 1좌씩 조각하였는데, 이후에 조성된 비천은 모두 불보살로 변하고 있어, 종신부에서의 불보살의 출현은 대체로 11세기 중엽부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견(鐘肩)에는 얕은 귀꽃 모양이 붙어 있어,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입화식(立花飾)의 시원을 여기에 둘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식상에 있어서 많은 변형을 볼 수 있는데, 그중 대표작으로 흥천사동종을 들 수 있다. 종의 견부에는 볼록한 두 줄기 선을 돌리고 그 위에 단판연화문을 돋을새김하였다. 종신 중앙에는 세 가닥의 굵고 볼록한 횡선을 돌려서 상·하로 구분하였고, 하구(下區) 중앙에 다시 볼록하게 두 줄기 선을 돌려 하대 모양을 취하고 그 사이에 파상문을 돋을새김하였다.
당초문이 돋을새김된 유곽 안에는 돌기된 9개의 유두가 있고, 네 곳의 유곽은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상대에서 떨어져 있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곽 사이에는 원형의 두광(頭光)을 갖추고 연화좌 위에 반측면상(半側面相)의 보살입상이 1구씩 양주되어 있다.
이 동종은 종신 중앙의 세 가닥 융기선 밑의 넓은 간지에 장문(長文)의 명문이 돋을새김되었는데, 그 명문의 말미에 “天順六年壬午十月日(천순6년임오10월일)”이라고 주성연대를 밝히고 있어 세조 8년(1462)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봉선사대종에는 종신 하구 간지에 가득하게 돋을새김된 명문이 있는데, 그 끝부분에 “成化五月七日(성화5월7일)”이라 새겨져 있어 이 동종의 조성연대가 세조 15년(1469)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보살입상의 주변과 종신 중앙부의 세 가닥 융기선 상연부(上緣部)에 범자가 돋을새김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이상과 같이 범종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대부분의 명문에는 연기(緣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연기에 보이는 소속 사원이나 화주(化主)·시주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 당시의 사회·사원·경제·관등(官等), 심지어는 중량(重量)과 그 단위까지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신라 상원사동종의 “……都合鍮三千三百鋌……(……도합유3천3백정……)”이나 성덕대왕신종의 “……敬捨銅十二萬斤欲鑄一尤鐘一口立志……(……경사동12만근욕주1우종1구립지……)”, 청녕4년명동종의 “……鑄成金銅一口重一百五十斤(주성금동1구종150근)” 등은 모두 당시의 주종 중량을 명시한 것으로,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성덕대왕신종에서의 ‘級飡, 大奈麻, 奈麻, 大舍’ 등은 당시 신라의 관등을 나타낸 것이므로, 주종 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실감하게 한다. 천흥사동종의 ‘聖居山天興寺鐘銘(성거산천흥사종명)’, 흥천사동종의 ‘興天寺新鑄鐘銘(흥천사신주종명)’, 봉선사대종의 ‘奉先寺鐘銘(봉선사종명)’ 등 서두에서 소속된 사원을 밝히고 있으므로, 당시 사원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명문 전체의 내용으로 당시 그 사원의 국가적·사회적 위치를 짐작하게 하며, 주종불사(鑄鐘佛事)와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살펴봄으로써 사찰 주변의 경제 상황도 짐작하게 한다. 명문의 말미에 ‘彫刻匠, 爐冶匠, 水鐵匠’ 등을 명기한 범종도 있는데, 이러한 명문에서는 당시의 사회계급을 알 수 있어 주의를 끈다.
성덕대왕신종은 명문에서도 밝혔듯이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을 위하여 종을 만들려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다음 대인 혜공왕이 그 뜻을 받들어 동왕 7년에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어, 종을 만드는 그 자체가 국가적인 사업이고 국왕을 위하는 일이었음을 말하여 준다.
청녕4년명동종도 서두에 ‘特爲聖壽天長之願’이라 하였고, 이밖에 흥천사동종이나 봉선사대종도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군주·왕실을 위한 주종이었다. 따라서 범종의 명문에서 조성 연기를 분석, 연구함은 곧 당시의 사회 제반문제까지도 부분적으로 고찰하는 결과가 되므로 범종 연구의 역사적 의의 또한 크다고 하겠다.
범종의 제조법과 소리
한국종을 창출한 신라사람들이 현대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상원사종·성덕대왕신종 등과 같은 명종을 만들어 종각에 어떻게 걸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종(鑄鐘)에 대한 기록이 없고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주조비술(鑄造秘術)도 도중에 단절되어 고대의 주종 기술을 찾을 길이 없다.
종의 생명인 ‘청아하고 은은한 종소리’, ‘아름다운 문양의 미’를 겸비한 신라사람의 주종 기술은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크게 한다. 여기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신라종을 토대로 하고, 현대의 주조기술과 관련시키면서 종의 제조법과 소리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종의 제조과정은 ① 용융금속을 주형에 주입하여 만드는 주조법(鑄造法), 즉 범종·동탁(銅鐸) 등과, ② 청동을 단련하여 만드는 단조법(鍛造法), 즉 금고(金鼓)·동라(銅鑼)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주조법으로 만든 종은 무거워서 종걸이에 걸어 고정시켜 타종하고, 단조법으로 만든 것은 가볍고 크지 않아 이동시키기 쉬운 장점이 있다.
설계
종을 만들기 위하여 종 제작을 의뢰한 사람의 요구, 종의 기능, 종의 크기, 종의 형상과 문양을 구상하고, 구체적인 치수와 문양에 대한 도면을 작성하는 것을 종설계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종의 두께 변화에 따른 음향설계와 각 부위의 문양에 대한 문양설계도 함께 한다.
또한 종 제작에 관한 주형, 금속용해법과 기타 필요한 사항 등을 설계에서 정한다. 종이 설계되면 종의 중량-구경(口徑) 치수-종의 높이-음통높이-두께-상대-하대-유곽-당좌-비천상-용두의 크기와 형상, 치수 및 문양이 확정되어 주조에 들어간다.
재료
종은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명기(打鳴器)로, 금속 중에서 청동으로 만든 청동종(우리 나라에서는 銅鐘이라고도 한다.)과 주철로 만든 무쇠종[鑄鐵鐘]으로 크게 나눈다. ≪천공개물 天工開物≫에는 “종을 주조할 때 상등(上等)은 청동으로 만들고, 하등(下等)은 주철(鑄鐵)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한국종은 거의 전부가 청동이고, 주철은 몇 개에 불과하다.
한국 범종에 사용된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이다. 신라 및 고려시대 종명문을 조사하여 보면, 유(鍮, 上院寺鐘)·동(聖德大王神鐘)·고금(古金, 蓮池寺鐘)·금종(金鐘, 來蘇寺鐘`塔山寺鐘) 등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표현법이 다를 뿐 동에 주석 12∼18%를 첨가한 청동이다. 일반적으로 주석량이 많아지면 종소리가 맑고 여운이 길지만, 다소 균열이 생기기 쉬운 결점이 있다.
제작공정
종의 제작공정은 크게 주형공정(鑄型工程)과 용해공정(溶解工程)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주형(鑄型, moulding) : 주형작업은 모형제작(模型製作)·지문판제작(地紋板製作)·밀랍형제작(蜜蠟型製作)과 조형제작 등으로 분업하여 준비된 것을 조립, 쇳물을 주입한 거푸집인 주형을 완성한다.
㉮ 모형제작-종의 외부와 내부모형을 [그림 1]의 빗금친 A와 B에 표시하였다. 이것들을 사용하여 종의 내부가 될 코어(core : 이것을 ‘알’ 또는 ‘알심’이라고도 한다.)인 C와 종의 표면이 될 D의 주형을 만든다. D는 2∼4개로 구분된 주형틀로 조립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지문판제작-한국종 표면의 아름다운 문양은 지문판을 제작, 종 외부 주형에 압입하여 상대·하대·유곽·당좌·비천상 문양을 조형한다. 지문판 재료에는 목재·석고·금속·합성수지 등이 사용되나, 최근에는 목재와 합성수지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 밀랍형제작-한국종의 정상부에 있는 단룡(單龍)으로 된 용뉴와 원통형의 음통 등은 형상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있어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므로 신라시대부터 이것을 밀랍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밀랍 대신 파라핀왁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밀랍형은 밀랍으로 용두와 음통을 만든 다음 이것을 사용하여 [그림 1]의 D상단의 상형(上型)을 만들고, 상형을 가열하여 밀랍이 용해되어 녹아 나온 공간에 쇳물을 주입한다.
㉱ 조형작업-종을 만들기 위한 모형·지문판·밀랍형이 준비되면, 이것을 사용하여 조형작업에 들어간다. 한국종의 주형에는 통틀주형과 조립주형의 2종이 있으며, 주로 조립주형이 널리 쓰이고 있다. 주형조립 전에 내형·외형 등의 건조·소성(燒成) 및 흑연도포 작업이 끝나면 조립작업을 한다. 이때 움[坑]을 파고 주형의 내형인 코어를 먼저 중압부에 배치하고, 종 외부가 될 주형틀을 하부에서부터 순서대로 쌓아올린 뒤, 상부에 용두와 음통이 포함된 상형을 조립하여 주형조립을 끝낸다.
② 주조(鑄造, casting) : 주조공정에는 용해로, 청동의 용해작업, 주입과 의식절차 등이 있다.
㉮ 용해로와 연료―주종에 사용하는 용해로에는 종래 도가니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용해작업이 쉽고 불순물의 혼입(混入)이 없어 재질 변화가 적다. 연료로는 옛날부터 목탄·골탄(骨炭) 등이 사용되었다(최근에는 塊炭·重油 사용). 청동용해용 연료에서 유황(硫黃)과 수분이 가장 유해하므로 이것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 청동의 용해와 주조-청동용해에서는 고종금(古鐘金)을 먼저 용해하거나, 동 또는 동 스크랩에 목탄을 덮고 용해하고, 일부 탈산제를 첨가한 뒤에 필요한 주석을 첨가하여 잘 저어 혼합하거나, 또는 동과 주석의 모합금(母合金)을 만들어 차례로 동과 주석을 배합한다.
용해온도는 주석 12∼18%의 경우 1,150∼1,000℃가 적당하다. 이 온도보다 높으면 가스흡수와 산화 등으로 유해하다. 주조온도는 유동성이 충분하면 낮은 것이 강인성(强靭性)이 크게 된다. 주입온도(鑄込溫度)는 합금의 비율에 따라 다소 다르나 950℃∼1,150℃가 되도록 조절한다. 그러나 주입온도가 낮으면 유동성이 불량하고 결정입의 결합이 불완전하다.
주조 전에는 탈산제(주로 10∼15%의 인이 포함된 燐銅을 사용)로 탈산하고 잘 교반한다. 주입할 때에는 쇳물이 연속적으로 주형내에 들어가도록 주입속도를 조절하여야 한다. 주조가 끝나고 쇳물이 냉각되면 주조된 종을 탈사(脫砂)작업한다. 이와 더불어 종의 표면과 내부를 검사하고, 필요에 따라 다듬질한 뒤 음향을 조절하고 평가한다.
그 뒤 완성된 종을 종각으로 운반하고 타종식을 기다린다. 옛날에는 큰 종은 무겁고 운반하기 곤란하므로, 종각 예정지 부근에서 주종한 뒤 경사면을 이용하여 이동시키고 종각을 건립하였다.
㉰ 의식 절차―불교에서 예불에 사용되는 사물(四物:범종·운판·목어·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인 종을 제작하는 종불사(鐘佛事)는 대단히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을 가졌다. 지옥중생을 구하고, 또한 인간을 백팔번뇌에서 해방시켜 주는 귀중한 범종의 주입작업의 성공을 빌고 주종 작업자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은 쇳물을 용해하여 주입하기 직전에 시행된다.
진동과 음향
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音響]이다. 종은 타종(打鐘)하면 종의 진동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공기의 진동이 사람의 고막을 진동시켜 뇌에 전달되면 소리를 감지하게 된다. 종에서 소리가 발생하는 것은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원자의 진동에 따라 종체의 탄성변형(彈性變形)이 공기중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종의 진동은 종의 크기 및 형상에 따라 다르고 또한 종의 재질, 타봉 종류 등 많은 인자(因子)들이 영향을 미친다.
‘좋은 종소리’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시한다. ① 맑은 소리, 즉 잡음이 없고 귀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감지할 수 있으며, ② 소리의 여운(餘韻)이 길어야 하고, ③ 뚜렷한 맥놀이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세 요소는 종에 사용된 합금, 쇳물의 냉각 속도, 종의 형상, 두께 분포, 문양 배치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진동모드
종의 진동은 반경(半徑)방향·원주(圓周)방향 및 길이방향 등 진동방향에 따라 다르나, 그중에서도 반경방향의 진폭이 가장 크고, 길이방향이 가장 작다. 따라서, 종의 반경방향의 진동변형이 주로 종소리로 들리게 된다. 종의 진동 크기를 표시하는 진폭은 타종 위치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종구(鐘口)에 가까운 종 하부를 타종하였을 때가 가장 크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종소리가 작아진다.
종의 진동양식을 진동모드라 하고, 종을 타종하면 [그림 3]과 같이 종구는 탄성 변형으로(A)·(B)·(C) 등과 같은 진동모드가 생긴다. 가장 간단한 (A)는 기본고유진동(基本固有振動) 또는 4-0모드라 부르고, (B)는 제1고차고유진동(第一高次固有振動, 6-0), (C)는 제2고차고유진동(8-0)이라고 한다.
종을 타종하였을 때 수많은 종류의 진동모드가 생기지만, 그 중에서 높은 고차진동은 빨리 사라지고, 기본고유진동(4-0모드)이 오래 지속된다. 우리가 종의 여운이라고 하는 것은 종의 기본고유진동(4-0모드)이 소리로 들리는 것을 말한다.
종소리의 3개 구간음과 여운
종소리는 수많은 부분음(또는 고차고유진동)으로 구성된 복합음으로, 타종하였을 때 3개 구간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제1구간음은 타종 직후 1초 이내에 소멸되는 소리로 타음(打音)이라고도 한다. 이 소리는 ‘꽝’ 하는 순간음으로서 많은 부분음이 포함되어 있다.
② 제2구간음은 타종한 뒤 5∼10초 전후까지 계속되고 이것이 먼 곳까지 전달되므로 원음(遠音)이라고 하며, 멀리까지 들리는 종소리가 이 소리이다.
③ 제3구간음은 타종한 뒤 30초∼1분 이상 계속되면서 점점 감쇠(減衰)되는 종소리로서 여운이라고도 한다. 여운은 기본 진동모드에만 관계되고, 은은하고 뚜렷한 강약의 맥동(脈動), 즉 맥놀이가 긴 종이 좋다. 종은 표면의 문양 배치 및 주형 제작에서 오는 두께 및 형상의 비대칭 때문에 각 진동모드에 주파수가 약간 차이나는 서로 다른 고주파수 및 저주파수로 구성되는 경우가 있다. 이 고(H) 및 저(L)주파수의 차인 H-L값이 여운의 울림(또는 맥놀이라고 한다.)의 주파수가 된다. 맥놀이는 고주파수와 저주파수가 공명(共鳴)이 생길 때 나타난다.
(4) 대표적인 한국종의 고유진동수
한국종의 특색은 맑고 청아한 음색을 가지며, 또한 긴 여운과 뚜렷한 맥놀이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725)의 고유진동수는 102Hz이며, 4-0진동모드에서 고진동수(H) 103.02Hz와 저진동수(L) 101Hz가 합성되어 맥놀이 주파수 2.02Hz를 형성한 국내에서 가장 좋은 종소리로 평가되고 있다.
상원사종의 특색을 ≪한국의 범종≫에서 조규동(趙奎東)은, “종의 양성적인 소리는 엄숙하고 장중한 성품으로, 저음의 느린 울림과 애타게 절규하듯 중심음이 한없이 길게 푸른 대공(大空) 속으로 아름다운 선을 그어 나간다.”라고 평하였다. 실제로 상원사의 종소리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 종소리가 명실상부하게 국내에서 제일 아름다운 종소리라고 평하는 사람이 많다.
신라종으로서 국내 최대 종인 성덕대왕신종의 기본 고유진동수는 65Hz이고, 맥놀이 주파수는 0.35Hz이다. 그러므로 약 3초에 한 번씩 여운에 울림이 생기면서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이 종의 특색을 ≪한국의 범종≫은 “태산이 무너질 듯 장중하며 호연히 천지에 후(吼)하듯 굵고 낮은 매듭 속에, 또한 못내 자비로운 높은 여운은 그칠 줄 모르고 또 깊게 사바(娑婆) 속으로 스며들기만 한다. 실로 이 세계적 거종의 생명은 그 종소리와 더불어 영원하기만 하다.”라고 평하였다.
이 종은 1,20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동안 많은 역사가 변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공예문화의 진수와 불음(佛音)을 그대로 전하여 주고 있다.
한국종의 음통(音筒)과 명동(鳴洞)
한국 범종의 종정에는 중국종·일본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음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중국 고대의 용종과 관련시켜 용통이라고도 부르고, 또한 음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하여 음관(음통)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 역할·기능에 관하여서는 고고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나 완전히 구명되어 있지 않았다.
1982년 황수영(黃壽永)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인용하여 신라 종정에 있는 원통은 신라 제일의 국보이고, 신기(神器)인 만파식적에서 유래한다는 학설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신라 종정의 원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음관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만한 보고가 없었다. 염영하(廉永夏) 등은 1982년 ≪한국종의 음관에 대한 연구≫에서, 음통은 용두와 더불어 종을 종가(鐘架)에 걸 때 지주 역할을 하고 종을 주조할 때 주형 내부의 가스 배출에 기여하며, 음향학적으로 음향필터(acoustic filter)로서, 타종하였을 때 종 내부의 잡음을 감소시키고 음향 확산효과에 도움을 준다는 공학적인 해석을 하였다. 음통은 앞으로 더욱 연구할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종의 하부에는 옛날부터 항아리를 놓거나 땅을 움푹하게 파서 명동을 만드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명동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철호(鐵壺)가 실물로 1949년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된 바 있는데, 그 외에는 실례를 찾을 수 없다. 이 명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상태에 있어, 더욱 자세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종은 한국 고유의 창출(創出)로 ‘소리’ 및 아름다운 ‘미’에서 세계 제일로 평가되는 우리 나라 금속공예품으로서, 민족의 긍지를 후손에게 남겨준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범종』(조규동, 한국문화재연구회출판부, 1966)
- 『한국종연구』(염영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보신각 새종 설계제작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공과대학 생산기술연구소, 1985)
- 『韓國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 『天工開物』(書文內請, 平凡社, 1979)
- 「조선전기 범종고」(정영호, 『동양학』 1, 1971)
- 「신라.고려범종의 신례」(황수영, 『고고미술』 113.114, 1972)
- 「신라범종의 각부문양소고」(이호관, 『문화재』 10, 1976)
- 「한국종연구」(염영하, 『범종』 1, 1978)
- 「봉덕사종고」(홍사준, 『범종』 1, 1978)
- 「한국범종목록」(금희경, 『범종』 1, 1978)
- 「재일신라범종에 관한 연구」(염영하, 『범종』 5, 1982)
- 「신라범종과 만파식적설화」(황수영, 『범종』 5, 1982)
- 「신라시대의 범종기술」(염영하, 『대한금속학술지』 6,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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