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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

 매일경제신문에서 지난 2017년 2~3월 중 4회에 걸처 보도한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에 관한 기사는 고구려벽화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은바 있다. 고구려벽화를 그림을 첨부하여 흥미롭게 해설한 동 기사를 네티즌들과 공유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소개코자 한다.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1) - 황해도 안악3호분의 주인은?

임기환 기자
입력 :  2017-02-02 15:01:06
 
[고구려사 명장면-12]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3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3호분이 눈길을 끌었다. 무덤의 규모가 크고 벽화의 보존 상태도 좋았을 뿐 아니라 무덤 안에는 250여 명의 인물로 이루어진 대행렬도 등 다양한 벽화가 벽면 가득 담겨 있었다. 실로 고구려 생활사 자료의 보고였다. 여기에 더하여 7행 68자로 된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묘지 묵서명(墨書銘)은 안악3호분을 해방 이후 북한 최고의 발굴로 자리매김하게 한 최고의 명문 자료였다. 그리고 그 묵서명이 후일 국제적 논쟁거리가 되리라곤 발굴 당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묘지 묵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永和) 13년 초하룻날이 무자일(戊子日)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이자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兎帶方太守)요 도향후(都鄕侯)인 유주(幽州) 요동(遼東)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출신 동수(冬壽)는 자(字)가 □安인데, 나이 69세로 벼슬하다 죽었다."

 영화(永和)는 동진(東晋)의 연호로서, 12년으로 끝나고 승평(升平) 연호로 바뀌었는데, 묘지명에서는 이전 연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아마도 연호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영화 13년은 서기 357년으로 고구려 고국원왕 재위 27년이다.

안악3호분을 왕릉으로보는 입장에서는 묘지명이 적힌 아래 장하독을 동수라고 본다.
 묵서명의 주인공 동수(冬壽)는 '진서(晉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 역사책에 보이는 동수와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동수는 본래 전연(前燕)왕 모용황 밑에서 사마(司馬)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러 갔다가 패하여 모용인의 부하가 되었다. 그 뒤 모용황이 군대를 일으켜 모용인을 격파하자 336년에 곽충 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여기까지가 문헌에 보이는 동수의 행적이다. 그런데 안악3호분에서 동수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문헌 기록 이후를 메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묘지라고는 무덤 안에 오직 동수의 것만이 적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무덤의 주인공도 동수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1950년대에 북한학계에서는 안악3호분=동수묘설을 비판하면서 고국원왕릉설이나 미천왕릉설을 제기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 무덤의 규모가 가장 크고, 또 대행렬도의 규모가 왕의 행렬급에 해당하며,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인 깃발이 보이고, 벽화 주인공의 복장이 왕의 복색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안악3호분은 왕릉이라고 주장하였다. 묘지가 쓰여져 있는 동수는 묵서 아래 인물인 장하독이라는 것이다. 다만 미천왕릉이냐 아니면 고국원왕릉이냐인데, 1990년대 이후 북한학계에서는 고국원왕릉설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북한측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안악3호분은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이러한 돌방무덤과 고분벽화라는 양식은 당시까지 고구려 사회에서는 낯설은 장의 양식이다. 수도 국내성에서는 5세기 초까지 여전히 돌무지무덤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천왕릉이든 고국원왕릉이든 갑자기 왕릉을 왜 벽화가 그려진 돌방무덤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그리고 뒤이어 국내성에서 소수림왕릉이나 고국양왕릉, 광개토왕릉은 다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앞뒤가 잘 안 맞는 논리이다.

 더구나 안악3호분이 위치한 곳은 당시 북상하는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예성강 전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아닌가? 이런 곳에 무엇보다 안녕을 중시하는 왕릉을 안치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할 정도로 전선이 불안정한데, 평양보다 더 남쪽인 안악 지역에 아버지 고국원왕릉을 모신다는 생각을 과연 아들 소수림왕이 하였을까? 그리고 고국원왕이 평양 경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도 아직 낙랑, 대방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는 그리 안정되지 않았던 그런 시기이다.

 이처럼 정황상으로도 그렇지만, 무덤 안 벽화의 내용이나 양식을 보아도 고구려 왕릉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무덤 주인공을 포함해서 등장 인물들의 복식도 국내성 일대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고유의 것과는 거리가 있다. 무덤 주인공의 부인과 시녀들의 풍만한 얼굴은 한~위·진대 중국 여인의 모습이지, 갸름한 고구려 여인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도 벽화 제작을 담당한 이들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낙랑계 혹은 북중국에서 흘러든 한인 화가일 것이다.

 


 안악3호분에는 무덤 주인공을 시위하고 있는 인물로 성사(省事)·소사(小史)·문하배(門下拜)·기실(記室)·장하독(帳下督)이란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다. 이들 속관도 왕릉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논란거리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군태수급에서 3품장군 이하급 관리의 속관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이 동수여도 그다지 모순된 점이 없다.

 그리고 벽화에 보이는 묘주의 관모 등 복색도 묵서명에 보이는 동수 관직의 위계와 잘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은 동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오히려 벽화에 보이는 등장 인물들의 복식 등에서 왕릉급이라는 단서를 찾기가 더 어렵다. 물론 무덤의 규모가 고구려 벽화고분 증 가장 크지만, 이 정도 크기로 고구려 왕릉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고구려 왕릉의 위상을 축소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겠다.

 필자도 2005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남북학술조사팀에 참여하여 북한의 고구려 벽화고분 여럿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안악3호분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미 안악3호분의 동수묘지명을 검토한 적이 있고, 그래서 고구려 왕릉설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북한학자들은 내게 "가서 직접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필자도 내심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는 기대감도 가졌다. 하지만 직접 무덤을 본 뒤 고구려 왕릉으로 보기에는 축조 방식 등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의 결론은 안악3호분은 동수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확신에 북한학자들은 실망한 듯한 눈치였다.

 북한학계가 왕릉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도 안악3호분처럼 당대에 가장 뛰어난 벽화고분을 고구려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대형 벽화고분이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전연 출신 망명객의 무덤이라면 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게다가 이런 규모의 고분을 망명객이 만든다면 4세기 중엽까지도 안악 일대는 고구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도 들었을 것이다. 선입견이 올바른 역사 해석을 가로 막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하지만 안악3호분이 동수무덤일 경우 우리는 이 고분을 통해 고구려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왕릉이든 동수무덤이든 안악3호분이 고구려의 문화유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2) - 동수의 관직에 숨은 비밀

임기환 기자

입력 :  2017-02-16 16:03:01
 
[고구려사 명장면-13] 지난 회에 잠시 인용했던 동수 묘지 묵서명 중, 이번 회에 필요한 동수의 관직 부분만 다시 환기해보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都鄕侯)"

 묵서명에 보이는 동수의 관직은 언뜻 보아도 호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고구려 땅 평양 남쪽 재령강 유역에서, 그것도 전연에서 쫓겨온 망명객인 주제에 어떻게 이런 거창한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고구려 땅에 살다 묻혔는데, 정작 고구려 관직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중국식 관직만 잔뜩 나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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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묘주도 복원/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도대체 동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왜 국내성이 아니라 이곳 멀리 재령강 지역에 묻혔던 것일까?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답을 찾기가 어렵지만, 가능한 몇몇 추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역시 묘지 묵서에 적혀 있는 동수의 관직에서 찾을 수 있다. 동수의 관직은 도독호(都督號)+장군호(將軍號)+태수호(太守號)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 동진(東晋)에서 도독에게 준 칭호의 일반적인 관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다소 어색한 면도 있다. 예컨대 도독제군사는 군사를 통괄한 대상 지역이 함께 명기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유주(幽州)도독제군사' 하는 식이다. 그런데 위 동수의 도독제군사는 관할 지역이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위 동수 관직은 여러모로 의문투성이다.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동수의 관직은 모용황 휘하에 있을 때 받은 '사마(司馬)'직이다. 뒤에 모용인 아래로 들어갔을 때에는 더 높은 다른 관직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모용인이 '차기장군(車騎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 요동공(遼東公)'을 자칭하였기 때문에, 이와 동격인 묵서명에 보이는 관직을 동수가 역임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그중 창려태수는 그때 역임한 관직일 수도 있다. 어쨌든 묵서명의 호화로운 관직 대부분은 고구려로 망명한 뒤에 얻은 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호화로운 관직을 동수에게 수여한 주체는 누구일까? 당시 이런 책봉호 관직 체계를 마련한 동진일까? 아니면 동수의 출신국인 전연일까?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니 의당 고구려왕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중국식 관직을 주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혹 동수 스스로 자칭한 것은 아닐까?

 위 동수 관직을 스스로 자칭한 관직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도독제군사에 관할지가 없다는 것도 주요 근거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위 관직이 동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거나, 혹은 실직이 아닌 허구 관직이라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자칭의 근거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자칭할 바에야 관할지 역시 근사하게 허구로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진일까? 하지만 동진이 고구려왕을 책봉한 흔적을 현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이미 낙랑·대방 지역이 고구려에 의해 병합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동진이 고구려왕을 젖혀 놓고 일개 망명객인 동수를 책봉하였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아니면 전연일까? 여기에는 약간의 개연성이 있다. 우선 위 관직 중 창려·현도·대방은 '태수'라고 하면서도, 유독 '낙랑상(樂浪相)'이라고 한 점이 의아하다. 상(相)은 태수와 별 차이가 없으나, 왕국(王國)이나 공국(公國)일 경우에 '상'으로 불리운다. 즉 묵서명에 낙랑태수가 아닌 '낙랑상'으로 기록한 점은 동수가 낙랑왕(공)국의 태수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악3호분 부인도 복원/사진=동북아역사재단
 이 무렵의 '낙랑공'이라면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으로부터 받은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이란 책봉호가 떠오른다. 즉 고국원왕이 낙랑공에 책봉되면서 동수는 낙랑상(樂浪相)이 되고, 고국원왕이 받은 정동대장군과 짝하여 동수도 평동장군을 전연으로부터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동수가 망명한 이후 342년(고국원왕 12년)에 전연은 고구려를 침입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미천왕 시신과 왕모(王母), 왕비 등을 인질로 잡아갔다. 고국원왕은 이듬해 동생을 전연에 보내어 아버지 미천왕 시신은 돌려 받았으나 왕모는 귀환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미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다.

 그 뒤에도 고국원왕은 왕모를 되돌려 받기 위해 전연과의 관계 개선에 무척 애를 썼으며, 이때 전연 출신인 동수 등을 외교 중개자로 활용했을 것이다. 전연도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고구려와 더 이상 긴장관계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 결과 355년에 왕모가 귀환하는 대신 고국원왕이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태로 양국 관계가 정리되었다. 이때 고국원왕의 책봉호에 맞추어 동수도 '평동장군 낙랑상'이란 관직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나머지 사지절이나 현도·대방태수 관직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일까, 혹은 자칭한 것일까? 정동장군과 낙랑상이 고구려 왕권과 관련되어 획득한 관직이라면, 과연 나머지 관직들도 어떤 형태로든지 고구려 정권과 연관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망명객이 비록 명목상이라도 이렇게 호화로운 관직을 마음대로 자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당시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전쟁에서 수도 국내성이 파괴된 이후 평양 지역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경영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중국식 벽돌무덤을 사용하는 등 아직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과거 낙랑·대방 지역 출신 토착 세력을 통제하는 데 망명객 동수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이 지역 대표자로 내세웠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동수의 관직이 그렇게 호화롭게된 연유가 아닐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왜 고구려가 중국식 관직을 동수에게 부여했는지는 아직 잘 풀리지 않은 문제다. 고구려 정권이 의도적으로 중국식 관직 체계를 이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어쩌면 위 동수의 관직은 그것을 획득한 계기가 여럿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여전히 동수가 자칭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개중에는 그 묵서명의 관직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세의 기원을 담은 무덤 속에서만 그렇게 호화로움을 과시했다는 견해가 흥미롭다. 그러나 과연 죽은 뒤의 염원만을 바라는 묵서에 그친 것일까?

 이렇게 동수의 간단한 묘지 묵서명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풀어가야 할 역사의 숨겨진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이 특히 금석문 자료가 갖는 흥미진진한 면모다. 동수 관직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을 풀어갈 때, 우리는 한 망명객의 행적만이 아니라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도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안악3호분이 4세기 고구려사의 비밀을 풀어갈 귀중한 자료가 되는 이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3) - 동수의 집 구경

 

임기환 기자
입력 :  2017-03-02 15:13:02
 
[고구려사 명장면-14] 안악3호분은 무덤방 크기에 있어서도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또한 널길과 앞방, 좌우 곁방, 널방, 그리고 널방을 'ㄱ'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회랑 등으로 가장 복잡한 내부 구성을 하고 있다. 더욱 무덤 내부에 4각 기둥과 8각 기둥이 여러 개 설치되어 공간을 나누는 구실을 하는데, 널길과 앞방 그리고 회랑은 통로로 연결된 독립 공간이 아니라 기둥과 사이 벽으로 구성되어 전체 평면은 마치 두 칸처럼 보인다. 공간의 분할과 통합이 적절하게 이뤄져 마치 귀족 저택과 같은 느낌을 충분히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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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평면도/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특히 앞방 동쪽과 서쪽 곁방 2곳에는 귀족 저택의 안채 등 여러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부엌, 고기창고, 수레 차고, 방앗간, 외양간, 마구간 등도 모두 지붕을 기와로 이은 기와집으로 매우 호화롭다. 전체적으로 무덤방의 구성과 벽화가 사후 세계에서 무덤 주인공의 편안한 삶을 보장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다.   무덤 주인 부부는 앞방 서쪽 곁방에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장막을 친 방안에서 좌상 위에 앉아 남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남자 주인공이 그려진 공간은 일종의 사랑채를 상징하며, 부인이 그려진 공간은 안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는 조선시대 주거 공간 개념이라 용어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부부의 남녀 공간은 저택 안에서도 구분되었을 것이다. 비록 무덤 안에서는 하나의 곁방에 모두 그려져 있지만, 귀족인 무덤 주인공이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사랑채와 안채 등 여러 채의 건물을 상상하는 것이 실제 고구려 귀족의 저택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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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앞방 동쪽 곁방 동벽 및 북벽 벽화 모사선화
 앞방 동쪽 곁방에는 부엌, 고기창고, 수레 차고, 방앗간, 외양간, 마구간 등 집안의 여러 살림살이 시설이 그려져 있다. 부엌간은 기단이 있고 바닥에 녹유전을 깔고 그 위에 부뚜막이 마련된 건물이다. 기와 지붕에는 치미가 묘사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한 마리 새가 앉아 있다. 부뚜막에는 시루인지 솥인지가 올려져 있고 아궁이에는 불길이 활활 타고 있어 막 음식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시루처럼 보이는 그릇의 크기로 미루어 많은 식구가 함께 살고 있음이 짐작된다.   모두 3명의 여인이 부지런히 부엌일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조리를 하고, 또 한 사람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옆에서는 한 여자가 소반 위 접시 등을 정리하고 있다. 부엌 앞에는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부엌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듯한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부뚜막의 모습은 순천 용호동1호분에 출토된 철제 부뚜막 모형(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그 형태가 같다.
 

 부엌 옆에는 고기창고가 있다. 노루, 멧돼지 등이 쇠갈고리에 꿰어 매달려 있다. 왼쪽 기둥 안쪽에 '경옥(京屋)'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고깃간 옆에는 차고가 그려져 있는데, 두 대의 수레가 그려져 있다. 지붕을 덮고 장막을 두룬 수레, 장막이 없는 개방된 수레 두 채인데,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장막을 두룬 수레는 무덤 주인공의 부인이 사용하는 수레일 것이다. 왼쪽에 있는 수레는 대행렬도에서 주인공이 타고 있는 수레와 같다.

  수레를 끄는 소들은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데, 검정소, 누렁소, 얼룩소 등 세 마리 소가 있으며, 모두 뿔을 빨갛게 그려 놓았고, 코뚜레를 달았다. 마구간에는 사냥이나 전쟁에 나갈 때에 주인공이 타는 말들이 그려져 있는데, 말 세 마리가 털색이 조금씩 다르며, 말 갈기 한 올 한 올까지 묘사할 정도로 세밀한 표현이 돋보인다. 마구간 아래 나무방책 앞에서는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시동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중이다.

 방의 북벽에는 지레 원리를 이용한 용두레 우물이 그려져 있으며, 우물 주변으로 다양한 모양의 물항아리와 말이나 소의 구유가 자리하고 있다. 방아를 찧고 있는 여인과 키질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앞방과 널방에는 행렬도 등 무덤 주인공의 공식적인 행사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동서 곁방의 그림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는 다음 회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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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앞방 동쪽 곁방 서벽 및 남벽 벽화 모사선화
  안악3호분의 무덤방 구성으로 고구려 귀족의 저택 구성을 곧바로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널방에 주인공 부부의 관이 안치된다고 보면, 앞방 서쪽 곁방에 그려져 있던 주인공의 사랑채와 부인의 안채가 본래는 널방처럼 저택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앞방 동쪽 곁방에 있는 다양한 살림살이 공간이 안채에 딸린 부속 시설로 안채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무덤의 널길은 대문과 좌우 행랑채에 해당하고, 앞방은 혹 공식적인 공간 혹은 저택내 안뜰이 될 것이다. 'ㄱ'자 회랑은 안채의 회랑이나 후원, 뒤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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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내부 투시도
 자, 안악3호분을 들어서면서 고구려 귀족의 저택을 상상해 보자. 사랑채와 안채에는 주인공 부부가 시종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고, 안채에 딸린 부엌에서는 시녀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음식을 조리하고 상차리기에 열심이고, 방앗간에서는 곡식 찧기에 바쁘고, 용두레우물에서는 시녀가 물을 길어 항아리와 구유에 담는 중이다. 외양간과 마구간에는 소와 말들이 여물을 먹고 있고, 몇 마리 개가 집 안을 어슬렁거리고, 지붕 위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매우 사실적인 그림들은 고구려 귀족 저택에서 이뤄지던 일상의 한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주거 공간을 자세하고 정성스럽게 묘사한데는 생전의 풍요로웠던 생활이 내세에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과연 동수는 내세에서도 그런 풍요로운 삶을 누렸을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4) - 공무 생활과 행렬도

임기환 기자
입력 :  2017-03-16 15:01:05
 
앞방 남벽 서측 악대 그림
[고구려사 명장면-15] 안악3호분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귀족의 저택을 재현하는 공간과 벽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림집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방의 동, 서 곁방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앞방과 널방에는 저택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무덤 주인공의 공적인 활동과 관련된 그림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 곁방에 그려진 무덤 주인공 부부의 초상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의 상황을 추정했지만, 이 무덤 주인공의 초상은 단지 저택 내에서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공적인 공간에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서쪽 곁방으로 들어가는 벽면의 좌우에는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시종 관료가 그려져 있다. 동수의 묘지 묵서가 장하독의 머리 위에 쓰여 있기 때문에 동수가 무덤 주인공이냐, 아니면 장하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동수가 무덤 주인공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자, 그러면 동수의 공적 생활을 벽화를 통해 살펴보자.

  무덤의 널길 동서 양쪽 벽에는 의장대열이 그려져 있는데, 보존 상태가 나빠 지금은 붉은 방패와 창만 겨우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무덤 입구의 널길에 의장대를 그려 넣은 것은 안악3호분에만 보이는 특징으로, 무덤방의 주인공에 대한 의례적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의도한 듯하다.

 앞방 남벽은 널길로 통하는 문을 기준으로 동서 양 벽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쪽 모두 검은 가로선을 그어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그림을 배치하고 있다. 서측 상단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두 남자가 마주 보며 커다란 뿔나팔을 불고 있고, 하단에는 큰 북을 두드리고 무릎을 꿇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도포 차림의 4인의 악사가 그려져 있다. 모두 무덤 주인공이 거느린 악대를 표현하고 있다.

 동측에는 상단에 화개, 각종 깃발, 절(節) 등을 든 7명의 의장기수가 그려져 있는데, 다채로운 의장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앞에 있는 4명은 거의 같은 복장으로, 긴 두루마기에 허리띠를 동여매었으며 작은 깃발을 들었다. 뒤의 세 명은 각각 색이 다른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다른 의장구를 들었다. 갖가지 의상과 깃발 등으로 의장대의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앞방 남벽 동측 의장대 그림
 의장기수 하단의 벽화는 잘 보이지 않으나, 그 동쪽 좁은 벽면에는 도끼를 든 부월수 4명이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의장기수나 부월수 모두 일종의 의장대로 볼 수 있다. 이들 남벽의 인물들은 모두 널길방으로 통하는 문쪽을 향하고 있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관청 문으로 들어서는 주인공을 맞이하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의장대가 도열하여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모습을 절로 상상하게 된다.  이들 부월수는 다른 벽면에도 그려져 있다. 동측 곁방 입구 오른쪽 벽에는 수박희 장면과 도끼를 든 부월수(斧鉞手)의 대열이 상하 두 단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대행렬도에도 도끼를 든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앞방에 두 군데나 그려진 의장대 혹은 병사로서의 부월수와 같은 인물들일 것이다.

앞방 동벽 수박희 그림
 앞방과 널방 사이에는 4개의 기둥을 세워 공간을 분할하였는데, 널방 동벽에는 세 사람의 악사가 무릎을 꿇고 육현금, 왕함, 장적 등을 연주하고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인물이 그려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다리를 꼬고 선 자세로 손뼉을 치며 춤추고 있는 이 무용수는 큰 눈과 매부리코의 모습으로 보아 어떤 탈을 쓰고 있거나 혹은 서역계 인물로 추정된다. 앞방의 악대가 엄숙한 의장의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널방의 이 악사와 무용수는 아마도 연회 자리에서 주인공과 손님들의 흥겨움을 북돋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안악3호분에는 서역계 요소가 적지 않다. 위 서역계 무용수와 춤은 물론 비파 등 악기도 서역계이다. 앞방 수박희 장면에서도 대결하고 있는 한 사람은 높은 코와 큰 눈으로 보아 서역계 인물로 보인다. 동쪽 곁방 부엌그림에서 부뚜막에는 속이 보이는 투명한 그릇이 놓여 있는데, 유리그릇이라면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안악3호분 안에서만도 이렇듯 여러 서역계 인물이나 문화요소가 발견되니 당시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 교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피도록 하겠다.

 이제 회랑으로 들어가보자. 회랑은 널방의 동벽에서부터 북벽까지 'ㄱ'자로 둘러싸여 있다. 이 회랑의 남쪽 벽면에는 고상식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동쪽 벽면에는 25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이 행렬도의 길이만도 10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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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도(복원)
 행렬도의 벽화의 남쪽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게 그림이 남아 있으나, 북쪽 부분로 가면서 점차 희미해져서 인물과 의장구의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서 매우 아쉬운 마음이다. 동쪽 회랑의 행렬도가 북쪽 회랑으로 이어질 듯한데 북벽은 훼손이 심하다.  이 행렬도는 행렬의 앞부분 무리와 주인공을 호위하는 중간 행렬을 그렸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리지 않은 행렬 뒷부분까지 고려하면 본래 전체 행렬 구성은 300명이 넘는 규모로 추정할 수 있겠다. 행렬도의 규모가 방대하며 전체가 매우 장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무덤 주인공의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행렬도를 보면 소가 끄는 수레를 탄 무덤 주인공은 행렬의 3분의 1 정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악대가 노래와 연주를 하고, 춤을 추며 나아간다. 수레 뒤쪽으로는 의장 기수, 시녀, 말을 탄 문관 등이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좌우로는 창, 칼, 도끼, 활을 지닌 보병과 개마무사들이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다.

 그리고 행렬의 앞부분은 3열로 진행되는데 주인공의 수레 앞의 악대 등 무리에서는 5열로 늘어서 있고, 다시 주인공의 수레 지점에서는 7열로 확장된다. 행렬이 서서히 커지면서 화려함과 장중함이 점점 상승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더욱 7열의 묘사에서는 인물들 간에 겹쳐 그리기를 하고 있어 행렬 폭의 깊이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겹쳐 그리기는 다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매우 수준 높은 묘사법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 행렬에 묘사되어 있는 무기와 갑주, 악기, 복식 등등의 그림만으로도 당시 사회와 군사, 생활상을 밝히는 자료가 가득하다. 이런저런 점에서 뭐니 뭐니 해도 이 행렬도가 안악3호분 벽화 중 최고의 벽화다. 아니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그림의 수준이나 풍부한 내용에서 뛰어난 가치를 갖고 있다.

 무덤의 구성을 주인공의 공무 생활 공간으로 비견하면, 주인공의 초상이 있는 서측 곁방은 집무실에 해당하며, 악대와 의장대, 수박희 등이 벌어지는 앞방 공간은 관청의 앞마당과 부속 시설 공간이 되겠다. 무용수와 악사가 있는 널방은 주인공이 여유를 즐기는 후원쯤 될 터이고, 행렬도가 그려져 있는 회랑은 소속 관리들의 집무 공간이나 관청의 바깥 진영쯤 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안악3호분은 무덤 주인공의 공적, 사적 공간이며, 그가 생시에 행했던 여러 활동들이 펼쳐져 있는 독자의 세계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초기에 해당되는 안악3호분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고구려 묘제 양식과는 다르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벽화의 수준이나 무덤의 구성이 매우 세련되고 완성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무렵 고구려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악3호분에 담겨 있는 진정한 비밀은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 왕이냐 동수냐가 아니라, 폭넓은 대외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시대 문화 창조의 빈곤을 절감하는 우리들이 고구려인들에게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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