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형의 절묘한 미학 - 조각보
검약하는 생활과 복을 비는 마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보자기는 선암사에 보관되어 있는 탁자보로 알려져 있는데,『탁의卓衣』라는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몸을 감싸는 천을 의衣라 하듯 물건을 감싸는 보자기도 의라 불린 것 같다. 물건을 싸는 보자기까지 옷으로 여겼던 것은 무엇이든 정성스럽게 보관했던 검약한 정신이 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 어느 곳보다 우리나라가 보자기 문화가 발달되었던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가 협소한 생활공간에서의 편의성이다.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조선조 선비정신에서 협소한 생활공간은 검약과 미덕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 안에서 많은 양의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보자기는 함이나 궤에 비하여 제작이 쉽고 사용 용도가 다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접어두어 보관하기 편리하여 자재도구로서 편한 보자기를 선호 했던 것 같다. 둘째는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려는 동양적 사고에 예禮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 정중히 감싸면서 아름다운 문양의 장식성까지 있어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출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많은 양의 이불이나 베개 등을 필요로 하는 이런 안방 살림살이와 가재도구를 잘덮어 남에게 보이지 않게 보관하기에 보자기는 아주 요긴했을 것이다. 셋째는 기복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옷을 지으면서 버려진 조각난 천 조각을 모아 한 땀 한 땀 복을 잇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새로운 보자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물건을 복에 비유하여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이 복을 싸 두는 것과 같아 복을 싸 두면 복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넷째는 외부와 사회 활동이 거의 없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표현이 외부로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보자기였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여인들이 맛 볼 수 있었던 제작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감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런 성취감의 결과물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는 조각보 가운데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는 것들이 상당 수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추측해본다. 정성을 들인 조각보를 귀하게 여기어 여성들이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장롱 깊숙이 보관했다가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
조각보의 면 구성을 살펴보면 여러 모양이 있는데 이중 사각형처럼 반듯한 조각들로 만들어진 정방향 모양이 가장 안정감이 있다. 고요함과 평행감각이 살아 있으며 반복된 형태로 단조로움과 지루한 감이 있으나 오방색의 색채를 대비시켜 긴장감을 주었다. 다음은 이등변 삼각형이 정연하게 이루어진 사선형 조각보인데각삼각형에 색상을 주어 사각형보다 삼각형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해 아주 율동적인 형태를 구현했다. 이중 가장 입체적인 분할이 돋보이는 것이 마름모형 구성인데 4개의 삼각형이 모아져 반복적인 형태와 색채를 규칙적으로 사용해 대칭을 이루어 화려한 면구성과 균형미를 갖고 있다. 이런 조각보는 수직 수평의 안정감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또다른 형태로는 사다리꼴처럼 모양이 변형되거나 선이 비뚤어진 조각을 이용한 것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정방향이나 마름모형 등 정형화된 패턴은 궁중이나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사용한 조각보에서 주로 나타나며 일반 집에서는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하다 보니 반듯하고 일정한 모양의 조각만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아 있는 자투리 천으로 그렇게 이렇게 삐뚤삐뚤한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춘 솜씨는 의도된 디자인 조합이 아니라 무작위의 천 조각들을 타고난 심미안으로 구성하는 절묘한 감수성 없이는 불가능했다. 예전에는 천값이 비쌌기에 천조각 하나도 버리기 아까웠을 테고 여인들이 직접 천을 짜는 일이 많다 보니 남은 천을 허투루 다룰 수 없었다. 그래서 자투리 천을 그냥 버리지 않고 만들어낸 것이 조각보였으니, 자투리를 모아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옛 여인들의 정성과 안목이야 말로 대단하였다.
이렇듯 조각난 천을 잇는 행위에는 복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고, 천을 복으로 보았기에 천을 자르거나 찢는 행위를 복을 찢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상인 중에 포목점을 가장 천히 여겼는데 이것은 옷감 장사처럼 천 찢는 직업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여 만든 천들을 찢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도 이 때문 이었는데, 지금 당장 돈을 아무리 잘번다 해도 포목장사의 끝이 좋지 않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옷을 만드느라 자르고 찢은 옷감, 즉 복을 다시 이어 붙임으로써 복을 받고 잘살기 위해 조각보를 만들었다.
몬드리안의 작품과도 같은 여인들의 조각보
조각보의 색채는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오방색과 유황硫黃, 홍紅,벽壁, 록錄, 자紫의 오간색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상시 유교적 사상이나 신분으로 철저히 규제 받았던 색채의 사용은 억압되었던 조선여인의 심리적 표현이 화려하게 조각보의 천 조각들 위에서 펼쳐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낸다. 여인네들의 깃들어 있는 정성이며 솜씨, 그들의 심미안이 여간 놀라운 게 아니다, 보색補色과 동색同色이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고 가로 세로 면 분할도 놀라울 정도로 황금 분할에 가깝다. 이것은 마치 신조형주의의 이론을 전개시킨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수직, 수평의 선과 여러 가지 색면들을 연상시키며 독일 바우하우스 대표작가인 클레의 그림 <매직스퀘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추상 미술의 선구자인 몬드리안과 클레의 작품과 비교해도 나으면 낫지 모자랄 것 없는 이 조각보를 예전에는 한 집에 기본적으로 60~100여 장씩은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 많은 조각보들을 다 어디에 쓰는가 하면 책보, 옷보, 이불보, 패물보, 혼수보, 예단보, 상보 등 이름만큼이나 쓰임새도 다양했다. 책이나 소지품 등을 싸 갖고 다니는 운반용도, 철 지난 옷이나 이불 등을 싸놓는 보관용도, 혼수나 예단, 선물 등을 격식 차려 보내는 포장용도, 음식에 먼지나 벌레가 앉지 못하도록 하는 덮개용도 등으로 쓰이는, 그야말로 다양하게 사용했던 멀티플레이어인 셈이다.
그중 혼례 때 사주단자를 싸서 보내는 조각보는 집안의 얼굴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유인 즉 조각보를 보고서 안주인의 솜씨나 눈썰미가 어떤지, 가정교육은 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 여인네들은 어릴 때부터 자투리 천을 갖고 조각보 만드는 연습을 했는데, 요리조리 천 조각을 이으면서 시침질, 감침질, 공그르기 등 갖가지 바느질을 연마했다. 처음에는 서투르기 그지 없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느질은 완벽해지고 색 대비나 면 배치는 세련되어 졌을 터. 이렇게 만든 조각보로 사주단자를 싸서 보내니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얼굴도 안 보고 혼례를 올렸던 시절, 시댁에 보내는 조각보는 며느릿감의 증명사진과도 같았다.
조각보에 담겨져 있는 여인들의 미적 감각이나 남은 천을 모아 알뜰한 여인네의 복을 비는 마음까지, 조각보에는 우리 여인네의 아름다운 심성과 지혜와 재능이 담뿍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투리를 모아 전체로 환원하는, 그리고 쓸모없는 것들을 모아 생명을 부여하는 우리의 민족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조각보를 바라보는 요즘 사람들은 서양 현대작가인 몬드리안과, 황금 분할을 이야기하며 그 예술성에 감동하기도 하고 조각보의 재발견을 떠들기도 하지만, 조각보를 만들었던 옛 여인들은 예술을 목적으로한 것도, 정교한 계산으로 조각보를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고 한 조각 한 조각 천을 이어 붙여 가족의 안위와 가문의 번성을 기원하는 조선 여인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진 시간과 정성의 결과물인 것이다. 몬드리안의 현대 추상화를 백 여 년 앞선 우리의 예술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바느질에 배어 있는 우리 조상들의 심성과 정성을 읽어보는 것도 조각보를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 최웅철 (문화평론가) 사진. 현암사, 조각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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