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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대자보에 폭발한 광기, 왕은 죄인 머리를 깃대에 매달라 명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대자보에 폭발한 광기, 왕은 죄인 머리를 깃대에 매달라 명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4. 1755년 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狂氣)

서울 숭례문 아래 홍예문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용은 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영조 때는 이 남대문 앞에서 역적 처형식이 열리곤 했다. 1755년 여름에 벌어진 처형은 권력 콤플렉스와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던 영조의 광기가 적나라하게 폭발한 사건이었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7.07. 03:00업데이트 2021.07.07. 10:41
 

복잡다기한 영조의 콤플렉스

경종이 즉위하고 1년 두 달이 지난 1721년 8월, 당시 여당인 노론은 야밤에 궁으로 들어가 경종에게 “후사를 기대하지 말고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택하라”고 요구했다. 경종은 그들 뜻대로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선택했다.(1721년 8월 20일 ‘경종실록’) 두 달 뒤 노론은 경종에게 본인은 물러나고 아예 정사를 세제에게 대리청정 시키라고 요구했다.(같은 해 10월 10일 ‘경종실록’) 그러자 야당인 소론 김일경이 이리 상소했다. “저 (노론) 무리들이 벌써부터 전하를 군부(君父)로 대접하지 않고 또 스스로 신하로 여기지 않는다(彼輩旣不以君父待殿下 亦不以臣子自處也·피배기불이군부대전하 역불이신자자처야).”(같은 해 12월 6일 ‘경종실록’) 경종은 하고 싶던 말을 대신 해준 전직 관리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등용했다. 왕위를 맘대로 하려던 노론 4대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렸다. 권력은 노론에서 소론으로 옮겨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듯했다.(같은 날 ‘경종실록’)

3년 뒤 멀쩡하던 경종이 급서하고 왕세제 연잉군이 왕이 되었다. 그가 영조다. 등극 과정은 이렇게 정통성이 부족했고 복잡했다. 오랜 기간 영조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노론과 손잡고 이복형인 경종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루머가 말년까지 떠돌았다.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 사이에서 난 신분적 열등감과 형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도 풀리지 않았다. 이 복잡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오늘은 서기 1755년 여름날, 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권력자가 서울 남대문 노상에서 폭발한 광기(狂氣) 가득한 풍경을 구경해본다.

                                                       조선 21대 국왕 영조(1694~1776) /국립고궁박물관

264. 1755년 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狂氣)

나주 괘서 사건과 광기의 서막

영조 왕위에 의문을 품은 수많은 무리들이 의문을 실천에 옮겼다. 조정을 비난하는 괘서(掛書·대자보) 사건은 난무했다. 등극 4년째인 1728년 영남 남인들이 주축이 된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은 군사력으로 정권을 바꾸려는 쿠데타이자 혁명이었다.

무신란 진압 후 근 30년이 지난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다. 여염집 담벼락도 아니고, 전라도 나주 객사 망루에 반정부 대자보가 나붙은 것이다. 괘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1755년 2월 4일 ‘영조실록’) 오랜 세월 ‘상하(上下)가 편안히 여기며 지냈던’ 터라 영조는 웃어넘기려 했지만 노론은 달랐다. 권력이 흔들릴 징조였다.

그리하여 좌우포도대장을 출동시켜 사정을 알아보니 1724년 영조 즉위 후 역적 혐의로 처형됐던 윤취상이라는 자의 아들 윤지(尹志)가 벌인 일이었다. 윤지 또한 그때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나주로 유배지를 옮긴 인물이었다. 일은 역모 사건으로 확대됐다.

                               1755년 노론 정권과 영조에 저항하는 괘서(掛書)가 걸렸던 전남 나주 객사./박종인

체포된 윤지는 영조가 직접 심문했다. 나주는 물론 서울에 있는 소론 인사까지 두루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2월 25일 윤지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3월 8일 영조가 창경궁에서 가마를 타고 남대문 밖 청파교까지 나가 그 아들 윤광철 목 베는 장면을 참관했다. 잘린 목과 팔, 다리(肢脚·지각)는 거리에 걸도록 명했다. 윤취상-윤지-윤광철로 이어지는 3대의 끔찍한 멸문이었다.(1755년 3월 8일 ‘영조실록’)

두 달 뒤 영조는 역적 토벌을 기념하는 특별과거 토역정시(討逆庭試)를 실시했다. 영조가 직접 채점해 급제자 10명을 뽑았다. 그런데 답안지 하나를 영조가 읽다가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1755년 5월 2일 ‘영조실록’) 두 달 전 괘서 사건을 처리할 때 얼핏 보였던, 광기(狂氣)의 서막이었다.

역모 가득한 과거 답안지

제출한 답안지를 영조가 찬찬히 뜯어보는데, 답안지 하나는 그 아래쪽에 ‘파리 머리만한 글씨’로 난언패설(亂言悖說·사리에 어긋나게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가득 적혀 있었다. 마침 시험장 감시관이 땅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주워서 바쳤는데 ‘그 종이에도 음참한 글이 가득해 똑바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땅에 떨어질 듯하였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왕을 바라보며 신하들 또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종이에는 왕실 금기 사항인 선왕(先王)들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같은 날 ‘영조실록’)

답안지와 종이 주인은 1728년 무신란 때 처형당한 역적 심성연의 동생 심정연이었다. 난을 평정하고 27년이 지나고, 더군다나 막 발생했던 괘서 사건 처리 완료 기념 시험장에서 또 콤플렉스를 건드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다음 날과 그다음 날 영조가 직접 행한 심문에서 심정연은 이리 말했다. “내 일생 동안 가진 생각이기에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 이미 써둔 글이다. 여하간 왕에게 음흉한 말을 했으니 내 흉한 마음이 탄로 났구나.” 심정연 또한 남대문 밖 청파교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복주(伏誅)됐다. 복주는 ‘역적 혐의로 처형했다’는 뜻이다.(같은 해 5월 4일 ‘영조실록’) 죽기 전 심정연은 공모자들을 자백했는데, 그 가운데 나주 괘서 사건 주모자 윤지의 사촌 윤혜가 끼어 있었다. 괘서 사건 마무리 경축 파티에 바로 그 괘서 사건 범인 무리가? 왕은 지옥문을 열어버렸다.

 
                                                     소론 반역자들에게 지옥문이 돼 버린 남대문. /박종인

지옥문이 된 남대문

창경궁 선인문 남쪽 궐내각사 내사복(內司僕) 마당으로 윤혜(尹惠)가 끌려왔다. 체포와 함께 압수해온 문서 한 장에 역대 왕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윤혜가 “내 아들 이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답했다. 진노한 영조가 붉은 방망이(朱杖·주장)으로 매우 치라 명했다. 윤혜는 혀를 깨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론 원로 영부사(領府事·원로 벼슬) 김재로가 영조를 말렸다.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에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영조가 소리를 질렀다. “급하게 해도 실토하지 않는데, 느슨하게 하면 실토하겠는가!”

이성을 잃은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서둘러 궁궐을 나갔다. ‘보여’는 왕이 타는 가마 연(輦)보다 작은, 늙은 평민이 타는 작은 가마다. 가마가 종묘에 이르자 영조는 가마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내 부덕함이 종묘에 욕을 보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 울었다. 그리고 운종가 광통교에서는 구경 나온 노인들에게 이리 말했다. “올해에 또 남문(南門·남대문)에 가니, 너희들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남대문. 지옥문이었다. 이성을 찾으라는 원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진 풍경은 이러했다.

왕이 갑옷을 입고 숭례문 누각에 나아갔다. 대취타(大吹打)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이 윤혜를 고문하라 명하며 “문서를 누가 썼는가” 물었다. 윤혜는 곧바로 “심정연이 짓고 내가 썼다”고 자백했다. 그러자 영조는 문무백관을 차례차례 기립하라 명한 뒤 훈련대장 김성응에게 윤혜를 참수하고 그 목을 매달아 바치라 명했다. ‘헌괵(獻馘)’이라고 한다.

목을 기다리며 왕이 울면서 말했다. “이 어찌 내가 즐거이 하는 일이겠는가!” 영의정을 지냈던 판부사 이종성이 왕을 뜯어말렸다. “하급 관리가 할 형 집행을 어찌 지존(至尊)께서 하시나이까.” 그러자 영조가 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대는 나를 하급 관리 취급하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전직 영의정 이종성은 충주목으로 부처형(付處刑‧귀양형의 일종)을 받았다. 이어 헌괵이 늦어지자 영조는 훈련대장 김성응을 곤장을 치고 충청도 면천군으로 부처형을 내렸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때 임금이 이미 크게 노한 데다가 또 자못 취해서(上旣盛怒且頗醉·상기성노차파취) 윤혜의 목을 깃대 끝에 매단 뒤 문무백관에게 여러 차례 조리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작은 천막에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물시계가 인정(人定‧밤 10시)을 알릴 때에도 취타는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남대문 하늘 위로 취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은 날이 샐 무렵에야 천막에서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옷을 입은 채 궁으로 돌아갔다.’(이상 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윤혜의 형제 셋도 이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닫히지 않은 지옥문과 광기

‘역적 소굴을 밝힐 일을 논하다’, ‘복주되다’, ‘효수하다’, ‘국문하다’, ‘국문하고 효시하다’, ‘형신하다’, ‘물고되다’…. 1755년 5월 ‘영조실록’ 기사 제목들은 끔찍하다. 역적 혐의로 처형하고 목을 베고 고문 도중 죽고 목을 베 내걸고…. 이때 많은 소론(少論)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이런 실록 기사들 주인공이 됐다. 소론은 이후 제대로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노론은 아주 오래도록 권력 중심을 차지했다.

그리고 아홉 달이 지난 1756년 2월 15일 서인의 태두요 노론의 정신적 지도자 송시열과 송준길이 문묘에 종사됐다. 숙종 이래 노론당 숙원 사업이던 송시열 성인화 계획이 마침내 실현됐다.

그리고 8년이 지난 1764년 5월 15일 영조는 소론 영수였던 박세채 또한 문묘에 종사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 전후 신하들과 나눈 대화가 의미심장했다. 영조가 이리 물었다. “송시열이 도통(道統)을 (소론 영수였던) 박세채에게 부탁했던가?” 예조판서 홍계희가 답했다. “세도(世道·세상을 이끌 도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박세채 또한 문묘에 종사하라고 명했다.(1764년 5월 15일 ‘영조실록’)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린 왕, 그리고 그 권력을 지켜준 당과의 관계는 그러하였다.

출처 https://www.chosun.com/opinion/2021/07/07/PZ2EKCIVAFDPHKUVFN2LSCZB2A/?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