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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따스한 봄날, 꽃나무 아래 햇볕을 즐기는 강아지들

따스한 봄날, 꽃나무 아래 햇볕을 즐기는 강아지들

보물 이암 필 <화조구자도>

           이암 필 〈화조구자도 (花鳥狗子圖)〉, 지본담채, 86×44.9cm ⓒ한국저작권 위원회 공유마당

 

보물 이암 필 〈화조구자도〉는 화조화와 영모화가 병합된 형식의 그림이다. 조선의 사대부층이 향유한 사의적(思意的) 화조화의 경우 새는 암수가 나뭇가지에 쌍을 이뤄 앉아 있거나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을 그리고, 꽃나무는 몇 개의 가지가 화면 밖에서 화면 안으로 편입된 형식을 취한다. 이는 생략과 절제를 통해 음양 조화의 이치와 화면 밖 광대한 우주 자연의 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묘책이다. 이와 달리 이암의 〈화조구자도〉는 두 마리 새가 각기 나무 둥치와 가지에 앉아 주변을 나는 벌과 나비를 잡아먹으려는 듯 응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무는 땅에 뿌리박은 형태로 묘사돼 있다. 이것은 이 그림이 어떤 관념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생활 주변의 현실적 모습을 사생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암 필 〈모견도(母犬圖)〉, 지본담채, 163×55.5cm ⓒ국립중앙박물관

 

화폭에 담긴 왕실의 반려견 〈화조구자도〉의 주인공은 뭐라 해도 강아지들이다. 무심 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는 검둥이, 세상 편한 자세로 방 아깨비를 희롱하는 흰둥이, 검둥이 뒤에서 천진무구한 얼 굴로 곤히 잠든 누렁이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들 개는 정초 에 그려지는 세화(歲畵)나 부작화(符作畵)의 개처럼 벽사 의 주재자이거나 전설, 고사의 주인공이 아님이 명백하다. 만약 개를 매개로 벽사, 교훈 등 어떤 상징적 의미를 표현 하고자 했다면 이처럼 졸거나 놀이에 빠졌거나 멍해 있는 강아지를 그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반이자 선비인 이암이 이런 개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암(李巖)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檻)의 증손이다. 천거 절차 없이 왕(중종)으로부터 직접 두성령(杜城令) 벼슬을 제수받을 정도로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 인조 즉위년에 창경궁에 설치된 화국(畵局)에서 당시 실력파 직업 화가였던 이상좌와 함께 중종 어진을 추사(追寫)하는 등 그림 그리는 일로 궁궐 출입이 잦았다. 이암과 동시대에 살았던 문신이자 서화가인 성세창은 이 암의 작품으로 알려진 〈가응도(架鷹圖)〉를 보고 한 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 시에 ‘죽계(이암)가 선왕의 완물(玩物)을 그렸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암이 매와 같은 왕실 반려동물도 그렸음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다. 이암의 또 다른 작품인 〈모견도〉의 개 역시 왕실 반려견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민가의 개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술 장식과 금속제 방울이 달린 목줄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 이다. 평범한 개라도 궁중에서 왕이 아끼고 사랑하는 개라면 그림 대상이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동시대는 아니지만, 『태종실록』 기록에서도 왕실의 개와 관련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이 명나라 사신 두 명에게 각 한 마리씩, 세자가 수행원 두 명에게 모두 세 마리를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임시, 아니면 일정 기간 궁중에서 개를 사육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일말의 상징적 묘법을 찾기 어려운 보물 이암 필 <화조구자도>의 사랑스러 운 개들은 왕실의 반려견일 가능성이 높다.

 

생활 주변의 현실적인 모습을 담다

이암이 살았던 조선 초기의 사회와 화단을 신분적,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양반들은 고답(高踏)적이고도 복고적인 회화 표현 방식을 숭상했다. 그 당시의 대표적 선비 화가인 강희맹은 ‘세상에 속된 그림[俗畵]은 많아도 신(神) 에 통한 묘수는 진실로 만나기 어렵다’라고 한탄했다. 이 말은 사의적인 그림보다 〈화조구자도〉 같은 ‘형상을 본뜨고 살을 그린[模形寫肉]’ 그림이 더 많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림 그리기를 여가 선용의 고상한 취미로 여겼던 조선 선비 사이에서 표면적으로는 문기(文氣)와 기운생동을 중요 시하면서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림을 한낱 기예에 불 과한 것으로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조구자도〉 같은 장식화나 실용적 그림, 소위 모형사육 한 그림과 완전히 담쌓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그림 을 순수 감상용 그림보다 더 많이 소장하고 자주 접하고 또 스스로 그리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남긴 제발(題跋)이나 시 등 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런 면에서 보물 이암 필 〈화조구자도〉는 조선시대 양반층 의 또 다른 기호와 감상안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출처: 문화재청>문화재사랑

2022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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