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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김영택 류‘김영택 원금법’

김영택 류‘김영택 원금법’

기사승인 2017.11.13  11:34:23


  

김 영 택 (펜화가, 칼럼니스트)

동양에서 수천 년간 붓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때 서양에서는 펜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후 펜화는 기록화로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성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19세기 카메라의 등장으로 그 역할이 끝나고 기록펜화의 명맥이 끊겼다.

이렇게 사라진 기록펜화가 한국에서 재탄생 하였다. 사진과 다른 회화적 요소를 더하고, 사라진 문화재의 복원기능을 보여주면서 박물관과 전시관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펜화로 그린 작품들이 또 다른 문화재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사진과 다른 기능으로 펜화의 효용성이 높아졌다.

펜화를 그리면서 사진이나 서양화의 원근법과 인간의 시각이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 서양화 원근법은 핀홀박스에서 개발 되었다. 내부를 검정색으로 만든 사각상자 앞면 중심에 작은 구멍을 뚫고, 뒷면에 우유 빛 유리를 붙인 것이 핀홀 박스다. 검정 보자기를 쓰고 뒷면을 보면 상자 앞 사물들이 상하좌우가 뒤집혀진 상태로 우유 빛 유리에 투영된다. 사물의 모양과 거리에 따른 크기의 비례가 정확하고, 놓인 상태가 질서 정연하게 나타난다. 사진과 똑같은 원리다. 이 상을 복사 확대하여 그림을 그리면서 서양화는 과학적이며 정확성이 100%인 기록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넓은 풍경을 그릴 때 서양화의 원근법대로 그리면 현장에서 본 감흥과 동떨어진 그림이 되기 쉽다. 사진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왜 그럴까?

빌딩을 낮은 곳에서 카메라로 보면 빌딩의 윗부분이 좁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수직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연필을 들고 한쪽을 눈 가까이 대고 보아도 앞과 뒤의 굵기가 비슷해 보인다. 원근법대로라면 분명 눈앞의 연필 굵기와 뒤끝의 굵기가 크게 차이가 나는데 말이다. 사람의 눈도 카메라 구조와 같지만 뇌에서 빌딩은 수직이고, 연필은 앞뒤의 굵기가 같다고 판단을 하고 이미지를 수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은 중심부분만 상세하게 보며, 주변부는 흐릿하게 본다. 사람 눈의 망막은 중심에는 아주 작은 고해상도의 센서가 있고, 주변부는 저해상 센서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훑어보게 되고, 사진처럼 한 장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훑어보면서 가까운 사물은 표준 렌즈와 비슷하게 보고, 먼 곳의 사물은 줌렌즈처럼 보기 때문에 사진이나 서양화 원근법과는 사뭇 다른 영상으로 기억한다. 중요한 사물은 크게 기억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인간 시각 특성에 맞추어 도법을 만들고 ‘김영택 원근법’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김영택 원근법’을 적용하여 해남 미황사 그림을 그렸다. 대웅보전의 배경인 달마산을 15%쯤 확대하고, 달마산의 특징인 입석들을 강조하였더니 현장에서 본 감흥이 담겼다. 주지스님도 사진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던 제대로 된 그림을 본다며 좋아 하였다.

마찬 가지 수법으로 금강산 신계사와 집선 연봉을 그렸다. 먼저 가로로 배치된 13동 건물들의 크기 비례를 조정하였다. 서양화 원근법대로 하면 가까운 건물과 끝 건물 크기의 차이가 무척 커지는 단점을 줄인 것이다. 다음에는 가까운 배경인 소나무 숲을 10% 정도 확대하였다. 마지막으로 먼 배경인 집선 연봉을 20% 정도 확대 하고, 연봉의 바위 형태를 세밀하고 선명하게 강조 하여 신계사의 진면목을 담았다.

진천 보탑사 목탑은 탑을 가까운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로 그렸다. 탑은 올려다보는 구도에서 가장 탑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사진에서는 상층부로 갈수록 좁아지게 되지만 펜화에서는 수직 구조에 가깝게 조정하였다. 위로 가면서 높이가 줄어드는 현상도 조정하였다. 탑 뒤의 산도 높게 살려서 탑과 산의 위용이 제대로 담긴 그림이 되었다.

합천 영암사 터를 그릴 때에는 그림의 중심인 쌍사자 석등을 5%정도 확대하였다. 아름답고 귀중한 문화재인 석등은 누구에게나 크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펜화에서는 불필요한 요소를 빼버리기도 하고, 위치를 이동시켜 문화재가 잘 보이도록 만든다. 특히 문화재 앞에 세운 해설판이나 근대에 세운 보호 시설 등은 아예 삭제한다. 다른 건물이 옆을 가릴 때에도 삭제한다. 나무에 가려서 제대로 안 보이는 경우 나무를 줄이거나, 옆으로 옮기거나 하여 제 모습을 기록한다.

때에 따라서는 동양화의 관념기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건물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도를 잡았는데, 중요한 부위가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그림에 살려 넣는 것이다. 물론 억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다.

문화재 복원도를 만드는데 펜화는 무척 유용한 수단이다. 없어진 문화재도 흐릿한 사진만 있으면 당시의 건축 방법을 고증하여 상세한 모습으로 재현해 낼 수 입다. 광화문, 경복궁 서십자각, 덕수궁 대안문, 서울의 4대문과 4소문을 모두 되살려 그렸다. 한국의 부도 중 가장 아름다운 ‘철감선사부도’를 온전한 상태로 그렸다.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전은 희귀한 엽서를 구해 본래의 모습을 찾아냈다.

일본 나라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은 1400여 년 전 아스카 시대에 백제계 성덕태자가 세웠다. 백제, 신라, 고구려 장인 들이 동원되었다. 나라 시대에 두 건물의 1층 지붕 밑에 모코시(차양칸)를 덧대 지었다. 참고 자료를 이용하여 복원 하였더니 답답한 형태를 벗고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이 그림을 중앙일보에서 본 ‘무토 마사토시’ 주한일본대사가 “어떻게 한국인이 일본 건축문화재 복원도를 그리느냐”며 대사관저로 초대하여 저녁만찬대접을 해 주었다.

내 펜화를 보고 일본의 가와하라 히데야끼씨가 ‘김영택 류(金榮澤 流)’라는 평가를 하였다.

김영택원근법으로 새로운 화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쇠퇴한 펜화의 장르를 되살리고 있는 역할을 인정하기 때문이란다. ‘김영택 류’라는 이름에 걸 맞는 작품들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아시아씨이뉴스 asianews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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