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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동천의 기억- 부산포대첩과 동천 살리기

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4-9> 동천의 기억- 부산포대첩과 동천 살리기

이순신 장군 대승 거둔 동천 하구…부산포 대첩탑 세우자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07-09 19:49:40
  •  |  본지 6면


   
부산포와 부산진성 주변 옛 지도
- 1909년 성지곡 수원지 건설前
- 現 동천 하구 위쪽 육지는 바다
- 이곳서도 부산포해전 진행 추정

- 전선 74척 등 도합 166척 구성
- 3도 수군 연합 함대 부산 진격
- 왜군 500척 중에 100여척 격침

부산의 도심인 부산진구 범전동, 부전동, 범천동을 거쳐 동구 범일동의 부산만(북항)으로 흘러내리는 동천이 깨어나려 하고 있다. 동천 살리기는 뒤늦었지만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다.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살려야 할 강이다. 동천 살리기의 시민적 노력과 더불어 동천 하구 지역이 부산포 해전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란 사실과 의미를 밝혀보려 한다. 이것도 동천 살리기 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천 하구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주축이 된 3도 수군이 우리 수군 전사상 가장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가장 큰 전과를 거둔 부산포 해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이 부산포 해전을 기려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한 것이다. 따라서 동천 하구에 그날의 부산포 해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사적지를 조성하여 부산 시민의 긍지를 드높여야 할 것이다.

■동천의 형성과정

   
북항과 만나는 동천 하구의 전경
역사적 의미 규명에 앞서 먼저 동천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동천은 서면의 중심 하천으로 많은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이 동천은 엄광산의 가야천을 받아들이고, 백양산 동남쪽 지류인 당감천과 합류한다. 또 초읍동 연지동에서 발원한 부전천 물길을 이어받고, 전포동 지역에서 전포천을 끌어안고, 동구 안창마을 뒷산에서 발원하는 범내의 물길까지 모두 껴안아 부산만으로 들어간다.

이들 지류와 동천 본류에 사방수로(砂防水路)인 둑을 쌓아 물길을 잡기 시작한 것은 동천의 상류 계곡에 성지곡 수원지가 축조된 1909년부터이다. 성지곡 수원지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비가 오면 서면 주위의 산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길이 낮은 자리로 제멋대로 흘러내려 지금의 서면 일대는 산에서 굴러내린 돌자갈과 흙모래 천지인 하천부지였다.

바로 그러한 곳이 지금의 서면 중심지가 되어 있다. 오늘날 롯데백화점 자리도 그런 곳이다. 그곳에 1923년 부산공립 제2상업학교(오늘날의 개성고등학교)가 세워질 때만해도 주위에는 아무런 집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때 주변의 모래 먼지가 교실까지 날아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것이 치수사업으로 둑이 쌓이고 10년쯤 뒤의 일이라고 하니, 그 이전에는 더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서면지역에 하천정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폭우가 쏟아지면 주위 산자락의 물길은 돌자갈과 흙모래를 몰아내려 강물에 휩쓸려 바다를 메워갔다. 물론 부산진 앞바다가 본격적으로 매축되기 이전의 일이다. 그러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지금의 부산시민회관과 평화시장, 심지어 옛 제일제당(현 포스코 더샵 아파트) 자리까지 바다였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은 지금의 동천 하구에서 위쪽으로 한참 올라온 동천 어귀의 바닷가에서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부산포 해전의 준비과정

부산포 해전에 대해서는 당시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임금께 올린 장계(狀啓)인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에 소상히 나타나 있다. 그 장계에 따르면, 이순신은 부산포를 점유하고 있는 왜의 수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1592년 8월1일(이하 모두 음력)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의논하여 전라 좌·우 양도(兩道)의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여수 앞바다에서 연일 합동훈련을 거듭했다. 이때의 전력은 전선(戰船) 74척, 협선(挾船) 92척 도합 166척이었다.

8월24일, 연합함대는 여수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25일 사량(蛇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을 만나 3도 수군연합체가 되었다. 28일 부산 가덕도 북쪽에 집결한 3도 수군 수뇌들은 한자리에 모여 밤을 새워 가며 부산포에서 적을 무찌를 작전을 세웠다.

■치열했던 해전

   
통영에 있는 한산대첩 기념비
9월1일 첫 닭이 울 무렵 3도 수군은 가덕도를 출발해 부산포로 향했다. 아침 8시경 화준구미(현 사하구 다대포 화손대 서쪽의 내만으로 추정)에서 적선 5척을 격파했다. 이어 다대포에서 적선 8척, 서평포(현 사하구 구평)에서 9척, 절영도(현 영도)에서 2척의 적선을 각각 격파했다.

절영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니 부산 앞바다에 세 군데로 나뉘어 500여 척의 배가 진을 치고 있는데, 그중의 4척이 초량항(草梁項·지금의 부산대교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 수군은 그 적의 선봉선을 일시에 쳐부수고 장사진(長蛇陣)으로 부산포로 돌진했다.

우리 수군의 재빠른 돌진에 진성(鎭城) 동쪽 5리쯤 떨어진 산 아래 정박해 있던 적선 470여 척에서 총탄과 화살이 비오듯 날아들었다. 육지의 성과 산 위 여섯 군데로 나누어진 적군이 우리 전선을 내려다보며 총탄과 화살을 퍼부어댔던 것이다.

우리 수군은 그럴수록 분발해 적의 선단을 포위하여 총통(銃筒)과 활을 쏘고 철환을 던지며 적선을 쳐부수고 불살랐다. 부산포는 적선이 타는 연기로 자욱하고 총탄 소리가 종일토록 메아리쳤다. 해가 저물 무렵까지 적선 100여 척을 격침, 소각했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밤 삼경(三更) 가덕도로 회군하였다가 이튿날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제각각의 임지로 돌아갔다.

■동천 살리기의 동력으로

이순신의 장계에서 말한 부산은 임진왜란 당시의 부산으로 지금의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지역에 한정되고, 부산포 역시 그 바닷가에 국한된 말이다. 장계에서 진성 동쪽 5리쯤의 산기슭 바다 세 곳이라 한 진성은 지금의 좌천동에 있었던 우리의 부산진성을 말하고, 그 5리 동쪽은 지금의 동천 하구쯤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하구는 자연 매축과 인공 매축 이전의 바다였을 것으로 보인다. 산 위 여섯 군데로 나누어진 적군이란 말도 그렇다.

이 부산포 해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4개월 보름 뒤의 일이다. 당시 부산은 왜적에 점거된 상태였다. 적들은 부산포 주위를 요새화하여 병참기지를 삼고 자성대와 황령산 기슭에 여섯 군데로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그러니 부산포 해전은 적의 소굴로 진격해 싸운 매우 불리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크게 이겼다. 이순신도 부산포 해전 이전에 네차례 해전을 벌여 모두 이겼지만 전과로는 70여 척을 쳐부순 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포 해전에서는 100여척을 깨부수는 전과를 올렸다고 했으니 얼마나 통쾌한 승리인가.

600여 척이 넘는 쌍방의 배들이 온종일 싸워 그같은 전과를 올렸는데도 부산에는 그날을 기념하는 자취 하나가 없다. 무심한 역사다. 같은 전승지인 통영 한산도에는 한산도 대첩탑이 우뚝 세워져 전체가 국가 사적지인 국립공원이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거제 옥포에는 옥포대첩탑과 함께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원균이 크게 패배한 칠전량에도 금년에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부산은 부산대첩의 9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1980년에 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부산에도 응당 부산포대첩을 기념하는 대첩탑 혹은 기념공원이 있어야 한다. 지역 학계가 의미를 재조명하고 시민들이 뜻을 모으면 못할 것이 없다. 의미로 따지면 부산포 해전은 그 어떤 해전보다 값진 승지를 낚은 곳이 아닌가.

동천 살리기 운동과 부산포대첩 재조명 작업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부산포대첩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동천 살리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천 하구 짬에 부산포 대첩탑이 우뚝 세워지길 기대해 본다.

최해군 소설가·향토사학자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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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0710.22006194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