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창희
- 승인 2018.02.08 11:21
금샘과 금정산 주능선. 뒷쪽이 정상인 고당봉이고 왼쪽 아래에 범어사가 있다. 금어동천은 어디쯤 있을까? 출처: 부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금어동천을 찾아라
금어(金魚)! 비늘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졌다. 푸르고 싱싱한, 밝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였다. 눈이 부셨다. 주변에 신선들이 노닐고 있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표정들. 몸을 흔들자 짙푸른 금어가 푸드득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온몸이 감전된 듯 쩌릿하다. 소름이 돋으려는 찰라 꿈이 깼다.
금어, 금어라…. 박 선달은 한층 명료해진 의식으로 방금 꿈에서 본 금어를 화두처럼 바라본다. 금어는 금정산의 상징이 아니던가. 금어가 사는 곳이 금정(金井, 금샘)이고, 금정에서 노는 물고기가 금어렸다. 문헌에는 범어사 옛길 언저리에 ‘금어동천(金魚洞天)’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하다면, 풀리지 않을 것도 없다. 가 보자, 현장에 답이 있을 터. 걷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두 발이 네 발의 말이 되어 뛰고 싶은 박 선달이다.
어? 그런데 금어동천이 어디 있지?
금어동천은 세상의 공식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 같은 데서 간간이 비밀리에 소개가 되어 있곤 하지만 막상 찾으려면 난감해진다. 범어천, 즉 범어사 계곡 어디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하는데, 원효 대사쯤 되면 모를까, 단순한 지시만으론 도무지 찾아갈 수가 없다. 해운대 가서 모래알 세기요,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격이랄까. 하긴 금정산 범어천 계곡이 어디랍시고 한갓 바위인 금어동천을 찾아내겠는가.
금정산성 북문을 기점으로 금정산 물줄기는 크게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범어천 계곡을 따라 범어사를 거쳐 온천천~수영강~부산 앞바다로 흐르는 물줄기다. 또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흐르는 천인데, 부산학생교육원 옆의 시시골을 끼고 대천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금정산은 이처럼 부산 바다와 낙동강의 중요한 원천(源泉)을 이루는 산이다.
범어천 계곡에 금어동천을 꼭꼭 숨겨놓은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범어천은 옛날부터 물이 많고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계곡 자체가 비경이라 범접할 수 없는 신비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수원지 보호구역으로 묶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곳이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로 탄생한 것은 지난 2012년 6월 부산 금정구가 탐방로 조성사업을 벌이면서다. 옛날 수원지 보호구역 때 설치한 철조망을 걷어내고 데크 등을 설치하자 멋진 탐방로가 탄생했다.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은 금정구 청룡동 친수공원에서 범어사까지 약 2.3km에 이른다. 범어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 누리길은 골짜기의 기암괴석과 편백나무 군락지 등이 어우러진 천혜의 도시 산림을 자랑한다.
범어사 문화체험 누리길이 열렸으나 금어동천은 여전히 신비의 베일을 벗지 않았다. 범어천 계곡 속을 걷는 누리길과 금어동천을 지나는 범어사 옛길은 엄연히 다른 길이다. 범어사 옛길은 서기 678년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하고부터 트인 길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수원지 보호를 위해 만든 누리길과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범어사 옛길은 사실 비교 자체가 무리다. 말하자면 국보급 옛 문화재와 근대의 풍물 하나를 놓고 비교하는 격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길을 혼동하는 것은 그만큼 범어사를 잘 모른다는 말도 된다.
금어동천이 숨어 있는 이유야 금어동천만이 알겠지만, 짐작컨대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금어(金魚)는 금정산을 상징하는 하늘 물고기, 동천(洞天)은 신선이 산다는 선경을 일컫는다. 신선사상이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동천이 자리했다. 경남에 홍류동천(합천), 화개동천(지리산), 운흥동천(울산), 자장동천(통도사)이 있고, 부산에도 범어사의 금어동천을 비롯하여 사상구 운수사의 청류동천(淸流洞天), 장전동의 백록동천(白鹿洞天), 동래 학소대의 도화동천(桃花洞天), 기장군 홍류동천(紅流洞天), 묘관음사의 조음동천(潮音洞天) 등이 있다. 저마다 금수강산의 비경 한자락씩을 품고 있었다. 중국 도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동천에의 꿈은 우리 조상들의 의식세계가 선(仙, 禪)에 닿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범어사가 오늘날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사격을 유지하는 것도 금어동천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속세에서는 문필가들이나 유배된 정치가들이 동천을 찾아 그들만의 세상을 가꾸기도 했다. 동천은 선계로의 여행지이자, 속세의 도피처였다.
금어동천 옛길 풍경. Ⓒ박창희
하지만 금어동천은 최근에야 그 존재가 알려졌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를 알지 못한다. ‘숨어 있어야 동천’이란 말이 있는데, 금어동천이 바로 그런 것 같았다. 박 선달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숨어 있어야 보존이 되고 가치가 높아지니, 숨어 있을 수밖에.
#금정산의 부산 정신
후훗, 짐작한 바가 있는 듯, 박 선달이 쓴웃음을 짓는다. 걷는 자가 누리는 달관의 웃음이랄까. 나침반과 도리도표(道里圖標)를 꺼낸 박 선달은 길을 파악한 듯 범어사 옛길 초입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이름을 ‘금어동천 옛길’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그냥 편하게 범어사 옛길 또는 가마등길이라 부르는데, 그건 이 길의 진정한 뜻이 아닐 것이다. 찾아야할 것이 금어요 챙겨야 할 것이 동천이란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금정구 청룡동 경동아파트 옆으로 난 돌계단 산길이 이른바 금어동천 옛길의 들머리다. 원래의 길은 금정구 부곡동 십휴정(十休亭) 기찰(譏察)에서 지금의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 인근의 팔송정을 거쳐 경동아파트 쪽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세월이 바뀌고 도로가 변했음에랴. 오고 가지 않는 길이 없듯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길도 없다.
그런데도 고마운 것은 경동아파트 초입에서 계명봉 산자락을 따라 난 금어동천 옛길만은 옛길 그대로다. 길 하나에 천년 이상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흐른다면 이건 보물급이다. 천여년 동안 쌓였을 스님들의 발걸음과 절을 드나든 민초들의 애환과 역정을 어찌 다 말로 다 하랴. 범어사의 개산조인 의상 대사가 다녀갔을 테고, 당대의 쌍벽인 원효 대사가 금정산 원효봉이나 원효 석대에서 선 수행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허, 용성, 동산, 성철 스님 등 고승대덕들이 연연세세 범어사로 드나들며 도를 닦고 덕을 세웠을 것이다. 거기에 중생들은 불문에 기대어 염화시중의 미소를 배우며 번뇌의 바다를 건너갔을 테다. 풍류객들은 금어동천 바위 주변의 절경을 찾아 한 세월을 노래했을 것이고, 시인 묵객들은 금어동천에 천고에 남을 시문을 걸었을 테다.
국란을 당할 때 범어사는 먼저 떨쳐 일어나 싸웠다. 신라시대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원효 대사는 지팡이로 신통력을 발휘했고, 임진왜란의 치욕을 겪고 전란 후 금정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는 승병들이 주축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범어사 학승과 학생들은 3·1운동의 선봉에서 억눌린 조국의 의기를 떨쳤다.
동래(부산) 정신이 금정산에서 발원한다는 말이 결코 흰소리가 아니다. 그 생생한 현장이 금어동천 옛길이니 어찌 중하다 아니하리오. 박 선달이 금어동천 옛길을 끔찍이 아끼고 챙기는 이유다. 1920년대 범어사 신작로가 나면서 금어동천 절경 일부가 사라지고, 1960년대 일주도로가 뚫리면서 다시 절경의 절반이 훼손되었지만, 바위의 각자(刻字)에 스민 기운이 쇠한 것은 아니다. 더 이상은 훼손을 허할 수 없다는 듯, 숲속에 고고하게 숨어 세상을 지켜보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다. 어쨌든 모진 개발의 세파속에 이 정도나마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장하다.
금어동천 바위와 정현덕 각자. Ⓒ박창희
금어동천에는 누가 다녀갔던가? 흥미롭게도 다녀간 이들의 이름이 금어동천 바위에 큼지막한 각자(刻字)로 새겨져 있다. 가로 3m, 세로 2m 크기의 바위 중간에 ‘금어동천’이라 음각하고 그 옆에 김철균(金撤均)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앞쪽 바위에는 정현덕(鄭顯德), 그 밑에 윤필은(尹弼殷), 건너편에는 김교헌(金敎獻)이란 이름이 보인다. 대부분 동래부사를 지내는 등 내로라는 부산의 유력자들이다. 시대와 세대를 달리하며 금어동천이 오래 전부터 지역의 명소로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김철균이 금어동천 각석을 새겼거나 새기게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김철균은 부산 첨사를 지낸 인물. 첨사(僉使)는 첨절제사의 준말로, 수군절도사영 아래 3품의 무관이다. 19세기 중반 초량왜관 난출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그의 행적이 드러나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 같지는 않다.
윤필은(1861~1903)은 조선말기 동래부윤을 지낸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윤현진(尹顯振) 열사의 부친이다. 윤필은은 1900년 5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그해 8월에 퇴임하였다. 이때 동래 부민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는 ‘윤필은 청덕선정비(尹弼殷淸德善政碑)’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동래구 수안동 동래부 동헌 내 정원에 있다.
김교헌(1867∼1923)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제2대 교주를 지낸 인물.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 침략에 맞서서 이권운동을 도모하다가 일본측의 횡포로 일시 관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계속)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1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 박 창희
- 승인 2018.02.15 10:42
범어사 금어동천의 옛길의 비석골. 사진=박창희
#역사의 풍운아 정현덕
정현덕(1810~1883)은 구한말의 풍문아였다. 그는 고종 초에 서장관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흥선 대원군 집권 후 심복으로서 1867년(고종 4) 동래 부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임기가 끝났음에도 계속 자리를 지켜 1874년(고종 11) 정월까지 약 7년 동안 동래 부사를 지내 최장 기록을 세웠다.
정현덕은 동래 부사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외교 일선을 담당했다. 흥선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국교 재개 교섭을 서계(書契, 일본 정부와 주고받던 문서) 문제를 이유로 끝까지 거부하였고, 동래읍성을 개축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썼다. 특히 그는 동래의 인심을 바꿔 놓을 정도로 교학을 진흥시켰다. 동래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맹자의 고향)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오는 가풍을 잇게 하는 등 나름의 선정도 베풀었다. 그래선지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금정산성 내의 국청사 경내와 범어사 옛길의 비석골, 양산 물금의 황산도 길에 세워져 있고, 동래향교에 흥학비, 동래 금강공원에 시비가 놓여 있다.
국청사의 정현덕 선정비는 명신(明信), 평윤(平允) 두 승려가 1872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은 건립 이후 무슨 연유에선지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중에 향토사학자 주영택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고, 다시 제 자리에 복원되었다. 비석의 높이는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비석 전면에는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적혔고 좌우편에 4언시가 적혀 있다.
相鄕趾美(상향지미)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重建佛宇(중건불우) 국청사 건물들을 중건하고 逢海宣恩(봉해선은) 동래 고을 백성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廣置寺屯(광치사둔) 국청사에도 많은 땅을 희사하였네.
선정비란 게 으레 그렇고 그런 정치적 목적 하에 세워지는 것이지만, 정현덕 선정비는 실제 그의 선정(善政)과 연관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국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청사는 임진왜란 때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승병들의 주둔지였다.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는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고,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 승장인(僧長印)’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호국의 얼이 서린 국청사를 남달리 보고 중창을 지원하고 땅을 희사한 것은 정현덕의 정책 의지였을 것이다.
정현덕은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가 동래를 전역을 둘러보고 쓴 ‘봉래별곡(蓬萊別曲)’은 19세기 후반 동래부 상황와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시가다. 총 4단으로 구성되었으며 2단에 ‘범어사’를 읊은 시가 나온다.
장부 강개(慷慨) 못 이겨서 다유(多遊)하여 살펴보니, 금정산성 대배포(大排布)에 범어사가 더욱 좋다. 소하정(蘇蝦亭) 들어가니 처사는 간 곳 없고 유선대(遊仙臺) 올라가니 도사는 어데 간고? 온정약수(溫井藥水) 신효하니 병인(病人) 치료 근심 없다. 배산(盃山)이 안산 되고 슈무막(온천천)이 되였도다.
금정산성 등 동래의 산천이 선연히 그려진다. 범어사 소하정 유선대 온정약수 등은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신선세계를 꿈꾼 정현덕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부산에 그가 좇으려 한 유토피아가 있었음인가.
이 대목에서 박 선달은 강한 궁금증이 하나 돋아났다. 여기에 금어동천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박 선달은 고개를 갸웃하며 정현덕의 뜻을 헤아려본다. 금어동천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새겨 놓고 시가에는 언급을 하지 않은 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금어동천 바위를 숨겨 놓으려고?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이 적어? 박 선달은 특유의 쓴웃음을 짓고는 무덤덤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 대로 놔두자는 심산이다. 길이라고 다 길을 일러주는 건 아니지….
정현덕은 말로가 비참했다. 동래 부사에 이어 승지,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이 임금의 외척인 민 씨 일파에 쫓겨나자 정현덕도 파직당해 귀양을 갔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발발과 더불어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 복귀하여 다시 형조 참판에 올랐으나, 얼마 후 대원군이 다시 쫓겨나고 정현덕은 원악도(遠惡島, 사람이 살기 힘든 외딴 섬)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로부터 정현덕은 잊혀져갔다.
#조엄과 낭백스님 이야기
동래 부사는 1546년 초대 부사 이윤탁으로부터 시작해 1895년 사임한 정인학에 이르기까지 349년 간 모두 255명이 거쳐 갔다.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부산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고, 동래가 중심이었다. 동래 부사는 국방과 대일 외교, 지역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로,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강명한 인사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금어동천 옛길 개요.
금어동천을 지나 범어사 매표소 쪽으로 비스듬이 난 옛길을 따라 오르자 비석골이 나온다. 길 옆에 5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마에 땀을 훔친 박 선달이 다가서 비석을 골똘히 살핀다. 오른쪽부터 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헌교, 장호진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현덕과 조엄, 정헌교는 동래 부사 출신이고, 홍우길은 경상도 관찰사, 장호진은 대한제국 참서관을 지냈다. 모두 피폐한 사찰 구제와 보시로 은덕을 베풀었던 인물들이다. 범어사는 그 마음씀에 대한 고마움을 불망비로 대신했다.
임진왜란 뒤 각종 잡역에 따른 부담이 늘고 사찰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범어사 승려들은 사찰계를 결성해 한 푼 두 푼 모아 촛대를 사고 불화를 조성하고 법당도 수리하며 사찰을 지켰다. 사찰계는 사찰에서 이루어진 계(契)로, 승려와 신도가 함께 참여했다. 범어사 사찰계는 1722년에서 1947년 사이 63개에 이른다. 특히 동갑 승려들이 결성한 ‘갑계’가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 같은 사찰계로 축적한 사찰의 재정은 근대기 고승을 많이 배출한 바탕이 됐고, 선찰대본산 범어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 이를 동래 부사나 지역 유지들이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잊지 않겠노라’는 불망비의 뜻이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으니 불망비는 시대를 넘어 제 소임을 다하는 모습이다. 이 비석들은 ‘금어동천 옛길’이 이곳임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범어사로 가는 어떤 길도 없었을 때, 금어동천 옛길은 사람들의 발길에 눌려 길을 열어 주었고, 시대를 건너는 석각과 비석, 서낭당 등의 표식을 남겨 옛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비석골의 비석 중 조선 영조 때 동래 부사를 지낸 조엄(趙曮, 1719~1777)의 불망비는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비문은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曮革祛寺幣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조엄이 사찰의 폐단을 없애준 것에 대한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내용이며, 조선 순조 8년(1908) 조엄의 후손인 조중려가 범어사의 요청으로 썼다고 한다. ‘순상국’은 왕명을 받아 군무를 통찰하던 순찰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관리다. 동래 부사와 통신사 정사를 지낸 조엄을 높인 칭호다. 이에 대한 ‘거짓말 같은’ 전설이 범어사에 전해진다.
조선 중기 동래 범어사에 낭백(浪伯)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범어사에 입산해 수도했으며 보시행을 발원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타인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어 보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커다란 원력을 세워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염원을 이뤄냈다. 이른바 조엄 환생설화인데, 그게 불망비로 우뚝 서 있으니 거짓말이라 눙치기도 어렵다.
“누가 꿰맞췄는지 참으로 절묘한 설화야. 귀신이 곡할 얼개야.”
박 선달이 감동한 듯 연신 무릎을 친다. 이 설화는 환생과 윤회, 인과응보, 원력과 보시, 그리고 후세의 평가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길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한 줌의 설화가 나그네의 심사를 흔든다.
#금어를 찾아서
‘금어동천’의 금어는 어떤 의미일까? ‘금빛 물고기’로 봐야 할까, ‘금정산의 신어’로 봐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금붕어’일 뿐일 텐가?
불가에서 ‘금어(金魚)’는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승려를 뜻한다. 불화를 제작하는 이들을 흔히 불모(佛母), 화사(畵師), 화승(畵僧), 화원(畵員), 양공(良工), 편수(片手)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이 중 으뜸이 금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닐듯, 중생들이 용기 있게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용된다. 그런가하면, 시공을 초월해 전해지는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좋은 의미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금어를 찾을 수 있다. 신라 말기·고려 시대에 공신 등 특별히 하사받은 사람이 관복을 입을 때에 차던 붕어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금어(金魚) 또는 어대(魚袋), 금어대(金魚袋)라 했다. 보통은 3품 이상이 금어대를 찼다고 하니 금어는 곧 고관대작을 뜻한다. 금어가 요술을 부리듯 신통방통하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자신의 책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 2014)에서 금어(金魚)의 원형을 ‘금붕어’에서 찾고 원초적 생명의 가치를 부여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모두 금어(금물고기)라 하는 것을 우리만 왜 금붕어라고 하는가. 이어령의 해석은 이렇다. “한국은 금붕어라는 말 속에 붕어라는 이름을 살렸다. 금붕어 조상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생명이란, 잘 길들여진 인공의 공예품 같은 금붕어에서 그 야성을 보는 것이다. 가축, 애완물, 문명인 모두에게는 배꼽의 추억과 같은 생명의 신비함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흔들어 깨워라.”
이어령의 생명 강의 중 ‘콩 세 알의 조화’는 과연 그다운 탁견이다. “콩 세 알을 심어서 하나는 새가, 하나는 벌레가, 하나는 인간이 먹는 따뜻한 마음, 자연과 인간이 손잡고 사는 조화로운 세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하늘을 나는 새는 쫓아버리고, 땅속의 벌레는 농약과 제초제로 죽인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콩 세 알을 모두 차지할 수 있을까.”
박 선달은 ‘이어령식 해석’에 그저 고개만 주억거린다. 탁월한 해석이지만 억지춘향식 논리도 보이지 때문이다. 가령 금어를 금붕어의 틀로 읽는 것은 의미 축소라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금어와 금어동천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2017 온천천 금어 빛 축제. 출처: 금정문화재단 홈페이지.
시월의 어느 멋진 날, 부산도시철도 1호선 장전역~부산대 역 아래의 온천천에 대규모 금어떼가 나타났다. 제법 장한 물살을 형성한 온천천의 하천 공간에 빛의 터널이 만들어졌다. 부산 금정문화재단이 주최한 ‘2017 금어 빛 축제’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제작한 2000여 마리의 오색 빛깔 금어 조형물이었다. 온천천을 가득 채운 춤추는 금어떼는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밤하늘의 은하수 아래에 ‘빛을 품은 금어’들이 도시민들에게 무슨 밀어를 나누는 것 같았다.
박 선달은 그때 축제 장면을 ‘금어의 환생’으로 이해했다. 산에서 잠자던 금어가 비로소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과 호흡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금어의 상징성을 보다 넓게 풀어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금어는 단순한 금빛 물고기가 아니다. 한갓 금붕어는 더욱 아니다. 금어는 하늘이 금정산에 내려준 선물이자 신기한 요술 물고기다. 금어는 상황에 따라 날치가 되고, 목어가 되고, 고래가 된다. 펄쩍 뛰어오르는 금어는, 비상한 도약의 힘, 초월의 힘, 상상의 힘이 되고, 급기야 생태적 삶의 바탕, 희망 세상의 메시지가 된다. 더 나아가 해양도시의 탯줄로서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금샘은 금정산의 원천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하늘의 오색 물고기, 즉 금어가 산다. 금어가 사는 금샘의 물은 범어천을 거쳐 온천천, 수영강에 이르고 다시 부산 앞바다로 흘러든다. 이렇게 보면 금샘은 해양도시의 원천이요, 금어동천은 해양도시 부산의 금빛 브랜드가 아닌가!
박 선달의 가슴에서 ‘잠자던 금어’가 일어나 펄떡 펄떡 뛰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부산문인협회 주관의 월간 ‘문학도시’ 2월호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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