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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3.1운동 주역 동산 김형기, 그는 부산사람이다

 

3.1운동 주역 동산 김형기, 그는 부산사람이다


편집 2002.02.28(목) 14:40


3.1절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로 분주한 가운데 유두 김씨 문중의 부산 모라동 재실에 서있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기념비는 찾는이 없이 나홀로 3.1절을 맞았다.

초라한 기념비속 주인공은 동산 김형기 선생. 낙동강변 유두리(지금의 부산 삼락동) 출생으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일어났던 3.1 독립만세 주동자로 옥고를 치렀고, 병원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인물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동산 김형기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산 모라동 어느곳에 그의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조차 생소한 실정이니 찾는 이가 없는게 당연한 일이다.

현재 부산엔 일제시대 동광동에서 백산상회를 설립,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백산 안희재 선생이 크게 추앙받고 옛 백산상회 터까지 기념관으로복원돼 있다.

또 일제에 항거했던 여러 부산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공적비와 동상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동산 선생은 그 행적이 묻혀버린 탓에 후손들이 자신들의 재실에 모신초라한 기념비외엔 그의 업적을 만나볼 길이 없다.

동산 선생의 독립운동 내력은 지난 80년대말 집안 손자들이 독립기념관에서 자기들과 같은 본적의 이름이 3.1운동 관련 책자에 실려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애국지사 동산김형기선생비

동산 선생이 3.1운동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집안 사람들에게만 전해오던 이야기였다.

해방직후 이데올로기 분쟁의 와중에서 행방불명됐고 독립운동 내력을 입증할 자료가 없어 유족들은 그들의 가슴에만 동산 선생을 담아 놓고 있었다.

손자들이 독립기념관에서 `김형기'란 이름을 발견한 이야기는 종친회에 알려졌고, 이후 종친회는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3.1운동 관련자 기소문이란 사실을 알게됐으며,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동산 김형기 선생이 피고인 1번으로 형을 선고받은 `판결문'까지 찾아냈으며, 동산 선생은 이 자료 덕택에 지난 90년 비로소 건국유공자 애족장을 받게 됐다.

동산 선생은 3.1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중 재경유학생회 회장으로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총독부에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른 것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후 낙동문화원 백이성 원장(57) 등 많은 이들이 그의 행적을 추적한 끝에 동산 선생의 일제 판결문에는 경남 양산군으로 기록돼 있지만 지금의 북구 삼락동인 낙동강변 유두리에서 1896년에 출생했고, 3.1운동을 주도한 공적외에 지난 1926년 부산 영주동에 동산병원을 열어 인술을 베풀었으며 독립운동 자금 제공처 역할을 맡았던 이야기까지 최근 수집해냈다.

또 동산 선생이 해방후 미군정청 고문단에 관여해 귀환동포 후원위원장을 맡아 귀환동포 구호에 재산과 시간을 모두 바쳤으며, 이데올로기 분쟁속에 6.25 한국전쟁직후 정보기관에 연행된 이후 행방불명된 이야기도 수집됐다.

반세기동안 묻혔던 조국의 독립와 동포들의 위해 일생을 받친 동산 선생의 일대기가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산 사람'인 동산 선생의 공적을 제대로 아는 부산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그가 인술을 베풀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병원 자리도 온데 간데 없고 그를 기리는 기념비 하나 없기때문이다.

낙동문화원 백 원장은 "낙동강변 삼락동 둔치에 동산 선생의 기념비와 흉상을 건립하는 방안을 관계기관에 요청할 계획"이라며 "그의 거룩한 정신이 후세에 길이 전해져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뜻있는 이들이 앞장서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연합뉴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02/005000000200202281440760.html

 

 

부산출신 東山 김형기선생...이념에 할퀸 '민족해방仁術'

 

 

 

 

사색의 창

- 민족과 인술

 

 

피고인 1. 동래고보를 거쳐 경성의전 4학년이던 청년은3·1 독립운동의 주동자급으로 분류돼 옥고를 치릅니다. 이후 부산에서 인술을 베풀며 독립운동의 자금 모집에 헌신하기도 했지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던 동산 김형기 선생이었습니다.  다이내믹 부산 제 1530 | 기사 입력 20120620()

 

 

1. 동산의 사진 

김형기01.jpg

부산 동산의원 시절 환자를 돌보던 모습(부산시보사진)
 

 

해방 후 미군정청 수석고문 당시의 선생모습(뒷줄 오른쪽 네번째)

앞줄 오른쪽에서 尹相殷재무국장, 徐상환내무국장,해리슨준장(美군정지사)金秉圭도지사,金局泰경찰국장, 뒷줄 오른쪽부터 尹炳昊농림국장,金仁浩道고문, 朴己出보건후생국장, 金炯璣귀환동포후원회회장,禹德俊해리슨준장통역관

 

훈장증(1990.8.15/건국훈장애족장)

 

 

2. 동산 김형기 선생 약력
1986(태생) : 8월9일 삼락동 유두리에서 김욱권(金昱權)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11(16세) : 사상의 명문집안 출신 지부염(池富廉)신부와 결혼
    ?           :  사립명진학교졸업및 동래고보 다님
1916(21세) :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1918(23세) : 자택은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 감
1919(24세) : 1월부터 2월까지 3.1독립만세 모의에 재경유학생 회장으로 가담,
                   거사준비에 주동적 역활을 담당
                 : 3월1일 탑골공원에서 시위운동 주동급 인사로 참여
                 : 10월에 기소, 11월6일 1년형 언도를 받아 옥고를 치름
1922(27세)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1924(29세)  : 울산에서 공의(公醫)로 근무
1925(30세)  : 동래 기장 대변에서 공의(公醫)로 근무
1930(35세)  : 동래 복천동에서 동산병원 개원
1932(37세)  : 부산 영주동에서 동산병원 개원
1942(47세)  : 부산 대청동으로 동산병원 이전
1945(50세)  : 해방 후 미군정청 수석고문,귀환동포 후원 회장 역임
1950(56세)  : 6.25 전쟁직후 정보기관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실종)
1990. 8.15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8. 4.6    : 애국지사 동산김형기선생추모비 건립

 


 

 

[관련기사3]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 추모비 

포악한 왜적이 우리 강토를 강점하여 국토를 유린하며 식민통치를 자행한지 십여년 각계각층의 민족 지도자와 재경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대한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드니 청사에 길이 빛날 3.1 독립운동이다.
 
이 3.1 운동을 주도하신 최고 지도자의 한분인 동산(東山) 김형기(金炯機)선생이시니 이곳 김녕 김씨 (金寧金氏)유두(柳頭) 문중 유헌재(柳軒齋) 앞뜰에 청석을 세워 선생의 위대한 행적의 일단을 새겨두고 우러러 보고자 한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이며 호는 동산(東山) 으로 대보공(大輔公)휘(諱)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며 고려조(高麗朝)에 금주군(金州君)을 훈봉 받으신 휘(諱)시흥(試興)이신 문열공(文烈公)이 관조(寬祖)이시다. 문열공(文烈公)의 9세손으로 세조 조(世祖 朝)에 단종(端宗) 복위를 주도하고 순절하신 사육신 충의공(忠毅公)휘(諱) 문기(文起) 백촌(白村)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정란(靖亂)의박해를 피하여 부산(釜山)의 유두(柳頭)에 이거(移居)하신 유헌(柳軒) 휘(諱)영필(永弼)공의 13세손이다.
 
선생께서는 서기1896년8월9일 선조의 세거지인 당시 동래군 사상면 유두리 231번지2에서 출생하였으며 충주 지씨 (池氏)부염(富廉)님을 부인으로 맞아 슬하에 장남 재진(在珍)등 2남6녀를 두셨으며 효심이 지극 하셨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각별하신 분이셨다.
 
선생이 경성의전(京城醫專)4학년에 재학중 당시 유일한 학생조직인 재경 유학생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1919년 1월 민족대표 33인으 한분이신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과 함께 협심하여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정세와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고취 시키면서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계획을 재 경성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주종선(朱鍾宣)(李公厚)김문벽(金文壁) 등과 같이수립하셨다. 
동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강기덕(姜基德)한창식(韓昌植)과 회합하여"  조선 독립선언서"를 지역 대표 및 학교 대표에게 배포함으로써 서울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 조선 독립만세 소리가 노도와 같이 번지게 하였으니 실로 독립운동사에길이 빛날 위업을 이루셨다
 
3.1일 탑동 파고다 공원 앞에 모인 수천의 시위군중 앞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하여 학생 대표로 선생께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셨다고 전하나 확인 할 길이 없어 더 없이 애석한일이다. 이 날의 시위로 주동자인 선생을 비롯하여 학생대표37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동년 11월 6일 주동자 중 최고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셨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3.1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분이 재경 유학생회 회장 동산(東山)김형기(金炯機)선생님을 쉽게 알수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김형기[]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출처 디지털부산문화대전-김형기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대중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한 언론인.

가계

본관은 김녕(). 호는 동산(). 입향조는 유헌() 김영필()이다. 김영필은 사육신 김문기()가 참형을 당하자 충청북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구의 유도()인 유두리 강변으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김형기()는 김영필의 13세손이다. 김형기는 1896년 8월 9일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당시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유두리]에서 김욱권()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1918년에 유두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이사하였다. 한글학자이자 부산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김두봉()과는 외사촌간이고,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박일형()이 그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김형기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천석꾼이었던 아버지가 개화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종사하다 실패하면서 사상의 땅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결국 집안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갔다. 1911년 16세에 사상의 지주인 지씨()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사립명진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우여곡절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수(), 곽상훈() 등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26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을 개원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병원을 옮겨 해방 이후까지 같은 장소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김형기는 병원 수입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동산의원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김형기는 서상권, 김칠성(), 김재준() 등과 함께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남도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경남구호회’의 위원장을 맡아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대중 신문』을 창간하여, 1년 6개월간 발행인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논지는 중도 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김형기는 사찰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9일에는 군정 법령 제55호 ‘정당 등록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관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벌이던 김형기는 6·25 전쟁 중 좌익계로 분류되어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의 사촌 동생 집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이승만() 정권은 비판적 지식인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학살하였는데, 특히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했을 때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형기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의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하였던 행적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좌파 인물로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 마을에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3동 115번지 김녕 김씨 유두 문중 재실인 유헌재() 정원에 대한광복회와 낙동문화원, 김녕 김씨 유두 문중이 1998년에 함께 세운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가 있다.

참고문헌

  • 『내 사랑 부산 이야기-정말 부산을 사랑한 사람들』(부산민학회, 2000)
  • 박철규, 「미군정기 부산 지역의 대중 운동」(『한국 근현대 지역 운동사』1-영남편, 여강출판사, 1993)
  • 신종대, 「해방 직후 부산·경남 지방의 변혁 운동」(『한국 근현대 지역 운동사』Ⅰ-영남편, 여강출판사, 1993)
  • 『부산 일보』(1997. 8. 15)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대중신문(大衆新聞)』

한자 : 大衆新聞
영어의미역 : The Daejung Sinmun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26|대청동 1가 35
시대 : 현대/현대
집필자 : 김보영 


[상세정보]

성격 " 정기 간행물|신문
관련인물 ": 박일형|김동산
편집인 : 박일형
발행인 : 김동산
판형 : 타블로이드판[39.3㎝×54.5㎝]
창간 시기/일시 : 1945년 12월 5일 - 창간
폐간|종간 시기/일시 : 1949년 10월 1일 - 『부산 일보』에 합병
속간 시기/일시 : 1948년 1월 - 속간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 중립지로 발행하다 정간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8년 1월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26번지에서 중구 대청동 1가 35번지의 구 곡물 취인소 건물로 이전
제작|간행처 : 『대중 신문』 간행처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26
제작|간행처 : 『대중 신문』 간행처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1가 35


[정의]
해방 이후 부산 지역에서 창간되었던 좌익 성향의 신문.


[창간 경위]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자 한국 사회는 식민지의 모순을 청산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제를 둘러싸고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달리하는 여러 정당과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각종 주의·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정당과 단체들은 각종 매체를 동원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에서도 좌익 성향의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그 대표적 신문이 『대중신문(大衆新聞)』이다. 『대중신문』은 편집인은 동래 출신의 박일형(朴日馨)과 발행인은 의사 김동산(金東山)이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26번지에서 창간하였다.


[형태]
판형은 타블로이드판[39.3㎝×54.5㎝]이며 발행 면수는 2면이다.


[구성/내용]
『대중 신문』의 내용은 좌익 성향의 논조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변천과 현황]
1947년 10월에 좌익지인 『인민 해방보(人民解放報)』가 폐간된 뒤 그 독자들을 흡수하여 사세가 활발하였으나, 발행인 김동산과 편집국장 박일형이 좌익으로 규정되어 군정의 간섭이 심해짐에 따라, 1947년부터 홍보영(洪甫容), 이재현(李在賢) 등이 운영권을 인수하여 중립지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운영난을 해소하지 못해 정간(停刊)에 들어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1월, 일제 때 『매일 신보(每日新報)』 경상남도 지사장을 지낸 이수우(李壽雨)와 박문희(朴文熹), 김달범(金達範) 등이 운영권을 인수하여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1가 35번지의 구 곡물 취인소 건물로 이전하여 속간(續刊)하였다. 속간 후 실업가 김지태(金智泰)의 외삼촌인 이수우는 김지태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을 개선하여 노력하다가 1949년 10월 1일, 김지태가 인수한 『부산 일보(釜山日報)』에 합병되었다.


[의의와 평가]
1947년 10월에 부산의 대표적 좌익지였던 『인민 해방보』가 폐간되면서 『대중 신문』이 많은 독자를 흡수하였다. 이에 따라 중립지인 『민주 중보』나 우익지인 『자유 민보(自由民報)』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요산 김정환 선생


"요산 아호, 이미 1946년에 사용"
이순욱 '김정한전집' 엮은이
김희국 기자 | 2014.02.03 21:03


문학평론가인 이순욱(사진) 박사는 김정한 선생이 '요산'을 평생 아호로 삼은 시기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가 2008년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정본 '김정한전집'에 실린 작가 해적이(연보의 우리말)에 따르면 1950년 8월 김동산으로부터 감옥에서 인자수(오래도록 지조를 지키며 살아라)라는 뜻이 담긴 '요산'을 아호로 받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 박사는 새롭게 발굴한 자료를 통해 요산이 1946년 11월 21일 자 '대중신문'에 연재한 '이론과 비평'이라는 글에서 '요산 역'이라고 표기해 실제로는 1946년 3월께 '요산'이라는 아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이 박사는 또 광복기 요산에 관한 기록도 소설과 시가 발굴돼 공개됨으로써 일부분은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산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계속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들의 검토와 협의를 거쳐 일부를 고쳐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에 꼿꼿이 저항한 민족주의자…그는 붓을 꺾은 적 없었다
요산 '절필기' 소설·시 발굴
• 국제신문
•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
•  |  입력 : 2014-02-03 21:06:25

 

국제신문 전신인 산업신문 1948년 1월 7일 자 2면에 실린 소설 '서거픈 이야기'. 이순욱 박사 제공


- 지역의 좌파 매체들 통해- 이념적 색깔 담은 작품 발표- '이따위 악질 모리배들…'- 사회현상 날카롭게 비판- 새로운 민족국가 열망 표출- 기존 '절필기' 의미 퇴색- 문학 연대기 재설정 필요

그동안 '광복기' 요산 김정한 선생에 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렸다. 197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김정한소설선집'에 실린 연보를 보면 1940년(33세) '일제의 발악 극도에 달해 이로부터 붓을 꺾음'이라고 표기돼 있고 1966년(59세) '10월 '모래톱 이야기' 발표로 중앙 문단 복귀'라고 쓰여 있다. 1940~1966년을 요산의 '절필기'로 규정한 근거 중 하나다. 하지만 2008년 (사)요산기념사업회에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정본 '김정한전집'에서는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조갑상(경성대), 황국명(인제대) 교수와 이순욱 박사가 협의를 거쳐 '절필'이란 표현을 뺐다. 요산이 광복기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뒤늦게 속속 발굴되면서 '절필'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기 때문이다.부산·경남 지역 문학사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낸 문학평론가 이순욱 박사는 최근 새롭게 발굴한 요산의 광복기 소설과 시를 통해 요산이 스스로 말한 '절필기'에 실제로는 좌파 민족주의자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광복기 몇몇 유력 매체에 의존했던 기존 자료 수집 방식에서 벗어나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발간된 '민주중보' '인민해방보' '자유민보' '대중신문' '신한일보' 등 신문과 잡지 '전선' 등 다양한 이념적 색깔을 지닌 광범위한 매체를 조사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을 발굴했다.

 

■요산, 정치문학을 전개


요산 김정한 선생의 1970년대 모습. 최근 그가 광복기에 쓴 소설과 시가 새롭게 공개됐다
 
이 박사는 요산이 광복 후 배달학원 강사, 조선예술동맹 부산지구협의회 위원장, 조선문학가동맹 경남도위원장 겸 부산지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남지부 부위원장 등을 지내며 좌파 민족주의자로 활동했다고 강조했다. 또 이 시기 요산이 발표한 작품은 대부분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담아 좌파 관련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요산은 현실 비판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했는데 광복 후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소설보다 시로 먼저 드러냈다. 1945년 10월 '인민해방보'에 발표한 4수로 이뤄진 연시조 '해방부'는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형극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이후 등장한 시들도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광복기 요산이 지역이 아닌 서울 매체('문학·비평')에 유일하게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소설 '설날'이 실제로는 그에 앞서 지역의 좌익지 '대중신문'에 '호출의 설날'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연재했다는 사실을 이 박사는 이번 논문에서 밝혔다.

특히 국제신문의 전신인 산업신문에 연재된 소설 '서거픈 이야기'가 이 박사에 의해 새롭게 공개되면서 광복기 정치문학을 전개한 요산에 관한 재평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왜 우리 조선에는 이따위 악질 모리배들이 많을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서거픈 이야기'는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소설이다. 요산이 스스로 절필기라고 표현한 것과 관련해 이 박사는 "1940년대 초반 일제 국책기관의 관리로 일한 경력과 1949년 생존을 위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 전향한 점을 자책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요산, 광복기를 복원하자 이 박사는 광복기 활동을 고려해 요산의 문학적 연대기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전기-중기-후기' 또는 '초기-절필기-후기'로 구분했는데 앞으로는 등단작 '사하촌'(1936년) 이후의 문학적 청년기를 요산문학 1기, 정치문학으로서 가능성을 표출한 광복기를 2기, 국민보도연행 가입과 전향, 한국전쟁을 거쳐 대표작 '모래톱 이야기'(1966년)를 발표하기 이전까지를 3기, '수라도'(1969년), '인간단지'(1970년) 등 수작을 배출한 시기를 4기로 분류하자고 제안했다.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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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⑥ 수난시대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 죽을 고비 넘겨
8개월 형무소 생활 교도관 제자 덕에 회생
부산일보 2008/11/22일자


가장 큰 시련은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8개월 가량 형무소 생활을 했을 때.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당국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처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캄캄한 형무소 뜰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워졌다. 그의 얼굴에 강한 플래시 불빛이 비쳤다. 그 순간 그 불빛의 주인은 "선생님 웬일이십니까?"라고 소리치더니 그를 감방으로 돌려 보냈다. 감방에서는 동료 수인들이 그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평론가 김종철과 대담에서) 그를 살려준 은인은 박태지. "남해보통학교 제자 중에 박태지라는 분이 있었어. 이 분이 어려울 때 아버지가 월사금을 대신 내줬대. 1950년에 부산형무소 교도관이었는데, 이 분 덕에 면회고 뭐고 덕을 많이 봤어. 그때만 해도 줄 세워서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태지 씨가 아버지를 살려줬대. 큰 누님이 박태지씨 부인을 아는데 부인이 그 이야기를 하더래. 아버지가 월사금 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8월 14일 이전에 잡혔으면 못 사셨을 거야. 8월 15일부터 군법재판소에서 민간재판소로 이관된 거야. 천운이야."(장남 김남재 구술)

가족들의 삶도 고단했다. "6·25 전쟁 난 다음날부터 아버지가 엄궁에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소재를 대라며 육군특무대에서 누님하고 어머니를 잡아갔어. 아버진 8월 15일에 연행됐지. 아버지가 그렇게 들어가고 나니까 우리 7남매 먹고 살 게 아무 것도 없었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장사' 했지. 100매씩 떼다가 동광동 광복동 국제시장 보수동에서 팔았지. 모친은 밤에는 군복공장에 나가고 낮에는 행상을 했어. 첫 누님부터 셋째 여동생까지는 떡공장에 다녔어. 그런 생활을 8개월을 했지."(김남재 구술)

도망도 많이 다녔다. "48년 3학년 작문 수업 때였지. (요산은 47년부터 부산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공부시간에 밖을 보는데 교문에서 너댓 명이 들어오더라고. 내 눈에도 형사들 같았어. 선생님도 그걸 보시곤 그 길로 줄행랑을 치셨지." 당시 학생이었던 송영택 시인의 말이다. 김남재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48년쯤으로 기억하는데 경남도경 사찰과에서 지프차를 타고 나와 아버지 어디있냐고 하면서 휘발유를 내 입에다 먹이는 거야.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해. 그 형사 죽일 거라고 이름도 외고 있었는데…."

 

광복기 요산 김정한의 문학 활동 연구
이 글은 광복기 요산의 문필활동과 작품세계를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시기 요산은 연시조 3편(총12수)과 자유시 3편, 노랫말 1편을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자유시 ‘유리창’과 ‘四二七八ㆍ八ㆍ十五ㆍ十二時’는 목원(牧園), 『인민해방보』에 발표한 연시조 ‘옥중투사(獄中鬪士)에게‘는 두우(杜宇)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특히 요산은 한 제목 아래에 4수를 묶은 연시조 ’해방부(解放賦)’, ‘새해에 바침’, ‘옥중투사에게’를 통해 당대의 급변하는 현실과 지식인의 자세를 담아내고자 했다. 광복기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호흡이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태도를 표명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요산은 4편의 소설, ‘옥중회갑(獄中回甲)’, ‘호출(呼出)의 설날’(‘설날’로 개제?), ‘서거픈 이야기’, ‘하느님’을 통해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과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표명하였다. 글에서는 이제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 6편과『대중신문』 연재 단편소설 ‘호출의 설날’과『산업신문』(『국제신문』의 전신) 연재 단편소설 ‘서거픈 이야기’를 발굴ㆍ고증하였다. 특히 10월인민항쟁의 후일담을 다룬 연재소설 ‘호출의 설날’(1947. 1)은 『문학?비평』 1호(1947. 6)에 수록하면서 제목을 ‘설날’로 바꾸었다. 신문 연재본과 잡지 게재본은 부분적으로 단어를 손질한 것 이외에 내용상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나, 장분할에서 일정한 재편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거픈 이야기’는 연재 1회분만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으나 악질모리배가 판을 치는 광복기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세태소설이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기 직전에 발표한 ‘하느님’또한 역사 발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사 부인을 등장시켜 사회 진보의 주체로서 개인의 책임과 역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시와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요산은 급변하는 당대의 문화 지형에 즉각적으로 부응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의 글쓰기를 수행함으로써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으로서 당대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여 자신의 이념과 실천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산은 광복 후 배달학원 강사, 조선예술동맹 부산지구협의회 위원장, 조선문학가동맹 경남도위원장 겸 부산지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남지부 부위원장 등을 지내며 좌파 민족주의자로 활동했다. 또 이 시기 요산이 발표한 작품은 대부분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담아 좌파 관련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요산은 현실 비판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했는데 광복 후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소설보다 시로 먼저 드러냈다. 1945년 10월 '인민해방보'에 발표한 4수로 이뤄진 연시조 '해방부'는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형극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이후 등장한 시들도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광복기 요산이 지역이 아닌 서울 매체('문학·비평')에 유일하게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소설 '설날'이 실제로는 그에 앞서 지역의 좌익지 '대중신문'에 '호출의 설날'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연재했다는 사실을 이순욱 박사 박사는 이번 논문에서 밝혔다.

 

동산과 요산은 동향의 인물인데다 사상적 바탕이 같음으로 인해 동산이 발간하는 대중신문에 요산의 단편소설 ‘호출의 설날’을 연재할 정도로 지인관계를 유지하였다. 아울러 1950년 이승만 정부에 의해 1950년 8월 소설을 발표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