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상의 토박이

사상지역의 독립운동가

 

사상지역의 독립운동가

부산향토문화전자대전과 부산역사문화대전에 기록된 사상지역 출신인물의 독립운동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한다.

 

1. 김형기

한자 : 金炯璣 

영어음역 : Gim Hyeonggi 
이칭/별칭 ; 동산(東山)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인물/인물(일반)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 하유식,서용태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세정보
성격 : 독립운동가|언론인

성별 : 남

본관 : 김녕(金寧)

대표경력 : 동산의원 운영

출생 시기 : 1896년 8월 9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 : 1911년 - 사립명진학교 수학

           : 1916년 -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 1922년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활동 시기 : 1919년 3월 1일 - 서울에서 3·1 운동 참여

           : 1919년 11월 6일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 1926년 - 동산의원 개원

           : 1945년 12월 5일 - 『대중 신문』 창간

           : 1946년 3월 -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

           : 1950년 8월 20일 - 정보기관에 연행됨

추모 시기 : 1998년 -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 건립

           : 1990년 8월 15일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이주지 :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

학교|수학지 : 경성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 『대중 신문』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묘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대중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한 언론인.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동산(東山). 입향조는 유헌(柳軒) 김영필(金永弼)이다. 김영필은 사육신 김문기(金文起)가 참형을 당하자 충청북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구의 유도(柳島)인 유두리 강변으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김형기(金炯璣)는 김영필의 13세손이다. 김형기는 1896년 8월 9일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당시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유두리]에서 김욱권(金昱權)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1918년에 유두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이사하였다.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박일형(朴日馨)이 그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김형기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천석꾼이었던 아버지가 개화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종사하다 실패하면서 사상의 땅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결국 집안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갔다. 1911년 16세에 사상의 지주인 지씨(池氏)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사립명진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우여곡절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곽상훈(郭尙勳) 등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26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崔天澤),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병원을 옮겨 해방 이후까지 같은 장소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김형기는 병원 수입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동산의원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김형기는 서상권, 김칠성(金七星), 김재준(金在俊) 등과 함께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남도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경남구호회’의 위원장을 맡아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대중 신문』을 창간하여, 1년 6개월간 발행인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논지는 중도 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김형기는 사찰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9일에는 군정 법령 제55호 ‘정당 등록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관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벌이던 김형기는 6·25 전쟁 중 좌익계로 분류되어 1950년 8월 20일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의 사촌 동생 집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비판적 지식인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학살하였는데, 특히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했을 때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형기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의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하였던 행적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좌파 인물로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오택

한자 : 吳澤

영어음역 : aek

이칭/별칭 : 北星),만춘(晩春),오혜영(吳慧泳),오회영(吳澮泳),오재영(吳哉泳),오준영(吳晙泳)

분야 : 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의병·독립운동가

지역 : 역시 사상구 주례동

시대 : 일제 강점기

집필자 : 류지하  

 

[상세정보]

성격 : 독립운동가 

성별 : 남

대표경력  : 재단법인 고계학원 이사

출생 시기 : 1897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 : 1903년 - 한문 서당 삼괴제 입학

           : 1908년 - 부산진좌천학교 입학 

           : 1909년 - 사립명진학교 2학년으로 전학
           : 1912년 - 부산공립상업학교 입학 

활동 시기 : 1913년 - 구세단 결성
           : 1920년 9월 14일 -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 가담

           : 1921년 - 만주일보사 경남지사 인수

           : 1923년 -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지원

           : 1924년 - 상애회·보천교 타도 운동 전개

           : 1927년 - 신간회 부산지부 활동

           : 1929년 - 대중 숙박업소를 운영하며 일본에 가는 노동자 지원

           : 1931년 - 서울로 이주

           : 1945년 9월 - 정당통일기성회 조직

           : 1945년 - 『독립신문』 창간

           : 1946년 2월 -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신문』 양도

           : 1946년 - 박재혁 의사 추모회 개최 및 추모비 설립

몰년 시기 : 1948년 8월 2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 : 1983년 3월 31일연표보기 - 독립 유공 훈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 : 1920년 9월 14일연표보기 -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

출생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학교|수학지 : 사립명진학교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692-1지도보기

             : 부산공립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지도보기

활동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활동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묘소 : 망우리 공동묘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오직선(吳直善)이고, 어머니는 김순임(金順任)이다.


[활동 사항]
오택(吳澤)[1897~1948]은 1897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모가 한약방을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1903년 한문 서당 삼괴제(三槐齊)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학업을 시작하였다. 1908년 부산진 좌천학교에 입학하였고, 1909년 사립명진학교로 전학하였다. 16세 되던 해인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박재혁(朴載赫)·최천택(崔天澤)을 만나 형제 결의를 할 만큼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3년에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생인 오택과 박재혁·박홍규·김인태 등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학생 비밀 결사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는 활동으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 되었다. 오택은 이 활동으로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구세단의 해산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920년 9월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의 처단을 계획하고 부산으로 잠입하자 오택·최천택 등은 정공단(鄭公壇)에서 제를 지내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오택은 박재혁의 폭탄 투척 의거에 거사 자금을 제공하고 폭탄의 보관을 담당하였다.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감행할 때 오택은 부산진예배당 앞에서 거사 상황을 주시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총포 화약 취체령 위반죄로 한 달가량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봉천에서 『만주 일보』를 발행하는 만주일보사 경남지사를 인수하여 신문 업무를 견습하면서 주식회사를 설립하려 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금지된 기사가 게재된 신문을 시내에서 판매하다 구속되어 대구감옥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 및 조선일보사 부산지국을 경영하는 등 꾸준히 언론과 관련한 활동을 벌였다.

1924년부터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을 갈취하던 친일 단체 상애회에 반대하였고, 친일 사이비 종교 단체인 보천교 타도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부산광역시 중구 대창동에 대중 숙박업소를 개업하여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을 도왔다. 1927년 신간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자 선전부·조사연구부·서무부의 부원과 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31년 서울로 이주하여 이후 말년까지 대부분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1941년 최천택·김범부·최윤동·노기용·성학구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모환·김진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이듬해 2월 11일 종간호를 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양도하였다. 1946년에는 부산으로 내려와 박재혁 의사 추모회를 개최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친구이자 동지인 박재혁의 항일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어 상경하여 영우회(嶺友會)를 조직하고 재단법인 고계학원(財團法人高啓學院)의 이사가 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다 1948년 8월 22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집』이 있다고 전해진다.


[묘소]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3월 31일에 독립 유공 훈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3. 정호종

한자 : 鄭浩宗

영어음역 : jung Hojong

분야 : 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의병·독립운동가

지역 : 역시 사상구 백양대로572번길 17-21[감전동 262-1]

시대 : 일제 강점기

집필자 : 양진회화


[상세정보]


성격 : 독립운동가

성별 : 남

출생 시기 : 1901년 2월 9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 : 1919년 -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활동 시기 : 1919년 3월 13일 - 동래 장터 3·1 운동 주도

           : 1919년 4월 30일 -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 : 1981년 9월 28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 : 1983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 동래 장터 3·1 운동

출생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262-1

거주|이주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학교|수학지 : 동래고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 동래 장터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호종(鄭浩宗)[1901~1981]은 1901년 2월 9일에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262-1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3·1 운동의 소식이 부산에도 전해졌다. 이 무렵 3월 7일에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인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 등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해 주었다.

이에 정호종은 동급생인 추규영(秋圭暎)·손영수·김기삼(金琪三)·서진랭(徐鎭冷)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수학 교사 이환(李環)에게 전해 주었으며 이들이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의거의 참모 역할을 담당하면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호종은 주동 학생들과 함께 엄진영의 집 및 자신과 백정기(白正基)·고영건(高永建)의 하숙방 등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방에서 주동 학생들과 함께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이 동래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정호종은 다른 주동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등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50여 명의 일본군과 수십 명의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하며 닥치는 대로 군중을 체포하였다. 이때 정호종도 체포되어 부산감옥소에 투옥되었다.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 받고 부산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1년 9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관련 내용>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4권  >   1919년 4월 22일  >   釜山지방법원에서는 지난 3월 13

연월일 1919년 04월 22일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 시위운동 > 삼일운동 > 삼일운동 
출전 每日申報 1919.4.24

釜山지방법원에서는 지난 3월 13일에 동래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관련된 24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형하다.


懲役 2年6月 嚴道永金貴龍
懲役 1年6月 金仁浩高求建李相悳秋圭映金振炯徐鎭冷金琪三金聖祚申鍾殷金元龍朴得龍鄭浩宗
懲役 6月 尹三東 外 7人

每日申報 1919.4.24

 

4. 황용하

한자 : 黃龍河 

영어음역 : Hwang Yongha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 장선화
  

[상세정보]

성격 : 독립운동가

성별 : 남

수학 시기 : 1919년 -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활동 시기 : 1919년 3월 13일 - 동래 장터 3·1 운동 주도

           : 1919년 4월 30일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 받음

           : 1919년 8월 14일 - 가출옥 석방

관련 사건 시기 :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 동래 장터 3·1 운동

출생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교|수학지  : 동래고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 동래 장터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황용하(黃龍河)는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동래 장터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3·1 운동의 소식이 부산에도 전해질 즈음인 3월 7일에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가 동래고등보통학교 4학년인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김인호(金仁浩) 등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해 주었다. 이들은 황용하 등 2·3학년 대표 학생들과 동래 의거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수학 교사 이환(李環)에게 전해 주었고, 이들이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의거의 참모 역할을 담당하면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황용하 등 주도 학생들은 협의를 거듭하여 동래 장날인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고영건(高永建)의 하숙집 등에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오후 2시 엄진영이 동래군청 정문에 올라가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을 신호로, 황용하는 주변에 모여 있던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부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 모두 출동한 일본 경찰과 수비대에게 체포되었다. 4월 30일 황용하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8월 14일 같이 복역하였던 윤삼동(尹三東), 이수열(李守烈), 엄동영(嚴東永), 김철규(金哲圭), 조주성(趙柱星), 임명조, 박임갑(朴壬甲), 손영수(孫永壽) 등과 가출옥 석방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5. 황용주

한자 : 黃龍珠

영어음역 :  Hwang Yongju

이칭/별칭 :  황성주

분야 : 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의병·독립운동가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시대 : 일제 강점기

집필자 : 강은수  

 

[상세정보]

성격 : 독립운동가

성별 : 남

수학 시기 : 1909년 3월 사립명진학교 입학

           : 1913년 4월 동명중학 입학

           : 1916년 7월 동래고보 입학

           : 1918년 9월 -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활동 시기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3월 5일 대한문앞 3·1 운동 참여

           : 1919년 3월 6일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8개월 복역

           : 1919년 11월6일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3년 선고 받음

           : 1919년 11월 -학교 자퇴

           : 1920년 ~1928년 목포에서 미곡상 운영, 1928년 화재 발생

           : 1931년 1월 사상면 덕포리에서 황용주정미소 운영함

           : 1937년 진선계회칙 제정

           : 1946년~1950년 광복절에 사상초등학교에서 특별 연설

관련 사건 시기 : 1955년 3월8일 지병으로 사망, 장례 때 사상초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출생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학교|수학지  : 사립명진학교 - 부산

               : 동명중학교 - 부산

               : 경성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 서울 탑골공원, 대한문앞

활동지 : 사상면 덕포리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본관은 창원(昌原).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 출신. 일명 성주(性珠). 호는 운파(雲坡). 황두천(黃斗千)의 차남으로 189825일 출생. 1913년 사립명진학교(私立明進學校), 1916년 동명학교(東明學校), 1918년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의전(京城醫專)에 입학한다.

191931일 경성의전 1학년 재학 시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에 참여한 뒤 독립만세를 부르고 종로방면으로 거리시위를 하였으며, 35일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러 2차 시위를 함에 따라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36일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미결수로 8개월 복역한 상태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에 8개월 복역함에 따라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한다. 이 때 퇴학 조치를 당한 대부분의 학생은 형기를 마치고 나서 학교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나 황용주는 일본인 선생 앞에서 머리 숙이기 싫다며 학교를 그만 둔다. 그리고 친구가 있는 목포로 가서 미곡상을 운영하던 중 192926일 미곡상에 화재가 발생하여 재산상의 손실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대문형무소 복역 시 입은 고문 후유증으로 힘든 농사 대신에 목포에서 미곡상 경험을 살려 19311월 덕포동에서 정미소를 운영한다. 정미소 운영은 가족(아내와 아들)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때 과묵한 성격의 황용주는 집안에서 칩거하면서 독서와 신문읽기 및 서예에 몰두하였으며 정미소 운영은 주로 아내(김영태)가 맡아 하였다. 대외 활동으로 당산제 제수 비용 부담과 마을의 모임인 진선계의 회칙을 작성하는 등 제한적으로 마을을 위한 일에만 힘을 보탰을 뿐 대외 활동은 마다하였다. 대신에 요시찰 인물로 주기적으로 담당형사가 행동을 감시하였으며 때로는 집안에 들어와 곳곳을 검사한 사실을 장녀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숨죽이는 생활을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은 뒤, 모교였던 사상국민학교에서 후배들에게 3.1절과 8.15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여 특별 연설을 하였다. 말년에 지병으로 능인사에서 요양 생활 중 1955년 사망하였으며, 장례 때 사상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내 집에서 도로까지 늘어서 3.1절 노래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면서 마지막 길을 전송하였다. 유고 문집으로 능인사에서 요양생활 할 때 기록한 김립선생시집이 있다.

황용주 선생의 삶은 낙동강 하구의 농촌 마을에서 출생, 사립명진학교, 동래고보를 거쳐 뛰어난 두뇌로 나라의 최고학부인 경성의전에 1918년 입학, 유학 생활 속에 19193.1운동 참여와 옥고를 치렀던 시기와 학교를 그만 둔 1920년부터 말년까지 미곡상과 정미소를 운영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일반 학생과 달리 일본인 선생 앞에 고개 숙이며 공부하기 거부하고 학교를 그만 둘 만큼 과감한 선택을 한 후반기의 삶속에서 독립운동과 직접으로 관련된 일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보기에 따라 변절의 빌미로 해석할 수 있는 정미소 운영은 일제에 협력한 소산물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생계방편으로 충실했을 뿐이었다. 해방 후 동래출신 지인 곽상훈의 천거로 이승만 정부에 입각할 기회를 거절한 것은 그의 강직함의 결과였고, 당시 사상국민학교에서 3.1절과 광복절에 특별연설을 한 것은 마지막 남은 애국심의 발로이자 모교와 후배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193.1절 때 받았던 독립선언서를 현재까지 3대에 80년간 걸쳐 보관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후손들이 3.1 독립운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극명한 사례이다.

 

<황용주 관련인물>

 

성명은 許永祚.

연령은 23세, 9월 15일생.
신분은 …….
직업은 京城醫學專門學校 學生.
주소는 京城府 孝梯洞 202번지 崔仁成방.
본적지는 釜山府 草梁洞 531번지.

함께 하숙하는 사람이 있는가.
醫學專門學校黃龍珠·동 金泳珍 양명과 그밖에 성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 1명이 같이 하숙하고 있다

 

성명은 金永珍.

연령은 27세, 10월 19일생.
신분은 …….
직업은 京城醫學專門學校 學生.
주소는 京城府 孝梯洞 202번지 崔仁成방.
본적지는 京畿道 水原郡 水原面 新豊里 420번지.
출생지는 京城府 町名 番地不詳.
같이 하숙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학교의 4학년생인 許永祚·같은 학교의 1학년생인 黃龍珠·동 1학년생 鄭寅喆 등 3명이 나와 동숙하고 있다.

 

성명은 鄭寅喆.

연령은 21세·2월 1일생.
신분은 …….
직업은 京城醫學專門學校 學生.
주소는 京城府 孝悌洞 202번지, 崔仁成방.
본적지는 黃海道 載寧郡 載寧面 文昌里 60번지.
團成社에는 누가 와 있던가.
劉完榮·黃龍珠·朴文浩·吳泰泳·吳龍天 등이 와 있었다.

 

성명은 吳龍天.

연령은 18세, 6월 29일생.
신분은 …….
직업은 京城醫學專門學校學生.
주소는 京城府 仁義洞 92번지 崔貞淑방.
본적지는 平安北道 鐵山郡 古城面 中部洞.

오후 3시경이라고 생각한다. 활동사진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만세만세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와서 즉시 나가 보았더니 학생의 단체가 약 150명 정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있었다. 나도 그 군중에 들어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昌德宮·安國洞·光化門통·大漢門을 거쳐서 西大門에 이르고 그곳에서 귀가하였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의 선언을 한다는 것은 언제 들었는가.

그와 같은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나는 3월 1일에는 토요일이었으므로 정오 12시 지나서 학교로부터 귀가하였는데 劉完榮·鄭寅喆의 두 사람은 나에 대하여 오늘 團成社로 活動寫眞을 구경하러 간다고 하였으므로 나도 하숙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즉시 團成社로 갔었다. 그리하였더니 그곳에는 劉完榮·鄭寅喆·吳龍天·吳泰泳 등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후 2시경까지 보고 재미가 없어서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있었는데 오후 3시쯤에 이르러서 鍾路 5丁目 편에서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나는 하숙을 나와서 鍾路 5丁目으로 나가서 보았더니 군중이 만세를 부르면서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앞에 서있는 사람에 대하여 물어 보았더니 오늘 파고다공원에서 33인의 사람들이 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므로 만세를 부르며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황용주신문조서


그로부터 어찌하였는가.
위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기뻐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 5丁目을 약 1시간 정도 왕복하고 다니다가 그곳에서 헤어져서 귀가하였다.
군중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므로 피고는 기쁘게 생각하고 만세를 부른 셈인가.
그렇다.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가.
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므로 그것을 외부에 알리기 위하여 만세를 부른 것이다.
알린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하여 조선사람만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사람만으로서 정치를 하고 싶어서 그런 운동을 한 것인가.
그렇다.
활동사진의 입장료는 누가 냈는가.
내 돈으로 갔다.
그때 군중 속에 아는 사람이 있던가.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는 만족하지 못하다. 조선에 대한 정치는 정신적으로 조선을 압박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독립을 희망하는가.

나로서는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의사를 한번 발표하였으면 그것으로서 족한 것이므로 이번에 한번 발표하였으므로 장래에는 하지 않겠다.

 

 

이관수(李觀洙)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관수(李觀洙)[1925~1951]는 1925년 10월 22일에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 827-5번지[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266-15번지]에서 태어났다. 1944년 결성된 항일운동 단체 순국당(殉國黨)의 당수인 차병곤(車炳坤)과 내외종간이다. 1938년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 동래중학교에서 김병현(金柄鉉)·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를 중심으로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41년 겨울에 독서회를 강화하여 항일 학생 조직인 조선청년독립당을 결성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당은 1942년 봄에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이때 이관수도 참가하였다. 이관수는 행동반으로서 첩보 수집, 간첩 테러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 후 당원들은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 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 행동을 개시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당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암호를 사용하여 연락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당원들은 1944년 8월 1일에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한편 군사 기밀 탐지, 일본군 탄약고 폭파, 군용 열차가 통과할 때 구포 다리 폭파 계획 등을 세웠다. 그리고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청년독립당은 항일 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 등과도 연계하면서 항일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하였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1일 결성된 때부터 이관수가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행동 내용, 조직 등이 조선청년독립당과 거의 같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청년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탄로 나면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조선청년독립당의 조직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관수는 8월 8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동래중학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을 매우 엄중하게 여겨, 가족 면회도 금지한 채 조사를 하였다. 이관수는 1년간 검찰에 계류된 채 구류되어 있었으나 구류 기간이 만기된 1945년 8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옥하였다. 1951년 12월 25일 사망하였다.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평산 저수지 옆에 이관수 지사 묘가 있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87년 9월 5일에 이관수 지사 묘비 제막식이 개최되었다.

출처: 이관수(李觀洙) - 부산역사문화대전 (grandculture.net)

정의]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의사.

왕치덕

 

한자 : 王致德
영어 : Wang Chideok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 인물/인물(일반)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460번길 21[좌천동 317]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 전성현

[활동 사항]

왕치덕(王致德)은 1896년[혹은 1898년] 부산광역시 사상구[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749번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동구 범일동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범일동은 부산진에 위치한 대표적인 조선인 마을로서, 일본인 거주 구역이 팽창하면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범일동 일대에 거주하던 조선인 청년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박재혁(朴載赫)을 필두로 의열단 관련 인물들을 대거 배출하였다.

왕치덕은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3회로 입학하였으며 이후 1914년 봄, 부산공립상업학교 동창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 조직 구세단에 가입하였다. 구세단은 이후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재혁·오택(吳澤)·최천택(崔天澤) 외에도 박흥규·김병태(金餠泰)·김인태·김영주(金永柱)·장지형·조영상 등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립 사상이 투철한 청년을 모으고 연결하려는 데 주목적을 두었다.

이후 구세단은 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원봉(金元鳳)과도 연결을 가졌는데, 왕치덕 역시 1914년에 김인태·오택 등과 함께 김원봉을 만나기 위해 밀양으로 갔지만 만나지 못한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단은 설립된 지 반 년이 못 되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왕치덕은 다른 구세단 단원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구세단원들은 구세단을 해체한다는 조건으로 방면되었다.

그 후 구세단원들 대부분은 의열단의 투쟁에 참여하거나 부산 지역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왕치덕도 1920년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박재혁의 단독 행동으로 일단락되어 풀려났다. 이후 1927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한 후 1931년 5월부터 좌천정에 일광의원(日光醫院)을 개원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이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갖고 부산으로 오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오택·김인태 등과 함께 김원봉과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출처: 왕치덕(王致德) - 부산역사문화대전 (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