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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사상 공업 지역의 건설

사상 공업 지역의 건설

부산의 태생적 문제는 용지의 부족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1960년대를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이 문제는 다시 부산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기업들은 오늘날의 원도심이라고 부르는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에 주로 자리하였다. 해방 직후에서 1950년대까지는 부산진구, 동구에 속하는 범일동·부전동·부암동·가야동동래구 쪽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도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새로운 공업 부지의 확보는 부산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시역 내에서 새롭게 구할 수 있는 용지는 1963년 1월 1일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에 새로 편입된 사상 지역 밖에 없었다. 사상 지역의 저습 지대인 덕포, 삼락, 괘법, 감전, 학장, 주례 지역의 8.44㎢[255만 9000평]를 대상으로 사상 지구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1965년 공업 지구로 지정된 사상 공업 지역은 1968년 4개년 계획으로 시작되었는데, 1971년 준공을 목표로 시행하였지만 결국 1974년에 가서야 대사업이 완성되었다.

사상 공단 입지 조성이 1974년에 완료됨에 따라 많은 공장들이 사상 공업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1978년에서 1987년까지 약 10년 동안 사상 공업 지역으로 이전한 기업은 380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는 사상 공업 지역도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 사상 공업 지역은 명실상부 부산 최대의 공업 지대였다.

사상 공업 지역이 정점에 이르렀던 1980년대 후반인 1987년에 사상 공업 지역에 입지한 공장은 부산 전체 공장의 39%를 점하였다. 특히 기계는 46.9%, 화학은 48.4%로 두 업종은 부산 전체의 거의 절반의 공장들이 사상 공업 지역에 입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6년 사상 공단의 수출은 13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부산 전체 수출의 43%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또 공장 종업원 수도 13만 명을 넘었는데, 이 13만 명의 10분의 1인 1만 3000여 명이 국제상사 사상 공장에 근무하였다.


부산이 성장 억제 및 관리 도시로 묶이면서 기업들의 역외 이전이 본격화 되었다, 사상 공업 지역이 1974년 완공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사상 공업 지역으로 이전하였지만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소득 증가로 인한 주택 가격의 상승도 기업들의 역외 이전을 부추겼다. 시설 확장을 위해 더 넓은 토지가 필요하였던 기업들은 도심지의 공장 부지를 비싸게 팔고 값싼 넓은 용지를 찾아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73년6월18일 매일경제신문에 게재된 산업인맥-동양맥주 상
박필희 사장에 관한 기사

-1922년 동래고보 졸업

-1937년 함경남도 원산 천광고무 운영

-1947년 사상면 괘법리 신라고무 설립

-1952년 5월22일 동양맥주(주) 이사 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