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품는다
2010년 3월부터 경남도민일보에 인기리에 연재한 최헌섭 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의 "낙동강을 품는다"를 소개합니다. 누구보다 낙동강을 잘 알고있는 최헌섭 두류재 대표의 글을 통해서 낙동강에 얽힌 내력을 통해 보다 풍성한 스토리텔링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낙동강을 품는다]①낙동강, 경남에 들다
낙동강은 이준이 쓴 <낙동강범월시서>에서 옛적에 낙양이라 불리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그리 부른다 했고, 그 뒤 이중환의 <택리지>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에서도 그 말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2007년에 상주시에서 함창제에 세운 '낙동강의 유래'라 쓴 빗돌에 그리 나옵니다. 그러나 이전 자료에도 낙동강이란 이름은 나오고, 실학시대의 다산 정약용은 그의 글 <아방강역고>에서 열국시대(列國時代) 우리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인 가락(駕洛-가야)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 그리 부른다고 했으니, 이름이 비롯한 바에 대해서는 더 따져 봐야 할 일입니다.
강의 길이를 두고도 천삼백 리니 칠백 리니 운운하는데, 1300리라고 한 것은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의 함백산 황지에서 보아 그렇다는 얘기고, 700리는 낙동강이 비로소 강다운 모습을 보이는 경북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서 치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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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굽이치는 곳이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인데, 낙동강의 공격사면인 이곳은 비탈 기울기가 수직에 가까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 ||
강은 남쪽으로 흘러 대구 달성군 구지면과 경계를 이루는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에서 경남으로 듭니다. 이곳은 열국시대 여러 가야의 한 나라인 비화가야(非火加耶)의 옛 터전인 창녕인데, 경남에서 처음 낙동강을 받아들이는 송곡리 듬말에는 경북 고령군 우곡면(牛谷面) 객기리로 통하는 손터나루(客基津)가 있습니다. 이 나루의 남쪽 손실마을에는 봉분이 커서 왕무덤 또는 말무덤이라 불리는 고려시대의 무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서쪽에는 산성이 있다고 <창녕군지>에 전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창녕현 역원에는 현의 북쪽으로 27리 떨어진 이곳 송곡리에 다견원(茶見院)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여지도서>의 창녕현 지도에는 현풍과의 경계에 대견원(大見院)이란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창녕에서 서쪽의 고령과 합천으로 이르는 교통로에 배치되어, 예서 우산(牛山)나루를 건너 합천의 율지(栗旨)나루로 통했습니다. 송곡리에서 장천리 윗마까지는 낙동강의 공격에 의해 비탈이 심하게 깎여 강가를 걸을 수 없어서 에돌았습니다.
장천리 윗마에 있던 우산진(牛山津) 터는 양수장 근처에 있었는데, 그 곁에는 늙은 느티나무가 바위 벼랑에 뿌리를 박고 질긴 생명을 이어가며 나루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흐르는 내가 강으로 드는 곳이 나루터였는데, 지금의 강 양쪽 나루 위로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는 쓰임을 다했습니다. 1981년에 나온 <한국지명총람>에는 '우산나루터'를 윗마에서 합천의 밤마로 가는 나루라 채록해 두었습니다.
이곳은 <한강선생봉산욕행록(寒岡先生蓬山浴行錄)>에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어목정(漁牧亭), 부래정(浮來亭)을 거쳐 뱃길로 50리 여정으로 닿은 창녕의 옛 우산촌(牛山村)입니다. 도동서원에서 물길로 50리 정도의 여정이면, 바로 이곳 장천리 일대가 되니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나온 <해동지도>의 현풍현 지도에 큰 물줄기인 낙동강을 그리고, 그것이 창녕 우산진으로 흘러든다고 적었습니다.
지금도 이곳 장천리(長川里)에는 우산(牛山), 우미(牛尾) 등의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어 일대에 우산나루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강 정구 선생께서 지금의 동래인 봉산에 온천욕을 하러 가시던 기록에서는 이곳을 <해동지도>에서 보듯 창녕의 경계라 했으니 장천리의 옛 이름이 우산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과 나루의 이름은 송곡리(松谷里)와 장천리 사이에 있는 구릉인 우산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우산은 쇠뫼를 한자로 그리 적은 것이니, 현풍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인 송곡리 또한 우산의 골짜기를 이르는 소실 또는 쇠실을 그리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우산에서 비롯한 실마리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우미마을은 우산의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이기에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 임금 때 만든 <여지도서>에는 우산나루가 현풍과의 경계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책 '산천'에는 현풍 경계에서 영산현 경계까지의 수로 70리에 이르는 낙강(洛江-낙동강)을 설명하면서 시작점을 우산진(牛山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로써 보자면, 우산진은 지금의 장천리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해동지도>에는 이곳 우산진에 개인이 운용하는 배 한 척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유어면과 경계를 이루는 토평천 하구에 배말개(梨旨浦-이지포)와 나란히 그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창녕현지> '산천'에는 우산진은 현 서쪽 40리 현풍 경계 아래 낙강에 있다고 했습니다.
나루를 뒤로 하고 강가 둔치를 따라 내려가니 간간이 열국시대 이래의 질그릇 조각과 독 조각이 눈에 띕니다. 둔치에는 매실나무와 복숭아나무, 감나무, 배나무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고,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시작되어 벌써 매화나무를 베어 버렸습니다. 둔치의 곳곳에는 버려진 배추와 마늘이 싹을 틔웠고, 쑥과 냉이 등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글·사진/최헌섭(역사연구공간 두류재 대표)
- [낙동강을 품는다] 옥야(沃野)를 지나다 새창
- 3주 만에 다시 찾은 낙동강은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지금 그곳은 온통 토목공사 현장으로 변해 있습니다. 지난 번에 걸었던 장천리 우산마을 앞 둔치에 지천으로 널렸던 냉이는 벌써 꽂을 다 피웠고, 배나무와 복숭아나무는 꽃망울을 머금었으며, 매화는 강바람에 꽃잎을 뿌리며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연은 순리대로 제 몫을 다하려는데, 지금 이 강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앞서 걸었던 길을 이어 우산마을 둔치를 따라 내려오니 장천리 동쪽 골짜기에는 조선시대 옥야(沃野)로 불
- 최헌섭 대표 201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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