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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1937년판 동래부지

책소개
본서는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하고 발행한 읍지인 동래군지(東萊郡誌)(부산과 경남 양산군일대)의 상편(上編)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동래군지의 하권(古2756-1)과 합쳐지면 완질본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상ㆍ하권 합쳐서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 편은 이 중 1권과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상기 하권의 해제와 중복을 피하고자 하므로 본 해제에 없는 내용은 하권의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편집인인 문기주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의 제101호에는 ‘출판불허가(出版 不許可)의 이유(理由) 및 기사(記事) 해당요지(該當要旨) 집무자료(執務資料)『동래군지(東萊郡誌)』상(上)’이라고 하는 자료 가운데 그 이름이 보인다. 발송일이 1937년 01월 08일인 이 자료에는 문기주(文錡周), 신기운(辛起雲), 송종염(宋宗濂), 김호의(金好義), 김상승(金祥升), 최명상(崔命相) 등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특히 신기운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과 의로운 여성이 동래성 함락 때 싸운 내용 등을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 일부 삭제를 한 다음에 출판할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따라서 내용상으로 볼 때에 문기주는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민족의 저항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하는 의식을 어느정도 가졌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한편 이 책의 간행 등에 참여한 아래의 인물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이들과 친분을 나눴던 인물로 이해한다면 그다지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서문을 적은 정병조(鄭丙朝)는『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의하면, 가정에서 수학하여 1885년 2월에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1894년 12월에는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1895년 4월에는 임시강원시종관(任侍講院侍從官)을 지냈다. 1897년 3월에는 조칙에 따라 제주(濟州)에 유배되었고, 1901년 7월에는 다시 지도(智島)로 유배지를 옮기다 1907년 11월에는 특별히 조서가 내려저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궁내부(宮內府) 장례원(掌禮院)의 전사(典祀)에 임명되었으나, 1908년 2월에는 의원 면직되었다. 다시 1908년 7월에는 중추원(中樞院) 부찬의(副贊議)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한편, 정병조가 관여한 책으로는『해은선생년보(海隱先生年譜)』(古朝57-가310)』,『感慕文(感慕文)』,『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등이 전하며,『엄협판묘비탑본(嚴協辦墓碑榻本)』에도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한편, 이『동래군지』의 하편에는 표지 뒤에 하편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고, 그 뒤에 권3과 권4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이규신(李圭臣)과 이광욱(李光昱)이 작성한 발문이 실려 있다.

여기서 이규신에 대해서도 특별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현전하는 1914년에 간행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중인『함안이씨유적휘편(咸安李氏遺蹟彙編)』(古2517-174-2)』와『설재유고(雪齋遺稿)』(古3648-62-1103) 등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함안이씨유적휘편』의 발(跋)에는 후손(後孫) 규신(圭臣)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그가 함안이씨의 후손임을 알려준다.

한편, 발문에 참가한 또 한사람인 이광욱(李光昱)에 대해서는『조선신사대동보』에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의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1860년 12월 28일에 출생하였으며, 경상남도(慶尙南道) 부산부(釜山府) 읍내면(邑內面) 대안동(大安洞) 6통 10호에 거주했으며, 부는 이우형(李雨亨)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친족 가운데 시중(侍中) 이원(李元) 등이 있음도 보여진다. 관력(官歷)으로는 동래감리서주사(東萊監理署主事), 감리서기(監理署理), 재판소판사서리(裁判所判事署理), 삼화감리서주사(三和監理署主事),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 동래보통학교 학무위원(東萊普通學校 學務委員囑托), 동래대한협회 지회장(東萊大韓協會 支會長), 민의소 부의장(民議所副議長)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상권은 서(序), 범례(凡例), 목록(目錄) 뒤에 본문인 권1과 권2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는 위치(位置), 경계(境界), 건치연혁(建置沿革), 성곽(城郭), 영진(營鎭), 공해(公廨), 창고(倉庫), 산천(山川), 누대정각(樓臺亭閣), 형승고적(形勝古蹟), 묘사단재(廟祠壇齋), 학교(學校), 역원(驛院), 봉수산(烽燧山), 관시(關市), 찰사(刹寺), 도로(道路), 교량(橋梁), 제언(堤堰), 읍면동리(邑面洞里), 호수인구(戶數人口), 총면적(總面積), 토산(土産), 수산(水産), 공산(工産), 축양(畜養), 제세액(諸稅額), 금융(金融), 산업단체(産業團體), 공물(貢物), 각색장인(各色匠人), 기후(氣候), 풍속(風俗) 항목이 기록되어 있고, 2권에는 인물(人物), 상신(相臣), 유림(儒林), 학행(學行), 충훈(忠勳), 절의(節義), 효자(孝子), 열녀(烈女), 양원(良媛), 사마(司馬), 문과(文科), 무과(武科), 문관(文官), 음사(蔭仕), 무관(武官), 노직(老職), 증직(贈職), 유행(儒行), 열전(列傳)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편찬할 무렵에는 지부(知府) 성진선(成晉善)이 작성한『동래지(東萊誌)』가 있었지만 일실되었고, 부사(府使) 이서우(李瑞雨)가 찬한『동래승람(東萊勝覽)』과『장산후지(萇山後誌)』(편찬자 미상)가 남아 있었지만 두 책 모두 소략하였다. 숙종(肅宗) 시기에 동래부사(東萊府使) 박사창(朴師昌)의『동래부지(東萊府誌)』마저도 민몰(泯沒)된 상태였고, 고을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상황에서 문기주가 신구(新舊)를 합하여 2책으로『동래군지』를 편찬하여, 김만도(金晩度)가 동래인쇄소에서 인쇄하였다.

한편, 동래군은 삼국시대(가야)에는 해운대 지역에 장산국(萇山國, 혹은 萊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으로 소국을 이루었다. 6세기 경 신라의 점령 후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되고 8세기 경 경덕왕 때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때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東萊縣)으로 격하되고 울주(蔚州)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7년 동래군에 진(釜山鎭)이 설치되었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다시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409년 동평현이 다시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1428년에 다시 동래의 속현이 됨). 1547년 동래현이 동래도호부로 승격되었다(1592년에 다시 동래현으로 격하됨).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1599년 기장군이 폐현되어 그 남쪽을 동래현에 이속시켰다. 1617년 기장군이 복원되었다. 1895년 음력 윤5월 1일 동래부(東萊府)로 승격시키고 기장군을 속하게 하였다.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양산군 구포면을 편입하면서 다시 동래부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1910년 10월 1일 동래부를 부산부(釜山府)로 개칭하였다. 1914년 4월 1일 부산부를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할하였다. 이 때 기장군이 폐지되고 동래군에 흡수된다. 1918년 좌이면을 구포면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동래면을 동래읍으로 승격하였다. 1931년 구포면을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 1936년 4월 1일 서면ㆍ사하면 암남리를 부산부로 편입하였다. 1942년 10월 1일 동래읍, 사하면, 남면, 북면 부곡리ㆍ장전리를 부산부에 편입하였다. 1943년 10월 1일 구포면을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 광복 이후인 1963년 구포읍ㆍ사상면ㆍ북면ㆍ기장면 송정리를 부산직할시에 편입하고, 울주군 서생면을 동래군에 편입하였다. 1973년 현재 기장 지역 등 남은 동래군 지역 모두가 양산군에 편입됨으로써 행정구역명이 소멸되었다. 1995년 폐지된 동래군 군역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부활하였다. 군역이 1914년 폐지된 기장군과 일치하여, 군명은 기장군이 되었다. (하도겸)

목차
  •   表紙 = 0
      東萊郡誌序 = 1
      凡例 = 3
      東萊郡誌 目錄 = 5
      東萊郡誌 卷之一 = 11
      位置 境界 建置沿革 = 11
      城郭 = 13
      公해 = 16
      倉庫 = 17
      山川 = 18
      樓臺亭閣 = 24
      形勝古蹟 = 31
      廟祠壇齋 = 34
      學校 = 40
      驛院 烽燧山 = 42
      關市 寺刹 = 43
      道路 = 44
      橋梁 = 45
      堤堰 = 46
      邑面洞里 = 47
      戶數人口 = 51
      總面積 土産 = 53
      水産 = 54
      工産 畜養 = 55
      諸稅額 = 56
      金融 産業團體 貢物 各色匠人 = 58
      氣候 風俗 = 59
      東萊郡誌 卷之二 = 61
      人物 = 61
      相臣 = 64
      儒林 = 66
      學行 = 69
      忠勳 = 72
      節義 = 77
      孝子 = 79
      烈女 = 88
      良媛 = 93
      司馬 = 98
      文科 = 100
      武科 = 101
      文官 = 102
      蔭仕 = 104
      武官 = 118
      老職 = 119
      贈職 = 128
      儒行 = 131
      列傳 = 138
      東萊郡誌 下編 目錄 = 142
      東萊郡誌 卷之三 = 144
      受貫姓氏 = 144
      世居姓氏 = 145
      寓居姓氏 = 196
      鄕案 = 213
      守官 = 220
      東萊郡誌 卷之四 = 244
      陵墓 = 244
      題詠 = 247
      郡誌跋 = 287
원문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브러리 http://region.dibrary.net/posts/list/602/0/212854/OR02.do?topics_per_page=5#dum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