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운수사와 청류동천

봉산(封山)

봉산(封山)

봉산표석

금산(禁山)과 마찬가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한, 즉 금양(禁養)된 곳 자체를 뜻하기도 하였다. 봉산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고 포의(胞衣 :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를 묻기 위하여 정해진 태봉봉산(胎封封山), 황장목만을 생산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재목을 생산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등이 있는데, 이 기능을 보아 봉산은 특수한 목적으로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호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의 기록을 보면 태실수호군(胎室守護軍)은 능실(陵室)의 규정조례에 따라 봉산 가까이 주거를 금하게 하고, 3년마다 관원을 파견하여 순찰하게 하는 한편 잡목을 제거하게 하였다.

 

1734년(영조 10)에는 봉산에 대한 그간의 교령(敎令)을 정리, ≪신보수교집록 新補受敎輯錄≫을 편찬하였는데, 봉산지역의 산허리 위로는 화전개간을 못하도록 강조하고 있으며, 벌채금지·화기금지 등을 밝혀두고 있다.

 

≪속대전≫에서도 금산·봉산·의송산(宜松山)·송전(松田)·영액(嶺阨) 등 봉산에 관한 금제조항이 보이며, 그 위반에 대하여는 엄벌주의가 규정되고 있다. 한편, 황장봉산의 실태는 ≪속대전≫과 ≪만기요람≫에 부분적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따르면 1746년 당시 황장봉산이 경상도에 7개 소, 전라도에 3개 소, 강원도에 2개 소이며, ≪만기요람≫에는 경상도 14개 소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봉산의 수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도벌·남벌 때문에 자원확보의 필요상 늘어난 것이다.

 

황장봉산의 황장목은 소나무의 나이가 수백년이 되어 거목이 되면 그 심재(心材)가 적갈색으로 변하며 황색의 장기(腸器)처럼 된다는 나무로 당시로서는 중시되었다.

본래 봉산은 금산보다 더 특수한 목적으로 정해졌지만 금산과 봉산이 혼용되고 있는 경우도 보인다. 가령, 안면도·장산곶·변산반도·완도 등은 연해금산(沿海禁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들을 황장봉산으로도 기록, 혼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금산이나 봉산에서 베지 못하게 한 나무가 대부분 소나무였으며, 재목의 공급이라는 측면에서는 금산이나 봉산의 구분이 의미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운수산 계곡을 '청류동천'이라 불리었다.

 

백양산 자락에 최대 전통사찰인 운수사가 있어 사상지역 사람들은 '백양산'이라고 부르기 보다 '雲水山'이라고 부른다. 내력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기록인 좌수영지(左水營誌) 병고조(兵庫條)에 보면 운수산이 병고(兵庫)로 나와 있다. 즉, 수군(水軍)의 배를 만드는 데 사용할 재목을 얻기 위하여 민간인이 나무를 베어 쓰지 못하게 하는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었던 산이다. 

 

이러한 연유로 운수산에는 숲이 우거져 있으며 운수산계곡에는 사계절 맑은 흘러 '청류동천'이라 불리었다.


  

황장산 봉산표석 (黃腸山 封山標石)

 

 

 

 

황장목 함부로 베지마라! 소나무 귀한 줄 알아야지
 

봉산표석


봉산(封山)이라 함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을 말한다. 왕실에서 궁궐과 재사 건축물 등에 쓰기 위해 보호하는 나무가 있는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주로 소나무가 많은 산이 여기에 해당되지만 용도에 따라 제사용 신주목으로 쓰던 밤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배를 만들 수 있는 용도의 나무가 많은 산도 봉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금산(禁山)이라 하여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사점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산림이용을 권세가가 지배하는 것을 막고자 아예 산을 폐쇄 시켰다. 봉산은 조선 후기 숙종 원년부터 시작한 제도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산림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황장(黃腸)이라는 글자의 뜻은 소나무 중에서 속이 황색을 띤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목재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조정에서는 주로 이 황장목으로 왕실에 필요한 관을 만들었고, 황장목의 확보를 위해 특정한 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엄격히 관리했으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려고 경계표식(境界標式)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황장금표이다.

우리 문경에도 바로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봉산표석이 동로에 있다. 지난 1990년 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황장산 봉산표석이 그것인데 명전리 옥수동 벌천계곡 하류 합류지점의 논 가운데에 위치한다. 1976년 동로면 간송리에 거주하던 하정학씨 등에 의해 받침석에서 약 20m 지점에 매몰 되어 있는 것을 원래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한다
.

표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져 있고 지대석은 화강암 자연석으로서 표석에 각자는 두글자로서 『封山』이라고만 음각되어 있다
.
표석의 비석 높이는 103, 40, 두께 17㎝이고, 지대석의 높이는 약 110㎝정도이다. 글자의 크기는 두 글자 모두 가로세로 약 24㎝정도의 크기로서 음각의 깊이 가 1.5㎝ 정도로 깊이 패여져 있다
.

1871
년에 만들어진 문경현지(聞慶縣誌)에 의하면 ‘황장봉산-강희 경신 6(1680)에 봉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지역의 황장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18세기 중엽)에 나오는데, 여기서 ‘황장봉산은 대미산(黛眉山) 아래에 있으며 주위로 둘레 10리’라고 했다. 여기서 대미산(1,145m)은 현 재 문경의 황장산 서쪽으로 인접해 충북 제천시와 경북 문경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역시 백두대간의 능선에 포함되어 있다
.

황장산에서 벌채된 황장목은 육로로는 영남대로에 해당하는 하늘재를 통과했고, 수로로는 인근의 남한강 지류인 동달천을 통해 조정으로 운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황장산의 봉산 지정은 목재의 운반에 용이한 교통로와의 접근성도 중요한 인자로 고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논 가운데 서 있는 봉산 표석

 

 

 

황장봉산의 분포지를 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강원도에 가장 많이 지정됐고, 그 다음이 경상도임을 알 수 있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문경, 영덕, 봉화, 안동, 예천, 영양에 14곳이 황장봉산으로 지정됐고, 전라도에는 순천, 강진, 흥양(지금의 고흥) 3곳이 지정됐으며, 강원도에는 금성(지금의 철원), 양구, 인제 등 19개 고을에 43곳이 지정됐다고 했다.

 

http://tour.gbmg.go.kr/open.content/ko/people/heritage.mungyeong/?i=18663




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8> 부산의 봉산제도

엄격하게 관리되던 봉산, 뇌물로 민둥산 변모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1-01 19:57:11
  •  |  본지 24면

    


한국전쟁 이후인 1958년의 부산항. 온 산야가 민둥산으로 헐벗었다.
- 군선 조선 등 제조 위해 운영
- 동래 등 9개 군·읍 28곳 지정
- 도감 2인 산직 1인 둬 산 지켜

- 인근 주민 땔감난·노역 불만
- 산지기 뇌물받고 벌목 묵인

"절영도 들어가니 물길은 십 리길 어김이 없고/산 아래 목장에는 삼천준마(三千駿馬) 날뛰누나/섬의 산 위에는 봉산(封山) 되어 외시(外寺) 입금(入禁) 일도 많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1869년에 지은 '봉래별곡(蓬萊別曲)' 중에서 영도를 노래한 구절이다. 봉래산 아래는 목장이며 산 위쪽은 봉산이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예전에 부산의 주변 산야는 이 지역의 특성에 맞게 그 기능이 주어져 있었다. 말을 키우는 목장이거나 아니면 군선과 같은 배를 만들기 위한 목재 조달용 봉산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봉산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국가에서 벌채를 금지하는 산을 지정, 관리토록 했다. 그러니까 국가의 다양한 수요에 따라 산림을 기능적으로 세분화해 관리보호했다.

가령 한양에서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금강소나무를 관리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다면, 부산지역과 같은 변방에는 조선용 목재 확보를 위한 선재봉산(船材封山)이 있었다. 특히, 참나무만 전문으로 가꾸는 진목봉산(眞木封山)도 있었는데 이는 참나무가 성질이 견고하여 목선의 늑골과 같은 뼈대나 키, 노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선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산은 나무를 채취하였을 때 물길을 따라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해안가 가까이나 강 유역에 지정하였다. 또한, 봉산의 기본법인 송헌(松憲)이 제정되어 몰래 나무를 벤 자는 그루 수에 따라 엄한 벌에 처했다. 소나무 한 그루를 벨 때마다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 장(杖) 60대를 맞았고, 소나무 10그루 이상을 베었을 때와 솔밭에 불을 지른 방화범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러면 당시 부산지역에서 이러한 봉산제도를 관장한 부서가 어디였을까?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지역의 수령인 동래부사가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때는 달랐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관장하였다. 좌수영 관하 군선과 조선 그리고 대일통신사선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곳 봉산에서 필요한 목재를 얻어야만 했다. 그래서 수군절도사는 봉산을 보호하고 벌목을 단속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었다. 1850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에서 편찬한 이 지역의 지리지라 할 '내영지(來營誌)'를 보면 경상좌도의 관할구역은 동래·기장·울산·경주·장기(포항)·영일·흥해·양산·밀양 등 9개 군·읍이 해당되었다. 이 구역에 지정된 봉산은 28곳으로서 동래는 장산· 운수산·몰운대·두송산이었고, 인근 기장은 남산·장안산·거물산·앵림산·백운산이 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산에는 관리를 맡은 관직인 도감(都監) 2인, 산직(山直) 1인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봉산이 국가 차원에서 아무리 필요한 제도라 하더라도 그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과 불만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땔감이나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심지어 봉산 인근의 마을 주민은 목재를 채취하는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산지기들이 주민과 짜고 뇌물을 받고 묵인해 주는 것이 일반화되어 벌목행위가 자행되기도 했다. 그 사례로 조선 시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염전인 분개염전(지금의 용호동 LG메트로시티 일대) 소금주가 산지기와 결탁하여 소나무를 배에 싣고 운반하다가 검거되었다. 그래서 1792년 당시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에는 나무가 없어 거의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래부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데다 염전에서 철로 된 솥으로 소금을 굽거나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도 많은 땔감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벌채 문제와 지역민의 군정첩역(軍丁疊役) 등으로 수령인 문관출신 동래부사로서는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고, 또한 봉산을 관리하는 수군의 수장인 무관 출신 좌수사에게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이러한 봉산의 운영을 두고 두 사람 간에는 미묘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지만, 변방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군선을 만들고 관리를 위해서는 봉산정책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경상좌수영 관하의 군선과 통신사선 등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던 곳이 선소(船所)였다. 특히, 통신사선을 만들었던 곳은 경상좌·우수영의 본영이었다. 부산의 수영과 경남 통영이 그곳으로서, 이들 지역은 오늘날 우리나라 조선업의 메카가 되어 있는 곳이다.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오랫동안 국가적 명제인 해방(海防)과 해운(海運)을 위해 봉산제도의 규율 아래 배를 만들며 지역민이 쌓아온 내공의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부산세관박물관장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봉산의 종류


‘황장봉계표석’과 봉산封山제도의 유래

조선시대 초기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소나무 목재를 조달하기 위한 지역을 금산禁山으로 지정하여 관리했다. 전란으로 인한 복구용 목재 생산을 위한 대량 벌채가 목적이었다. 후기로 내려 올 수록 권세가들이 산림을 사유화하면서 소나무를 보호하기가 곤란해졌다. 이러한 문란한 임정을 쇄신하고 관리의 부정을 막고자 숙종 때 금산제도 대신에 봉산封山제도를 도입하였다. 봉산제도란 국가에서 필요한 특정한 용도의 목재(조선재, 관곽재, 신주용 목재)를 공급하기 위한 지역을 설정하는 제도이다. 조선시대 많이 지정했던 봉산은 선재봉산船材封山, 황장봉산黃腸封山, 율목봉산栗木封山이 있는데 선재봉산은 전선戰船과 조운선漕運船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나무와 참나무를 생산하는 곳이고, 황장봉산은 왕실에서 필요한 관을 만들거나 궁궐 건축에 필요한 소나무를 생산하는 곳이다. 율목봉산은 신주神主를 만드는데 필요한 밤나무를 생산하려고 지정한 산림이다. 조선 순조8년(1808) 편찬된 『만기요람(왕에게 경제, 군제, 토지 등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편찬)』에 따르면 전국에 봉산은 282개소가 지정되어 있었으며 그중 황장봉산은 60개소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지정된 봉산에는 봉표를 자연석 등에 새겨 나라에서 지정한 산림임을 쉽게 알게 하였고 일반인이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울진 소광리는 백성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산지를 황장봉산으로 지정하여 특별관리 하였던 지역으로 이곳에는 아직도 바위에 새긴 황장봉표가 남아있다. ‘울진소광리황장봉계표석’이라 불리는 바위는 조선왕실에서 금강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한다’는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소광리 표석은 숙종 6년(1680년)에 새겨진 것으로, 그 구역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 이름들과 길吉이라는 사람을 산지기로 명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보호로 울진 봉화 지역의 소나무는 그나마 잘 보전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시대 철도가 부설되고 신작로가 개설되는 등 교통이 발달되자 봉화 울진 지역에 있는 소나무 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하였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나무가 봉화군 춘양역을 통해 외지로 반출되었는데, 당시 지역에서 생산된 금강소나무 목재를 춘양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소광리 일대는 불편한 교통으로 인하여 금강소나무가 잘 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질좋은 소나무를 지킨 표석, 황장금표

취사 및 난방용 연료재, 농사용 퇴비 등의 생산을 위하여 인가주변의 활엽수림이 오랫동안 훼손된 결과 나쁜 토양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게 되었다. 소나무 숲은 우리의 농경문화가 변모시킨 국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치악산 구룡사의 황장금표
[치악산 구룡사의 황장금표]

울진 소광리의 황장금표
[울진 소광리의 황장금표]

치악산 구룡사의 황장금표
[치악산 구룡사의 황장금표]

울진 소광리의 황장금표
[울진 소광리의 황장금표]




밤나무숲을 지킨 표석, 율목(栗木)봉표

율목봉표(栗木封標)는 왕실에서 사용되는 위패를 만드는 신주목인 밤나무를 생산하기위해 지정된 숲을 표시한 것이며,

율목봉표
[율목봉표]


참나무 숲을 지킨 표석, 진목(眞木)봉표

진목봉표(眞木封標)는 선박건조에 필요한 참나무(특히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를 생산하기 위해 지정된 숲을 표시한 것이다.

진목봉표
[진목봉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부근의 율목 및 진목봉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부근의 율목 및 진목봉표]


질좋은 향나무를 지킨 표석, 향탄봉표(香炭封標)

향탄봉표(香炭封標)왕실에서 능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목과 목탄을 생산하기위하여 지정된 숲을 표시한 것이며, 향탄봉산(香炭封山)에서는 나무를 하거나 짐승을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팔공산의 향탄봉표
[팔공산의 향탄봉표]


산삼을 지킨 표석 삼산봉표(蔘山封標)

삼산봉표(蔘山封標)는 조선왕실에 봉납할 산삼을 얻기 위해 지정된 숲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최근 강원도 정선의 회동리와 인제의 미산리 2곳에서 발견되었다.

가리왕산의 삼산봉표
[가리왕산의 삼산봉표]


농경문화가 변모시킨 국토의 얼굴


강릉 일대의 소나무 숲
[강릉 일대의 소나무 숲]

취사 및 난방용 연료재, 농사용 퇴비 등의 생산을 위하여 인가주변의 활엽수림이 오랫동안 훼손된 결과 나쁜 토양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나무 숲이 무성하게 되었다. 소나무 숲은 우리의 농경문화가 변모시킨 국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 숲의 본래 모습

광릉 소리봉 일대의 천연활엽수림
[광릉 소리봉 일대의 천연활엽수림]

가까이에서 본 광릉의 천연활엽수림
[가까이에서 본 광릉의 천연활엽수림]

530여년 지켜온 광릉 소리봉 일대의 천연활엽수림은 전 세계적으로 몇 남지 않은 온대 지방 숲의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산림청은 이 일대를 학술림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