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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이야기

금남호남정맥 속 봉수왕국, 장수가야

금남호남정맥 속 봉수왕국, 장수가야 

 

흔히 봉수(烽燧)란 낮에는 연기와 밤에는 횃불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인 전화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고총 못지않게 가야계 왕국의 존재여부를 방증해 주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 자료이다. 삼국시대 때 가야계 소국인 반파(伴跛, 叛波)513년부터 3년 동안 기문(己汶)과 대사(帶沙)를 두고 백제 무령왕과 갈등관계에 빠졌을 때 봉수제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반파의 위치를 비정할 때 문헌에서 요구하는 절대조건은 삼국시대 봉수의 존재여부이다.


장수군 장계분지에서 갈라진 한 갈래 봉수로가 백두대간을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사진 우측 상단부가 장수 봉화산 봉수이다.  

장수군 장계분지에서 갈라진 한 갈래 봉수로가 백두대간을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사진 우측 상단부가 장수 봉화산 봉수이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전북 장수군 일대에서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진안고원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수계상으로 금강유역에 속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두대간이 가야 영역의 서쪽 경계를 이룬 것으로 널리 인식됐다. 그런데 진안고원에서 유일하게 전북 장수군에만 가야계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있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에 가야계 소국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이다. 장수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왕국으로까지 융성했던 장수가야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봉수왕국이다.

 


한성기 백제와 가야의 간선교통로가 통과하는 진안고원 탁고개로 좌측에 진안 운봉리 산성, 우측에 진안 운봉리 봉수가 있다. 

한성기 백제와 가야의 간선교통로가 통과하는 진안고원 탁고개로

좌측에 진안 운봉리 산성, 우측에 진안 운봉리 봉수가 있다.

 

금강 최상류에 속한 진안고원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그 존재를 드러내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80여 개소의 봉수가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봉수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장수군으로 향하는 내륙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 그리고 산봉우리 정상부에는 대체로 장방형의 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둘렀다. 흔히 돌로 연대를 쌓고 그 위에 연조를 설치했던 조선시대 봉수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에서 삼국시대 회청색 경질토기편보다 그 시기가 늦은 청자편과 백자편이 봉수에서 수습되지 않았다.

 


장수 백화산 봉수로 그 아래쪽에 120여 기의 가야계 고총들이 모여 있는 장수 삼봉리·월강리·장계리·호덕리 고분군이 있다. 

장수 백화산 봉수로 그 아래쪽에 120여 기의 가야계 고총들이

모여 있는 장수 삼봉리·월강리·장계리·호덕리 고분군이 있다.

 

아마도 진안고원의 봉수에서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은, 봉수의 설치시기와 설치주체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기준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안타깝지만 봉수의 분포양상을 근거로 장수가야에 의해 봉수망이 구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삼국시대 봉수들로 그 존재만으로도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봉수보다 그 조영 시기가 천 년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백두대간의 영취산과 봉화산 봉수를 대상으로 그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시작되는 분기점에 장수 영취산 봉수가 있다. 영취산은 금강과 섬진강, 낙동강 분수령으로 12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밀집 분포된 장계분지가 한눈에 잘 조망된다. 영취산 봉수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구시봉과 할미봉 봉수, 서쪽으로는 장안산 봉수, 남쪽으로는 봉화산 봉수가 있다. 영취산 정상부를 평탄하게 다듬은 뒤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만을 가지고 조잡하게 단()을 쌓았다. 단은 그 평면형태가 장방형으로 백두대간 산줄기와 평행하게 장축을 두지 않고 장계분지 방향으로 약간 비스듬히 두었다. 영취산 9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한 바퀴 둘렀는데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다.

 


백두대간 산줄기 정상부에 자리한 장수 영취산 봉수 발굴광경으로 좌측 상단부 리본들이 금남호남정맥의 시작을 알려준다. 

백두대간 산줄기 정상부에 자리한 장수 영취산 봉수 발굴광경으로

좌측 상단부 리본들이 금남호남정맥의 시작을 알려준다.


장수 영취산 봉수 발굴 현장 항공사진으로 붉은색 장방형의 점선이 단(壇)이며, 좌측 점선은 봉수를 두른 방호벽 바닥이다. 

장수 영취산 봉수 발굴 현장 항공사진으로 붉은색 장방형의 점선이

()이며, 좌측 점선은 봉수를 두른 방호벽 바닥이다.

 

 

장수 봉화산 봉수 항공사진으로 붉은색 장방형의 점선이 단이며, 백두대간 등산로를 개설하면서 유구가 심하게 유실됐다. 

장수 봉화산 봉수 항공사진으로 붉은색 장방형의 점선이

단이며, 백두대간 등산로를 개설하면서 유구가 심하게 유실됐다.

 

장수 봉화산 봉수는 아영분지가 잘 조망되는 백두대간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 경계로 섬진강과 낙동강 분수령을 이룬다. 운봉고원에 속한 아영분지는 가야계 고총에서 처음으로 금동신발과 철제초두, 청동거울,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가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끈 남원 월산리·두락리 고분군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갈라진 한 갈래의 봉수로가 운봉고원 서쪽 자연경계인 백두대간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운봉봉수로라고 불린다. 봉화산 산봉우리를 두른 성벽이 확인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영취산 봉수와 그 속성이 흡사하다. 이들 봉수에서 유물은 돗자리무늬와 격자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편, 적갈색 연질토기편 등 삼국시대 토기면만 출토됐다.

 


 

진안고원의 금강 상류지역 봉수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토기편들로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삼국시대 토기편만 수습됐다. 

진안고원의 금강 상류지역 봉수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토기편들로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삼국시대 토기편만 수습됐다.

 

운봉고원 서쪽인 백두대간을 따라 배치된 봉수에서 수습된 유물들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가야토기편도 포함되어 있다. 

운봉고원 서쪽인 백두대간을 따라 배치된 봉수에서 수습된 유물들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가야토기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봉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어딘가이다. 그곳에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실어온 변방의 소식을 최종적으로 보고 받는 지배자가 있기 때문이다. 전북 무주군진안군임실군, 남원시 운봉읍, 충남 금산군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모두 장수군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5대 봉수로가 서울 남산에서 합쳐지는 것과 똑 같다. 전북 동부지역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들 봉수의 운영주체는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게다가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된 장계분지와 장수분지에는 10여 개의 봉수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2001년 장계분지 서쪽에 자리한 장수 봉화산 봉수 지표조사 광경으로 산봉우리 정상부에 봉수대를 알리는 표지목에 있다. 

2001년 장계분지 서쪽에 자리한 장수 봉화산 봉수 지표조사


광경으로 산봉우리 정상부에 봉수대를 알리는 표지목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성 및 봉수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진안고원이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줄곧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고원을 장악하려는 삼국의 정치군사적인 목적과 관련이 깊다. 제일 먼저 백제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웅진 천도 이후 한 동안 정치적 불안으로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이를 틈타 장수가야가 백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봉수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 무렵 신라도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무주군 무풍면 일대를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진안군과 금산군까지 신라의 영향권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진안군과 무주군, 금산군 일대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진안고원 금산분지까지 진출하여 대규모 축성과 봉수망을 구축했던 장수가야가 백제 및 신라와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분명하지 않다.

 


 

전북 진안군 정천면 국사봉 봉수 지표조사 광경 

전북 진안군 정천면 국사봉 봉수 지표조사 광경

 

국사봉 9부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두른 방호벽 

국사봉 9부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두른 방호벽

 

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백제와 가야,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쳤다. 그리하여 장수군을 제외한 진안고원에서 삼국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그러다가 장수가야가 백제에 복속됐고,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진안고원이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수도와 진안고원을 왕래하던 내륙교통로가 끊긴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낙후된 지역을 암시하는 용어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무진장(茂鎭長)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가야계 왕국으로 장수가야의 발전과 삼국의 각축장으로 진안고원이 큰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백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전북 장수군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고 있다. 장수군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80여 개소의 봉수는 줄곧 백제와 등을 맞댄 장수가야가 그 생존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운영했던 가야계 문화유산의 백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종합적인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삼국시대의 봉수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단한 지표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오늘도 전북 동부지역 봉수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도전과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운봉고원의 제철유적과 함께 장수가야의 봉수도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곽장근 프로필 

 

 

출처: 문화유산채널

http://www.heritagechannel.tv/hp/hpContents/story/view.do?contentsSeq=8316&categoryTyp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