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역사가 보이는 盆城山![]() | ||||||||||||||||||||||||||||||||||||||||||||||
金海市(김해시)의 중심지가 등지고 있는 높이 310m의 盆城山(분성산). 분성산에 오르기만 하면 古代 동아시아 세계의 最先進(최선진) 해양국이며 「鐵(철)의 나라」였던 金官伽倻(금관가야·駕洛國)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해의 新·舊 시가지 사이를 꿰뚫고 흘러내려 西낙동강에 합류되는 해반천. 아득한 옛날, 바로 이 해반천을 따라 東아시아 세계를 압도한 가야의 철기문화가 절정의 꽃을 피웠다. 특히 4~5세기 가야무덤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철제 말 얼굴 가리개까지 발굴되었다. 이런 가야의 전쟁도구는 같은 시기의 신라나 백제의 것보다 선진적이었다. 가야의 鎧馬武士(개마무사)는 무서운 戰士(전사)집단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개리 레저드 교수는 일찍이 『가야 무사는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의 기간에 100년 이상 왜국의 왕위를 차지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분성산 烽燧臺(봉수대)에 올라 서쪽을 향해 보면 발 아래로 首露王(수로왕)의 天降(천강) 설화로 유명한 龜旨峯(구지봉), 伽倻(가야) 철기문화의 선진성을 입증한 大成洞 고분군, 금관가야 최대의 주거지 鳳凰洞(봉황동) 유적이 펼쳐 있다. 해반천 동쪽 유역을 따라 이어진 南北 2km의 벨트. 바로 이 벨트 안에서 전성기 가야인들이 태어나 살고 죽어서 묻혔다.
필자의 답사에는 김해시청의 문화재연구원 宋源永(송원영)씨가 동행했다. 지난 1월25일 오전 9시30분, 김해시청 앞에서 만나자마자 宋연구원은 필자 일행을 盆山城(분산성: 사적 제66호·어방동 산 9번지)으로 끌고 갔다. 그는 釜山大 고고학과 출신으로 『가야의 위상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 우리 역사상의 「三國시대」를 「四國시대」로 바꾸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젊은 연구자이다. 분성산은 분산성으로 요새화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1377) 김해부사 朴威(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 그러나 城의 기초 선정 방법이 우리 古代 山城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퇴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의 축성연대는 가락국 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은 성곽의 길이가 929m인 石城이다. 분산성 바로 아래엔 朴威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박위라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쓰시마 섬(對馬島·대마도)을 정벌한 장수이다. 우왕 14년(1388), 경상도 都巡問使(도순문사) 박위는 병사 1만 명과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對馬島에 원정해 왜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이는 쓰시마를 소굴로 삼았던 왜구에 대한 응징이었다. 우왕 在位 14년간 한반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 횟수는 무려 378회에 달했다. 분산성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는데, 고종 8년(1871)에 개축되었다. 당시의 집권자는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이었다. 흥선대원군 기념비는 박위의 공적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분성산의 북쪽으로는 김해시를 껴안은 神魚山(신어산·630m), 동쪽으로는 이름처럼 뾰족하게 돌출한 「돗대산」이 보인다. 수년 전의 어느 날, 짙은 안개 때문에 착륙 포인트를 놓친 中國籍 여객기가 김해 상공을 선회하다가 바로 이 돗대산에 부딪혀 추락했다. 분성산 동남쪽으로는 西낙동강, 그 너머로 김해국제공항과 낙동강 본류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해안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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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김해와 경계를 맞댄 釜山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요즘 김해에 대한 지리 감각은 거의 백지에 가깝다. 그래도 필자에게 김해가 生面不知(생면부지)의 땅으로 느껴지지 않는 연유가 있다. 50년 전,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추억이다. 부산의 「교통부 앞」(지금의 범내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馬山으로 가면서 중도의 김해 읍내 車阜(차부: 정류소)에 잠깐 정차했다. 그때 「아줌마들」이 버스의 전후좌우로 우르르 몰려와 이렇게 외쳤다. 『내 딸 사이소(사세요)!』 『내 딸 사이소 예!』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절은 무르녹은 봄날, 바로 딸기철이었다. 「과일행상 아줌마들」이 「딸기」란 낱말의 절반을 줄여 그냥 「딸」이라고 했다 . 이런 물정은 애들도 대번에 눈치챌 만했다. 하지만 버스에 탄 몇몇 싱거운 청·장년들은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머니 「딸」 얼맹교(얼마요)?』 『아주머니 얼굴 보니 「딸」도 이뿔꺼라(예쁠 것이라)…』 『내 아즉(아직) 총각 아닌교. 마, 사우(사위) 삼으소!』 그때만 해도 순박했던 시절인지라 아주머니들은 『문디 머슴아…』 따위의 질펀한 대거리는 하지 못했다. 당시 김해평야는 영남에서 제일 넓은 곡창이었다. 토마토·오이·딸기 등 원예농업도 풍성했다. 하기야 지금도 김해시 進永邑(진영읍) 일대는 전국 제일의 단감 産地(산지)이다. 舊김해군은 부산직할시의 팽창으로 1970~1980년대에 김해평야의 중심부인 1邑(대저읍) 3面(명지면·가락면·녹산면)을 부산에 넘겼다. 하지만 지금의 김해시는 그때 그 시절의 농촌이 아니라 首露王 이래 최대의 경기를 누리고 있다. 1973년 시가지 바로 남쪽으로 남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식품·섬유·타이어·전자업체 등이 부산으로부터 대거 이전해 들어와 인구 1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 후의 도시화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현재 인구는 무려 45만 명,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농사를 짓다가 토지보상금을 받아 하루 아침에 수십억원대 부자가 된 주민들도 적잖다. 특히, 金大中 대통령-金鍾泌 국무총리-金爀圭 경남지사 재임 시절, 김해시가지와 가야 유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위 3人의 공통점은 首露王을 시조로 삼는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정치세력의 子宮일까. 현재의 盧武鉉 대통령도 김해 출신이다. 분산성에서 내려와 가야문화의 출발점인 구지봉(구산동 산 81번지)에 올랐다. 구지봉은 정상부가 놀이마당처럼 편평한 구릉이다. 구지봉의 정상부 남동쪽 가장자리에는 「龜旨峯石」(구지봉석)이라 새겨진 南方式 고인돌(支石墓) 1基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김해 일대가 청동기시대에 이미 상당한 인력 동원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三國遺事(삼국유사)」의 駕洛國記(가락국기)는 신라 유리왕 19년(서기 42년) 3월 上巳日(상사일: 3일), 하늘로부터 이곳에 6개의 황금 알이 담긴 황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首露王을 비롯한 6가야의 始祖王(시조왕)들이 태어났다는 신화를 담고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아니 내놓으면 불에 구워 먹으리다』 그날, 구지봉에 모인 김해 지역의 9干(간: 추장)을 비롯한 무리 약 300명은 하늘(天神)이 계시한 대로 그렇게 합창했다. 이것이 우리 국문학상 중요한 詩歌(시가)의 하나로 손꼽히는 「龜旨歌(구지가)」이다. 이 구지가는 거북을 神(신)의 使者(사자), 즉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자로 하여 왕이 강림하도록 기원하는 대왕맞이 굿의 迎神歌(영신가)이다. 그러면 당시의 김해사회는 어떤 발전단계에 와 있었을까. 김해 지역에선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벼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농경·어로생활이 펼쳐져 왔고, 기원후 1세기로 접어들면 9干을 우두머리로 한 조직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辰韓(진한)의 서라벌 지역에서는 혁거세가 斯盧國(사로국: 후일의 新羅), 馬韓의 서울 지역에서는 온조가 什齊(십제: 후일의 百濟)를 건국해 영토국가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물론, 弁韓(변한)의 중심인 김해 지역에서도 고대국가의 건설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가락국의 명칭은 史書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加羅(가라), 伽倻(가야=加耶·伽耶), 狗倻國(구야국), 南加羅(남가라), 金官國(금관국=金管伽倻) 駕洛國(가락국) 등이다. 금관국이란 국호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쓰인 것이고, 구야국은 「三國志(삼국지)」의 魏志 東夷傳(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국명이다. 모든 이름이 그렇듯이 한 나라의 이름에는 그것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라」 또는 「가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은 이번 김해 답사여행 전에 만난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의 견해이다. 1) 가라(加羅)의 본디 소리와 뜻은 「하·해=태양」+「라=사람」+「라=땅·나라」=「하라라: 해의 자손의 땅·태양족의 나라」였다. 여기서 「사람」 혹은 「땅」을 뜻하는 「라」가 중복되어 있는 탓으로 그 하나를 생략해 「하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이 「하라」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가라」라고 발음하게 된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간고쿠」라고 하는 것도 이런 소리바꿈 현상 때문이다. 3)古代의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말의 1인칭은 「라·나=태양」이고, 妻(처)는 「안해=안에 있는 해」, 자식은 「아해=새로 태어난 해」라고 부른다. 요즘 철자법으로는 「아내」, 「아이」로 표기되지만, 그것은 원래의 뜻을 무시한 것으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안해」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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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에서 내려와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구산동 120번지)으로 넘어갔다. 거북의 머리 형상인 구지봉과 거북의 몸통에 해당되는 수로왕비릉 사이의 구릉은 일제 때 김해-밀양 간 국도를 내면서 잘려 나가 평지화되었는데, 15년 전에 구릉을 복원하고, 그 밑으로는 구지터널을 뚫었다. 무덤 앞에는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 새겨진 묘비가 서 있다. 수로왕비를 왜 「보주태후」라 했는지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수로왕비는 印度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이름은 許黃玉(허황옥)이다. 아유타국은 인도 동북부를 흐르는 갠지스江 중류 유역에 실재했던 아요디아 왕국이다. 허황옥은 수로왕 7년(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거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해 수로왕과 혼인했다. 人口大國(인구대국) 인도 출신의 여성답게 수로왕비는 多産(다산) 체질이었던 듯하다. 수로왕과의 사이에 10남2녀를 생산했다. 별세 직전에는 열 아들 중 두 아들을 자신의 姓(성)인 許씨를 따르게 했다. 따지고 보면 許왕후는 韓民族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자손인 김해김씨와 김해허씨가 현재 한국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되는 600만 명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宋源永 연구원은 『許왕후는 한국 여성파워의 선구자』라고 치켜세웠다. 과연 그러하다. 許왕후는 年下의 남자(수로왕)와 센세이셔널한 국제결혼을 감행할 만큼 모험적이었고, 아들 둘을 許씨로 삼아 스스로 金海許氏의 시조가 되었던 만큼 우리 역사상 戶主制(호주제)를 파괴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뿐만 아니다. 허황옥은 시집올 때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습의 神魚像(신어상)을 가져와 이 땅에 퍼뜨렸다. 아유타국의 國章(국장)인 이 神魚像은 21세기 김해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수로왕비릉의 앞마당에는 神魚 두 마리가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의 분수대가 만들어져 있다. 또한 그녀가 인도에서 시집올 때 역시 배로 실어 왔다고 전해지는 婆裟石塔(파사석탑)도 왕후릉 앞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다. 붉은 무늬가 은은한 石質(석질)로 보아 한국산이 아니며, 그 조각 방법도 이국적이다. 이 석탑은 荒天(황천) 항해 중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6개의 석재만 남아 있다. 바다사람들이 안전항해에 효험이 있다는 전설을 믿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석탑의 돌을 조금씩 떼어 가는 수난을 당해 오늘처럼 왜소해졌다고 한다.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許왕후가 시집올 때 그녀의 오빠 長遊和尙(장유화상)도 함께 와 김해에 상륙했다. 후세의 假託(가탁)인지는 모르나 장유화상은 김해의 신어산 銀河寺(은하사), 지리산 七佛庵(칠불암) 등의 창건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한반도 전래시기는 300여 년 앞당겨진다. 어떻든 파사석탑은 가야불교의 南來說(남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학계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
필자 일행은 이어 봉황동 유적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있는 회현리 貝塚(패총: 조개무덤)은 가야시대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골각기 등과 함께 王莽(왕망)시대의 중국 동전인 「貨泉(화천)」이 출토되었다. 왕망이 前漢(전한)을 찬탈하고 세운 新(신)은 A.D. 9~22년 사이에 존속하다 後漢(후한)에 멸망당한 短命(단명)왕조이다. 이 화천의 발견을 놓고 가락국이 국제무역국이었음을 뜻하는 하나의 증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화천은 김해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산지港과 일본의 쓰시마, 규슈에서도 한두 점씩 발견되었다. 화천은 短命왕조 新의 멸망 후에는 국제교역에서 결제를 위한 화폐로 사용될 수 없었던 만큼 그 유민들이 고국을 떠나올 때 간직했던 기념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회현리 패총은 일제 때인 1914년에 1차 발굴되었고, 1999년 부산大 박물관팀에 의해 再발굴되었다. 패총이라면 先史(선사)시대와 고대의 쓰레기장이다. 현재, 발굴현장 주위엔 패총에서 파낸 팔뚝만 한 굴 껍데기, 주먹 크기의 백합·소라 껍데기, 그리고 생선뼈와 토기· 철기의 파편 등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는 불에 탄 쌀도 출토되어 우리나라 쌀농사의 기원과 傳來루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발굴현장은 현재 가건물이 덧씌워진 채로 폐쇄되어 있다. 울타리 틈새로 그 속을 들여다보니 규모가 매우 크다. 宋源永 연구원은 『회현리 패총의 깊이는 8.5m로서 세계에서 제일 깊은 패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 패총 단면 노출 전시시설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회현리 패총과 인근의 가락국 최대의 생활유적인 봉황대는 함께 묶어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가락국의 왕궁터, 주거지, 高床(고상)가옥, 土城 등이 발굴되었다. 고상가옥은 습기와 쥐 피해의 방지를 위해 높은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은 창고이다. 당시 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인류의 적이었다. 각종 질병을 옮길 뿐만 아니라 생산된 곡물의 30%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고상가옥에는 쥐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기둥 상단에 둥근 원판 모양의 防鼠板(방서판)이 설치돼 있다. 고상가옥이나 주거지의 지붕은 낙동강 일대에서 무수하게 자생하는 갈대로 엮었다. 갈대 지붕은 15~20년을 견딘다. 고상가옥 앞에는 다소 엉성하지만 선착장도 복원되어 있다. ![]()
生者必滅(생자필멸)은 인간세상의 법칙이다. 「봉황대」에서 살던 가야인들은 죽어서는 바로 북쪽에 大成洞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필자는 대성동 고분군보다 良洞里 고분군(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 3번지)을 먼저 답사했다. 양동리 고분군이 대성동 고분군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무덤이기 때문이다. 김해의 중심가에서 馬山 가는 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10여 리 달리면 주촌면 歌谷(가곡)마을에 이른다. 「酒村」과 「歌谷」이 언제부터 그렇게 불려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술 빚는 마을(酒村)」, 「노래 부르는 골짜기(歌谷)」라는 이름에서 가야인의 로맨티시즘이 느껴진다. 韓民族은 중국의 史書에까지 「飮酒(음주)와 歌舞音曲(가무음곡)을 좋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歌谷마을 뒤 야산(해발 90m)에 3만평에 달하는 양동리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가야인들은 「酒村」에서 술 마시고 「歌谷」에서 노래 부르고 살다가 죽어서는 마을 뒷산에 묻힌 것이다. 발굴 후의 무덤들이 흙으로 덮여 있어 지금은 地下遺構(지하유구)를 살필 수 없다. 발굴 당시에 이곳은 감나무 과수원 조성지 부분, 소나무와 잡목들로 이루어진 야산 그대로인 부분, 이미 훼손되어 집과 공장이 들어선 남쪽 끝자락 부분으로 나뉘어 어느 곳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유적에 대한 훼손이 진행된 상태였다. ▣ 東義大 박물관장 林孝澤 교수 ![]() 필자는 金海 답사 하루 전날인 1월24일 아침 서울을 떠나 부산 伽倻洞(가야동)에 위치한 東義大(동의대) 박물관장실로 직행했다. 여기서 오후 4시부터 3시간30분 동안 김해 良東里 고분군의 발굴(1990~1996년)을 지휘한 박물관장 林孝澤(임효택) 교수를 만나 伽倻 유물 전반에 걸친 강의를 들었다. 林교수는 釜山大 조교 시절인 1976년 김해 大東面 예안리 고분의 발굴조사에 참여한 이래 加耶史(가야사)의 숱한 수수께끼를 하나하나씩 풀어 온 고고학자이다. 『예안리 고분군에서 여러 형태의 무덤 250여 基가 확인되었고,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100여 구에 달하는 人骨(인골)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입니다. 석회질 성분이 계속 공급되는 地質(지질) 속에 묻힌 탓에 썩지 않았던 거예요』 ―발굴된 인골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10여 년간 정리해 현재 부산大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인골 하나하나를 수거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더군요. 일본 聖마리안느 醫大의 인골전문가 오카다(小片) 교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안리에서 발굴된 인골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당시 사람들의 형질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三國志」의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것처럼 扁頭(편두)가 뚜렷한 인골 10구도 출토되었어요. 위지 동이전의 정확성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예안리 유적의 인골은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4.7cm, 여성이 150.8cm였다. 편두의 인골은 10례(남성 3례, 여성 7례)가 확인되었다. 위지 동이전 弁辰條(변진조)에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안리 고분 발굴을 통해 확인한 편두의 부위는 앞 이마와 이마의 양 옆 부분이다. 『예안리 유적의 발굴은 가야고분에 대한 학술적 발굴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의 福泉洞(복천동) 고분군, 합천의 玉田(옥전) 고분군, 고령의 芝山洞(지산동) 고분군 등이 잇달아 발굴조사되었거든요』 ![]() ―양동리 고분군을 발굴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훼손된 遺構(유구)로 인해 가곡마을 뒷산 일대에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발굴 前에 이미 가야유적지임이 알려져 있었어요. 이 유적지의 서쪽 끝 부분 일부가 당시 김해군에 의해 도정공장 부지로 계획됨에 따라 救濟(구제) 발굴이 불가피했던 겁니다』 계획 당초에는 조사대상 지점이 변두리이고, 또한 비교적 경사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지하에 유구가 있다고 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유구가 밀집·중복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개개 유구에서도 중요한 자료들이 속속 출토되었다. 처음 3개월로 계획되었던 발굴기간이 6년간(4차)으로 연장되었다. 『양동리 고분은 전체의 배치상이 마치 가야고분의 전시장을 펼쳐 놓은 듯하며, 시기별 墓制(묘제)와 유물의 변화·발전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유적의 연대는 上限(상한)이 기원전 2세기 말, 下限은 5세기로 추정되며, 특히 BC. 1세기로부터 5세기까지는 공백 없이 지속적으로 조성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요. 이는 가락국 초기의 중심지가 봉황동·대성동이 아니라 주촌면 일대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유물의 질적 수준에서도 적어도 3세기 말까지는 양동리 고분군 쪽이 대성리 고분군 쪽보다 높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두 6종류나 되는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었다. 가야의 묘제는 시기별로 크게 구분해 보면 목관묘(2세기 전반까지)·목곽묘(2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까지)·석곽묘(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의 단계로 변화·발전되어 왔다. ―가야의 출발 시기를 언제로 보십니까. 『목관묘를 통해 살펴보면 早期 가야의 개시시점은 기원전 1세기였습니다. 제55호 목관묘에서는 銅劍(동검)·銅鏡(동경)·曲玉(곡옥) 등 일본 천황가의 3寶(보)가 완전한 세트로 출토되어 이 묘의 주인공이 정치적 실력을 가진 「天君」(천군: 祭政一致 시대의 지도자인 샤먼)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묘의 조성 시기는 前期 가야의 구야국에서 가락국으로 변하는 2세기 초엽으로 추정됩니다』 양동리 고분군 중 548基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청동기·철기·장신구 등 모두 5192점에 이른다. 토기에 있어서는 가야토기의 변화·발전상, 특히 瓦質(와질)토기에서 硬質(경질)토기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확인되었다. 『신라토기·백제토기·가야토기 중에서 가야토기가 가장 멋있습니다. 경제적 여유에 의한 멋입니다. 당시 가야는 경제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서가던 지역이었어요』
![]() 양동리 고분과 대성동 고분에서는 많은 양의 鐵鋌(철정)이 바닥에 질서정연하게 깔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철정을 우리말로 「덩이쇠」라고 풀이하고 있다. 「덩이쇠」라면 대번에 주먹 모양이 연상된다. 실제의 모습은 중앙은행에서 지불준비금으로 보유하는 金塊(금괴)와 비슷하다. 다만 허리 부분이 조금 잘록할 뿐이다. 필자는 「철정」 또는 「덩이쇠」보다 「鐵塊(철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느꼈다. 『가야시대의 철정은 오늘날의 금괴와 같이 규격화된 쇳덩이입니다. 삼한 시기의 납작도끼(板狀鐵斧)에서 기원되었죠. 4~5세기에는 도끼와 매우 다른 형태의 덩이쇠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덩이쇠는 精鍊(정련)의 과정을 거친 시우쇠(熱鐵)인데, 불에 달궈 두드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 가야의 무덤에서는 이런 철정이 10매 단위로 끈에 묶여 차곡차곡 쌓인 채로 부장되어 있다. 왜 하필 무덤에 철정을 묻었을까. 『地神(지신)에게 무덤의 땅을 사면서 철정을 값으로 치른 것입니다. 公州에 있는 백제의 武寧王陵(무녕왕릉)에서도 地神에게 대가를 치르고 땅의 권리를 취득했다는 買地權(매지권)이 발굴되지 않았습니까. 가야의 철정은 산업의 중간재와 수출품인 동시에 당시의 국제화폐였습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여러 종류의 철제 무기, 농·공구류, 馬具(마구)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갑옷과 투구, 독특한 모양의 말 재갈 등 고도의 전문적 기술로 제작된 철제품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가야사회의 역동성과 선진성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인 동시에 酒村面 일대가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 제철은 오늘의 반도체처럼 최고의 첨단산업이었습니다. 「해양왕국 가야」, 「쇠의 왕국」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철기유물 하나만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철정입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주변의 풍부한 鐵鑛床(철광상)을 이용하여 제철업을 발전시켰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이미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기원후 3세기 이후에는 樂浪(낙랑)과 帶方(대방), 馬韓과 東濊(동예), 그리고 왜국에 수출했다. 『금관가야는 「日本書紀(일본서기)」에 「須那羅(수나라)」 또는 「素奈羅(소나라)」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쇠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三國史記」에 「金官國」이라고 기록된 것도 「쇠를 관장하는 나라」라는 의미예요. 금관가야는 농업국이 아니라 古代의 일류 공업국이며 東아시아 최초의 해양국이었습니다. 지금 김해평야의 구릉이나 산은 가야시대엔 섬이었고, 지금의 평지는 바다였습니다. 농토가 그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이름 「金海」도 「쇠의 바다」라는 뜻 아닙니까』 ―가락국이 「철의 나라」로 부상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기원전 108년, 漢武帝(한무제)가 2년에 걸친 침략전쟁 끝에 위만조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때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대거 김해로 내려왔고, 그중에는 제철기술자들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위만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적어도 당시 세계 최강 漢武帝의 군대에 맞서 장기간 방어전을 전개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당한 제철기술을 보유했을 겁니다. 그런 집단인 만큼 김해·부산·양산 등 낙동강 하류 유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철광산을 그냥 둘 리 있겠습니까.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류를 샘플링해 포항제철 산하 산업과학기술연구소에 성분분석을 의뢰했는데, 바로 양산의 勿禁(물금)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이라는 해답이 나왔습니다』 ―전성기 가야인은 어떤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4~5세기의 가야인들은 잘 먹고 잘 살았고, 문화적으로도 한반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이었을 겁니다. 철정의 무역으로 거금을 벌어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선진지역인 중국에서 최신 패션과 기호품을 바로바로 들여왔겠죠. 당연히 사치풍조도 만연했을 거예요』 가락국의 최전성기는 3세기부터 4세기까지 100여 년간이었다. 북방의 강력한 군사체제를 도입했고, 철을 매개로 광범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富國(부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4세기 중엽 이후 격동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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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의 영남지역에서는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兩大 정치적 연합체가 결성되어, 두 진영이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열한 영토확장 전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국가 간의 경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국가 간의 결연과 외교전을 유발했고, 결국 대항세력인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의해 서기 400년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남하시켜 가야의 세력을 꺾어 버렸다. 고구려의 남침에 의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는 더 이상의 발전을 못 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경자년(서기 400년) 南征(남정)은 한반도 남부에 정치·군사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던졌습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 勢를 업고 낙동강 유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합니다. 그 결과 낙동강 東岸에 위치한 釜山지역의 新羅化(신라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부산지역은 4세기까지 김해지역과 동일한 금관가야 문화권이었다. 5세기 이후 금관가야는 國運 위축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과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입니다. 복천동 고분들 가운데 4세기 무덤까지는 伽倻系(가야계) 유물이 출토되지만, 5세기 이후 무덤에는 차츰 新羅系(신라계) 유물로 바뀝니다, 고리가 달린 큰 칼(三累環頭大刀·삼루환두대도)과 金銅冠(금동관) 등 威勢品(위세품)에 이르기까지 신라系 유물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김해에서도 5세기 이후의 王墓級(왕묘급) 또는 지배자층의 무덤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광개토왕 發 파문이 東아시아 세계에 일파만파로 번져 나간 것입니다. 우선, 신라를 압도하던 금관가야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어 금관가야를 문화적 젖줄로 삼아 오던 일본이 백제에 의지하는 등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야 세력이 대거 일본으로 몰려가 지배세력화했던 것입니다. 금관가야의 세력은 일본 열도로만 이동한 것이 아닙니다. 낙동강 물길을 이용해 합천·고령·함안 등지로 이동함으로써 대가야(고령-합천)·아라가야(함안)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금관가야는 더 이상 발전을 못 한 채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 532년 仇亥王(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왜 금관가야는 再起(재기)에 실패했던 것일까. 『금관가야는 철로 인해 융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로 인해 쇠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철의 국제가격이 급락했기 때문입니다. 5세기에 들면 일본 열도에서도 제철기술을 배워 자국의 풍부한 철광산에서 원료를 채취해 자체적으로 철 생산에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금관가야의 철정을 수입해 가지 않았습니다. 가야 철정을 수입해 가던 낙랑과 대방도 4세기 초엽에 고구려·백제에 의해 멸망당해 금관가야로서는 북쪽 시장도 이미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 伽倻 전성기의 지배층의 무덤―大成洞 고분 다시 김해 시가지로 되돌아와 아파트 숲 사이에 위치한 사적 제341호 대성동 고분군(대성동 434번지)을 살폈다. 1990년에서 1991년까지 3차에 걸쳐 경성大 박물관이 발굴한 떼무덤이다. 특히 이곳 목곽무덤에선 풍성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했던 가야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後漢代의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파형동기 등도 출토되어 古代 김해가 韓·中·日 삼국 간 문물교류의 중심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구릉 위에 설치되어 있는 露出(노출) 전시관에 올랐다. 노출 전시관 안에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최초의 王墓라 할 수 있는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가 발굴 당시의 상태로 복원·전시되고 있다. ![]()
대성동 고분군을 발굴한 경성大의 申敬澈(신경철·現 부산大 교수) 교수는 『대성동 고분군의 「의도적」 무덤 파괴 현상은 금관가야 지배세력의 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이곳의 주인공들이 3세기 말 북방계 기마민족에 의해 대대적으로 교체되었고, 새로 등장한 기마민족들이 금관가야의 문을 연 주인공이라고 주장했다. 申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3세기 말 이전의 대성동 무덤 유물이 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고, 무기류가 빈약해 대체로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狗耶韓國(구야한국)」 사람들일 기능성이 높은 데 비해 3세기 말 이후 무덤에서는 철제 창검·철제 갑옷·기마용 馬具·청동솥(기마민족 특유의 취사도구) 등이 나온 데다, 무기를 구부려서 매장하고 습속 등으로 보아 북방계 사람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세기 말, 김해 지역으로 「갑자기 남하해 온 기마민족」의 정체는 무엇일까. 申교수가 주목한 집단은 滿洲(만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夫餘族(부여족)이다.
이에 대해 林孝澤 교수는 대성동 고분군과 비슷한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 양동리 고분군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반론을 편 바 있다. 林교수의 반론 요지는, 申교수가 파악한 무덤 파괴 현상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이미 그전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났고, 그 후에도 나타났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지배세력 교체에 의한 의도적인 파괴가 아니라 가야인이 지닌 장례풍습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申교수의 주장은 1948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東京大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설」의 논리구조와 유사하다는 국내 학계의 공박을 받았다. 「기마민족 정복설」의 골자는 부여족이 남하하여 가야를 거쳐 일본 규슈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와 규슈에 걸친 倭韓연합왕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설」은 일본에서는 明治維新(명치유신) 이래의 「皇國史觀(황국사관)」을 부정한 획기적인 학설로 자리매김되었지만, 우리 학계에선 「제2의 任那日本府說(임나일본부설)」로 비판받았다. ![]()
왜국이 4세기 말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근 200년 동안 가야 지역을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일본 학계에서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主流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고교 교과서에는 고구려 廣開土王의 공적을 찬양하는 丙申(396년)條의 碑文을 「근거」로 내세워 『4세기 말 倭(왜)의 韓國 진출의 반증으로 되어 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林孝澤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게임 끝」이다』라고 말했다. 『임나일본부설이 성립하려면 가야의 중심이었던 김해 지역의 어딘가에, 특히 양동리·대성동 고분군에서 당시 왜국의 墓制(묘제)인 前方後圓墳(전방후원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김해 지역 어디에서도 전방후원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더 이상 논쟁의 가치가 없는 완전한 허구입니다』 「임나일본부 유적 찾기」는 패망(1945년) 前 일본학계의 큰 과제가 되었다. 東京大의 구로이다(黑板勝美) 교수는 합병 초기부터 김해의 會峴里·參山里·內東里 고분군과 酒村面·長有面 일대를 조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1917년부터는 경상도 전역으로 조사대상을 넓혔다. 이 조사에 일본의 대표적 학자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참가했다. 그 결과보고서 格인 1921년의 「조선의 古蹟조사」(민족과 역사 제6권)에서 요코다(濱田耕作) 교수는 『저 任那라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先入見(선입견)은 즉각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
대성동의 29호 목곽묘는 구릉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길이 9.6m, 너비 5.6m. 서쪽 편으로 부장칸을 만들어 단지 48개를 나열해 두었고, 주검이 놓인 바닥에는 철정 91점을 깔았다. 중간 부분에는 청동솥 1점이 놓여 있고, 그 밖에 철촉 304점, 大刀 3점, 도끼 8점, 낚싯바늘 3점, 구슬과 장신구류 등이 발굴되었다. 39호 목곽묘는 主槨(주곽)과 독립된 副槨(부곽)을 갖추고 있다. 주곽에는 남쪽과 서쪽 편으로 토기를 투구 2점과 갑옷이, 주검이 놓인 중앙에는 목가리개·허리가리개 등 갑옷 부속구와 대도 등이 놓여 있다. 그 밖에 통형동기와 철창, 2구의 殉葬人骨(순장인골) 등이 발견되었다. 殉葬(순장)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행하던 장례풍습이다. 申敬澈 교수는 한국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古代 종족들 중 당시까지 순장 습속을 유지했던 것은 夫餘族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三國志 위지 동이전에는 서기 285년 夫餘族이 鮮卑族(선비족)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沃沮(옥저: 함경도)로 피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부여족 主力의 근거지 이동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사료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즉, 옥저로 피란했던 부여족들이 해상 루트를 통해 김해 지역으로 再이동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어떻든 대성동의 많은 목곽묘에서는 주인공의 주위나 발치에 배치된 3~5구의 순장인골이 확인되었다. 그 부곽에는 토기를 가득 채웠고, 토기 사이에 정교한 철제 말 재갈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가락국의 지배층이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었음을 말해 주는 물증이다. 1993년 이 구릉 기슭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박물관 관람은 「내일의 일」로 미루고 곧장 서상동 수로왕릉으로 발길을 돌렸다. ![]()
수로왕릉 대문은 2층 누각의 모습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면 수로왕의 신위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숭선전이 보인다. 마당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막아선다. 지붕 하나에 문 세 개가 나란히 달려 있다. 가운데 문 위에 「納陵正門」(납릉정문)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수로왕릉는 「納陵」으로 불린다. 납릉정문의 문설주 위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코끼리의 긴 코와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며 그 사이에 있는 탑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許왕후에 의해 가야에 전해졌다는 유명한 雙魚文(쌍어문)이다. 쌍어문은 古代 인도 동북부에 존재했던 아유타국(아요디아 王國)의 國葬이었으며, 지금도 그 지역의 상징적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1975년 아동문학가 이종기씨의 현지답사로 처음 확인되었다. 그러나 許왕후의 出自문제는 그 후에도 논란이 되어 왔다. 아유타국의 멸망연대(A.D. 20년)가 허황옥의 결혼연령과 맞지 않는다는 점, 아요디아에서 김해까지 5만여 리를 A.D. 48년 5월에 출발해 2개월 남짓한 7월27일에 도착한 점 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명을 위해 고고학적 답사·문헌연구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A.D. 20년경에 멸망한 아요디아 왕족의 일부가 중국 양자강 상류 사천성 安岳縣(안악현) 지방에 이주해 許씨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악현의 許씨들은 농민반란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자 양자강 중류의 武漢(무한)으로 다시 이주했어요. A.D. 48년, 許黃玉은 종자 20여 명을 이끌고 양자강을 내려와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김해에 상륙했습니다. 수로왕비릉에는 「가락국 수로왕비 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는데, 「普州」는 사천성 안악현에 대한 後漢 시기의 이름입니다』 수로왕릉 경내의 박물관에는 「金海府內地圖(김해부내지도)」가 걸려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조선 후기(1800년경)에 군사용으로 제작된 지도로서 당시의 김해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수로왕릉이 위치한 서상동 일대에 夫巖(부암)·姑巖(고암)·浮石(부석) 등 7개의 고인돌이 표시되어 있는 점, 봉황대와 대성동 구릉의 능선을 따라 토성이 둘러져 있는 점 등도 눈길을 끈다. ![]() 김해의 지형을 보면 神魚山地가 배후를 이루고, 前面에는 낙동강이 두 갈래로 분류해 남해로 흘러 들어간다. 강의 兩岸에는 낙동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넓은 삼각주가 분포한다. 하지만 이러한 삼각주는 19세기까지 서너 개 정도의 소규모 河中島(하중도)로 나뉘어 있었다. 1860년대에 金正浩(김정호)가 제작한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를 보아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지금보다 낙동강의 강폭이 훨씬 넓었다. 지질조사에 의하면 1300년 전에는 지금의 해발 2m 이하의 육지는 모두 바다였다. 따라서 현재의 김해평야가 가야 시기에는 대부분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지 동이전 倭人條(왜인조)를 보면 당시 낙랑·대방에서 출항한 배가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항해, 狗耶韓國(구야한국: 김해)에 기항했다가 대한해협을 건너 對馬島-이키島를 거쳐 왜국으로 갔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가락국의 선박들은 南韓 최장의 낙동강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는 상주, 서쪽으로는 진주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김해는 중국 동해안, 한반도 서북지방, 경상도 내륙지방 및 왜국 등을 연결하는 동북아의 허브港이었다. 필자 일행은 古代 국제 허브항의 모습을 느끼기 위해 西낙동강을 따라 舊김해군 駕洛面(가락면: 현재 부산시 강서구 가락동)으로 내려갔다. 가락동 포구는 소형선박 몇 척이 정박하고 있고, 그 위로 겨울철새들이 한가하게 하늘을 날아다닐 뿐이었다. 가락동 포구 뒷산은 임진왜란 때 왜장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쌓은 倭城 터가 남아 있다. 가락동에서 다리를 건너 강서구 대저동(舊김해군 대저읍)으로 건너갔다. 멀리 김해국제공항 상공으로 점보 여객기 한 대가 치솟고 있었다. 필자 일행은 김해시청 앞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우리 일행 셋은 뿔뿔이 헤어졌다. 李泰勳(이태훈) 사진기자는 다른 사진 취재를 위해 전북 고창으로 떠났다. 필자는 혼자 神魚山 銀河寺(은하사)로 출발했다. 신어산 은하사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만, 10여 년 전과는 달리 이제는 자동차 도로가 잘 닦여 있다. 은하사는 許왕후가 시집올 때 동행한 오빠 長遊和尙(장유화상: 허보옥)이 창건한 절로 전해 오지만 확인할 만한 기록은 없다. 은하사 뒤편의 신어산 정상부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타고 온 승용차를 절 마당에 세워 두고 대웅전으로 올라갔다. 대웅전의 벽화 밑 須彌壇(수미단)에는 물고기 4마리가 돋을새김(양각)되어 있다. 세 마리가 東向하고 한 마리가 西向하는 구도이다. 대웅전 답사를 끝내고 내려와 「신어산 찻집」에서 곡전차를 맛보았다. 신어산의 겨울밤이 빨리 다가왔다.
▣ 伽倻문화의 학습장―大成洞고분박물관 ![]() 1월26일 오전 9시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지붕이 매우 특이하다. 宋문화재연구원은 『지붕 모습은 여성의 性器(성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2003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입체모형과 영상자료, 실물 크기의 무덤 복원, 가야인의 모습과 생활상의 복원, 가야무사들의 무기와 갑옷 등 다양한 보조자료를 통해 가락국의 사회와 문화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고 있다. 눈길을 끈 것은 금관가야 무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高位 무사는 예안리 12호 고분에서 출토된 北方系 인골을 토대로, 下級 병사는 예안리 41호 고분의 南方系 인골을 토대로 하여 복원되어 있다. 4세기 이전의 삼한 시기의 갑옷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지만, 4세기 무렵부터는 철제 갑옷이 만들어졌다. 철제갑옷은 비교적 큰 철판을 재단해 만든 板甲(판갑)과 비늘 모양의 小札(소찰)로 이뤄진 비늘갑옷(掛甲·괘갑)으로 구분된다. 대성동 2호분과 양동리 78호분에서 출토된 판갑은 木甲이나 皮甲을 철제로 변화시킨 것이다. 대성동 3호분 등지에서 발굴된 비늘갑옷은 北方 기마민족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갑옷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철제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중간소재는 鐵鋌(철정)이었다. 당시 철정은 최고의 첨단제품이었으며, 화폐로도 사용되었음은 앞에서 거론했다. 당시 금관가야製 철정의 최다량의 수입국은 왜국이었다. 그렇다면 왜국은 철정과 철기를 수입하면서 금관가야에 어떤 대가를 지급했던 것일까. 최근 역사·고고학계에서는 그 대가가 노동력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당시 철기 제작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冶鐵(야철)·製鍊(제련)·精鍊(정련)·鍛冶(단야) 등의 여러 제작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가야史 전공의 홍익大 김태식 교수는 「後漢書」에 「倭王이 生口(생구:사람) 160명을 가락국에 보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왜국이 금관가야에 인력을 공급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라는 것이다. 이런 교역방식은 발굴유물로도 증명되고 있다. 김해 지역에는 「와지키」라고 불리는 倭系土器(왜계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왜국 서민들이 사용하던 용기로서 당시의 국제교역 품목이 아니었다. 따라서 와지키는 금관가야에 건너온 왜국의 노동자들이 사용한 생활토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철제투구도 갑옷과 세트를 이루면서 출토되었다. 또한 말 갑옷이나 말 투구도 함께 사용되었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군사문화의 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금관가야의 무기체계는 4세기에 들어 혁신적 발전을 이룩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4세기의 창은 3세기의 창보다 훨씬 살상력이 높은 구조이다. 창 끝은 3세기의 것보다 훨씬 뾰족한 다이아몬드型이다. 4세기의 화살촉도 날카로운 삼각형으로 모의실험 결과 종래의 것보다 관통력이 높았다.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무기·무장 체계가 갑자기 혁신적 변화를 일으킨 까닭은 무엇일까. 4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남부지역에서는 신라와 금관가야가 死活을 건 패권전을 전개한다. 대성동 고분군과 양동리 고분군을 보면 금관가야에서는 4세기 초엽에 전문 전사집단이 나타난다. 금관가야의 개마무사를 보면 철제 무기·갑옷·투구·馬具에서 신라를 압도하고 있다. 다만 금관가야는 신라에 비해 영토국가로서의 발전이 늦어 병력의 수에서 열세였다. 병력의 확보는 절박한 요구였다. 금관가야는 그 해법을 왜국의 노동인력에서 구했다. 당시 왜국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國防大의 스즈키 야마시로 교수는 『당시 금관가야가 철정과 철제품의 대가로 왜인들을 대거 傭兵(용병)으로 고용했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따르면 서기 399년 倭가 신라에 쳐들어와서 城과 저수지를 마구 무너뜨리자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인 400년 步騎(보기) 5만 명을 보내 왜병을 소탕했다. 이때부터 금관가야와 신라의 군사력은 역전되었다. 금관가야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은 처절했다. 그것이 대성동 57호 무덤에서 나타난다. 이 무덤에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女戰士(여전사) 인골이 발견되었다. 병력의 열세였던 금관가야는 여성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렸던 것 같다. ![]()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이어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이 박물관에는 경남·부산지방의 先史(선사)시대에서 가야 성립 이전의 변한, 그리고 전기 가야를 대표하는 금관가야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적 흐름을 살필 수 있다. 고래잡이 船具(선구), 발찌와 같은 장신구, 왜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黑曜石(흑요석)제 화살촉 등 신석기 유물과 無紋土器(무문토기), 철로 만든 무기와 농·공구류, 당시의 영혼관을 보여 주는 오리 모양 토기 등은 변한시대의 유물이다. 이와 더불어 화려하게 만들어진 철제 무기·갑옷 등 금관가야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김해 양동리에서 발견된 칼자루꾸미개(2세기), 수정목걸이(2세기), 청동세발솥(3세기)과 대성동에서 발굴된 화로 모양 토기(4세기), 김해 퇴래리에서 발견된 판갑옷(4세기) 등이 금관가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함안·고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阿羅(아라)가야·大加耶 등 가야의 문화적 독창성과 변화상도 관찰할 수 있다. 아라가야 전시장에서는 새 모양 장식 미늘쇠와 阿羅토기의 특색을 보여 주는 굽다리접시 등이, 대가야 전시장에서는 금동으로 장식한 투구와 다양한 말 부속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했다고 해서 군사적 약체였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가야는 뛰어난 철기문화를 보유한 국가였다. 국립김해박물관에 가보면 용솟음치는 가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가야고분에서는 유별나게 많은 철제 갑옷과 무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전쟁도구는 신라나 백제의 그것보다 선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미국의 여성 동양사학자 존 코벨(1910~1996)은 그녀의 저서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에서 『한국의 삼국시대는 500년간 번영했던 가야를 포함한 四國時代로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50여 년간 일본의 古代 미술을 연구했던 코벨 박사는 「쇠의 바다」 김해에서 건너간 가야인의 일본 정벌을 고고미술학적 관점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그녀는 『가야는 東아시아 세계에서 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한 선진 해양국가』였으며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나 르네상스 시대의 제노아처럼 인근의 도시국가들(제국)과 해운연맹을 맺고 있었다』고 했다. 발굴유물로 판단하면 전성기 가야연맹의 판도는 오늘날 한국 제2의 도시 부산과 제3의 도시 대구를 아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 북부지역인 상주·영주, 서부지역인 진주·하동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왜 가야는 끝내 신라에 병합당하고 말았을까. 가야의 城邑국가들은 해양국가가 지닌 개방성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처럼 광역 영토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가야연맹체의 초·중기에는 금관가야가, 말기에는 대가야(고령-합천)가 맹주의 위치에 있었지만, 모두 강력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가야연맹체의 本家인 금관가야의 지배세력 중 상당수가 일본의 발상지인 규슈(九州)로 집단 이주했던 것이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룰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인구학·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서기 700년 현재 일본인의 80~90%가 渡來人系라고 발표한 東京大 나니하라(埴原和部) 교수의 학설, 일본 天孫降臨(천손강림) 신화의 주인공이며 일본 天皇의 직계조상인 니니기가 가라구니다케(韓國嶽)에 올라 『韓國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는 「古事記」의 기록 등은 가야와 일본 황가의 혈연 관계를 암시해 주는 단서들 중 일부이다. 더욱이 니니기 탄강신화는 수로왕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며, 탄강 장소인 「쿠지후루(久土布流)」는 龜旨峯(구지봉)의 일본식 표현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호에서 거론하겠지만, 당시 일본 열도로 건너간 가야인들이 가장 선호한 출발항은 海流(해류) 관계상 김해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古事記」에 기록된 「일본의 根國(근국: 뿌리의 나라)」은 가야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학계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지해 東아시아 세계로 뻗어나간 가야의 역사를 정면에서 다룰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
출처 : 우리문화답사회
글쓴이 : 박수성-무위-이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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