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기념물 제128호 장수 삼봉리 가야고분군 (長水 三峰里 伽倻古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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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북 장수군에선 6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굴돼 화제를 모았다. 발굴을 담당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에서
가야토기를 비롯하여 철제마구, 꺽쇠, 교구, 환두대도 등 피장자의 위상이 매우 높았었음을 짐작케 하는 최상급 가야유물이 출토 되었다.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백화산 자락에 자리한 가야 수장층의 묘역으로 직경 20~30m 내외의 대형고분 2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 특이한 건 고분 형태나 출토품이 대다수 가야 양식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백제권역으로 인식되는 전북에서 영남 쪽에 자리한 가야의 문화유적이 나오는 건 상식 밖이다. 당시 이 지역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전북 장수군 삼봉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을 하늘에서 촬영한 사진(위). 이번에 발굴된 지름 20m가 넘는 돌덧널무덤 대형고분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봉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 문명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아래)도 출토됐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 백제 틈새를 노린 대가야의 야망인가
학계에서 진안고원이 펼쳐진 전북 진안 장수의 동부 산악지역이 가야 유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6년 발굴 조사에서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이 가야계 ‘돌덧널무덤(석곽묘)’으로 드러난 것. 호남은 백제 또는 마한의 땅이라는 고정관념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변방 들러리로 취급되던 가야가 다른 3국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던 흔적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보면 이 지역은 6가야 가운데 대가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가야 연맹은 초반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위세를 떨쳤지만, 4∼6세기엔 경북 고령에서 출원한 대가야가 맹주로 군림했다. 가야연맹은 신라와 대결하면서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가 전북으로 진출한 결정적 계기는 5세기 초반에 일어났다. 국력이 강성해진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면서다. 예나 지금이나 강은 국가의 주요 교통로. 강이 없으면 외부와의 교역이 불가능하다. 대가야는 낙동강 대신 이 지역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장수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북지역이 곧장 가야 땅으로 편입되진 않았다. 상당한 힘을 지녔던 토착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야도 굳이 복속시키기보단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 교수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형태로 범(汎)가야 연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지만 백제는 왜 가야의 진출을 묵인했을까.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와 겨루느라 여력이 없었다. 백제 입장에서 동부 산악지역은 거리는 가깝지만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에 둘러싸여 직접 통치가 불편했다. 대가야가 일정 지분 보장을 약속해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높다.
○ 독립국가를 꿈꿨던 가야계 소국일 수도
장수 일대가 단순히 가야 영향권에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국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학계에선 장수와 진안을 아우르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는 시각은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 여기서 더 나아가 ‘가야계 소국’이나 ‘장수가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최근 대두하고 있다.
이 지역을 국가로 보는 근거는 엄청난 고분의 양과 규모다. 중대형고분 200여 기가 군집을 이루는 곳은 기존 가야 영역에서도 찾기 힘들다. 왕족이 아니라면 이 정도 무덤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단 설명이다. 고분에서 발견된 ‘꺾쇠’도 이를 뒷받침한다.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목관의 부재인 꺾쇠는 왕실 무덤에서나 발견되는 유물”이라며 “이 정도 규모와 돈을 들인 고분이라면 낮은 단계의 고대국가는 형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봉수(烽燧) 역시 중요한 근거다. 현재까지 이곳 주위에선 모두 42개의 고대 봉수 유적이 확인됐다. 봉수란 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시설로 이 지역 봉수로의 도착지가 장수다. 한 국가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곽 교수는 “장수가야는 세력은 약했을지언정 백두대간 영호남의 핵심 관문인 육십령(六十嶺)을 차지하고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 같다”며 “고구려에 패해 남쪽으로 물러난 백제가 6세기 후반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강조했다. (이상 2013.02.28 동아일보 기사)
○장수는 봉수(烽燧)의 왕국
백두대간이 가야의 서쪽 자연경계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인 장수군 일대에서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의 존재가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진안고원에서 유일하게 장수군에만 가야계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야계 고총이 200여 기 정도 남아있다. 장수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장수가야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봉수왕국'이다.
봉수란 낮에는 횃불과 밤에는 연기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왕릉 못지않게 가야계 왕국의 존재여부를 방증해 주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 자료이다.
진안고원 일대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80여 개소의 봉수가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봉수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륙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입지를 두었다. 그리고 산봉우리 정상부에는 대체로 장방형의 토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둘러놓았다.
그런데 봉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어딘가이다. 충남 금산군과 전북 무주군·진안군·임실군, 남원시 운봉읍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모두 장수군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5대 봉수로가 서울 남산에서 합쳐지는 것과 똑 같다. 전북 동부지역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들 봉수의 운영주체는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우리나라에서 산성 및 봉수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진안고원이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줄곧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고원을 장악하려는 삼국의 정치·군사적인 목적과 관련이 깊다. 제일 먼저 백제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웅진 천도 이후 한 동안 정치적 불안으로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이를 틈타 장수가야가 백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봉수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 무렵 신라도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무주군 무풍면 일대를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진안군과 금산군까지 신라의 영향권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진안군과 무주군, 금산군 일대에서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백제와 가야,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쳤다. 그러다가 장수가야가 백제에 복속되었고,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진안고원이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백제의 수도와 진안고원을 왕래하던 내륙교통로가 끊긴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가야계 왕국으로 장수가야의 발전과 삼국의 각축장으로 진안고원이 막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삼국시대의 봉수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단한 지표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오늘도 전북 동부지역 봉수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도전과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운봉고원의 야철지와 함께 장수가야의 봉수도 전북과 전북인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출처: 2012년 9월에 발표한 곽장근 교수의 글)
아래는 장수군의 홈피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역내 분포하고있는 삼봉리 가야고분에 관한 안내이다.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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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16,087㎡(9필지) |
지정(등록)일 | 2013.11.15 |
소 재 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산108-1 일원 |
시 대 | 삼국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공유, 사유 |
관리자(관리단체) | 장수군 |
상 세 문 의 | 전라북도 장수군 산림문화관광과 063-350-2224 |
삼봉리 고분군에 대한 2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내부에서 다양한 가야토기를 비롯하여 철제마구, 꺽쇠, 교구, 환두대도 등 피장자의 위상이 매우 높았었음을 짐작케 하는 최상급 가야유물이 출토 되었다.
또한, 한 봉토 내에 주곽과 부곽이 배치된 다곽식의 형태도 파악되었으며, 주곽과 부곽 모두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로 확인되었다.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던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타 지역의 가야 소국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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