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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5> 부산의 전쟁고아 - 넝마주이에서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5> 부산의 전쟁고아-넝마주이에서 근로재건대원으로

왕초·군부정권에 착취당하던 고아들 '전포동 개미회'로 자립 이루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4-04-23 19:45:38
   

행복산보육원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미군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수십 개의 보육시설이 설립됐으나 모든 고아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한국전쟁에 부모 잃은 아이들
- 왕초 손에 붙들려 넝마주이로
- 하루종일 폐품·종이 주워오면
- 판매 수익금의 삼분의 일 뜯겨

- 5·16 정변 일으킨 군사정부
- 이들을 부랑자·범법자로 규정
- 집단 수용소에 밀어넣은 뒤
- 황무지 개간·도로 확장에 투입

- 자립·불우 청소년 돕기 목적
- 1969년 80여명 '개미회' 창립
- 한때 일 년에 1억 원 모았지만
- 도시개발에 밀려 종적 사라져

■부전천 다리 아래 양아치 마을

   
1951년 부산 부민동에 있었던 행복산보육원 내 부산무료소아과 병원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아이. 부산시 시민공원추진단 제공
2011년 부산 부산진구 범전동 일대에서 구술조사를 하다 한 통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여기에 양아치 마을이 있었어. 양아치가 다리 밑에 집을 짓고, 사람들 못 들어가게 했는데, 무서운 주먹패가 있었지." 양아치는 동냥아치, 거지, 부랑자, 넝마주이 등을 일컫는 속칭이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1970년대까지 하야리아 부대 담장 바깥으로 부전천이 흘렀다. 넝마주이들이 개천 아래 수십 채의 움막을 짓고 모여 살면서 양아치 마을이 됐다. 그는 양아치 마을의 왕초가 고아들을 시켜 폐지를 줍게 하고, 이웃의 살림살이를 훔쳐오게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사를 더 해보니 부전천 뿐만 아니라 동천과 전포천 일대 그리고 황령산 기슭에도 폐품을 주워 살아가는 이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일명 넝마주이 촌이다. 부산 사람은 넝마주이를 '강구쟁이'라고도 했다. 넝마주이들은 강구(광주리의 경상도 사투리)를 지고 다니면서 폐품을 주웠기 때문에 '강구쟁이'라 부른 것이다.

그 통장의 말처럼 넝마주이 상당수는 고아였다. 한국전쟁 이후 부모를 잃고 부산으로 내려왔던 고아들은 이곳저곳을 헤매다 왕초들에게 잡혀 넝마주이 촌으로 끌려갔다.

■전쟁과 고아, 그리고 보육원

한국전쟁은 300만 명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어른들이 죽고 다친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됐다. 전쟁 중에는 수십만 명의 피란민이 부산에 몰린 터라 어른들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국제시장 인근에서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등을 하는 고아들은 그래도 나은 셈이었다. 대부분 깡통 하나를 들고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한 사람들이 보육원 설립을 추진했다.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매실보육원이 대표적 사례이다. 평양 출신의 부자였던 최매실 씨는 부산에 피란 왔다가 고아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전 재산을 털어 초량동에 보육원을 건립했다.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순식간에 100여 명의 고아가 몰려왔다.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재산이 금방 동나자 그녀는 하야리아 부대에 찾아가 군수품을 지원받았으며, 직접 밭을 일궈 농사를 짓기도 했다. 1954년께 당감동으로 이전한 후 미군의 도움을 받아 새 건물을 지었다.

전쟁 이후 UN과 종교 재단, 복지단체들이 수십 개의 보육원을 부산에 설립했으나 모든 고아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보육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이들이 많았으며, 답답한 보육원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넝마주이, 왕초의 수하에

넝마주이가 된 고아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 세계에서는 왕초들의 폭력과 갈취가 일상이었다. 거지나 넝마주이들의 우두머리를 '왕초'라 부른다. 왕초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싸움질이 뛰어나야 했다. 항간의 소문에 김두한을 동생으로 삼고, 이정재가 존경했다는 거지왕 김춘삼도 주먹왕이었다. 왕초들은 대개 30여 명의 넝마주이를 거느리면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했다. 왕초들은 불우한 청소년들을 끌어들여 앵벌이를 시켰고, 걷어온 폐품을 팔아 호의호식했다.

 

1962년 경찰의 공식 통계를 보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하는 넝마주이가 3490명이었다. 부산이 1180명으로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넝마주이들이 하루에 100근 정도의 폐품을 수집했다. 당시 이를 제지공장에 팔면 820환을 벌었는데 이 가운데 삼분의 일을 왕초에게 바쳐야 했다.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린 왕초들은 넝마주이가 벌어오는 돈으로 중류 계층 이상의 생활을 누렸다. 이런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왕초들은 주먹을 휘둘렀다. 1950년대 후반 부산에서는 전쟁과 피란의 상처가 여전했으며, 돌아갈 가정이 없는 고아들은 왕초 수하에 남아 있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유명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벨기에 유학시절 한국인 학생으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전쟁고아들이 길을 헤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계기로 그는 1961년 서구 암남동에서 구호사업을 시작했다. 초량동 뒷골목과 국제시장 등을 돌면서 버려진 고아들을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왔다. 1965년 보육원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700여 명의 고아가 한 식구가 됐다. 이따금 고아들이 왕초를 다시 따라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럴 때면 소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넝마주이 촌으로 들어가 아이를 구해오곤 했다.

■근로재건대 대원으로 변신

5·16 이후 넝마주이들에게 칼바람이 몰아쳤다. 군사 정부는 넝마주이들을 부랑자와 범법자로 인식하고, '해체와 교화'의 칼을 뽑아들었다.

1961년 6월 부산에서는 넝마주이들을 조사하여 집단 수용시킨 후에 제복을 주고, 명찰을 달게 했다. 손에는 삽과 괭이를 쥐여주었다. 동래와 구포 등 황무지 개간 사업에 이들을 편성시키고, 괴정동 도로 확장 공사에서 노역하게 했다. 자활, 재건, 재생의 이름이 붙었지만, 왕초의 폭력을 대체한 건 국가의 폭력이었다. 이들은 군대 조직과 마찬가지로 여러 소대에 배치되었으며, 부대장들의 통솔을 받았다. 군대의 엄한 규율로 다스렸으므로 수용소를 무단이탈한 이들에게 심한 물리적·제도적 폭력이 가해졌다.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있었다. 개인통장을 지급하여 국토건설 사업장에서 노역한 급료를 입금해줬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구호양곡과 부식비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1962년 5월 정부는 전국의 넝마주이를 모아 근로재건대를 발족했다. 넝마주이들이 폐품을 수집하기 위해서 관할 시청에 등록하고, 근로재건대에 반드시 소속되어야 했다. 미등록한 넝마주이는 처벌을 받았다. 폐품을 주워 간신히 끼니를 때우며 사는 넝마주이도 등록해야 하는, 통제와 감시 사회가 도래했다. 이들은 관할 경찰서에서 운영하는 집단 수용소에서 통제된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넝마주이들이 비로소 떳떳한 직업인이 되었으며, 왕초의 착취에서 벗어나 꿈을 담은 저금통장까지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를 받는 넝마주이가 진정한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1억 원을 저축한 전포동 개미회

개미회는 넝마주이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개미회의 신조는 '개미처럼 일하고 개미처럼 돕자'였다. 개미 할아버지로 통하는 마쯔이가 사회 밑바닥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기치로 일본에서 넝마주이들을 모아 처음 세웠다. 1969년 부산 전포동에서도 불우한 청소년을 돕고 사회적 냉대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로 개미회가 창립됐다. 80여 명의 개미회 회원들은 전쟁고아가 대다수였다. 1974년은 전포동 개미 회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해였다. 휴지와 폐품을 모은 뒤 제지공장 등에 팔아서 일 년 만에 1억 원이 넘는 돈을 저축했다.

   
이렇게 화제가 된 전포동 넝마주이들도 1970년대 중반부터 자취를 감쳤다. 강력한 도시 개발 정책에 따라 넝마주이 촌은 흉물로 인식되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뒤 넝마를 주워 살았던, 사회적 멸시와 숱한 폭력을 이겨냈던 그들도 도시화 앞에서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