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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항의 역사

[근대] 부산항의 역사 6 (부산)

출처: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0&no=468

부산항의 역사 6

개항기 2

개항후의 제도변천

일본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로 바뀐 왜관터

「조·일 수호조규부록」과 「조·일 무역장정규칙」에 따라 동래부사 홍우창(洪祐昌)과 일본관리관 近藤眞鋤 사이의 『부산 일본인 전관거류지(釜山 日本人 專管居留地)』 설정에 관한 실무회담이 1876년 12월 12일 개최되었다. 이때 체결된 조약이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인데 1877년 1월 30일에 조인되었다. 이로써 초량왜관이라 일컬어져 용두산 주위에 있었던 왜관터 약 11만평은 일본인이 관리하면서 거주하는 거류지가 되었다. 조선에서 외국인에 땅을 빌려주는 조계설정의 맨 처음도 이곳이 되었다.

그 내용으로 ① 면적은 약서부도(約書附圖)로 표시하였는데 서남(西南) 220 칸(間)·서북 279칸 반·동북 340칸 7홉 5작·동남 415칸 2홉 5작 가량이었다. ② 거류지(조계지 :租界地) 지조(地租)는 1년 일화(日貨) 50원(圓)으로 하고 1년 전에 예납(豫納)하도록 하였다. ③ 기타의 지기(地基)와 도로 그리고 구거(溝渠)는 일본정부가 보호 수리하고 배가 닿는 선창은 조선정부가 보수하도록 하였다.

1908년 6월에는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영대차(永貸借)에 관한 지소대도규칙(地所貸渡規則)」이 체결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전관거류지 안의 땅은 일본인에 한하여 차용(借用)할 수 있고, 차용자는 그 권리를 일본인에 한하여 양도 또는 대여(貸與)할 수 있다는 규정이 되어 일본영토와 다름없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를 거듭할 수록 부산으로 오는 일본인 이주자가 많아졌다. 그 이주자들은 명치유신 이래 급격한 정치·경제의 재편성 과정에서 탈락한 상민과 몰락한 사족(士族)층이었다. 지역적으로는 대마도를 위시하여 큐슈(九州)지방 야마구찌현(山口縣) 일대의 사람이 많았지만 오오시까(大阪)와 도오쿄(東京) 상인도 있었다. 명치정부는 이들 후진지역의 몰락분자와 불평분자, 그리고 상재에 밝은 상인들을 조선으로 이끌어 내어 국내의 모순과 내정의 불만과 외화획득으로 눈을 대외에 돌리게 하려는 이중적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일본 정부의 비호아래 적은 자본이거나 무일푼으로 건너와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상민들이었다.

이 일본세력은 공간적으로도 확대되어 갔다. 개항 당시인 1876년은 일본인이 오갈 수 있는 범위는 부두에서 10리(里)내외로 부산진성(현 동구 범일동) 안쪽이었는데 1883년 7월부터는 동으로는 기장(機張)·서로는 김해·남으로는 명호(鳴湖 :현 鳴旨)·북으로는 양산까지 확대되었다.

1년 뒤인 1884년 1월부터는 동으로는 울산의 남창(南倉), 서로는 창원(昌原)과 마산포(馬山浦)와 삼랑창(三浪倉), 남으로는 가덕도(加德島 :天城島), 북으로는 언양(彦陽)까지 확대되었다.

개항 당해년인 1876년 11월에는 일본의 관리청 안에 우편국(郵便局)을 개설하여 본국과의 서신 연락사무를 취급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필요로 해서 설립한 것이지만 우리 국토 안에서의 근대우편국 설치로서는 맨 처음의 것이었다. 이 우편국 우편 전용선으로는 나니와마루(浪花丸)라는 기선을 이용했는데 이는 여객선을 겸한 것으로 처음은 매월 왕복 1회로 부산·고오베·시모노세끼 ·나가사끼·고지마·쓰시마 사이를 왕래했다.

이 우편국에서는 1880년 5월부터 우편환(郵便換) 사무도 취급하여 금액 50원(圓)의 한도 안에서 일본본국에 송금할 수 있었다. 1883년에는 오날날의 광복동(신창동)에 전신국이 생겼는데 그 전신국에 1887년 영사관 안에 있던 우편국을 옮기어 『부산우편전신국』이라 이름을 고쳤다.

일본 은행가 시부자와(澁澤榮一)는 일본 국립 제일은행 부산지점의 설치를 일본정부에 출원하여 1878년 1월 21일 정식으로 인가를 얻었다. 1878년 6월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금대부를 받아 일본거류지 안의 오늘날의 동광동에 제일은행 부산지점을 설치했다. 이 은행지점 설치는 일본통화를 조선에 유통시키고 조선산의 금(金)을 매수하는데 있었다.

이에 앞서 일본의 외무대승(外務大丞) 宮本小一은 1876년 8월 24일 「조·일 무역장정규칙」 체결과 함께 조선정부에 지나날 왜관 때의 도중제도(都中制度 :정부지정의 무역상 제도)의 폐지를 요청하고 조선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폐지함으로써 부산에서는 완전한 민간주도의 자유 무역제도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일본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 상인에 의해서 기계제조상품인 일상생활 필수품(服地·실·染料·금속제 기구·식료품 등)이 다량으로 수입되었다. 그에 다라 조선내의 농촌 가내 수공업(家內手工業)과 도시 수공업이 점차 무너지고 조선인의 경제생활이 파탄되어 갔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농산물과 해산물, 그리고 금·은 등 중요 원료가 염가로 일본에 수출되었다.

이같이 조선의 대외무역은 염가인 원료가 수출되면서 고가(高價)인 완성 소비품이 수입되는 약탈적 식민지 무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일간의 외교관서 및 일본인 민간단체

(1) 개항기 항만관리기관의 변천

개항 후 개항지에 있어서는 외교와 통상에 관한 업무량이 날로 불어나고, 그에 따른 전문적인 사무처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1883년 8월 19일 조선정부는 부산·원산·인천 3개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게 되었다. 그때 부산 감리는 동래부사가 겸하게 되었다.

그 뒤 통상과 외교의 업무량이 더 늘어나자 1890년부터는 직원이 증가되어 독립된 관서인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었다. 이해 부산 감리서에는 4명의 서기관을 두고 별도로 방판(幇辦) 1명을 두었다.

그러나 감리서의 직제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지휘감독의 난맥상을 빚었다. 말하자면 방판은 동래부사의 지시를 받아야 할 지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야 할지 그 체제가 애매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5년 5월 1일 감리서가 폐지되고 부산감리서 서기는 동래부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감리서가 폐지된 지 불과 반년만에 종전의 감리서가 맡아하던 일을 일원화하기 위해 종전의 감리서와 같은 지사서(知事署)가 다시 독립되어 설치되었다.

그런데 1896년 8월 7일에는 감리서가 다시 부활하는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감리서가 다시 선 것은 조정에서 칙령 50호로 감리서의 직무한계를 규정지어 반포한데 있었다.

그 규정 제1조에서 ‘감리는 각국 영사 교섭과 조계와 일체 항내(港內) 사무를 관장한다’했고, 제2조는 ‘감리는 외무대신이 주정(奏定) 진퇴하고 외무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사무를 처판(處辦)한다’했다. 제6조는 ‘감리는 항내에 거류하는 외국인의 생명·재산과 본국인에 관한 일체 사송(詞訟)을 각국 영사와 상호 심사하는 권리를 얻음’으로 되어 있다.

이 이외 항구에는 경무관을 두고 경무관 아래에 총순(總巡)·순검(巡檢)을 두게 되어 있으며 경무관은 감리관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다. 감리는 관찰사와 평행상대(平行相對) 곧 대등의 위치로 대하게 했다. 그리고 부산항에 들어오는 상품과 관세를 매월 월말에 탁지부(度支部)에 자세히 보고하는 한편 외무부에도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전문(全文) 20조로 된 『감리서 부설관계 규정』은 감리서의 임무나 감리의 직분을 밝히기는 했으나 실제로 항무행정이 이루어지자 또 관찰사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얽혀 들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감리는 외국인과의 소송문제·수출입세와 외국인의 토지·가옥에 관한 사무만 맡게 되었다. 1896년 감리서 직제가 마련된 후의 초대 감리관은 동래아문의 방판이 유영환(兪英煥)이었다. 이때 동래(부산) 감리서는 영주동(현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두었다.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자 개항장의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해 온 감리서는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1906년 10월 1일 조선측에 관계되는 외교·통상 업무는 동래부사에게로 인계되었다. 그 반면 일반적인 외교·통상 행정은 『을사조약』의 제3조 규정에 따라 일본통감부(日本統監府)의 부산 이사청(理事廳)의 이사관으로 넘어갔다. 이 때의 부산 이사청은 부산 부근만의 이사청이 아니었다. 경남의 김해·밀양·양산·창녕과 경북의 장기·영일·홍해·청하·영덕·영해 그리고 강원도의 평해·울진·삼척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일본 통감부의 이사청은 단순한 외교권만을 위임받은 관청이 아니었다. 한국 전체의 지방행정 조직을 망라하여 한국의 주권 및 그에 수반되는 행정권 전체를 장악한 것이었다. 이는 「강화도조약」 이후 30년만의 일이요, 일제강점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침략의 마수를 정면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2) 개항장의 조선측 재판소 설립

근대적 재판소 구성법을 공포한 것은 갑오경장 후인 1895년 3월인데 개항장 재판소는 그때에서 약 3개월 뒤인 5월 10일자로 칙령이 반포되고 5월 15일부터 각지 개항장에 설치되었다.

부산의 개항장 재판소는 개항장에서 일어난 민사사건과 형사사건을 재판하게 되고 외국인과 우리나라 사람과 관계되는 민사·형사사건도 재판할 수 있었다.

재판권은 단석판사가 하였는데 각 재판소에는 2인 이상의 판사를 둘 때에는 단석 혹은 합석으로 재판을 심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2인 이상 합석의 경우에는 수석판사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재판소에는 판사·검사·주사·정리를 두었는데 이는 재판소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판사와 검사는 사법관 시험을 거친 사람으로 칙임관(勅任官)은 황제가 임명하고 주임관은 법무대신이 추천상주하여 임명하였다.

이 부산의 개항장 재판소는 동래부의 부사가 관장하는 재판이나 형집행과는 별도의 것이었다.

(3) 부산해관(海關)의 설치

부산에 제도적으로 갖추어진 해관(海關 :지금의 세관)이 설치된 것은 원산·인천과 더불어 1883년 11월 3일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수출입물품에 세금을 제도적으로 부과 징수하는 해관을 설치한 맨 처음이 된다.

개항을 한 1876년에서 1883년까지 7년 동안은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관계로 기계로 제조한 헐한 상품이 부산항을 통하여 마구 들어왔다. 이로 말미암아 근대적으로 자라고 있던 우리나라의 농촌과 도시의 수공업이 몰락되어 갔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해관의 설치나 그에 따른 세금 징수가 국가경제에 큰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위정자들도 개항장에서 오가는 수출입과 국내산업의 쇠퇴를 직접 보고 겪는데 따라 깨닫게 되었다.

해관은 처음 개항장인 부산과 뒤에 개항한 원산과 인천에 설치되었고 중앙에 총세무사청(總稅務司廳)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처음 우리나라는 해관사무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에 반대하는 일본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 리홍장(李鴻章)이 추천하는 서양인을 고용하여 해관사무를 보게 했다. 그때의 총세무사에는 독일인 묀렌도로프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초대 부산 해관장에는 로바아드·하아드(Robert·Hart)라는 영국사람이 임명되었다. 이어 프랑스인 비리, 영국인 한드, 프랑스인 라보오라, 아태리인 패코리니 등이 임명되었다. 그후 『을사조약』 후인 1906년 야마오가(山岡義五郞)라는 일본인이 해관장으로 임명된 후 계속 일본인이 임명되었다가 1908년부터 총세무사를 없애고 관세국(關稅局)을 두어 조선정부의 탁지부(度支部)에 소속시켰다. 1910년 일제강점 후는 조선총독부 세관으로 바뀌었다.

(4) 일본인의 거류지회의소 조직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인 관리관 콘도오(近藤眞鋤)가 1876년 10월 14일 부임하여 일본인의 자치기관으로 마찌다이간(町代官)을 조직하고 그에 소속되었던 상회소(商會所)에 거류지회의소를 두어 관리관의 지배 감독을 받게 했다. 1880년 2월에는 종전의 초량공관(왜관 때의 館守家)을 부산영사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부산에 그들의 영사를 주재시켰다. 그 해 4월에는 그 이름을 대일본제국 부산영사관이라 하면서 경찰소를 부설했다.

1885년 10월에는 재조선국 부산재판소를 두어 영사재판을 하였다.

이러한 일본 기관들을 옛날의 초량왜관 자리인 지금의 동광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1905년 11월에 부산이사청이 설치되자 부산의 일본영사관은 없어지고 일본인 조계의 자치제는 부산거류민단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5) 부산 일본인 상업회의소 설립

개항 직후에는 일본인들의 자치기관인 『거류지 회의소』에서 『상업회의소』의 사무를 겸해 보고 있었는데 1880년 8월에는 일본 관리관의 허가를 얻어 일본인 거류지 안에 별도로 『부산 일본 상업회의소』를 설립했다. 이 『부산일본상업회의소』는 일본으로 보아서도 도쿄(東京)·오사카(大阪)에 이어 세번째로 설립된 것이었다.

이는 부산의 일본 상인들의 통상·무역을 촉진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그들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단체였는데 그들의 발언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청국의 내정간섭

일본세력이 국내로 세차게 밀어들고 있는 사이 조선정부와 청국정부는 1882년 7월에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이후 리홍장(李鴻章)과 영국인 해관장 로버트·하트(Robet·Hart)의 책동으로 조선의 재정난은 가중되었다.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는 마건충(馬建忠)이, 군사에는 원세개(袁世凱)가 각각 간섭하였다.

그후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권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청나라의 관민(官民)은 조선정부로부터 여권교부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국내로 돌아 다녔다. 그래서 국내에는 일본세력과 청의 세력이 대립 반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부산의 일본조계에까지 청나라의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1883년 12월경 청나라 상인이 본정(本町 :현 동광동) 거주의 일본인 가옥을 임차하기까지 했다. 이 사실을 안 일본영사는 가옥주인 일본인에게 그 임차계약을 강제로 해약시켰다. 이 사건은 비록 청·일간의 일이기는 하지만 부산에 있어서의 최초의 청·일의 대립이라 할 만했다.

그후 청의 부산 이사관이 1884년 8월 부산에 와서 우리측의 동래 감리(監理)와 교섭하여 청나라의 영사관을 오늘의 초량에 설치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청국의 관·민들이 귀국하자 동래감리의 지시를 받아 감리서 직원이 청관(淸館)을 관리해 주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패배하자 부산에서의 청국세력은 상권이나 외교적 지위나 토지문제들에 있어 일본세력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외국으로 나가 있는 거류민의 힘은 본국의 힘에 좌우됨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다.

부산의 조계지(租界地)와 조차지(租借地)

(1) 일본 조계지가 된 왜관터

우리나라 영토를 부산에서 외국에 세를 받고 빌려준 땅으로는 조계지(租界地)와 조차지(租借地)가 있었다. 조계지는 개항 이후 일본조계와 청국조계가 있었고, 조차지로도 일본 조차지와 청국조차지가 있었다.

일본 조계지로는 앞의 장(章)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877년 1월 30일자로 동래부사 홍우창과 일본관리관 近藤眞鋤 사이에 맺어진 『부산항 조계조약(釜山港 租界條約)』으로 형성된 옛 왜관터인 용두산 주위 약 11만평의 조계지였다. 일본 전관거류지라 일컬어진 지역으로 지금의 중구 광복동과 동광동 지역이 그에 해당했다.

이 일본조계에 관해서는 앞의 장에서 이미 소상하게 말한 바 있다.

(2) 청국조계의 설정

일본조계 이외로는 청국조계가 있었다. 청국조계 설정과 청국영사관 설립을 보게 된 것은 이른바 덕홍호 사건이었다. 그것은 1883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청국의 상인 덕흥호의 주인 황요동(黃曜東)이 두 사람의 점원을 부산으로 보내어 일본거류지 안의 일본집을 빌어 덕흥호라는 이름의 지점을 내려고 한데 대해 일본영사관이 방해를 한 것이 일의 발단이 되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선총판상무위원(朝鮮總辦常務委員)인 청국사람 진수당(蔯樹棠)이 진상조사를 위해 조선외아문협변(朝鮮外衙門協辛力辛)의 독일사람 묄렌돌프(당시 중앙의 총세무사청 총세무사)를 대동하고 1883년 11월 25일 부산으로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이곳 실정을 감안하여 일본에 맞서 청국이 부산에 영사관과 조계지를 설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청국조계의 후보지를 확정하고 돌아갔다. 1884년에 부산에 거주하던 청국상인은 정위생(鄭渭生) 등이 경영하던 덕흥호에 4명, 건어류 도매상 3명 등 모두 14명이었다. 이들 14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1884년 5월에 청국영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때로서는 일본영사관이 있는데 청국영사관이 없을 수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초대 청국영사는 진위혼(陳爲箔)이 임명되었다. 진위혼은 부임하자 마자 청국조계에 관하여 동래감리와 의논하고 구획을 결정 측량하여 경계에 표목을 세웠다. 그때의 자리가 지금 초량동에 중국 화교학교가 있는 곳으로 청관(淸館)거리라 일컬어진 지역이다.

그 때의 동쪽은 해변(바다가 매축되기 이전)따라 길이가 314m였고, 서쪽은 산허리를 따라 동쪽과 같은 길이었고, 북쪽은 산허리에서 해변까지 303m, 남쪽이 275m의 장방형으로 주위 둘레는 9만 7백 46m에 이르렀다.

이 안에는 주인이 있는 무덤 49기(基)에 주인이 없는 무덤 2천 3백 9기가 있었다. 이 무덤들은 동래부가 모두 철거하기로 하고 구역 안에 있는 밭 450두지(斗地)와 논 10두지 5승지(升地)는 청국측에서 매수키로 했는데 가격은 그 모두를 3천2백78냥으로 정했다.

청국조계를 처음은 청국이사부가 있어서 청국이사부라 했다가 뒤에 이사부가 영사관으로 바뀌자 청국영사관이라 했다. 영사관 자리 중심으로 상가(商街)가 형성되어 번창하게 되자 청관(淸館)이라 했다. 청관이란 왜관(倭館)과 상대되는 이곳 사람의 통칭이었다.

1894년 조선의 동학혁명 진압문제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청국인 대부분은 주거와 재산을 그대로 남겨둔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국사람과 청국사람이 남기고 간 재산과 청국조계의 시설은 한양과 인천은 영국총영사가 보호하였지만 부산은 영국총영사와의 거리가 멀어 동래감리가 보호 관리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는 청국인들이 다시 그들 조계로 돌아왔지만 인천과는 달리 부산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일본상인의 득세 때문에 청국 상인은 크게 힘을 떨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청국 이사부(영사)의 세력도 일본의 영사보다 약한 위치에 있었다.

일본 영사관 기록으로는 1905년의 청국인 부산 거주자를 2백여명이라 적고 있다. 일제강점 1년 전인 1909년에는 338명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 해의 일본거류민은 5,605명이었다. 거류민 수로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 곳으로 온 청국인은 주로 비단장사와 잡화상을 했다.

(3) 일본의 절영도 해군 저탄장(貯炭場) 조차(租借)

일본은 조계지가 11만평이나 되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빌려서 쓰는 땅인 조차지(租借地)를 얻는데 혈안이었다. 그 보기로는 1879년 5월 일본에서 들어온 콜레라가 부산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국 관리관이 동래부사 윤치화(尹致和)에게 절영도(현 영도)에 소독소와 전염병원의 설립을 요청해 오자 윤치화가 이를 허락해 주었다. 조약규정에 없는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해 6월 20일 조정에서 윤치화와 절영도목장 관리책임자인 다대첨절제사(多大僉節制使)한우섭의 문책이 논의 되었다. 병막(病幕)은 즉시 철거되었다. 그렇게 조정에서 외국인의 절영도 침입을 거부한 것은 절영도가 국방상으로 요긴한 곳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영도에 눈독을 돌린 일본은 끈질겼다. 일본은 해군용 저탄창고(貯炭倉庫)를 건립하기 위해 5천평도 안되는 협소한 지역을 매년 땅세로 20원을 주겠다는 감언이설이 7~8개월 이상 계속되자 조선정부는 1885년 12월 27일 마침내는 조차지로 내어주었다.

(4) 러시아의 복병산(伏兵山) 조차 좌절과 절영도 조차 좌절

일본이 강권을 작용하여 부산을 개항하고 그에 힘입어 대륙으로 진출하려 하자 극동진출을 괴하고 있던 제정(帝政) 러시아는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도 1884년 5월 15일 『조·러 통상조약』을 맺었다.

1892년 5월에는 현재 부산지방기상청이 있는 복병산과 대청동 뒤쪽 비탈이 되는 사병산(四屛山)을 사들이는 일에 대해 조선정부와 약속이 이루어져 그들 관리를 보내 그곳을 측량하게 되었다. 그 측량은 복병산 앞에서 바닷가로 향한 400m와 그 동쪽으로 영국이 조차하고 있는 영국조차지를 넘은 150m까지 측량을 하고는 그곳에 표지가 될 나무 표목(標木)을 세웠다.

러시아가 그렇게 측량하는 것을 본 일본측은 날벼락을 맞는 격이었다. 일본측은 일본조계 부속공동묘지를 조성하기 위해 그곳을 조차(租借)하려고 1888년 5월부터 조선정부와 교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복병산은 왜관시대부터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러시아가 그렇게 측량을 하자 부산에 있는 일본영사는 복병산 높은 언덕 위에 『일본묘지(日本墓地)』라는 표목을 세운 뒤 러시아가 복병산을 조차하려 한다는 사실을 서울의 일본공사에 전보로 알렸다. 한양주재의 일본공사와 부산주재의 일본영사는 긴밀히 연락하면서 일본의 선점권(先占權)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기도(企圖)를 외교적으로 봉쇄하면서 1892년 8월 복병산의 일본인 공동묘지는 조·일(朝·日)간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보아서는 3만 5천평의 일본조계 부속지가 정식으로 조차된 것이었다.

복병산과 사병산 매수에 실패한 러시아는 1895년 다시 절영도(현 영도)에 조차지를 얻으려 했다. 일본이 1886년 절영도에 해군용 저탄창고(貯炭倉庫)를 세우기 위해 4천9백평을 1년 은화 20원으로 조차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부산에 조차지를 얻는 것은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면서 극동에 세력을 펼칠 교두보를 설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의도를 안 영국·미국·독일 등 각국 사신들이 좌시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저의에 맞서 각국 사신들은 중앙의 총세무사 브라운을 시켜 러시아가 조차하려는 절영도 땅에다 각국 조계를 설정할 예정지임을 밝힌 입표정계(立標定界)를 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외국 외교관들의 처사에 대해 1895년 7월 “절영도는 장차 필요에 따라 조선정부의 포대(砲臺)·등탑(燈塔 :등대)·병원 등 공용으로 사용할 계획이어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본국인마저 수시로 철거케 할 의향이다. 각국 사신도 이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는 공문을 외국공관에 발송했다.

그러나 1896년 초 고종임금과 태자가 러시아공관에 옮겨서 기거한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조선정부에 대한 발언권이 강해진 러시아공사 웨베르(韋貝 :Waeber)가 절영도 조차를 본격적으로 교섭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7월에서 8월에 걸치는 동안이었다. 8월 상순에는 부공사 케르베르그(Kehrberg)가 군함을 이끌고 직접 부산에 와 동래감리를 만나 일본저탄소 오른편에 선정한 약 9만평의 조차를 교섭해 왔다.

그 같은 움직임을 전해받은 일본은 필사적인 방해를 꾀했다. 일본 본국의 외무대신은 조선 주재공사와 부산 주재영사에게 러시아의 조차지 저지에 전력을 다하도록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일본공사는 서울에서 민종묵(閔種默) 외무대신과 그 밖의 각료를 회유하고 부산주재 일본영사는 동래감리와 부산 해관장인 영국인 헌트(Hunt) 등과 연락하여 이를 저지하는데 적극적인 책략을 다했다.

그 책략이 주효하여 8월 31일에는 외무대신 민종묵이 동래감리에게 러시아가 조차하려는 땅은 심히 넓고 또 각국의 조차 예정지이며 인가와 전답도 있으니 허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러시아의 담당자에게 잘 설명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훈령을 받은 동래감리 이용식(李容植)은 러시아의 부공사 케르베르그의 요구를 단호히 물리쳤다. 그리고 절영도에 논과 밭을 가진 조선사람에게는 감리서의 허가없이 외국인에게 팔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케르베르그 일행은 일본영사관과 부산해관장 Hunt를 방문하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9월 6일 군함을 타고 인천(仁川)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1897년 9월에는 서울의 웨베르 러시아공사 후임으로 스페이에르가 왔다. 스페이에르는 절영도의 각국 조차예정지 이외의 자리를 선정하여 러시아 해군의 저탄장으로 조차해 줄 것과 조선 황제가 종전에 부산에 있는 땅을 러시아에 조차지로 제공해 줄 것을 언약했음에도 그를 이행하지 않은 불신과 위약을 힐난했다.

그러한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11월 15일 러시아 동양함대 사령관 ‘마가로프’가 인솔하는 군함 3척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이튿날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3일 후 러시아군함 3척이 다시 부산항에 나타나 부산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 부산항에는 일본 거류민보호라는 이름으로 일본군함 海島號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양국 군함 사이 긴박한 상태가 조성되기도 했다.

러시아 함대를 거느리고 온 사령관 마가로프는 사관과 병졸을 거느리고 11월 20일에 상륙하여 케르베르그가 측량 획정한 조차예정지를 답사한 후 23일에는 부산항에 정박중이던 군함의 사병이 사령관의 명령이라 하며 조차를 받으려는 땅에 표목을 세운 뒤 함장이 동래감리서로 와서 “이곳 거주민이 표목을 뺏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데 대해 감리서에서는 “조선정부가 대여한 것이 아니므로 책임질 수 없다”고 거절했다.

1898년 1월 21일에는 갑자기 러시아 조차 예정지에 나무를 심겠다고 하고는 수병 20명과 사관(士官) 2명을 데리고 군함에 실어온 소나무와 삼나무 등 수백그루를 조차예정지에 심었다.

그러나 일본측이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했다. 그것은 만일 부산에 러시아의 조차지가 형성되면 일본은 대륙진출에 그 조차지가 큰 장애요인이 될 것이고 러시아는 조차지를 얻지 못하면 극동진출이 여의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마침내 부산에서 조차지를 얻을 수 없다고 단념을 했는지 러시아 함대는 1898년 2월 2일 부산항을 떠났다. 러시아 함대가 부산을 떠나자 서울주재의 일본공사는 1898년 2월 28일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의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러시아가 조차지로 얻으려 한 그 영도 동북단 90만평방미터를 각국 공동조계로 조차해 줄 것을 구한국 정부에 요청해 왔다. 그 요청을 받은 구한국 정부는 어느 한 나라의 독점이 아닌 여러 나라에 선심을 쓰면서 러시아에 대해서도 변명의 구실이 된다는 판단 아래 동래감리에게 러시아가 조차하려던 그 땅을 공동조계 예정지로 삼게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공동조개 예정지가 되었지만 그 조계 안에는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거주 희망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각국 조계로 예정된 지역의 민간인 토지를 일본인들이 사들인 탓으로 조계는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부산에서 극동진출의 기지를 얻지 못한 러시아는 1898년 3월 장승포(長承浦)에 조차지를 얻었고, 1900년 3월에는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산포(馬山浦)의 율구미(栗九味)일대를 조차하게 되었다. 이 율구미 조차지에는 해군병원과 창고 등 시설을 갖추다가 중도에 포기하고는 해군기지의 적지를 진해항(鎭海港)으로 잡고 그 점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과의 긴박한 대립을 보이는 가운데 이 진해항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는 극동진출의 기지를 남해 연안에 잡으려던 그 의도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5) 영국 조차지

부산에 영국인이 오게 된 것은 1883년 『조·영통상조약(朝·英通商條約)』을 맺게 되는데서 비롯되었다. 통상조약을 맺는 그해 8월 30일에는 영국 부영사와 동래감리 사이의 협정으로 영선산(營繕山) 일대 2만8백95평방미터를 영국이 조차했다. 이 구역 안에는 3천3백30평방미터의 관유지(官有地)와 사유지(私有地)로서 밭 88두지(斗地)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인에 양도(讓渡)하였던 8두지는 영국측에서 720원(元)으로 사들였다. 구역 안에 있는 무덤 6기(基)는 1기당 5원씩으로 이장했다. 조차 금액은 연간 16원 72전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부산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영사가 주재한 것은 1885년 5월이었다. 거류하는 영국인은 3~4명에 지나지 않았다. 거류민이 적어서 그랬든지 부산주재 영국부영사는 부임후 경상도 전라도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경북의 대구에서 주민들의 돌을 맞고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정부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은 영국영사에게 정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던 일까지 생겨났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를 거둔 뒤에는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지위가 확고해지고 거류 영국인도 그리 없어서 부산의 영사관은 1910년 무렵 문을 닫고 말았다.

영국 영사관이 있었던 산인 영선산은 지금의 영주동 고개에서 이어져 내려 지금의 부원아파트와 중부경찰서 쪽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 바다로 경사져 내린 두 봉우리의 산이었다. 이 영선산을 두 산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쌍산(雙山) 또는 양산(兩山)이라고도 했다. 쌍산 또는 양산이라고 할 때는 한 산이 영선산이 되고, 한 산은 영사관산이 되었다. 영사관 산은 영국영사관이 그 산 아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산을 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 산은 1909년에서 1912년에 걸친 착평공사(鑿平工事)로 깎겨 내려져 바다가 메워지고 시가지와 도로와 부두가 축조되었다.

영국이 영사관터로 삼기 위해 빌린 땅을 조계지라 하지 않고 조차지라 하는 것은 영사관터로는 지나치게 넓고 주거자가 그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출전 : 부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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