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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동해남부선 스토리텔링 걷기

 

동해남부선 스토리텔링 걷기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기찻소리에 묻혔던 그 곳, 발길 멈추게 하는 8㎞ 이야기길 되다

  • 국제신문
  • 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 2014-03-13 19:06:15
  • / 본지 26면

 

 

   
부산 해운대 달맞이언덕 밑에 있는 기차터널을 통해 도보여행객들이 걷고 있다. 홍영현 기자 hongyh@kookje.co.kr
부산과 경북 포항을 잇는 147.8㎞ 길이의 동해남부선. 이 철로의 부산~해운대 구간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개통됐습니다. 이후 울산, 경주까지 확장되면서 기존의 경주~포항선과 이어져 현재 동해남부선이 완성됐습니다.

부산 도심에서 동해안 일대를 연결하던 이 단선 철로의 일부는 새 노선의 복선화 사업으로 지난해 12월 1일 해운대 구간이 폐선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미포~송정역, 춘천 인근 등 일부 구간만 제외하고는 철로가 모두 걷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일부터 일반인에게 걷기 코스로 개방됐습니다. 부산시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앞으로 이 구간을 산책로와 자전거길, 레일바이크 체험길로 만든다고 합니다.

개방을 기념해 동해남부선 폐선 구간인 해운대 우동~청사포 8㎞를 걸었습니다. 철길 주위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며 말입니다. 무미건조한 '그냥' 걷기보다 잘 모르는 해운대의 역사를 들춰보며 걷기에 도전했습니다. 지금은 초고층 건물들로 대체된 동해남부선 부근 해운대 마을들은 예전에는 당시의 신시가지이기도, 피란민들의 일터이기도, 인기 관광지이기도,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해설은 향토사학자 주영택(76) 가마골향토역사연구소장이 맡았습니다. 해운대에서 나고 자란 주 소장은 중등학교 국사 교사로 재직하며 동백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해운대 지역사를 총망라하는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우동 올림픽교차로 지점에서 스토리텔링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철길이 모두 걷어진 도입 지점에 들어서자마자 주 소장은 탄식했습니다. "이걸(기찻길) 왜 치웠나요? 근대유산인데 당연히 남겨놨어야죠"라며. 철로가 사라진 자갈로 된 기찻길부터 걸으며, 구간 곳곳 널브러진 침목을 보면서 낡고 오래된 것은 순식간에 철거해 버리는 개발논리를 21세기에 다시 만납니다. 낡고 오래된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음에도 말입니다.

동해남부선은 당시 부산 도심과 외곽인 해운대를 잇는 철도 개설의 필요성 때문에 개통됐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1930년대 해운대 지역이 온천 골프장 등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해운대로 유람을 오는 일본인들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해서였습니다. 실제로 동해남부선 개통으로 해운대와 부산 시내로의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해운대는 외곽 유원지가 아닌 부산의 생활권에 들게 됐습니다.

   
향토사학자인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소장이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미포가 한눈에 보이는 동해남부선 미포 인근 폐선 구간에서 동해남부선에 얽힌 해운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대부분 철도의 탄생이 그러하듯 동해남부선 역시 일제의 자원수탈을 위해 건립됐습니다. 주 소장은 기억했습니다. "어렸을 적(일제강점기) 어머니랑 동해남부선을 탈 때면 쌀 등 귀한 곡물은 꼭꼭 숨겨야 했어요. 곡식이고 광물이고 보이는 즉시 닥치는 대로 뺏겼으니까요."

그럼에도, 갖은 역경에도, 꿋꿋하게 살아온 선조의 역사는 동해남부선과 함께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통학열차로, 보따리 상인에게는 수확한 곡식이나 생선, 해조류 등을 시내 장에 내다 파는 이동수단으로, 시내 공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에게는 통근열차로, 관광객들에게는 해운대 해안선과 해, 달을 보기 위한 관광열차로 80년간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되새깁니다.

이제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구간을 걸으며 해운대의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본지 취재팀이 다녀온 '부산 해운대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스토리텔링 걷기 구간'은 우동 올림픽교차로에서부터 청사포까지 8㎞에 이른다. 향토사학자인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소장으로부터 동해남부선 기찻길을 둘러싼 해운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걸어보았다.

①승당마을

   
철로가 보존된 동해남부선 해운대 청사포 인근 폐선 구간에서 여행객들이 기찻길을 걷고 있다. 홍영현 기자 hongyh@kookje.co.kr

동해남부선 스토리텔링 걷기는 해운대 우동자이아파트 지점에서 시작하면 된다. 진행 방향의 오른쪽에 보이는 동부올림픽아파트와 경동아파트 부지는 예전에 승당마을이었다. 승당마을은 '작은 집'이라 해서 '소운대'라 불리기도 했다. 운촌마을 일대 사람들은 자식이 결혼을 하면 마을 범위 내에서 살림을 내줬는데, 승당마을이 주로 새 살림 장소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신시가지'. 해운대 신시가지의 원조가 바로 이곳 승당마을인 셈이다.

'승려의 집'이란 뜻의 승당(僧堂)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직후인 1601년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일꾼으로 데리고 와 승당마을에서 숙식하며 부산진성을 축조한 데서 유래됐다. 승당마을 포구였던 현 수영만요트경기장 부지는 1982년 매립됐다.

현 신세계백화점 인근, 우동천이 흐르던 곳에는 해수욕장도 존재했다. 1970년대까지는 있었지만 지금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곳 수영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모래가 고와서 어린이들이 놀기에 적당했다.

②허리불

부산도시철도 동백역 인근, 운촌마을과 승당마을 사이는 '허리불'이라 불린 곳으로 해운대 제2부두가 위치해 있었다. 제1부두는 동백섬 초입 현 APEC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주로 자갈과 모래 채취선이 정박하던 제2부두는 한국전쟁 때 미국에서 들여온 탄약을 주로 하역하는 장소가 됐다. 이 일대에서 하역된 무기는 장산 탄약고로 옮겨진 뒤 동해남부선과 경부선을 따라 전국에 보급됐다. 항만 노역은 삶터를 잃은 피란민들에게 좋은 일거리였다. 부산항 부근에서 피란민들이 항만 노역을 하고 원도심 산복도로 주변에 살았던 것처럼 해운대 이 일대에도 피란민촌이 형성됐다.

③솔리방

소나무가 우거진 운촌마을 입구. 송림과 바위가 있어 솔리방이라 했다. 예전에는 행상(주검을 산소로 나르는 것)이 이뤄졌던 상여집이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래서 '귀신이 나타나는 곳'이라며 마을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했다. 지금은 도로로 개발됐으며 곧게 뻗은 20여 그루의 소나무가 과거 솔리방이 있었던 터였음을 알려준다.

④해운대 온천마을

해운대온천은 관광지로서의 해운대 역사를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예로부터 유명했으나 조선시대 폐장됐던 해운대구청 일대의 온천마을은 개항 이후 일본인에 의해 다시 개발됐다.

본격적인 개발은 1920~30년대에 이뤄졌다. 이 시기 일본인 기업가들이 해운대온천기업합자회사를 만들어 이 일대 99만 ㎡(30만 평) 부지를 온천관광특구로 개발했다. 온천탕과 온천수영장, 호텔과 여관 등 숙박시설 등이 대거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4년 개통한 동해남부선은 부산 시내에서 해운대 온천특구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30년대 다른 일본인 기업가가 벡스코 부근 센텀호텔 일대의 과수원을 사들여 골프장으로 만들면서 골프장과 온천을 연계, 관광지로서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했다.

본격적인 개발은 1930년대 시작됐지만 해운대온천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신라시대 진성여왕이 어렸을 적 마마병을 앓고 있다가 해운대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나서 병이 나아 이 일대가 유명해진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만큼 예로부터 해운대온천은 물 좋기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어느 시기(연도 미상)에 여러 가지 이유로 폐장됐다. 그 중 하나는 이렇다.

식염천인 해운대온천 물로 목욕을 하면 나병(한센병)이 낫는다고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의 나병환자들이 해운대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와우산(현 달맞이언덕) '문둥이골짝'에 기거하면서 밤이 되면 몰래 해운대온천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마을사람들은 민폐를 호소하며 물 나오는 곳을 매몰시켜 버렸다. 이렇게 폐장됐던 해운대온천이 개항이후 일본인에 의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해운대 온천마을 일대는 '구남들(벌)'로 불렸다. 거북이가 사는 장산의 남쪽 들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해운대온천이 옛날에는 구남온천이라 불렸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구남벌은 거대한 철새도래지이기도 했다.

⑤별장터

산과 강, 바다로 둘러쌓여 풍광이 멋진 해운대는 유명 인사들의 별장지로도 인기를 끌었다. 태극기를 만든 박영효의 별장이 운촌마을에 있었다. 근대 개혁가인 박영효는 갑오개혁을 일으키다 반역 혐의로 정계에서 쫓겨나 일본에 망명했고, 이후 일본의 조선 통치에 동조한 인물이다.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송병준의 별장도 해운대에 있었다. 그의 별장터는 동백섬과 해운대해수욕장, 오륙도가 내려다보이는 미포 초입에 있다. 한일강제병합을 적극 추진한 친일파로, 병합 이후 거액의 은사금과 자작 작위를 받았던 송병준은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미포에 별장을 지어놓고 호의호식했다.

⑥섬밭마을

춘천 복개구간에서 미포로 향하는 중간에 위치한 섬밭마을은 밭모양의 섬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가득 차 있다. 이 인근의 중동 당산에서는 매년 '철둑제'가 열리기도 했다. 동해남부선이 놓이면서 기찻길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주의로 인해 열차에 치이는 사고가 많이 났다. 철둑제는 열차에 치어 생명을 다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 더 이상 사고가 나지 않도록 비는 마을 차원의 제사였다.

⑦와우산

동해남부선 미포에서 송정역까지 4.8㎞ 구간은 폐선이 보존돼 있어 기찻길을 걸으며 해운대 일대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다. 미포에서 청사포까지의 임해철도 구간은 달맞이언덕을 빙 둘러싼 형태로 조성돼 있다. 지금은 달맞이언덕이지만 예전에는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렸다. 장산 꼭대기에서 보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다. 해운대 미포(尾浦)라는 지명도 와우산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

해발 183m의 나지막한 와우산은 예로부터 해맞이와 달맞이가 유명했다. 해와 달이 뜨는 장관을 보기 위해 일부러 동해남부선을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 와우산 정상에서 해가 지는 석양의 모습을 우산낙조(牛山落照)라 했다. 붉은 저녁노을이 구남벌을 물들인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는 뜻이다. 우산낙조는 해운대 8경 중 하나다.

현재 달맞이재라는 터널이 위치한 곳은 상공에서 보면 툭 튀어나온 형상의 고두백이(고두말) 지점이다. 남쪽의 해안선이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의 이곳에서 저 멀리 비슷한 형상의 동백섬까지를 위에서 보면 화살처럼 휘어져 있다. 이 휘어진 구간에 조성된 해운대해수욕장의 해안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⑧장산

동해남부선 해운대 폐선 구간은 장산을 둘러싸고 있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장산(634m)은 해운대의 배산이자 진산이다. 삼한시대 장산에는 장산국(또는 내산국)이 있었다. 장산을 삶터로 한 100여 명의 부족국가였던 장산국은 가야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 신라에 예속됐다.

장산 일대는 구석기유적지 3곳이 발견된 주요 장소이기도 하다. 이 유적지 발굴 전까지 부산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만 발견됐는데, 좌동(현 대림2차아파트 일대)과 중동(현 주공4단지아파트 일대), 청사포(해안 뒤 구릉지대) 3곳에서 구석기 유물이 나왔다. 이에 따라 부산 역사도 신석기에서 구석기로 확장됐다. 장산의 구석기유적지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가 바로 해운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장산과 장산 자락인 와우산은 조선시대 봉산(封山)이었다. 봉산은 국가가 특수 목적으로 개발하는 산을 뜻하며, 장산과 와우산은 소나무를 길러 배 건조, 건축 등에 쓰일 목재자원을 공급하는 임무를 띠었다. 장산과 와우산은 조선시대 왕가의 땅이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발견된 4개의 이산(李山) 표석은 1920년대 일제 총독부가 주인 없던 임야를 모두 자신들의 소유로 귀속시키려던 수탈에 맞서 이 씨 왕가가 세운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 창덕궁(이 씨 왕가)임을 알리려던 조선 왕조의 고된 싸움을 이산 표석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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