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14> 용두산공원
일제 신사 있던 권력의 공간, 부산탑 세워 관광명소로…이제는 청년문화 중심지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10-22 20:03:40
조선 후기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초량왜관의 중심 역할을 했던 용두산에는 신사까지 건립돼 있었다. 사진은 2007년 부산박물관이 발간한 '사진엽서, 부산의 근대를 이야기하다'에 수록된 용두산신사의 모습.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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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관치행사 열어
- 6·25전쟁 후 재정비
- 이승만 호 딴 '우남공원'
- 충무공 동상과 함께 내셔널리즘 상징으로
- 다보탑 본딴 부산탑
- 식민지 기억 없애고 근대부산 역사성 조망
- 空園 되어가던 공원
- 비보이·힙합의 무대로 역사·문화공간 재구성
■용두산이 뜨겁다
'부산탑, 청동의 충무공동상, 노랑 빨강의 꽃시계 그리고 그 앞에 부동의 자세로 긴장한 가족의 풍경' 이러한 프레임을 지닌 사진 한 장쯤은 부산사람이라면 오래된 사진첩 어딘가에 끼워져 있다. 이 각도가 만들어지는 장소는 용두산공원. 가족사진의 단골 포토라인.
'부산을 한눈에 담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 '부산 최고의 전망대 용두산공원' '부산여행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용두산공원은 부산시민이나 외지인에게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 '대표적 관광명소'로 입소문 나면서 용두산공원의 계단은 늘 붐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곳을 관광특구로 지정하면서 근대부산의 역사가 녹아 있는 장소성을 관광화하기에 여념 없다.
최근 용두산공원에 있는 부산의 랜드마크인 부산탑은 세계 최고의 등대를 표방하면서 부산항의 야경을 바꾸어 놓았다. 그뿐인가. 이 장소를 매개하는 문화적 실천들이 공원 마당에서 시민들에 의해 발산된다. 부산 안팎에서 용두산공원을 주목하고 있는 시선들이 폭증하면서 이곳은 주야로 뜨겁다.
■근대 공원 탄생, 내셔널리즘의 기획
부산 원도심의 쇠락과 함께 한때 용두산공원도 활기를 잃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 비보이 댄스를 추면서 다시 청년문화의 메카로 부활하고 있다. |
전쟁 직후 1954년 12월 용두산의 화재로 피난민 판자촌이 불타고 민둥산으로 변했다가, 곧 이 일대는 정비되어 공원지대로 다시 전환되었다. 1955년 12월 22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 시절 이승만의 80회 생일기념사업 일환으로 그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雩南公園)'으로 불렀다. 충무공 동상 제막식과 우남공원의 명명식이 함께 진행되었던 과정은 내셔널리즘과 결탁한 공원사업의 성격을 드러내 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미지에 호국, 충신의 이미지가 강한 충무공과 겹쳐지면서 용두산공원의 장소적 성격은 만들어져 갔다.
이곳에 이순신동상-충혼비-어린이헌장비-4·19기념탑-국민교육헌장-자연보호헌장-해병대사령부탑 등 국가기억의 표상들이 지속적으로 배치되는 것 또한 국가프레임이 강조되는 국민 되기의 수행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부산의 랜드마크, 부산탑
1973년 건립돼 부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온 용두산공원 부산탑. |
탑의 조형적 특색으로 부산을 상징하는 등대의 형상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 지붕에 얹혀 있는 보개(寶蓋)를 본 떠 만든 것이라 밝히고 있다. 여기서 경주는 단순히 지리적 차원만은 아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경주가 '국민 만들기'의 동원체제의 상징적 장소였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경주 다보탑이 왜 선택되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용두산공원에 드높이 치솟은 타워에 올라 부산을 내려다보아라'는 주문은 부산탑이 부산을 어떻게 매개하는가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부산탑이 용두산공원에 새 명물로 들앉음으로(건립 초창기 관광객 연 80여만 명), 이미 부산의 대표적 관광지 역할을 하던 용두산공원이 부산의 시공간을 더욱 강력하게 포괄할 수 있었다. 해발 190m 높이의 부산탑이 만들어내는 위아래의 조망은 관광객에게 원근법적 풍경과 같은 원리를 내면화하게 한다. 부산탑에서 바라보는 산동네 풍경에서 근대부산의 역사를 읽어내게 하고, 부산항을 조망함으로 부산의 역동적인 기상과 미래의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한마디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함으로 부산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해주었다.
부산의 랜드마크로서 부산탑은 과거나 현재나 내외부적으로 강력한 관광유인이 되었고, 이를 통해 용두산공원이 부산의 '대표 관광명소'가 되는 데 톡톡히 한몫했다. 관광명소가 된 용두산공원은 부산의 자긍심으로 자리 잡고, 한편으로 부산의 구심적 공간으로 그 효과를 생산했다.
■비보이들의 난장, 그리고 이후
마땅한 놀이시설이 없던 시절, 도심에 있는 용두산공원은 세상에 없는 놀이공원이었고, 부푼 가슴의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디뎌 언약하던' 194계단, 계단 가의 점집들, 밤 10시 통금시간의 숨바꼭질, 구름다리, 음악다방 등등은 용두산공원과의 기억을 연결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관광객들의 발걸음만 부산탑을 향해 직진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화려한 놀이공원으로 갈아타면서 공원(公園)은 '공원(空園)'이 되어갔다. 이 틈을 비집고 나온 비보이들의 춤판은 용두산공원을 다시 청년들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모여든 청소년 춤모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힙합무대. 청소년들의 야외마당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던 지역의 열악한 현실에서 용두산공원은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전국 힙합 메카', '비보이들의 성지' '용골춤판' 등으로 회자하는 힙합댄스마당은 용두산공원의 근대성을 탈근대적 놀이공간으로 진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용두산공원이 있는 원도심이 점점 공동화되어가는 시점에 이 공간이 청년들에 의한 놀이의 장소로 '재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힙합댄스마당이 단지 새로운 볼거리의 탄생만으로 이야기될 수 없다.
이와 함께 1990년대 이후 용두산공원 '마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민 주체들의 여러 문화적 기획은 '위로부터의' 기획만으로 공공 공간의 공공성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난장은 현재 용두산 공원을 둘러싼 비둘기와 노인의 표상을 걷어내고 다이내믹한 젊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획들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문학박사
※공동기획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국제신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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