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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조선후기 낙동강의 포구상업

조선후기 낙동강의 포구상업

1. 포구상업의 발달 배경
  1) 사상인의 등장과 장시(場市)의 번성
조선왕조는 건국부터 수취체제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적극적인 시책으로 전국적인 조운제를 정비해 갔다. 특히 낙동강을 이용한 조운(漕運)을 확립하여 경상도 지역의 수취에 심혈을 기울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조운선을 건조하는 과정에 목재구입, 기술자 고용문제와 조졸(漕卒)의 선정을 비롯한 인적관리 문제, 운항에 따른 항해술, 자연 재해의 극복문제로 인하여 존폐여부가 논의되기도 했다. 임진, 병자호란이후에 조운제는 거이 파괴되었다가 영, 정조조에 강력한 복원정책으로 경상조운이 재개되었다. 좌, 우, 후조창의 3조창이 복원되었고, 부족한 관선(官船)인 조운선 대신에 지방민이 소유하고 있던 사선(私船)인 지토선(地土船)이 임선(賃船)으로 대처되었다. 지토선의 영업행위는 수취체제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으나, 지토선의 확보, 지방관과 중앙관리들과의 연계, 자본문제 등에서 새로운 경쟁관계에 있던 경강선인(京江船人)에게 밀려나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취체제면에서 사선의 등장은 사상인의 활동과 이익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는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면서 농민이 이농하여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 종사하는 현상이 두드려졌다. 17세기까지 지방시장인 장시는 주로 중부이남 지역에서 발달했지만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1,000 여 개의 장시로 성장하여 주도면밀한 장시망까지 형성되었다. 이것은 17세기 말이래 생산력의 현저한 발전을 통해 사회적 분업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이다. 상업인구의 증가, 유통구조의 변화, 판로개척 등으로 일부 장시는 상설시장화 하면서 유수한 상업도시 및 상업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2) 선박교역의 이점
강이나 해안을 낀 포구는 물화의 집산이나 교역에 있어서 선박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李重煥)은 많은 물자를 수송함에 있어 수레보다는 선박이 더 우수하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까지의 길이 멀면 노자만 많이 허비하면서 소득이 적다. 이런 연유로 선박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3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면서 운송수단으로서 선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선박을 이용한 물자수송은 대체로 강을 따라서 오르내리는 강상운수와 해안을 따라서 교역하는 해상운수가 있다. 강상운수로 이용된 강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 주로 남, 서해로 흐르는 강이다. 해상운수는 대체로 17세기까지는 남해안과 서해안을 자유롭게 왕래하였으나, 동해안은 18세기가 되어야 개통되었다. 낙동강의 강상운수는 하류에서 안동, 상주 등지로 운행되었다. 이로서 낙동강을 연안을 따라 내방포구가 발달하게 되었다. 반면에 해상운수는 제법 다양한 항로가 존재했는데, 해안선을 따라서 부산-- 여수 항로, 여수-- 목포 항로, 부산--원산 항로가 있다. 그리고 남해안의 각 도서를 연결해 주는 목포, 우이도, 흑산도, 매가도, 태도, 임자도, 마안도, 고군산도의 항로가 있다. 연안항로를 벗어나서 부산, 거제도, 여수, 거문도, 우도, 제주도, 추자도를 잇는 목포항로와 부산--울릉도를 잇는 항로가 있다. 이러한 항로개설로 인하여 외방포구의 발달을 가져 왔다.



2. 낙동강 포구상업의 중심지 구포

내방포구와 외방포구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 하였다. 먼저 교역물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내방포구는 내륙지방에 생산되는 곡물, 목재, 시탄(柴炭), 약재 등인 반면에, 외방포구는 주로 해산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물산을 운송하는 선박도 강상운수에는 광선(廣船)이, 해상운수에는 삼선(衫船), 통선(桶船)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강과 바다를 왕래할 수 있었던 노선(櫓船)인 농토선(農土船)이 있다. 그래서 해산물과 육지산물과의 교역은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상인들은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나 판매의 거점이 되는 내외포구를 중심으로 상업적 조직망을 갖고자 했다. 강상교역의 시발지인 강의 하류지역은 각 외방포구의 해산물이 강상운수을 이용하기 위해 강으로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은 교통의 요지와 물산 집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도회지로 성장해 갔으며, 선박을 이용한 교역은 강상과 해상의 접합점인 강의 하구지역이 지리적 여건에 의해 주로 신흥 상업도회지로 발달해 갔다. 18세기 중반 이중환(李重煥)은 낙동강 하구의 칠성포(七星浦),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法聖浦)와 사진포(沙津浦), 전주의 사탄(沙灘), 금강의 강경포(江景浦)를 발달한 상품유통의 중심 포구로 들고 있다. 낙동강 하구에 있었던 칠성포의 번성이 어떠했는지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낙동강의 각 포구를 대표할 만 포구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칠성포의 번성에 대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고, 그 후 구포장이 이 지역 최대의 장시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구포가 포구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구포가 포구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된 원인은 먼저 구포가 위치한 것이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강상과 해상교역의 접합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 본류에 위치하면서 바다와 가장 단거리로 연결되고 또한 수심이 깊어 곡식 300 여 석을 실은 대형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낙동강 하류의 중심 교역통로는 불암창(佛巖倉)--산산창(蒜山倉)--조전(漕轉)--김해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낙동강이 유역이었다. 그러나 상류에 흘러온 토사가 칠점산(七点山)과 명지도(鳴旨島)에 퇴적되면서 서낙동강 유역이 지류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구포에 감동창(甘同倉 혹은 南倉)이 설치되어 많은 조운선이 출입하게 됨으로 관리나 역부(役夫)들이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것은 숙박업과 교역물자에 대한 상업행위가 발생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감동창을 중심으로 장시가 열리게 되었다. 또한 왜관무역의 관장과 주변 일대의 행정 중심인 동래부와 왜관무역을 담당했던 동래상인과도 연결이 용이하였다. 바다와 큰 강물이 만나는 낙동강 하류지역은 선박이 통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육로로서 내륙물산을 만덕고개를 넘어 최단거리로 짧은 시간에 공급할 수 있는 위치에 구포가 있어 포구상업의 번성을 이루었다고 본다. 따라서 구포장은 낙동강유역에서 가장 큰 장시가 되었으며, 경상도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포장에서 교역된 물산은 다양했으며, 유통지역이 상당히 광범했다. 구포장의 교역지역에 대하여 그 일면을 각설패가 불렀던 구포장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포장 타령에서 나오는 장시명에서 대구, 양산, 밀양, 수산, 김해, 덕두, 하단장은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는 포구장시들이다. 그리고 자갈치, 구례, 흥해장은 남해안과 동해안에 위치한 외방포구에 위치한 장시들이다. 실제 구포에서 삼랑진까지는 강상운수에 별다른 제약이 없으나 왜관, 안동, 상주로 이어지는 중, 상류지역은 강수량의 변화에 따라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량수송과 먼거리 운반 등의 장점을 갖고 있는 선박운수였기에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각 포구가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포장은 구포장타령에서 보았듯이 교역지역이 낙동강과 해상교역의 접합점으로서 장점을 충분히 살린 경상도 최대의 포구상업 도회지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보면 구포장에서 교역된 대표적인 물품은 곡물, 목재, 시탄(柴炭), 생선, 소금 등이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최대 소금 교역지 이었다고 본다. 조선후기 낙동강 하류인 명지도와 녹두도(菉豆島)에서는 공염(公鹽)을 생산하였다. 당시 경상감영은 산산창(蒜山倉)의 염본미(鹽本米) 1,500석의 대금 4,500량을 두 섬의 염민(鹽民)에게 주고 생산된 소금 3,000석을 매 석에 7량으로 내어 팔아 염본미 대금을 갚도록 하였다. 공염 3,000석은 판매하는 기간이 일정할 뿐만 아니라 그 대금은 항상 선금으로 감영에 납입되어야 했다. 공염제도 하에서도 한정액 3,000석이상의 소금이 생산되었으며, 이 것은 사염으로서 사염상(私鹽商)들에게 우선 외상으로 주고 수금은 분할하여 일년 내내 판매되었다. 공염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여 순조 19년(1819)에 폐지되었고, 이 후에는 사염제도 하에서 염세를 받게 되었다. 소금 생산과 판매가 사염화 됨으로 더욱 많은 이윤을 취하기 위해 염전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명지도의 소금생산량은 더욱 증가되어 1935년까지 매년 60kg 들이로 10만 가마를 생산하였다.


생산된 소금은 처음에는 지토선과 광선을 소유하고 있던 선주인(船主人)에 의하여 경상지역 70여 고을에 공급되었다. 하지만 상품유통업에 참가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물동량의 증대 및 다양화는 기존의 유통조직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 기존의 상품유통구조는 시전상인이 정점으로 사상(私商)---선주인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포구주인(浦口主人)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상품유통의 보조자로서 상업담당세력의 성격을 지녔다기 보다는 상품유통의 기생자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포구주인은 서울에서 시전을 배제시키고, 외방포구에서도 상품유통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구포지역도 선주인을 배재시킨 포구주인에 의해 장악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소금산지와 인접해 있고 선박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낙동강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접합점에 위치한 구포가 소금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구주인에 대한 자료가 전해져 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다.      


이렇게 조선후기에 포구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성을 누려왔던 구포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쇠퇴의 길로 걸었다. 철도개통은 영남지방의 다량 상품유통에 변화를 일으켰다. 철도를 이용한 상품운송은 기존의 선박보다도 편리하고, 한편으로 민족상업자본 형성을 저지하기 위한 일제 식민정책으로 새로운 상권형성정책이 추진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따라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회지 형성과 이를 기점으로 다시 소단위 상업루트가 형성되었다. 즉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고, 철로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총독부가 영남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구포에서 출발되었던 강상운수의 대표적인 물품인 소금이 철로를 통해서 수송됨에 구포의 포구주인이 많은 이윤을 잃게 되자 아울러 구포장시도 쇄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