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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사상구의 洞 이야기

사상구의 洞 이야기

 

 사상구 상징마크

 

1.총설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區로 동쪽은 부산진구, 북쪽은 북구, 서쪽은 강서구, 남쪽은 서구·사하구와 접한다. 또한 동쪽에는 백양산(白楊山:642m)·구덕산(九德山:565m)을 잇는 능선이 솟아 고지대를 이루고, 서쪽에는 낙동강이 연변에 충적평야를 펼치며 남류한다. 구청 소재지는 사상구 학감대로 242 (감전동)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0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사상면이 되었다. 광복 이후 1963년에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할 때 부산진구 사상출장소가 되었다가 1975년에 구포출장소와 통합되어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되었으며, 1978년에 북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에 삼락동·모라동·덕포동·괘법동·감전동·주례동·학장동·엄궁동 지역이 북구로부터 분리되어 사상구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이곳에 공업단지가 조선되고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은 급속하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공업단지가 입지하면서 모라1동·덕포1동은 공업단지와 주택가 주변에 영세상가가 밀집하였다. 모라동은 신흥주거지역으로 아파트단지가 밀집해 있고, 학장동·덕포동·주례동 등도 대단위 아파트 밀집지역이다. 법정동으로 삼락(三樂)·모라(毛羅)·덕포(德浦)·괘법(掛法)·감전(甘田)·주례(周禮)·학장(鶴章)·엄궁(嚴弓) 등 8개 동이 있다. 면적 35.84㎢, 인구 26만 8,880명(2008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학감대로 242 (감전동)다.

사상공업단지와 강서구의 삼각주(三角洲) 지역을 잇는 남해지선고속도로가 제2도시고속국도와 연결되어 도시고속국도에 이어진 경부고속도로에 접속된다. 경부선 철도가 L자형으로 구역(區域)을 관통한다.

문화재로는 부산영산재(부산무형문화재 9)가 있고, 그밖에 운수사, 모라동 사당(祠堂), 덕포동 비석군, 사상팔경대 등이 있다. 

사상구 행정지도 (삼락동, 모라1동, 모라3동, 덕포1동, 덕포2동, 괘법동, 감전동, 주례1동, 주례2동, 주례3동, 엄궁동, 학장동) 

감전동[ Gamjeon-dong , 甘田洞 ]

면적 3.48㎢, 인구 1만 6695명(2008)이다. 산지가 거의 없는 평탄한 지역이며, 동쪽은 주례동, 북쪽은 괘법동·삼락동, 남쪽은 엄궁동·학장동, 서쪽은 낙동강에 접해 있다. 감전동의 옛 명칭은 '감동(甘東)'이며, '감동촌(甘東村)' 또는 '감동리(甘東里)'라고 불렸다. 감동의 어원은 검도·검터[險瀆]이며, '감(甘)'은 신(神)을 뜻한다. '검'은 '감'으로 바뀔 수 있고, '도'·'터'는 '동(洞)'으로 될 수 있으므로 '감동'은 신성한 땅을 의미한다. 험독은 중국에서 쓰는 말인데, 옛 한글로는 검도·검터이다.

 

법정동인 감전동은 행정동인 감전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산시로 편입되고 사상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개발되기 시작하였으며, 관내에 사상구청, 북부산세무서, 중고차 매매시장, 청과물을 취급하는 새벽시장이 있다.

 

가야로(伽倻路)는 낙동강의 제방까지 이어져 제방 밑에서 낙동로와 만나는데, 이 지점에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으로 통하는 낙동강교의 인터체인지가 있다. 1981년에 건설된 낙동강교는 길이가 1,765m로 당시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이곳에는 낙동강으로 통하는 수로(水路)가 있어 배가 드나들었으며, 선착장과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많이 있었다. 서감전(西甘田) 입구에 낙동강의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포플러나무 밑에 몇 채가 있었는데, 이곳을 일본인들이 '뽀뿌라마찌(포푸라마치)'라고 하여 지명처럼 불리게 되었으며, 2000년대 초까지 윤락업소 집결지로 남아 있었다. 서쪽 낙동강변에는 '서발'이라는 곳이 있다.

 

이는 '새벼리'의 음이 변한 것인데, 원래 '벼리'는 '낭떠러지'를 뜻한다. 옛날 감전동 지역은 모래의 퇴적으로 생기는 삼각주의 생성과 변동이 잦아 새로 생긴 뻘은 많이 있었으나 벼랑은 없었다. 따라서 '서발'은 '새로 생긴 뻘'이라는 의미로 생긴 지명으로 보인다.

 

괘법동[ Gwaebeop-dong , 掛法洞 ]

면적은 3.43㎢, 인구는 2만 2654명(2008)이다. 사상구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은 삼락동, 북쪽은 덕포동·모라동, 남쪽은 감전동·주례동, 동쪽은 부산진구에 접해 있다. 괘법동의 원래 명칭은 괘내리(掛乃里)이고, 괘내(掛乃)는 바닷가나 강변에 있는 마을 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사상면 괘법리(掛法里)라고 하였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되었다. 1978년에 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되었다. 괘법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이 지역을 지나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된 1903년 무렵에는 이곳에 기차역이 없었으므로 구포역까지 나가야 기차를 탈 수 있었다. 1921년에 사상역을 설치하고, 우암동으로 향하는 가야선(伽倻線)이 신설되어 사상역이 그 분기역으로 되었다. 이때 지어진 사상역사는 8·15 광복 후 공비들의 방화로 전소되고 현재의 역사는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역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야산도 구획정리사업과 사상공업단지의 조성으로 완전히 제거되어서 넓은 역구내 면적을 확보하고 있다. 사상역 앞에는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사상역 앞에는 가파른 절벽이 있어 벼랑산이라고도 하던 벼락산이 있었고, 여기에는 경관이 뛰어난 팔경대(八景臺)가 있었으나 사상역 설치로 사라졌다.

북동쪽 덕개골[德浦谷] 옆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터가 있었다. 자연석으로 된 주춧돌이 산재해 있었고, 조선시대 기와 조각과 분청사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경작하기 위하여 원 위치에서 옮겨졌으므로 그 규모나 양식은 알 수 없다.

 

모라동[ Mora-dong , 毛羅洞 ]

면적 5.01㎢, 인구 49,361명(2011.7)이다. 사상구 북쪽 지역으로 동쪽에 백양(642m)이 있으며, 서쪽은 삼락동, 남쪽은 덕포동·괘법동, 북쪽은 북구 구포동에 접해 있다. 모라(毛羅)는 '마을'이라는 우리말의 고대어로서 마을이라는 고유명사가 동명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사상면 모라리(毛羅里)라고 하였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되었다. 1978년에 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되었다. 법정동인 모라동은 행정동인 모라1,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초가집이 있던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는데, 1968년에 사상지구의 저습지대를 개발하여 공업단지로 조성하면서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마을을 지나는 경부선 철도 동편 산쪽으로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고, 서쪽 저지대에는 공장지대가 조성되었다.

운수산(雲水山)이라고도 하는 백양산에 있는 운수사(雲水寺)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절골[寺谷]이라고 하는데, 가장 큰 골이라고 하여 큰골 또는 장골이라고도 한다. 고동바위골은 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큰 산고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산고동은 주민들이 신성시하여 여기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모라동에서 구포동의 시랑골[侍郞谷]에 이르는 고개는 경사가 급하고 산길이 험하여, 소를 몰고 이 고개를 넘어가면 소가 굴러 버린다 하여 어부랑고개라고 한다. 모라동 북쪽지역을 '시찌메'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조세로 낸 곡식을 서울까지 배로 운반할 때 중간에서 쉬던 곳인 수참(水站)을 일본말로 부른 것이다.

고동바위골 민요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민들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 주게 하였는데, 이때에 불렀던 민요이다. 어쩔 수 없이 물을 날라다 주어야 했던 그 당시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삼락동[ Samnak-dong , 三樂洞 ]

면적 6.68㎢, 인구 8989명(2008)이다. 사상구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모라동·덕포동·괘법동, 남쪽은 감전동, 북쪽과 서쪽은 낙동강에 접해 있다. 삼락동은 소요리(所要里)라고도 하며, 낙동강변에 형성된 삼각주(三角洲)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좌이면(左耳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삼락리(三樂里)로 바뀌었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되었다. 1978년 북구에 속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되었다. 삼락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사상제방 동쪽의 저습지대는 지면이 낙동강보다 낮아서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지역이었는데, 1968년부터 이 지대를 개발하여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삼락동 지역은 많은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구포에서 삼락동에 걸쳐 있는 제방은 현재 시민들의 산책로로 애용되고 있다.

삼락동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은 가포(駕浦)이다. 가포는 현재 주택가로 변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옛날에는 낙동강의 배가 이곳까지 들어왔었다. 가포의 명칭은 가락동의 서낙동강 서쪽 강가에 있는 해포(海浦)와 같이 개[海]의 뜻에서 개포라고 부른 것이 가포로 음이 바뀐 것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삼락동의 샛강을 유두강(流頭江)이라고 했는데, 이 강은 구포의 범방산에서 발원하여 사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이어졌으며, 가포나루터에서 대저동의 덕두나루터를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었다. 유두강 주위에는 유두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는 삼락동에 포함되어 있다. 

관내에는 북부경찰서와 소방서가 있으며, 사상공업단지에 필요한 산업도로인 낙동로(洛東路)의 준공으로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면적 5.04㎢, 인구 2만 9975명(2008)이다. 사상구의 남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엄광산(503.7m), 남쪽에는 승학산(496.3m)이 있다. 동쪽은 학장동, 북쪽은 감전동·학장동, 남쪽은 사하구 하단동·당리동, 서쪽은 낙동강 하구에 접해 있다.

 

엄궁동[ Eomgung-dong , 嚴弓洞 ]

엄궁(嚴弓)이라는 동명은 신성한 신(神)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다른 유래로는 마을 동쪽에 있는 엄광산(嚴光山:해가 먼저 비치는 산) 기슭에 있는 동네라고 하여 엄광(嚴光)이라고 하다가 뒤에 글자가 바뀐 것이라고 한다.'광(光)'이 '궁(弓)'으로 바뀐 것은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낙동강변의 요지로서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곳이므로 무예 강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사상면 엄궁리(嚴弓里)라고 하였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바뀌었다. 1978년에 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되었다. 엄궁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옛날 엄궁동 지역은 산을 등지고 있어 해뜨는 시간이 늦고 겨울에는 낙동강의 세찬 바람이 불어와 주거지역으로는 부적합하였으나, 갈대지붕에 토담집을 짓고, 농업과 어업에 종사해 온 강변의 빈곤한 마을이었다. 부산시에 편입되고 사상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붕어낚시터로 유명한 양어장이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도 부산에 임시수도가 있을 때 이곳에서 낚시를 하였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심취되어 "참으로 평화로운 마을이다"라고 하여, 그 후 추종자들에 의해 이 마을을 평화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179)는 지리적 조건과 기후, 생태계 등의 여건이 좋아 세계적인 철새 서식지 및 도래지이다. 최근에는 낙동강 하구둑과 주변의 공장지대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심해져 찾아오는 철새가 줄어들고 있다. 

 

주례동[ Jurye-dong , 周禮洞 ]

면적 4.76㎢, 인구 6만 4086명(2008)이다. 사상구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원견산(高遠見山:504m)과 백양산(642m)의 기슭에 남북으로 자리잡고 있다. 북쪽은 괘법동, 남쪽은 학장동, 서쪽은 감전동·학장동, 동쪽은 부산진구 개금동과 접해 있다. 주례(周禮)는 농촌에서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만든 조직인 두레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사상면 주례리(周禮里)라고 하였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되었다. 1978년에 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바뀌었다. 법정동인 주례동은 행정동인 주례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례동은 상·하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위에 있는 동네를 작은마을[小里]이라 하고, 아랫마을은 주례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어서 본리(本里) 또는 큰부락이라고 하였다. 작은마을은 고원견산의 북쪽 기슭 고지대에 있어서 멀리 낙동강 김해평야를 바라볼 수 있었다.

부산시에 편입되고 사상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이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화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업단지는 주로 사상구의 서쪽에 있으므로 주례동 지역의 공장수는 많지 않다. 관내에는 동서대학·경남정보대학 등과 부산구치소가 있다.

옛 지명으로는 골새마을·냉정(冷井)·냉정고개·몰랑등·소당나래·엄골 등이 있다. 냉정 약수터는 가야동에서 주례동으로 넘어오는 고개 밑에 있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유명하여 1714년(숙종 40)에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는 이곳의 물맛이 천하 일품이었다고 전한다.
 

 

학장동[ Hakjang-dong , 鶴章洞 ]

면적 5.48㎢, 인구 3만 6904명(2008)이다. 남쪽으로 구덕산(565m), 동쪽에는 엄광산(503.7m)이 있으며, 북쪽은 감전동·주례동, 서쪽은 감전동·엄궁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이곳에 동서로 자리잡고 있던 학성(鶴城)과 장문(場門)의 두 마을을 합치면서 생긴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상면(沙上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사상면 학장리(鶴章里)라고 하였고, 1963년에 부산진구 소속으로 되었다. 1978년에 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사상구 관할로 바뀌었다. 학장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학장동은 학장천(鶴章川)을 경계로 하여 서북쪽의 저지대와 동남쪽의 산지대로 구분되는데, 마을의 절반 이상이 산지대이다. 산지대는 구덕산엄광산 산자락 지역이며, 저지대는 북쪽의 가야로(伽倻路)와 서쪽의 학장배수로를 경계로 감전동과 주례동에 접하고 있다. 학장배수로는 사상제방 너머의 낙동강 수위보다 낮은 저습지대의 배수를 위해 인공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부산시에 편입되고 사상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외지였던 이 지역의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1986년에 개통된 구덕터널은 도심과 직접 연결되고 부마고속도로와도 이어져 학장동의 실용성있는 명물이 되었다.

학장동 지역은 조선시대에 동평현(東平縣)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군사상의 요지였으므로 엄광산 기슭에 학성(鶴城)을 축성하였는데, 현재도 주례동 쪽으로 성터가 남아 있다. 학장 패총(貝塚)은 낙동강 하구지역에 취락을 형성해 살던 김해문화기(金海文化期)의 유적으로 이곳이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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