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무와 박필희 사장
사상지역의 최초의 대규모 공장이 바로 당시 서괘에 있엇던 신라고무공업사(사장 박필희)였다. 해방 후 1948년 부산에는 하루 3만 켤레 이상을 생산하는 태화, 삼화, 국제, 동양, 보생 등 14개사나 되었으며 무려 71개의 신발공장이 있었다. 또한 1949년에는 [흥아타이어]공장의 본격생산 등이 가세하면서 부산의 고무공업이 한국공업의 중심산업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사상면 괘법리에 신라고무가 설립하게 된 것은 박필희 사장이 사상면 모라 출생으로 1922년 3월 사상공립보통학교와 동명중학을 거쳐 동래고보 졸업하였다. 1932년 동향의 박상환이 운영한 동아일보 사상분국에 총무로 근무하였으며 1937년에 元山에서 동래고보 후배 이상용과 함께 天光고무를 운영하였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 와 1947년 신라고무공업사를 창립하게 된다.
1954년 미군들이 촬영한 덕포, 괘법 사진속의 신라고무공업사 부분
신라고무공업사의 서울사무소-서울 중구 태평로 1가 29의 1
신라고무공업사의 신발
브랜드 "王" 표 고무신, 운동화 등 생산으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지역 경제에 큰 역활을 하였다. 하지만 가정사로 인해 1967년에 20년간 운영해 온 회사 문을 닿게된다. 6만9천여평의 공장을 국제 양정모 사장에게 매각하여 그나마 신발공장의 명맥은 이어지는 셈이다.
사족으로 훗날 두산그룹 창업주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필희 사장으로부터 6.25때 피난 내려 온 두산그룹 창업주(朴斗秉)는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민간기업인 동양맥주 이사진에 참여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다. 1952년 5월22일 부산에서 동양맥주(주) 창립 시 이사진으로 참여한 박필희 사장의 약력을 아래와 같이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출처; 매일경제신문 1973.6.18. 산업인맥 동양맥주 上
- 朴(박)필희씨(22년東萊高(동래고)졸,
37년咸南元山(함남원산)에서天光(천광)고무경영,
47년부산의 新羅(신라)고무공업사경영,현재에이름).
아울러 1959년 국내 최초의 민간은행인 '서울은행'의 창립 때 신라고무공업사의 박필희 사장이 경영진(이사)에 참여하게 된다.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온 이정림 회장에게 거주할 집을 제공한 인연으로 맺은 박필희 사장은 서울은행 창립 때 이정림회장의 제의로 참여하게 된 내력이 있다. 이처럼 박필희 사장은 1970년대 까지 경제활동에 참여 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화학
1965년 매출액기준 18위, 1975년 39위, 1985년 23위를 기록했으나 1995년 사라짐. 1949년 12월 21일 양정모씨가 부산 사상공장에서 신발류 제조업을 목적으로 창업, 훗날 국제그룹의 모태가 되었으며 1972년 수출비중 90%, 국내시장 점유율 40%. 1975년에 국제상사로 사명변경. 전두환정권하에서 기업해체의 불운을 겪음.
1968년 3월 양사 재산분할 중역회의를 통해 고정자산은 현존대로 분할하고 운전자본은 통틀어 반분키로 했다. 그 당시 고정자산은 진양화학이 10억원 정도였고 국제화학은 3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국제와 진양이 분리된 직후 아버지 양태진은 회장으로 승격되면서 진양화학 경영에 전념하고 국제화학은 그때부터 양정모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가 사장에 취임하자 두 갈래 항로를 두고 고심했다. 하나는 범일동에 있던 국제화학의 낙후된 시설을 교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활을 걸고 진양을 능가하는 새로운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양정모는 결연히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사상공단에 있는 신라고무공업사(박필희 시장)의 부지 6만9천평을 매입,대규모 공장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에서 최신 기계를 도입했다. 자금은 심지어 사채까지 끌어다 사용했다.
국제화학 사상공장
프로스펙스 라인
드디어 1969년 봄 사상공장의 거함이 출항하는 진수식을 가졌는데 그해의 수출 실적은 전년도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시중에서는 국제화학에 대한 온갖 악의적 루머가 나돌았다. '양정모가 진양화학을 내놓게 되자 오기로 이성을 잃은 것 같다' '국제화학이 경영부실에 빠져 기능공들이 동요하고 특약점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발업계는 물론 금융계와 사채시장에까지 위기설이 퍼지자 일부 사채업자들은 상환기간이 남았는데도 원금이나마 받아내겠다며 몰려들었다. 기업인에게 제일 무서운 게 채귀(債鬼)라더니 그때 국제화학이 마치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유도
1914년 이 섬이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서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와 유두리가 된다. 뒤이어 1931년부터 1935년에 시작된 낙동강 흐름을 바꾼 낙동강일천식공사와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어 섬의 일부가 육지가 되고 대부분 수몰되고 만다. 조선 중엽 김녕김씨(사륙신 김문기의 현손)가 이 섬에 들어 오면서 살기 시작한 섬 사람들은 양산, 구포, 모라,삼락, 괘법동 등지에 흩어지게 된다. 1929년에 펴낸 지도에 의하면 남북으로 긴 고구마 모양의 섬은 위쪽은 삼락리, 아래쪽은 유두리였으며
1932년 동아일보에 의하면 삼락리와 유두리에는 6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이때 15대를 이어 오면서 살아 온 김녕김씨 후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 20여년전에 모라동 뒷산(사상구 모라3동 산 115)에 입향조 호(號)를 따라 유헌재(柳軒齋)를 건립하여 입향조 이하 조상의 향제를 거행하고 있다
옛 영선고개(동광동 인쇄골목~영주시장)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코모도호텔 앞~메리놀병원 앞~가톨릭센터 앞~대청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를 영선고개라고 부르는데, 이 고개는 원래 영선고개가 아니라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렸었다. 6.25 전쟁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아스팔트 길을 냄으로써 ‘부산 아스팔트 도로 제1호’가 됐던 것.
원래 영선고개는 유엔도로 동쪽 밑에 있는 언덕 바로 윗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로, 영주동 시장 남쪽 입구~부원아파트 뒤~논치시장~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영선고개 착평공사(1909~1912)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 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이름을 따서 붙인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갯길은 초량왜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낮에조차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던 소름끼치는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함부로 넘어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렵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왜관 객사(客舍)와 임소(任所)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 바로 이 고갯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영선고개" 오솔길을 사람들 누구나가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은 1912년 영선산이 깡그리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닦인 뒤부터였다.
소름 끼치도록 음침한 처형장 영선상이 헐리고 나자 "영선고개" 오솔길은 이때부터 우거져 있는 녹음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전망 탁 튀어 시원한 고갯길로 탈바꿈했었다고 한다.
오늘날 영선고개는 영주터널 입구에서 코모도호텔을 지나 중구청에서 국제시장사거리에 이르는 길이다. 지금은 6.25동란때의 피난민 시절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발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와 구청, 호텔, 여관, 상가들이 빽곡히 들어서 있다.
구포다리
-1930.9.13 구포대교 건설착공,
-1933.3.7 준공 개통
-1932.3.8 영도대교 착공
-1934.11.23 영도대교 준공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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