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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淸朝의 건설자들-康熙, 雍正, 乾隆

20. 康熙(강희), 雍正(옹정), 乾隆(건륭) - 淸朝(청조)의 건설자들

 

강희                            옹정                            건륭

 

정복왕조인 만주족의 청조가 거대한 중국을 무려 3세기 동안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기반은 초창기 세 황제인 강희, 옹정, 건륭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륭에 의한 통치가 끝나자 이를 분기점으로 청조가 쇠퇴하고 마침내 청조는 물론 전제왕정 자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강희는 世祖(세조)인 順治(순치)(재위기간 1644-1661)의 셋째 아들로서 본명은 玄燁(화엽)이다. 그는 1662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대신들에 의해 사실상 좌우됐다. 그러나 1669년 마친내 주위의 적대세력을 제거하고 실질적인 황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강희가 직면혔던 문제는 아직도 청조에 대항하고 있는 明(명)의 잔류세력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서남지역에서는 삼번(三藩)이 저항하다 1673년 반란을 일으켜 청조에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이에 강희는 즉각 섬멸군을 보냈지만 적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진압은 무려 8년을 끌었다. 다른 한편 대만에서는 정성공이 바다를 보호벽으로 삼아 청조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희의 노력으로 대만의 정씨정권이 투항함으로써 중국대륙 내의 저항세력은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다.


그는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통치기간중 <古今圖書集成(고금도서집성)>이나 <康熙字典(강희자전)>과 같은 대저의 찬술작업도 펼쳤다, <고금도서집성>은 총 1만권으로 이루어졌는데 고금의 문헌을 사항별로 수집, 정리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강희자전>은 4만 2천자로 구성됐으며 지금도 한자해독에 귀중한 참고문헌으로 손꼽히고 있다.

 

강희가 60년 이상을 재위하고 사망하자 그의 4남인 옹정이 1723년에 즉위하여 1735년 죽었다. 옹정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재위시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고 대신 이름을 상자에 써넣었다가 황제가 서거한 후 발표하는 제도를 설치했다.

 

강희와 달리 옹정은 外治(외치)에 소극적인 대신 內治(내치)의 안정에 주력했다. 이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조세제도의 개혁이다. 이른바 地丁銀(지정은)제도를 실시, 조세와 부역을 토지세인 地丁(지정)으로 통합하여 단일항목의 세금으로 묶었다. 이 제도는 당시까지 성행했던 특권층의 탈세를 막는 장치로 활용됐다.

옹정이 재위 13년만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弘歷(홍력)이 24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건륭이었다. 이때가 1736년이었으며, 그는 무려 60여년이나 통치하고 1795년 사망했다. 그는 무려 60여년이나 통치하고 1795년 사망했다. 그가 즉위했을 때는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안정된 통치기반을 더욱 공고히 만들기 위해 우선 지식인을 회유하는 대대적인 문화진흥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四庫全書(사고전서)>라는 전대미문의 대편찬사업이 그에 의해 추진됐다. 연인원 1만 5천명의 학자가 무려 2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동원되어 모두 3만 6천권, 3천 4백 50책의 방대한 편찬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10여차례의 대외원정을 통해 영토확장을 추진했다. 건륭의 마무리 작업에 의해 중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파미르산맥까지, 북쪽으로 시베리아까지, 동쪽으로 태평양까지, 동북으로 黑龍江(흑룡강)과 우수리강까지, 그리고 남쪽으로 南沙群島(남사군도)까지 펼쳐지기에 이르렀다.

 

 

강희황제(康熙皇帝)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는 청(淸)나라 제4대 황제로 이름이 현엽(玄燁 : 1654~1722)이고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셋째 아들이다. 순치황제가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하였다. 61년간 재위하여 중국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향년 69세로 병사하였으나 일설에는 대신 융과다(隆科多)에게 피살되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장지는 경릉(景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서북쪽 70리 창서산<昌瑞山>)이다.

 

현엽은 1661년 정월 순치황제가 병사한 그 날(辛亥日)에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강희(康熙)"로 고쳤다. 현엽은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에는 오배(鰲拜) 등 4명의 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6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권력을 전횡하고 있던 오배 등을 처형하고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대만(臺灣)을 다스리던 정성공(鄭成功)의 손자 정극상(鄭克塽)을 항복시켜 중국을 새롭게 통일하였다.

 

또 야크사(雅克薩)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축출한 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여 동부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회강(回疆 : 회교도들이 거주하는 변경지역으로 신강성 천산남로<天山南路>)과 즁갈(準噶爾) 등지의 귀족 반란을 평정하고 농경을 장려하였으며, 한족 지식인들과 연계하여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강희자전(康熙字田)》등을 편찬하고, 자연과학을 크게 제창하여 《황조전람도(皇朝全覽圖)》등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다민족 국가인 청나라의 국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짐으로써 청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통일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긴 하였지만 여러 차례의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고, 농민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등 백성들을 아주 심하게 탄압했다.

 

성조는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충신과 간신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았다. 그의 재위 말기에 강남총독(江南總督) 갈례(噶禮)가 탐욕스럽고 교만하여 무고한 사람을 헤치길 좋아하였다. 당시 소주지부(蘇州知府) 진붕년(陳鵬年)은 청렴한 관리로 그 성품이 강직하고 아첨을 싫어하여 갈례와 잦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갈례는 그를 시기하여 탄핵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흑룡강(黑龍江)으로 유배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성조는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진붕년의 뛰어난 재학(才學)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북경으로 불러 도서 편찬을 맡기려 하였다. 갈례는 다시 성조에게 상소를 올려 진붕년이 지은 <유호구(游虎丘)>라는 시에 성조에 대한 원한과 불만의 정서가 가득하니 그를 엄중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 시의 원문을 동봉하여 바쳤다. 성조는 진붕년의 시를 자세히 읽어본 후 자기에 대해 어떠한 원한이나 불만의 내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다시 갈례의 상소를 자세히 읽어본 후에 그것이 진붕년을 모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성조는 즉시 신하들을 어전에 불러모아 놓고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갈례는 말썽을 일으키길 좋아하여 소주지부 진붕년이 약간 명성이 있다고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의 <유호구>시에 원한과 불만의 마음이 있다고 상소를 올렸소. 짐이 그 시를 자세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으니 이는 완전히 무고인 것이오. 비천한 소인배들은 그 수단이 대체로 이러한데 짐이 어찌 이러한 소인배의 속임수를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이렇게 말을 한 다음 성조는 갈례의 상소와 진붕년의 시를 신하들에게 공개하여 읽어보게 하였다. 갈례는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꼴이 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성조는 갈례의 정수리에 일침을 가하여 심성이 바르지 못하고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신하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1722년 봄 성조의 나이 70여세 때 그는 경로사업의 일환으로 65세 이상의 만주족과 한족 관리 및 퇴직 관리들을 모두 건청궁(乾淸宮)으로 불러들여 늦게까지 주연을 베풀었다. 이 주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약 1000여명에 달했기 때문에 그것을 "천수회(千叟會)"라 한다.

 

성조에게는 모두 35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파당을 결성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에 성조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위한지 14년 후에 즉시 4세의 적장자 윤잉(允礽)을 황태자로 삼았다가 3년 후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였다.

 

2개월 후에 다시 윤잉을 황태자로 삼았으나, 24년 후에 그는 태자의 권력이 비대해져 자신의 황권을 직접 위협하자 다시 윤잉을 폐위시키고 구금하였다.

 

결국 황태자 책봉을 너무 일찍 공개하여 많은 폐단을 경험한 성조는 임종 전에 유서를 남겨 거기에 후계자 문제를 명시해 두었다. 그가 만년에 가장 마음에 둔 아들은 14번째 아들 윤제(允禵)였다. 그는 특별히 윤제를 무변대장군(撫邊大將軍)에 임명하여 그에게 서북지역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키는 중임을 맡겼다.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부여하여 그의 권위를 높여 줌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여건을 마련해주었던 것이었다.

 

1722년 11월 8일 성조는 감기에 걸려 심한 열과 기침으로 호흡곤란에 시달리다 어의의 치료로 병세가 호전되어 창춘원(暢春園)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그는 친히 윤제를 후계자에 임명한다는 유서를 썼다고 한다. 당시 성조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신하는 북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보군통령(步軍統領) 융과다(隆科多)였다. 융과다는 성조의 넷째 아들 윤정(胤禎 : 청 5대 세종<世宗> 옹정황제<雍正皇帝>)의 외삼촌이자 그의 측근으로 줄곧 윤정을 황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조는 윤정을 전혀 의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 이에 융과다는 적절한 때를 틈다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十四子)"고 되어 있는 유서의 내용을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于四子)"로 바꿔 버렸다. 11월 13일 성조가 돌연히 사망하였는데 융과다에 의해 시해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어떤 학자들은 성조의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 친히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서를 공개하였으며, 서북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윤제와 구금되어 있던 윤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황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유서가 수정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서는 만주어로 씌여졌으므로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十四子)"를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노라(傳位于四子)"로 고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성조가 갑자기 사망하였으므로 유서를 남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하나 제기되고 있다. 즉 윤정은 평소 성조의 총애를 받았는데, 8세 때는 성조를 따라 북방지역으로 순행을 갔고, 10세 때는 사냥을 나갔다가 패자(貝子: 청대 작위의 하나)에 책봉되기도 하였으며, 32세 때는 친왕(親王: 청대 최상급의 작위)에 책봉되었고, 일찍이 황명을 받들어 조정의 군정(軍政)과 재정의 대권을 관장하였다. 여러 황자들이 노골적으로 황태자 쟁탈전을 벌일 때 윤정은 비록 암암리에 세력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거기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성조의 환심을 사는데 치중했다. 이에 성조는 윤제와 윤정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윤정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성조는 그가 죽은 후의 묘호(廟號)이며, 역사에서는 그를 강희황제(康熙皇帝)라 칭한다.

 

 

雍正皇帝(옹정황제)

성명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胤).

묘호 세종(世宗).

시호 헌제(憲帝).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윤당(允)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朱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광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칭하이[淸海]·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 옹정황제의 황위 계승

중국의 역사에서 황제와 자식, 황자(皇子)들 사이에서 가장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인 시대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년간(1661-1722)이었다. 그 원인은 강희황제가 너무나 많은 자식을 낳았고, 62년이라고 하는 너무나 오랜 기간 황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평생에 모두 5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에 아들은 35명, 딸은 20명을 얻었다. 아들 가운데 20명이 장성하였고, 딸은 8명이 장성하였다.

 

강희제는 여덟살때에 황제가 되어, 무려 62년간 재위하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오래 황제 노릇을 한 기록을 세웠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성년을 넘긴 황자들만도 20명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일찍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 오로지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황제와 황자(皇子)들, 그리고 황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각축은 서로 뒤엉켜 복잡한 과정을 연출하였다. 이보다 시기는 약간 뒤지지만 조선시대에서도 21대 임금인 영조가 무려 52년(1724-1776)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왕노릇하면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이 있었듯이 이런 사례는 청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희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당연히 일찍 죽고 싶지 않았고, 자식들이 자신의 지위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상심하고 두려워 하였지만, 결국에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식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를 지켰다.

 

강희제는 여덟에 제위에 올랐지만 매우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황제였다. 그는 열네살 때에 조정의 권신(權臣)인 오배(鰲拜)를 숙청하였고, 스무살 때에는 운남성에서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친히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여 8년 동안의 전투끝에 그를 제압하였다. 일생의 업적을 따진다면 정치 군사 방면 뿐만 아니라 문화사업, 산업부흥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강희제는 오히려 자식들 때문에 상심한 날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때때로 그 문제로 인하여 눈물을 흘린적이 많았다. 그는 일찌기 대신들에게 장수(長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의 복 중에서 부귀영화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소. 역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장수(長壽)와 편안히 죽는 일이오. 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제 명에 죽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소?"

 

강희제는 계승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날 것으로 판단하고 일찍부터 대비책을 세워 놓았다. 그는 22살때인 1676년 1월 27일에 겨우 한 살에 불과한 둘째아들 적장자(嫡長子) 윤잉(允礽)을 황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강희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어린아이는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지만 자라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결과 질투에 관해서 어떤 사람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남성들의 무의식적인 소유욕에서 발생되는 천성이자 잠재행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권력의 각축전에서는 부차적인 것이고 진정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열쇠는 태자의 특수한 지위에 있었다. 대신들은 자신의 앞날을 고려하여 황제와 태자의 사이에서 미래를 저울질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태자의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고 황제의 권력을 위협한다. 두 사람의 모순은 격화되고 일시에 충돌이 발생한다.

 

윤잉은 어릴때 태자에 책봉되었고, 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장차 황제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30여년 동안 태자의 지위에 머물다 끝내는 황제가 되지 못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사탕을 먹이고 그 다음부터 먹지 못하게 만들면 아이는 결코 참지 못한다. 윤잉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가 삼십년이 되어가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투덜거렸다.

 

"사십년을 천자 노릇하는 사람이 어디있나?"

윤잉은 아버지 강희제가 빨리 죽지 않나 푸념하였고, 이를 느낀 강희제는 아들을 미워하였다. 두 사람의 모순은 이로부터 점점 격화되었다.

 

강희제는 태자와 함께 순행을 나갔을때 태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저녁에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언제 태자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공포에 떨게했다.

 

강희제는 태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3가지 덕목을 생각했다.

첫째는 부황(父皇)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며, 결코 사당(私黨)을 만들어 제위(帝位)를 강제로 뺏으려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

둘째는 성품이 어질고(仁) 의(義)로워야 하고, 훗날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셋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혈족간에 다툼이 없어야 할 것.

 

이 3가지 정도는 충분히 갖추어야 태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황태자 윤잉은 자격 미달이었다. 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강희 47년(1708년)에 태자를 폐출하였다.

 

윤잉이 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희망이 별로 없던 다른 자식들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태자에서 쫒겨난 윤잉을 포함하여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황자(皇子)들은 모두 17명이었다. 서장자(庶長子)인 윤지(胤禔), 2자인 황태자 윤잉(胤礽), 3자인 윤지(胤祉), 4자인 윤진(胤禛), 5자인 윤기(胤祺), 6자인 윤조(胤祚), 7자인 윤우(胤祐), 8자인 윤사(胤祀), 9자인 윤당(胤당), 10자인 윤아(胤아), 11자인 윤자(胤자), 12자인 윤도(胤祹), 13자인 윤상(胤祥), 14자인 윤지(胤지), 15자인 윤우(胤우), 16자인 윤록(胤祿), 18자인 윤해(胤해)이다.

 

그중에서 선두는 대아가(大阿哥 : 만주어로 황제의 큰아들) 윤지(胤禔)였다. 그는 태자였던 윤잉보다 네살이 많았으나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혜비(惠妃)의 소생으로 서자(庶子)였다. 하지만 서자라도 결코 태자가 되지 못하는 법은 없었다. 만일 서자의 어머니가 황후가 되면 서자는 적장자의 지위로 바뀐다.

 

윤지는 어려서부터 강희제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강희제를 따라 전쟁에도 출정하였으며, 강희제는 때때로 업무를 그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윤지는 황자(皇子)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자이면서도 적자와 서자라는 구별에 의해서 태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기회를 찾았다. 심지어 라마(喇嘛)를 초청하여 윤잉을 저주하는 축주(祝呪)를 벌였다. 윤잉이 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윤지는 강희제에게 나아가 윤잉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흥분이 지나친 그는 자신에게 윤잉을 죽이는 임무를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윤잉이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강희제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고, 또한 강희제가 현명한 군주라는 사실을 윤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더욱이 강희제는 아들을 죽였다는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강희제는 윤지의 흉악하고 비정한 요청에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며 곧바로 윤지에게 '난신적자(亂臣賊子)'라는 죄명을 내리고 감금을 명하였다.

 

윤잉과 윤지가 밀려나자 황위 계승권에 가장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여덟째 윤사(胤祀)로 좁혀졌다. 그는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 났으며, 품덕과 행동이 우아하고 단정했다. 특히 그는 다른 사람을 끌어 들이는 매력이 풍부했다.

조정의 대부분 신하들과 많은 황족(皇族)들은 적극적으로 윤사를 지지했다. 특히 아홉째 윤당(胤당), 열넷째 윤지(胤지)가 그와 사이가 절친하였다.

 

태자 윤잉이 폐위되고, 대아가 윤지가 구금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대신들을 소집하고, 두 명을 제외한 황자(皇子)들 중에서 황태자를 한 명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여덟째 윤사와 가장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아령아(阿靈阿)와 예부시랑(禮部侍郞) 규서(揆敍)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각자의 손바닥에 여덟 팔(八)자를 그려 황제 앞에 펴보이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여덟째 윤사를 황태자로 추대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윤사가 태자가 되는 일은 이제 절차만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하나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권력의 각축에서 황제가 누리는 지위와 고독과 불안을 염두에 두지않았다. 이 일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여덟째 윤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강희제는 비록 황태자를 내세우고 언젠가는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생각하였지만, 대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태자는 원치 않았다. 황제가 느끼기에 윤사를 지지하는 세력이 현실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강희제는 경사(經史)에 밝은 황제로 송대 사마광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달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 이래로 이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된 사례를 많이 알고 있었다.

 

태자 윤잉이 폐위된 표면상의 이유는 불인불효(不仁不孝)였지만 이는 구실에 불과하였고, 실질적인 까닭은 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확대되자 황제가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아가 윤지가 구금된 것도, 혈육도 마다않고 죽이는 그런 성격의 태자라면 어느때고 아버지마저 죽일 수 있다는 염려에서였다.

 

여덟째 윤사가 조정대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태자에 천거되자, 강희제는 윤잉의 세력과 비교하여 윤사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세력이 결코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자신이 윤잉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여덟째 윤사가 은밀하게 세력을 확장하였으리라고 판단하였다.

 

강희제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튿날, 윤사는 태자에 임명한다는 황제의 조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적장자 윤잉을 다시 태자로 임명한다."

강희제는 윤잉을 내세워 윤사의 세력을 견제하게 만들고, 자신은 직접 윤사를 통제하였다. 그래도 윤사의 세력이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기세를 떨쳐가자 어느날 윤사를 불러 소리쳤다.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니, 너와 부자의 인연을 끊겠다."

 

강희제는 더나아가 윤사를 지지하였던 관리들을 색출하여 내쫒았다. 이렇게 볼때 윤사가 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강희제의 마음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윤사의 정치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강희제의 말년에 이르러 공개적으로 여덟째가 가장 어질고 총명하다고 선전하였다.

 

태자 윤잉이 폐위되었다가 복권이 된 것은 단지 윤사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강희제와 윤잉의 근본적인 모순은 여전히 해결이 이루어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모순은 강희제 51(1712년)년에 폭발하였다. 이 해에 강희제는 태자가 사당(私黨)을 결성하여 여러가지 움모를 꾸미고, 조정을 문란케 한 죄를 몰아 다시 폐위시키고 구금하였다.

 

이후 강희제는 태자를 한동안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전권을 휘두르면서도 의심이 많아, 태자를 내세우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봉건 전제정치에서 황위 계승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계승자를 정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래 끌면 끌수록 조정과 황실의 혼란은 가중되기 마련이다.

 

현재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성인이 된 십 여명의 황자와 이미 폐출된 윤잉, 여덟째 윤사도 포함된다. 특히 윤잉과 윤사는 비록 감금되어 있다 하더라도 황제가 갑자기 죽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일정의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더욱이 청나라는 중원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제도 속에 부락연맹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때문에 어떤 황자는 팔기병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만일 정치적인 혼란이 일시에 벌어진다면 강희제도 막을 수 없는 돌발적인 문제가 이들 황자에게서 발생 할 수도 있었다.

 

강희 57년(1718년), 서서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조짐의 선두는 열넷째 윤지였다. 이 해에 강희제는 윤지를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으로 삼았다.

 

강희제 이래 중국의 북방에 있던 몽골족이 서서히 강성하기 시작하여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몽골족은 강희제 50년(1711년) 이후, 내몽골의 서부, 청해, 신강, 티벳 일대를 통제하고, 점차 섬서, 감숙, 사천, 운남을 위협하였다.

 

윤지의 출정은 매우 중대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당시의 가장 첨예한 정치적, 군사적 임무였다. 강희제는 가장 믿을만한 장수를 보내어 이 지역을 장악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에 태자가 없는 상황에서 강희제는 열넷째 윤지를 대장군으로 삼아 출정시켰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누르하치의 십삼기병(十三騎兵)에서 출발하여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획득한 민족으로 전공(戰功)을 매우 중시하였다. 만일 출정한 황자가 빛나는 전공을 세운다면 그의 지위와 영향력은 상당히 팽창하고, 그 위세와 신망으로 황위의 계승권자까지 이를 수가 있엇다.

 

강희제는 어떤 의도로 열넷째 윤지를 선택했을까?

그는 황후의 소생으로 적출이었다. 정치적 재간이 뛰어나고, 위인됨이 중후하고 충직하였다. 강희제는 이 점을 고려하였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윤지는 성인이 된 황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고 직위도 낮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수년전부터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암투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점이 강희제의 눈에 띄었다.

 

청나라의 황자는 직급이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 패자(貝子)로 나뉘어졌다. 통상적으로 승급은 나이가 들면서 한계단씩 올라갔다.

 

윤지는 이때 가장 낮은 직급인 패자였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여러 황자는 대부분이 정치적 재간이 부족하여, 어떤 황자는 행동이 활발하지 못해 강희제의 눈에 들지 못했다.

 

강희제는 나이가 예순 여섯에 이르자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후사(後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이 많은 강희제는 당장에 권력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세력이 약한 윤지가 황위계승권자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이때 윤지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강희제는 윤제가 나이가 어리고 세력이 없으므로 그에게 특수한 공적을 쌓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우선 그는 윤지를 출정시키기에 앞서서 대신들에게 선언했다.

 

"과인은 이미 태자를 세우는 문제를 고려하였소. 믿을 만한 황자를 내세울테니 모두 복종하기 바라오."

얼마후 강희제는 14째 윤지를 무원대장군으로 삼고 출정을 시켰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강희제는 출정에 앞서 윤지에게 왕(王)이 사용하는 깃발을 하사하고, 또한 '대장군왕(大將軍王)'이라는 호칭도 내렸다. 게다가 매우 웅장하고 성대한 출정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윤지가 비록 패자의 신분이지만 이미 왕(王)과 같은 서열에 올라 있음을 표시하며, 바야흐로 태자의 직위를 계승하는 암시였다.

 

조정의 대신들과 황족들은 강희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윤지를 태자처럼 대우하였다. 강희 60년(1721년), 대장군 윤지가 강희제의 부름을 받고 전선에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수많은 대신들이 성 밖에까지 나가 윤지를 영접하였다. 아포란(阿布蘭)이라고 불리우는 어느 종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직위를 갖고 말한다면 아포란은 윤지의 위였는데, 그런 그가 윤지에게 예를 올린 행동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못하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아포란은 윤지를 태자처럼 여기고 미리 얼굴 익히기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 여덟째 윤사를 지지하였던 정치세력은, 윤사와 가깝게 지냈던 윤지의 지위가 점차 올라가자 매우 기뻐하였다.

 

윤지는 무원대장군으로 임명되고 무려 4년이나 전선에 있으면서 티벳을 청나라의 관할로 만드는데 중대한 전과를 올렸다. 이때 강희제는 몽골부족과 강화를 맺고 서북지역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에 윤지는 몽골족과 평화적으로 협정을 맺고 북경으로 회군하였다.

 

강희 61년(1722년), 윤지는 커다란 공로를 세우고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희제가 서거하였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황제의 자리는 넷째 윤진(胤禛)에게 돌아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까지 의외로 넷째 윤진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윤잉이 두번째로 폐출을 당하고, 대아가가 미움을 받아 감금되었을때 사람들은 여덟째를 주시하였다. 사람들은 셋째 윤지와 마찬가지로 넷째 윤진에게도 정치적인 재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윤진도 처음에는 여느 황자들처럼 강희제의 의심을 받아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혈육의 정이나 인간미를 중시하고 강희제나 형제들에게 따스하게 대하였다.

윤사가 정치세력을 키우다 발각되어 엄한 벌을 받았을때도, 넷째는 강희제 앞에서 혈육의 정(情)을 들먹이며 죄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윤사가 황위 계승권에서 물러나고, 많은 황자들이 다시 연합하여 다투고 있을때도 그는 전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강희제는 황자들이 사당(私黨)을 결성하는지 여부를 비밀리에 조사 하였지만 넷째 윤진의 옹정부(雍正府)는 항상 드나드는 사람없이 조용하다는 결과만 얻었다.

 

윤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권력욕과 두려움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쉽게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였다. 이것이 훗날 옹정제가 되는 윤진이 자신의 운명을 건 첫 번째 선택이었다.

윤진의 참모인 대택(戴鐸)은 윤진에게 자주 경고하였다.

 

"폐하는 영명하지만, 의심이 많습니다.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 하십시오. 가능한 재능을 숨기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길 수 있는 고리를 장악하십시오."

 

윤진은 처음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강희제의 환심을 사고, 태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 하지만 점차로 강희제의 성격을 알고부터 적극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앉아 세월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윤진은 참모의 조언에 따라 많은 대신들과 교분을 피하였고, 세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대신 두 명과 사귀었다.

 

한 명은 융과다(隆科多)였다. 그는 황후의 동모형(同母兄)으로 윤진의 외삼촌이었고, 보병의 최고지휘관으로 북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른 한 사람은 년갱요(年羹堯)였다. 그는 사천(四川)지방의 순무(巡撫)로서,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을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주요 장군의 하나였다. 만일 혼란이 일어났을때 열넷째 윤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그였다.

 

윤진은 오랜 기간동안 황위계승권에 끼어 들지 않았지만, 단 한번의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때 흐름을 장악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윤진은 봉건정치의 권력각축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임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강희 61년(1722) 10월 말, 서북쪽의 몽골족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북경을 압박하였다. 강희제는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오랜 기간의 전투를 끝내고자 하였다.

 

이 해 11월 초이레, 강희제는 북경의 서북쪽 교외에 있는 창춘원(暢春園)에 행차하였다. 다음 날, 강희제는 갑자기 풍한(風寒)에 들어 자리에 누웠다.

 

이 달 열흘에서 보름까지는 동지(冬至) 대제(大祭)가 있었다. 재계(齋戒)는 우선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조상에게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몸을 씻는 예식이었다. 이때 강희제는 추위에 몸을 씻다가 풍한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넷째 윤진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창춘원으로 사람을 보내 강희제의 병세를 파악하였다. 강희제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13일 아침, 강희제의 병은 더이상 나을 수 없는 선까지 이르렀다.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융과다는 강희제의 조서를 받아 3째 윤지, 8째 윤사, 9째 윤당과 4째 윤진을 창춘원으로 먼저 불러들이고, 이어서 나머지 황자들도 불러들였다. 윤진은 가장 나중에 도착하였다. 윤진이 들어가자 창춘원은 엄밀한 경계가 내려졌고 어느 누구도 출입을 할 수 없게 막았다.

 

13일 이 날, 창춘원의 공기는 심상치 않았다. 입궁한 황자들은 어느 누구도 강희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강희제는 이미 혼수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황자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태자의 자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또한 태자의 자리에 가장 근접한 열넷째 윤지가 지금 서북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가 아무런 유조(遺詔)도 내리지 않고 죽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질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황자들은 감히 자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강희제가 갑자기 깨어나 유언을 남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자들은 강희제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침전 밖에서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 중에서 여덟째 윤사는 황자들 중에서 가장 기민하고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황자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의 시선은 넷째 윤진에게 쏠렸다. 윤진은 매우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등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날 저녁, 여덟째 윤사는 창춘원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대문을 나서려고 하는 찰나에 융과다가 그의 앞을 막았다.

 

"폐하의 병세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불예(不豫;죽음을 이르는 용어)를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융과다의 뒤에는 수 백병의 위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무언의 위협을 가하였다. 윤사는 도저히 창춘원을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날 술시(戌時 : 오후 7-9시)가 조금 지났을때, 어전 태감이 강희제의 침전에서 급히 나오며 무릎을 꿇었다. 황자들은 직감으로 강희제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았다. 황자들이 안으로 달려가니 강희제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황자들은 눈물도 흘리지 않은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느끼는 공통점은 하나였다.

 

"누가 태자가 되느냐?"

황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윤지가 밖에 나가 이 문제를 상의하자고 제의했다. 이때 융과다가 안으로 들어오며 황제의 유체(遺體)에 절을 올리고, 여러 황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유조를 전하겠습니다. 대통은 넷째 윤진에게 이으라고 하셨습니다."

황자들은 융과다가 유조를 발표하자 너무나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조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폐하께서는 구조(口詔 : 말로 명령을 남김)를 남기셨습니다."

 

8째 윤사는 그제서야 융과다가 출입을 통제하고 늦은 시각에 유조를 발표한 저의를 깨닫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아침에 말하지 않았소?"

융과다가 눈 한번 꿈쩍이지 않고 말했다.

"그때는 폐하께서 살아 계셨는데 소신이 어찌 사사로히 발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윤사는 융과다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에 윤진과 친근하게 지냈던 황자들이 모두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윤진의 주위를 애워쌓다. 그들은 윤진에게 상례(喪禮)를 주관하도록 재촉하였다. 열넷째 윤지를 지지하였던 아홉째 윤당도 대세가 윤진에게 기울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윤사는 융과다와 윤진을 번갈아 보면서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황자들이 모두 윤진에게 복종을 표시하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윤진, 정말로 대담하고 치밀한 음모로군."

윤사는 허탈한 심정으로 패배를 자인하였다. 이로써 창춘원의 13일은 윤진의 승리속에 저물어갔다.

 

이 날 늦은 밤에 융과다는 북경성의 병권을 장악하고, 윤진을 반대하는 황족과 대신을 통제하였다. 윤진은 강희제의 유해를 이끌고 이 날 밤에 궁성으로 돌아왔다. 윤진을 제외한 모든 황자들은 황궁의 출입이 7일간 금지되었다. 이 7일동안 윤진은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 윤진은 년호를 옹정(雍正)으로 하였다.

 

옹정제는 즉위한 초기에 내정(內政)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대세력을 포용하였다. 많은 황자들은 강희제 시대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어느정도 통치기반을 확립한 옹정제는 황제의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선 황족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열넷째인 무원대장군 윤지는 북경으로 소환되고, 그 자리는 옹정제의 일등공신인 년갱요가 대신하였다. 윤지는 옹정제에 대해서 줄기차게 합법성을 의심하여 죽을때까지 감금생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8째 윤사와 9째 윤당도 끊임없이 강희제의 죽음과 유조(遺詔)에 의문을 품었다. 옹정제는 두 사람을 체포하고 평민의 이름인 아기나(阿其那 : 만주어로 돼지)와 색사흑(塞思黑 : 만주어로 개)으로 개명시키고 변방에 유배시켰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융과다와 년갱요의 말로도 비참했다. 두 사람은 옹정제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황제의 비밀을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옹정제는 두 사람이 권세를 믿고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다는 죄명을 씌워 융과다는 평생 감금에, 년갱요는 사형에 처하였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세상에는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대부분 반대파들이 옹정제를 모함하기 위하여 퍼트린 내용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비어는 강희제가 내린 유조의 내용을 고쳤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강희제는 죽기전에 태감에게 힘겹게 유조를 하나 남겼다.

"열넷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傳位十四子)."

이때 옹정제는 열 십(十)의 위에다 한(一)을 그어 어디에 우(于)로 바꾸었다. 어떤 유언비어에는 열 십(十)자를 제(第)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유조의 뜻은 일시에 바뀌고 말았다.

 

"넷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傳位于四子)."

제(第)로 바꾸어도 뜻은 같았다. 제 4자에게 제위를 물려준다(傳位第四子)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언비어였지만 강희제가 만일 유조를 내렸다면 아마 열넷째 윤지에게 넘겼을 확률이 가장 높다.

 

옹정제는 유언비어에 매우 분노하여 퍼트린 자를 모두 잡아 들이라고 조서를 내리고, 친히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책을 써서 정당한 계승을 변호하였다. 물론 이 책도 유언비어만큼 기이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황제 자신이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 썼으니 그 변명이 백성들에게 먹혔을리는 만무하지 않을까.

옹정제가 어떤 수단을 써서 강희제의 유조를 바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는 강희제가 죽음에 이르렀을때 재빨리 무력을 장악하고 적대세력인 황자들을 모두 한곳에 가두어 반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옹정제는 대단한 음모가이자 전략가이며, 정치적 재능과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적은 넷째 윤진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넷째 윤지가 북경에 없는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하고 강희제를 독살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윤진이 황제가 되는 과정은 우연과 기적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옹정황제의 강점

첫째는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초기의 각축전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면 그만큼 견제세력도 많아지고,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관계로 인식하는 부황(父皇)의 도전자로 간주되어 제거되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러 대신들과 교분을 맺지 않음으로써 세력권을 형성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강희제는 윤진을 의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세력권을 형성한 집단의 세력을 이용하는 그의 조호이산지계(調號離山之計 : 적에게 불리한 일기 조건이 형성되기를 기다려 적을 곤경에 빠지도록 하며 인위적인 위장술로 적을 유인하여 쳐부순다고 원문에 적혀있으나 말 그대로 호랑이가 산을 떠나면 힘을 쓰지 못하는 법, 이를 이용하는 계책이다. 예로부터 '벼슬아치는 인장에 의지하고 호랑이는 산에 의지한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관청에서 도장받기가 힘든 것은 다를 바 없고 호랑이가 산을 떠나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호랑이가 평양에 내려오면 개에게도 희롱을 당한다.'라는 말도 있다. 이 계에서 호랑이는 적을 뜻하고 산은 적에게 유리한 조건을 뜻한다. 적이 유리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거나 좋은 조건하에 있을 때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유리한 점을 소멸, 희석기켜 놓고 이쪽의 유리한 점을 활용하는 계책이다.)로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궁중과 북경성의 수비를 책임지는 사령관을 포섭하여 각축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선제압과 반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많은 수가 대세를 결정짓는게 아니라 핵심부서와 측근 몇 사람이 승부를 가름하는 열쇠를 그는 알고 있었다.

 

넷째는 반대세력을 한 곳에 모아 반격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원천봉쇄 하였다. 봉건시대 황위 쟁탈전은 차지한 뒤에 반대세력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막는게 가장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황궁의 봉쇄는 어느 조치보다 탁월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의 병세와 감정상태를 면밀하게 파악하면서 때를 기다린 철저함이었다. 강희제는 효성스럽고 예의바른 윤진의 가슴속에 이런 야망이 숨겨 있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최후의 일격을 당하였다.

()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

청(淸)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이름이 홍력(弘曆 : 1711~1799)이고 옹정황제(雍正皇帝)의 넷째 아들이다. 옹정황제가 죽은 후에 황위를 계승하여, 60년간 재위하다 89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하북 유릉(裕陵 :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서북쪽 창서산<昌瑞山>)이다.

 

홍력(弘曆)은 옹정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보친왕(寶親王)에 책봉되었다. 1735년 8월 옹정황제가 암살당한 뒤에 신하들은 내관에게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쓰인 액자 뒷면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오게 하여 밀서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넷째 황자 홍력을 황태자에 봉하노니 짐을 뒤이어 황위를 계승하라."고 씌여 있었다. 이에 홍력은 그 달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건륭(乾隆)'으로 고쳤다.

원래 홍력의 모후는 옹친왕(雍親王 : 즉 옹정)의 비였을 때 딸 아이를 한 명 낳았는데,

 

같은 날 해녕(海寧)에 사는 진각로(陳閣老)의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 옹친왕의 비는 딸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옹친왕의 환심을 살 수 없을까 염려되어 사내 아이를 낳았다고 거짓말하였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진각로의 사내 아이를 안고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가 낳은 딸아이와 바꿔치기를 했다. 진각로의 집안에서는 항변할 수도 없었고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력이 강남으로 여섯 차례 내려갔을 때 해녕으로 가서 그의 친부모를 몰래 만났다고 한다.

 

홍력은 재위 기간에 즁갈부락을 평정하고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대소화탁목(大小和卓木)의 세력을 제거하여 변경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영국 특사 마카르니(George Macartney)가 건의한 침략적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장수들이 잘난척하며 으시대면 그는 그들의 무공을 완벽하다 칭찬하고 자신은 완전히 늙었다고 낮추었다.

 

천산남로를 평정할 때 청나라 군은 소화탁목(小和卓木)의 비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으로 몸에는 항상 특이한 천연향이 풍겨나와 사람들은 그녀를 향비(香妃)라 불렀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현혹된 홍력은 그녀를 자기의 비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가라 명한 다음 특별히 회교도를 불러 그녀를 시중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궁궐 안 서원(西苑)에 회족(回族)의 집과 교회를 지어놓게 하였다. 그러나 향비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절개를 지켰다. 하루는 홍력의 명을 받은 궁녀가 다시 찾아가서 향비를 설득하였지만 그녀가 칼날이 시퍼른 비수를 사납게 꺼내는 터에 깜짝 놀란 궁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홍력이 예기치 못하게 불행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한 태후는 홍력이 교외로 제사 지내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향비를 불러 그녀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향비가 "죽음으로 절개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후는 그것을 허락하였고 그녀는 바로 자살하였다. 홍력은 궁궐로 돌아온 후 그 사실을 알고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 그후 향비의 시신을 신강(新疆) 카슈(喀什)로 돌려보내 장사지내주고 향비의 무덩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최근 전문가들은 많은 고증을 거쳐 향비가 홍력의 용비(容妃)였으며, 신강 위구르족 출신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곽집점(集占)의 반란 평정 전쟁에 참가하는 등 민족단결 촉진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홍력과 태후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에서 빈(嬪)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더 나아가서 용비가 되었고, 위구르족 전통 복장을 하고 회족 음식을 먹으며 홍력을 따라 각지를 주유(周遊)하는 등, 궁궐에서 28년간 생활하다가 58세에 병으로 죽어 동릉(東陵)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녀의 관 위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경전이 씌여져 있고, 그녀의 이야기는 중화민족단결사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홍력은 여섯 차례나 강남으로 내려가 유명한 도시들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홍력이 일으킨 문자의 옥(: 청(淸)나라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연간(1662∼1795)에 일어난 필화(筆禍)사건 - 사상통제적() 조치, 금서()의 발표. 필화사건은 중국 역대의 모든 왕조에서 흔히 나타난 현상으로 청나라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에 특히 심한 이유는 청나라가 한족()의 사상·전통과는 다른 만주인(滿)왕조였기 때문이며, 당시 한족에게 팽배한 양이사상()을 꺾으려는 청의 노력 때문이다.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저술하여 청나라, 즉 만주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할 정도였다. 필화사건의 예로는, 강희시대인 1711년 저술한 <남산집()>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여 일족()이 모두 처형된 대명세()사건, 옹정시대인 26년 향시()에 출제한 '유민소지()'라는 글 속에 옹정제를 참수()하려는 의도를 풍자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일족도 투옥된 사사정()사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런 사건은 건륭시대에 가장 많았고, 가경() 연간 이후에는 고증학()의 융성 등으로 점차 줄어들었다.)은 청대 전체를 통털어 횟수가 가장 많았다. 한번은 문인 호중조(胡中藻)가 "한 줌의 심장으로 청탁을 논한다.(一把心腸論濁淸)"라는 시구를 썼는데, 홍력은 그것이 청나라 조정을 비방한 것이라 여기고 호중조와 그 일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또 한번은 홍력이 심심해서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 등을 편찬한 오고전서관(五庫全書館)에 들어갔다. 그때 오고전서관의 책임자였던 기윤(紀)은 몸집이 뚱뚱하여 더위를 많이 타는데다 날씨마저 찌는 듯 하여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변발을 머리 위에 올린채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홍력이 들어오는 것을 본 기윤은 옷을 입을 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홍력은 일부러 못본척 하고 기윤이 숨어있는 탁자 옆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앉았다. 한참 지난 후 기윤은 땀에 축축히 젖었다. 그는 오고전서관 안에 소리없이 정적만 흐르자 "라오터우즈(老頭子: 영감)가 나가셨나?"라고 물으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옆에 앉아 있는 홍력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는 엎드려서 죄를 청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라오터우즈(老頭子)'라 불렀소? 이치에 맞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지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라는 홍력의 물음에 기윤은 "'라오터우즈(老頭子)'란 말은 경성에 사는 신하와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황제를 칭하는 말이지 결코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황제는 만세라 칭하니 어찌 '라오(老)'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만백성의 위에 계시니 어찌 '터우(頭)'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하늘의 아드님(天子)이시니 어찌 '즈(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홍력은 화를 가라앉히고 웃으면서 "그대는 정말 달변이군. 내 그대의 죄를 사면하리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홍력은 기윤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으며, 그 덕에 기윤은 계속하여 승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홍력은 재위 후기에 화신(和)을 20년간 임용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탐관오리인 화신이 고위 관직에 있었던 20년간 탐관오리가 극성하여 정치는 부패해지고 각처에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홍력은 일찍이 아홉 차례나 곡부(曲阜)로 순행을 나갔는데, 두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풍경이 아름다운 고반지(古泮池 : 곡부성 남쪽에 위치한 반원형의 연못) 북쪽에 새로 지은 행궁(行宮 : 즉 반궁<泮宮>)에 머물렀다. 그는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천년의 고백성 푸르름을 더하고, 비온뒤 봄꽃이 물위에 붉게 비치네.(千年古栢城頭綠, 過雨春花水面紅)"라고 읆조렸다. 그는 눈앞의 곡부성이 명나라 때 동쪽 교외의 옛성을 옮겨온 것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찌 노(魯)나라 유적에 속하는 고반지이겠는가? 고반지는 당연히 옛성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붓을 들어 "십리 동쪽 교외의 옛 노나라성이 있는데, 새로 지은 성에 어찌 반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오(十里東郊舊魯城, 新城安得泮池名)"라는 시구를 써내려갔다. 이 시는 비석에 새겨져 고반지 옆에 세워져 있다. 홍력은 네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사료를 폭넓게 조사한 결과, 곡부의 옛성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송나라 때 동쪽 교외로 옮겼다가 명나라 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가져 온 것이기 때문에 고반지가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번 시에서 자신이 내린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한 나머지 다시 <주필고반지(駐古泮池 : 고반지에 머물며)>라는 시를 한 수 썼다.

 

此地非常地 여기는 평범한 곳 아니고,

新城卽故城 새 성이 옛 성인 곳이라네

館仍今日駐 오늘도 숙소에 머무노니,

池是故時淸 연못이 옛날처럼 맑구나.

 

시를 다 쓴 후에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긴 홍력은 앞에서 시를 잘못 지은 것은 자신이 책을 자세히 읽지 않아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기 때문이며,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경솔하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그는 자신이 잘못 쓴 시에 대해 <고반지증의(古泮池證疑)>라는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후 고반지 옆에 세워두게 하였으니, 그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1795년말 홍력은 황위를 황태자에게 선양하기로 결심하고 조서를 내렸다.

"짐은 25세에 황위를 계승하여 당시에 하늘에 맹세하기를, 만약 60년간 재위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감히 할바마마(강희제를 가리킴)와 같은 해 만큼 황위에 있지는 않겠다고 하였노라. 지금 짐이 재위한지가 만 60년이 되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으니 15번째 황자 옹염(琰)에게 황위를 선양하기로 결정하였도다. 그가 정사를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당분간 내가 대신 처리할 것이니라."

 

화신 등의 대신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였지만 홍력은 그것을 듣지 않고 1796년 정월 초하루 태극전(太極殿)에서 선위의식을 거행한 후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실권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1799년 정월 홍력은 병이 나서 많은 명의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초사흘날 양심전(養心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홍력이 죽은 후 그의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하였으며, 역사에서는 그를 건륭황제라 칭한다

 

원본출처: http://www.startour.pe.kr/local/china/china_infom_1_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