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수많은 동물 중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는 동물이 ‘개(狗)’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따금씩 개는 ‘견공(犬公)’으로 불리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하면, 반대로 인간은 ‘개보다도 못한’ 행동을 저지르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문헌 속의 개
삽살개와 검둥이 (민화 화조도 부분),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현실 속의 개는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위대한 존재로 자리잡았고, 거기에 신령스런 능력까지 더해져 점점 상상의 동물로 발전했다. 옛사람들은 개가 액(厄)을 막고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해 주는 길잡이라고 생각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새해가 되면 부적으로 개 그림을 그려 곳간 문에 붙였다는 풍속이 전한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개를 의인화시켜 개의 형태와 습성을 오륜에 비유하기도 했다.
·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 것
〈불범기주(不犯基主) = 군신유의(君臣有義)〉
· 큰 개에게 작은 개가 덤비지 않는 것
〈불범기장(不犯基長) = 장유유서(長幼有序)〉
· 아비의 털빛을 새끼가 닮은 것
〈부색자색(父色子色) = 부자유친(父子有親)〉
· 때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것
〈유시유정(有時有情) = 부부유별(夫婦有別)〉
·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의 개가 다 짖는 것
〈일폐군폐(一吠群吠) = 붕우유신(朋友有信)〉
세눈박이, 네눈박이 개
불교에서는 환생을 믿어 어떤 사람이 죽은 후 저승의 삼목대왕(三目大王)으로부터 대우를 받았다는 설화에서 세눈박이 개가 나타난다. 이 설화는 오늘날 불교 경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개고기를 멀리한다.
고려시대에 합천(陜川)땅에 이거인(李居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가진 재산은 없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길을 가다 어두컴컴한 고개마루에서 짐승 한 마리와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몸은 누런 털에 검은 줄이 있는 것이 호랑이와 비슷한데 귀와 머리 모양은 개와 같았다. 모습도 이상했지만 더 섬뜩한 것은 파랗게 번쩍이는 눈이 세 개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인은 집까지 따라온 그 짐승을 내쫓으려 했지만, 그 짐승은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개 짖는 소리로 짖어 대었다. 하는 수 없이 거인은 개의 이름을 삼목구(三目狗)라 짓고 기르기 시작했다.
귀신 잡는 세눈박이 개,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삼목구는 주인에게 매우 충실했으며 사납고 용감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에는 병들지도 않았는데 밥도 먹지 않다가 며칠 만에 죽어버렸다. 거인은 불쌍하게 생각하여 관을 짜서 깨끗하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제문을 지어 슬픔을 달래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날, 거인 역시 갑자기 죽고 말았다.
저승으로 간 거인은 사자가 이끄는 대로 어느 지옥나라의 대궐에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대왕이 아래로 내려와 거인의 손을 잡으며 반가이 맞았다. “주인님, 어찌하여 여기에 오셨습니까? 내가 세상에 귀양갔을 때 3년 동안 주인님 집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귀양살이가 끝나 이렇게 돌아왔지만 주인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거인이 기르던 삼목구가 바로 삼목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거인은 염라대왕에게 가서 팔만대장경을 새겨 널리 전하고 포교하면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을텐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온 것이 안타깝다고 하자 염라대왕은 거인을 다시 이승으로 보내 그 일을 하게 했다.
세시 풍속에서도 개를 벽사(辟邪)용 영수(靈獸)로 여겨 매년 정초에 대문에 개 그림을 그려 붙여 귀신이나 도둑을 막고자 하였다. 일반적인 벽사용 개 그림은 전형적인 한국 토종개의 모습에 목에는 검은 방울을 달고 있는 세눈박이 또는 네눈박이 개의 모습이다.
일본 민속학자로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 1961)의 수집품 가운데 네 눈이 그려진 호랑이를 전시하자, 일본 미술사학계에서는 기상천외한 작품이라 하여 야단법석이 났었다. 일본인의 눈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네 눈, 네 귀를 가진 짐승을 그린 그림들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 잘 보고 더 잘 들어야 수문장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그렇게 그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삼목구(唐三目狗),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삼목구(三目狗)와 유사하게 쓰이는 신령스런 동물로 삼족구(三足狗)가 있다. 삼족구는 둔갑한 여우를 알아보고 죽일 수 있다는 신성한 동물이다. 하지만 태양에만 존재한다는 상상의 새인 삼족오보다 우리와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동물이다. 삼족오, 삼목구, 삼족구와 같이 우리 문화에서 이처럼 삼(三)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을 상징하는 ‘1’과 여성을 상징하는 ‘2’가 합해지면 ‘3’이 되는데, 이를 두고 ‘3’이라는 숫자를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목구와 삼족구 등을 탄생시켜 우리에게 신성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귀신잡는 개,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전 세계 300여종의 개 가운데는 방범·사냥·운반·애완 등 특수한 용도를 지닌 유명한 개들이 있다. 이 중 귀신 쫓는 개로 알려진 삽살개라는 이 개 근처에는 귀신이 얼씬도 못한다고 믿어 왔으며, ‘신선 개’·‘귀신 잡는 개’․‘삽사리’·‘하늘 개’로도 불렸다. 우리말의 ‘삽’은 없앤다, 또는 쫓는다는 의미이고 ‘살(煞)’은 귀신 또는 액운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인 개에 비해 작고 야무진 체구와 온 몸의 털 때문에 눈, 코, 귀도 구별이 가지 않는 삽살개는 얼핏 보면 어수룩해 보인다. 그러나 삽살개는 어떤 개보다 영리하고 영특하며, 멀리서 얼씬거리는 귀신의 소리와 움직임을 볼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청각과 후각을 가지고 있다.
삼목구 외에도 민화 속에는 흰 개가 많이 등장하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속신화인 본풀이에서 이승과 저승, 저승과 이승의 안내는 흰 강아지가 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인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개 그림이 나타나고 신라 무덤 속에서도 흙으로 만든 개 형상이 많이 발굴된다. 왜 다른 색 개가 아닌, 흰 개가 저승길을 인도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개는 후각이나 시각이 인간에 비해 수 천 배 발달하여 한번 갔던 길은 절대 잃지 않고 찾아가기 때문에, 영혼들이 멀고 먼 저승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충성과 의리의 의구비(義狗碑)
고려시대의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에는 전북 임실군 오수리에서 있었던, 충성과 의리를 갖추고 인간에게 우호적이며 희생적인 행동을 보여준 대표적인 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개인(金蓋人)이란 사람이 마을 잔치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둑에서 잠이 들어버렸는데, 그가 물고 있던 담뱃불이 떨어져 잔디에 불이 붙어 번져나기 시작했다. 주인을 지키고 있던 개는 주인을 향해 맹렬히 짖어대고 흔들어봤지만 주인은 인사불성이 되어 위험하게 되었다. 개는 급히 물에 뛰어들어 온 몸에 물을 적셔와 주인의 주변에서 뒹굴어 주인이 화재를 면하게 하였다. 술에서 깨어난 주인은 불을 막아주고 기운이 빠져 죽은 개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무덤을 만들어주고 나무를 꽂아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그 나무 비석에서 잎이 피고 뿌리가 돋아 살아나자 개나무라는 뜻의 ‘오수(獒樹)’라는 지명이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또, 목숨을 바쳐 주인을 구해준 전남 낙안읍성의 의구비, 개성의 벼슬개, 독극물이 든 물건을 주인 대신 개가 받아먹었거나 억울하게 죽은 주인의 원수를 갚았다는 등, 전국 25 개 처에서 개가 인간의 아둔함에서 비롯된 위험을 막아주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개를 비유할 때 잘못된 인생, 팔자, 욕, 행동, 언행, 심성, 음식 등에서 하찮은 존재 등 부정적인 이미지와 우둔하고 어리석은 약자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는 상반된 관계를 가지고 살아왔다.
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늘 인간의 주위에서 존재해 왔다. 때로는 구박과 멸시와 버림을 받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기도 한다. 인간은 개를 버려도 개는 인간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개는 우리 일상생활 문화에서 인간의 주위를 구성하는 풍경(風景)처럼 존재한다. 한국 문화에 나타나는 개는 충성과 의리의 충복, 심부름꾼, 애완견, 안내자, 지킴이, 보양식, 조상의 환생 등 인간과 매우 친근한 동반자로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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