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명문이 있어 539년에 고구려에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년명(紀年銘) 금동불이다. 중국 북위시대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이를 우리 나름대로 소화하여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으로 재해석한, 자신감 넘치는 한국적 조형미의 선구작으로 손꼽힌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조각실에 전시되어 있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산40 발견(1963년), 고구려 539년, 국보 119호
신라의 옛 땅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불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한 직후인 375년에 벌써 초문사(肖門寺, 혹은 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었고, 18년 뒤에는 평양에 구사(九寺)를 짓는다. 또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성왕의 무덤도 함께 옮기고 무덤 옆에는 웅장한 규모의 정릉사(定陵寺)라는 대사원을 건립한다. 그러나 이들 사찰에 어떤 양식과 도상의 불상이 안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상은 대부분이 5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는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기에 전래된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까지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뜻한다. 1세기 남짓한 한국 고대 조각사의 공백기를 깨고 우리나라 조각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이다. 1963년 여름, 경남 의령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금동불은 높이 16.2cm의 소형이지만 한국 고대 조각사의 기준작이자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이 발휘된 최초의 불상으로 손꼽힌다.
이 불상은 광배와 연화대좌, 신체가 한 몸으로 주조되었고 상 전체에 도금이 두껍게 입혀져서 생생한 금빛 광채를 자아낸다. 부처는 배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연꽃 대좌를 딛고 곧게 선 당당한 모습이다. 머리는 초기 불상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나발(螺髮)이며 중앙에 팽이 모양의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중국 북위(北魏)시대 금동불이나 운강(雲崗)과 용문(龍門) 석굴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길쭉하고, 귀는 타원형 판을 붙여 놓았을 뿐 세부표현은 전혀 하지 않았다. 긴 얼굴은 이목구비의 윤곽만을 표현하였지만 지그시 내려감은 눈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에 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가늘고 긴 신체 역시 두터운 가사에 덮여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시무외, 여원인의 통인(通印)을 맺었다. 가사는 중국의 포복식(袍服式, 곤룡포 형태의 의복) 복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살짝 반전하여 왼쪽 팔에 걸쳐 흘러내렸고, V자 모양의 두툼한 가슴의 옷깃 사이로 대각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내의 자락이 드러나 있다. 복부 중앙에 표현된 계단식의 옷주름은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 흘러내린 동적인 모습이며, 가사의 끝단과 그 아래로 드러난 치마의 끝단은 마치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몸 좌우로 날카롭게 뻗쳐 있다. 발목까지 드러낸 발은 부피감이 있지만 지나치게 커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여준다. 대좌는 연실(蓮實)과 여덟 개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었는데, 꽃잎 사이사이에 다시 예리한 형태의 사잇잎[間葉]을 배치하였다.
우연히 발견된 이 작품은 높이 16.2cm의 소형이지만 한국 고대 조각사의 기준작이자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이 발휘된 최초의 불상으로 손꼽힌다.
이 금동불은 조각 기법과 주물이 다소 거친 편이며 광배의 불꽃무늬도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양식적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신라 금동불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아마도 명문이 없었다면 ‘신라불상 특유의 단순성과 거친 조형성이 돋보이는 작품’ 정도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서 보듯이 이 불상은 고구려의 평양에서 천불상의 하나로서 조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불상 양식이 멀리 신라의 오지까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자, 불상의 제작지 추정에서 출토지보다는 양식적 고찰이 중요함을 일깨우는 귀중한 예인 셈이다.
명문의 해석 - 539년에 천불상의 하나로 조성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이 불상이 고구려의 것임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광배는 윗부분이 깨진 것을 접합한 것으로 표면 가득히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운 역동적인 불꽃무늬[火焰文]가 새겨져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의 신성한 기운을 가시적인 불꽃무늬를 빌어 묘사한 것이다. 광배 뒷면에는 주물이 끝난 뒤 끌로 새겨 넣은 4행, 47자의 해서체(楷書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을 새겨 넣은 다음 상 전체에 도금을 베풀어 마무리하였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발원문을 읽는 방식과 해석에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최근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하다.
첫머리의 연가(延嘉)는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사용했던 연호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지만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어떤 기록에도 없다. 그러므로 이 명문은 텍스트 역사서의 한계를 훌륭히 메워주는 금석문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연호 다음에 등장하는 간지인 기미년(己未年)은 479년, 539년, 599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각 형식과 양식적 특징에 비추어 539년으로 굳어진다. 479년은 중국에서도 포복식(袍服式) 불상이 등장하기 전이므로 너무 이르고, 599년이면 국내에서도 중국의 북제(北齊), 북주(北周) 및 수대 조각양식이 등장하므로 너무 늦기 때문이다.
낙랑은 현재의 평양으로 추정되며, 동사(東寺)가 절 이름인지 아니면 ‘낙랑 동쪽의 절’이라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제3행에서 보듯이 이 불상은 천불상의 하나로, 그것도 현겁천불 가운데 29번째 부처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서 조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겁 천불의 이름을 상세하게 기록한 불경인 [천불명호경(千佛名號經)]의 내용 그대로이다. 나머지 999구의 존재가 궁금하다.
담대하면서도 역동적인, 한국적인 조형미
미술 양식은 첫 영향을 준 선진의 영향을 받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민족성과 풍토성에 의하여 변화되어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삼국시대의 불상도 기본적으로는 종교적인 규범을 충실히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신선한 자극, 곧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국 불상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받아들여 이를 우리의 정서와 미의식에 맞게 변화 발전시켰다. 특정한 미술 양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였던 것이다.
금동삼존불북위 말~동위 초 6세기 중엽, 높이 35cm, 섬서역사박물관
이 불상에 보이는 길쭉한 얼굴과 신체, 포복식(袍服式) 복장, 몸 좌우로 갈퀴처럼 예리하게 뻗친 옷자락 표현방식, 통인의 수인 등은 북위시대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온몸을 감싼 두터운 가사의 옷주름은 선이 아니라 마치 대칼로 한번에 잘라낸 듯 담대한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특히 측면관에서 세 가닥으로 날카롭게 뻗친 옷자락에는 담대함과 함께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중국 북위시대의 금동불은 지나치리만큼 세부표현이 치밀하고 장식성이 강하여서 치마와 가사의 끝자락은 마치 작은 고리를 촘촘히 엇대어 놓은 듯한 잔물결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연가명 금동불에서는 가사와 치맛자락의 잔물결 옷주름이 두세 가닥으로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다. 담대성과 두터운 양감은 고구려 미술 양식의 특징을 웅변으로 대변하는 듯하다.
더욱이 광배는 이글거리는 불꽃무늬를 얕은 선각으로 새겼기 때문에 대비가 되어 불상의 양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또 끝이 살짝 치켜진 연꽃 대좌의 연꽃잎은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듯 양감이 강하고 탄력성이 넘친다. 이는 곧 날카로움과 동세(動勢)가 어우러져 발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힘, 즉 몸 속에서 발산하는 기(氣)를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의 형상이다. 마치 고구려 미술의 상승하는 기세를 보는 것 같다.
이 금동불의 조형적 특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의 조각 양식을 수용할 때 생략할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키고, 또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면서 우리의 정서와 미감에 어울리는 조형미를 창출해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외래 양식을 모방할 때 일어나는 경직된 선이나 양감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자신감 넘치는 활달한 선과 기세가 넘칠 뿐이다. 이처럼 자신감 넘치는 한국적 조형미는 이후 삼국시대 조각사를 풍미하게 된다.
또한 이 금동불을 통하여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대국이었고, 중국과 바로 인접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나아가 저 멀리 신라의 오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직 전도의 일념으로 어느 이름 모를 고구려의 승려에 의해 신라의 오지에 전래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과 고구려인의 기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진리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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