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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功臣, 후손의 ‘家格’까지 보장한 특권

功臣, 후손의 ‘家格’까지 보장한 특권

책봉때 전답 60결 노비 7구… 이듬해 전답 19결 노비 28구…

게재 일자 : 2012년 07월 09일(月)

▲ 1728년(영조 4) 7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박동형을 분무공신(양무공신) 3등에 녹훈하고 내린 교서와 초상화(아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학중앙硏, 충주朴씨 충원군 宗家 고문서 통해 분석

조선후기 재지사족으로 중·하급의 관직을 이어오던 충주박씨 공주파(상주파)는 박세화(朴世華·1653~1700)·박동형(朴東亨·1695~1739) 부자의 활약으로 가문의 격이 크게 높아진다. 박세화가 1679년(숙종 5) 문과에 합격해 정랑을 거쳐 5개 군현의 수령과 두 곳의 찰방 등을 역임한 데 이어 원래 조카였다 그에게 입양된 박동형이 1728년(영조 4) 발생한 무신란(이인좌의 난) 때 반란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박필현(朴弼顯)을 포획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공신이 됐기 때문이다.

같은 해 분무공신(奮武功臣·후일 양무공신으로 개칭) 3등에 녹훈되고 충원군(忠原君)에 봉해진 박동형은 문과 출신이 아닌데다 44세로 단명한 탓에 영조대 정치적 비중은 미미했지만 공신으로서 각종 제도적 특권을 누렸다. 무엇보다 공신이라는 위상은 그의 당대는 물론, 후손에 이르기까지 양반으로서의 가격(家格)을 유지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 장서각(관장 이종철)에 기탁된 충주박씨 충원군 종가소장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 공신가문의 존재 양태를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 6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중연 장서각 강의실에서 열린 콜로키움에서 김학수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충원군 종가소장 공신문서가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대부분 공신의 특권 및 생활상, 공신가의 권리 유지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내용이어서 조선시대 공신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번 콜로키움은 장서각에서 오는 15일까지 열리고 있는 특별전 ‘조선의 공신’과 관련, 조선시대 대표적인 특권층이었던 공신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비롯해, 1728년 분무공신까지 모두 28차례에 걸쳐 945명의 정훈공신(正勳功臣)이 책봉됐다. 정훈공신은 정공신(正功臣) 또는 친공신(親功臣)으로도 불리는데 자신이 세운 공으로 녹훈된 공신을 말한다. 이 가운데 광해군 때 4차례 책봉된 공신(4공신) 등 모두 6공신이 삭훈(削勳)되는 등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공신의 지위를 유지한 사람은 705명이었다.

이와 함께 임금이 죽어 위패를 종묘에 안치한 뒤 생전에 신하로 그 임금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어 신주가 함께 모셔지는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정공신보다 격이 떨어지는 원종공신(原從功臣) 등이 있다. 조선시대 배향공신의 수는 83위(명)에 불과하다.

김 실장에 따르면 공신의 수에 비해 남아 있는 공신문서의 규모는 보잘것없다. 임진왜란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임란 이후에도 전형적인 공신문서인 교서(敎書)와 화상(畵像·초상화), 녹권(錄券), 회맹문(會盟文) 및 일부 고신류(告身類)가 남아있을 뿐이다. 이날 조선시대 공신교서에 대해 발표한 심영환 장서각 선임연구원은 “현전하는 조선시대 공신교서는 모두 74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비해, 충원군 종가 소장 공신문서는 교서·화상·녹권은 물론 사패(賜牌) 및 임명 교지(敎旨), 부의단자(賻儀單子), 치제문(致祭文), 완문(完文),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 서간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가령 1728년 공신교서 외에 다음해 영조가 박동형에게 내린 전답 및 노비 사패 교지를 통해, 공신 책봉 때 내린 전답 60결(結) 및 노비 7구(口) 외에 전답 19결과 노비 28구를 더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 실장은 “공신에 대한 경제적 보상 정도를 공신교서에만 입각해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또 그가 첨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오위장·대호군 등 서반 한직을 전전하다 1732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 6품 광양현감을 제수받아 관직활동을 한 사례에 비춰 공신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정치적 현달을 보장받은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1739년(영조 15)과 1748년(영조 24) 박동형과 그의 부인 경주노씨가 죽었을 때 각각 국가에서 공신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충훈부(忠勳府)를 통해 내린 부의단자와 호조·예조를 통한 별치부(別致賻)단자, 1788년(정조 12) 정조가 충원군 박동형 집안에 내린 윤음, 묘소관리 등 공신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충훈부에서 충원군 종가에 발급해준 문서인 완문 등은 사후에도 친공신 집안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보호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이날 콜로키움에서는 또 박동형 초상화와 개국공신 이제(李濟) 초상화, 공신초상화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초본(草本)과 함께 전시된 정국공신 홍경주(洪景舟) 초상화, 선조의 피란길을 함께해 호성공신에 책봉된 내시 김새신(金璽信) 초상화 등 ‘조선의 공신’ 특별전을 통해 처음 소개된 초상화들에 대한 윤진영 장서각 선임연구원의 발표가 있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출처: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