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비(石碑)의 이해
우리나라를 석비(石碑)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석비가 그 숫자에 있어서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이들 석비는 묘비(墓碑)와 탑비(塔碑) 능묘비(陵墓碑) 외에도 신도비(神道碑) · 유허비(遺墟碑) · 기공비(紀功碑) · 송덕비(頌德碑) · 효자비(孝子碑) · 사비(祠碑)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 석비는 그 비문의 내용이 알려 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 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되어 왔다.
좀더 자세히 석문의 기본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형(方形)의 대석(臺石) 위에 네 발을 힘차게 뻗은 귀부(龜趺)가 놓여 있고 귀부의 배면인 타원형의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이 전체를 덮고 있다.
귀갑 중앙에는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를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별석(別石)으로 된 장방형의 대형 비신석(碑身石)을 세웠으며, 비신석 상단부에는 두 마리의 반룡(蟠龍)이 서로 얽혀 비신을 물어 올리는 듯하거나 혹은 대칭으로 마주보고 싸우는 듯한 모습을 한 이수(賂首)라는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양식을 갖춘 석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화를 거치면서도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전래되어 옴으로써 전통적인 석비 형태로 고착되었다.
우리나라 석비 양식은 삼국시대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단순한 석비 양식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경에는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보듯이 중국 당대의 석비 양식을 받아들여 비신에 이수와 귀부를 갖춘 사실적인 석비 양식으로 정립되었다. 8세기를 거치면서 9∼10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한국적인 석비로 변모 발전해 간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이르러 사실적인 양식으로부터 환상적이며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것은 당시 사회배경에서 이루어져 주로 왕의 능묘비나 고승의 탑비에 나타난다. 직립된 목에 용두화(龍頭化)되어 가는 귀두와 이수의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의 변화 등을 보여 주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비 양식은 10세기에서 12세기 전반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12세기 후반부터 석비 양식은 장방형의 대석 위에 간략화된 규수형(圭首形)의 귀접이 형태와 옥개형(屋蓋形) 이수로 발전 변화되어 가며,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어 한국 석비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또한 14세기 후반부터 당대 석비 양식을 새로이 재현하여 만든 석비가 조선시대 석비의 전통을 이루게 되는데, 15세기 후반의 원각사비와 17세기 전반의 청태종공덕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주로 만들어지던 탑비의 전통 대신 왕이나 사대부의 능묘비나 신도비가 주로 만들어지며, 18 ·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기공비, 사적비, 효자비, 송덕비 등 용도에 따른 다양한 석비가 만들어지게 되어 오늘날 한국이 석비의 나라라고 불려지는 전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출처 :동수마루의 작은 오두막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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