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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한국 전통경관의 정수 누정(樓亭)

한국 전통경관의 정수 누정(樓亭)


김영모(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교수)


1. 누정의 기원

누정은 인류가 지상에 집을 축조하고 개별적으로 주거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그 연원이 매우 깊다. 누정은 원림(園林)을 구성하는 옥우(屋宇)의 일부인 ‘누(樓)’와 ‘정(亭)’을 합친 용어이다(박종우, 258;2008). 원래는 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약칭으로서 인간이 자연속에 잠시 머무르면서 자연을 즐길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현실적인 공간으로 정신을 수양하는 장소, 후학들의 교육의 장소, 문인들과 문학에 대해 토론의 장소이기도 하였다(한국조경학회, 1996).

 

우리나라에 있어서 누정에 관한 기록은 서기 400년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제21대 소지왕(炤智王)은 즉위 10년(488 A.D)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고 했으며1),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5)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을 춤으로 왕도 함께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백제에 있어서는 무왕(武王) 37년(636 A.D)에는 망해루(望海樓)를, 제30대 의자왕(義子王) 15년(655)에는 궁남지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볼 때 삼국시대의 누정은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 위락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전기의 누정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주로 왕공귀인들의 사교 공간으로서 문벌귀족의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었다(박연호, 106-107;2004).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이규보의 「四輪亭記」에서 보듯 궁중이 아닌 개인 소유의 누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일부 발견되기도 한다. 고려 말기까지의 누정은 대부분 휴식과 심성수양의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원림에 배치되거나 산수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경내뿐만 아니라 전국의 방방곡곡에 이르렀으며, 조영자도 왕실로부터 사대부 그리고 일반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번지고 있었다(정동오, 25-26;1986).


2. 누정의 개념상 분류

누정이라 하면 누각과 정자의 약칭이다. 정자를 앞세워 정루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地理誌)의 ‘누정조(樓亭條)’에서는 -堂, -臺, -閣, -齋, -亭, -軒, -廳, -觀, -房, -榭 등의 접미사가 붙는 건물까지 범칭한 개념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원림내든 산수경관에서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누정은 일반적으로 ‘누’, ‘대’, ‘각’, ‘사’, ‘정’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누정은 그 형태와 기능에 따라 분류가 가능한데 ‘누’는 겹집 즉 이층의 행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대’는 높다란 자연암반이나 그곳에 지은 건축물을 일컫으며, 각은 누의 형태이나 사방을 향하여 열린 형태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누정의 형태와 기능이 변화되면서 이러한 구분은 차츰 혼동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누정에 대한 개념상 분류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그 기원이 되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루(樓)

⟪원야(園冶)⟫

-⟪說文⟫云..重屋曰「樓」。(爾雅)云..陜而修曲爲「樓」。言窓牖虛開。諸孔慺慺然也。造式,如堂高一層者是也。

- ⟪설문(說文)⟫에서는 ‘중첩하여 지은 집을 누(樓)라 한다[重屋曰樓]’고 하였고, ⟪이아(爾雅)⟫에서는 ‘폭이 좁으면서 길고 굴곡이 있는 집을 누(樓)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창호(窓戶)가 활짝 열려서 허다한 창구멍이 나란하게 있음을 말한 것이다. 누(樓)를 만드는 방식은 당(堂)과 흡사하나 높이가 한층 더 높다.


- ⟪강희자전(康熙字典)⟫

又⟪爾雅·釋詁⟫樓,聚也。루(樓)는 모인다는 것이다.


- ⟪문집총간(文集叢刊)⟫

⟪東國李相國集·四輪亭記⟫構屋於屋謂之樓。집 위에 지은 것을 누(樓)라 한다.


② 대(臺)

- ⟪원야(園冶)⟫

⟪釋名⟫云..「臺者,持也。言築土堅高,能自勝持也」園林之臺,或掇石而高上平者,或木架高而版平無屋者,或樓閣前出一步而敞者,俱爲臺。

⟪석명(釋名)⟫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臺)라고 하는 것은 지탱한다[지(持)]. 흙을 견고하고 높다랗게 쌓되 능히 자체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원림에 있는 대(臺)의 경우에 어떤 것은 돌로 높이 쌓고 그 상부는 평탄하게 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나무로 엮어서 높이 쌓고 그 위에 평판(平板)을 깔되 지붕이 없는 것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각(樓閣)의 앞면에 한 보(步)정도 튀어나오게 하여 개방시켜 놓은 것도 있는데 그러한 것도 모두‘대(臺)’라고 부른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觀,四方而高者。从至从之,从高省。與室屋同意。徒哀切〖注〗、㙵,古文。䑓,俗字。

- ⟪강희자전(康熙字典)⟫

〔古文〕������㙵⟪廣韻⟫徒哀切⟪集韻⟫⟪韻會⟫⟪正韻⟫堂來切,������音苔。

⟪說文⟫觀四方而高者。사방을 볼 수 있으며 높은 것이다.

⟪釋名⟫臺,持也。築土堅高,能自勝持也。대(臺)는 지탱한다는 것이다. 흙을 견고하고 높게 쌓아 능히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爾雅·釋宮⟫闍謂之臺。⟪註⟫積土四方也。도(闍)를 일러 대라 한다. 주) 흙을 사방으로 쌓은 것이다.

⟪禮·月令⟫仲夏之月,可以處臺榭。⟪疏⟫積土爲之,所以觀望。중하지월(5월)에 대나 사에 머물 수 있다. 흙을 쌓아 만들어 멀리 볼 수 있는 까닭이다.

⟪五經要義⟫天子三臺,靈臺以觀天文,時臺以觀四時,圃臺以觀鳥獸。천자의 삼대(三臺)란 천문을 보는 영대(靈臺)와, 사시를 보는 시대(時臺)와, 새와 짐승을 보는 포대(圃臺)이다.


- ⟪문집총간(文集叢刊)⟫

⟪東國李相國集·四輪亭記⟫崇板築謂之臺。판을 대어 높이 쌓은 것을 일러 대라 한다.


③ 각(閣)

- ⟪원야(園冶)⟫

閣者,四阿開四牖。漢有麒麟閣, 唐有凌烟閣等, 皆是式。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방에 지붕의 비탈면이 있고, 사방에 창문을 낸 것을 가리킨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所以止扉也。


④ 사(榭)

- ⟪원야(園冶)⟫

⟪釋名⟫云..榭者, 藉也。藉景而成者也。或水邊, 或花畔, 製亦隨態。⟪석명(釋名)⟫에서 ‘사(榭)는 기댄다는 의미’라고 하였으니 (‘사(榭)’라고 하는 것은) 주변의 풍경에 의지하여 구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사(榭)는 물가에 위치하기도 하고, 꽃밭 가에 위치하기도 하는데 만드는 방법도 변화가 많다.


- ⟪강희자전(康熙字典)⟫

⟪孔傳⟫土高曰臺,有木曰榭。흙을 높게 쌓은 것을 대(臺)라 하는데 목제기구가 있으면 사(榭)라고 한다.


- ⟪문집총간(文集叢刊)⟫

⟪東國李相國集·四輪亭記⟫複欄檻謂之榭。난간을 겹으로 한 것을 일러 사(榭)라 한다.


⑤ 정(亭)

- ⟪원야(園冶)⟫

⟪釋名⟫云..「亭者,停也所以停休遊行也。」司空圖有休休亭, 本此義。⟪석명(釋名)⟫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亭)이라고 하는 것은 정(停)이다. 여행하는 사람이 잠시 정지하여 쉬는 곳이다.’ 사공도(司空圖)는 휴휴정(休休亭)이라는 정자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름을 지은 근본 뜻이 여기 있었다.


- ⟪문집총간(文集叢刊)⟫

⟪東國李相國集·四輪亭記⟫作豁然虛敞者謂之亭。활연히 툭 트이게 지은 것을 일러 정(亭)이라 한다.

⟪艮翁集·松亭記⟫不待瓦與茅。凡可以蔽天陽而庇陰于人者。皆可謂之亭。기와나 띠풀을 갖추지 않아도, 무릇 사람에게 햇빛을 막아 그늘지게 할 수 있다. 모두 정(亭)이라 이를 수 있다.


⑥ 당(堂)

- ⟪원야(園冶)⟫

古者之堂, 自半已前, 虛之爲堂。堂者, 當也。謂當正向陽之屋, 以取堂堂高顯之義。옛날의 당(堂)은 전반부가 텅 비어 있는 부분을 ‘당(堂)’이라고 하였다. 당(堂)이란 당(當)이다. 다시 말하면,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을 한 가옥을 말하는 것으로서 당당(堂堂)하게 높이 드러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 ⟪설문해자(說文解字)⟫

堂, 殿也。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 說文解字注〉

古曰堂, 漢以後曰殿。古上下皆稱堂, 漢上下皆稱殿。至唐以後, 人臣無有稱殿者矣。옛날에는 당(堂)이라 일컬었으나, 한 이후에는 전(殿)이라 일컬었다. 옛날에는 위아래(임금과 신하) 모두 당(堂)이라 칭하였으나 한 대에는 임금과 신하 모두 전(殿)이라 칭하였다. 당대이후, 신하 중에 전(殿)이라 칭한 자가 없었다.


- ⟪강희자전(康熙字典)⟫

〔古文〕坣㙶⟪唐韻⟫⟪廣韻⟫⟪集韻⟫⟪韻會⟫⟪正韻⟫������徒郞切,音唐。

⟪說文⟫殿也。正寢曰堂。전(殿)이다. 정침을 일러 당(堂)이라 한다.

⟪釋名⟫高顯貌。그 모양을 높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演義⟫當也,謂當正向陽之宇也。당(當)이다. 당(當)은 정남향의 가옥을 이른다.

옛날에도 당(堂)이 있었는데, 전반부가 빈 것을 일러 당(堂)이라 하였고, 후반부가 찬 것을 일러 실(室)이라 하였다.


⑦ 헌(軒)

- ⟪원야(園冶)⟫

軒式類車, 取軒軒欲擧之意, 宜置高敞, 以助勝則稱。헌(軒)의 양식은 옛날의 수레와 유사하여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하다.[軒軒欲擧]’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헌(軒)은 마땅히 높고 활짝 트인 장소에 지어서 빼어난 경치에 보탬이 되게 한다면 서로 어울릴 것이다.


⑧ 재(齋)

- ⟪원야(園冶)⟫

齋較堂,惟氣藏而致斂,有使人肅然齋敬之義。蓋藏修密處之地,故式不宜敞顯。재(齋)를 당(堂)과 비교하여 보면, 기(氣)를 갈무리하여 들이어서 정신을 수습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하고 경건함을 갖도록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숨어서 수신(修身)하고 은밀하게 처신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양식이 활짝 펼쳐지거나 눈에 잘 뜨이는 것은 좋지 못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

戒,潔也。삼가고, 깨끗이 한다는 것이다.


- ⟪강희자전(康熙字典)⟫

⟪廣韻⟫側皆切⟪集韻⟫⟪韻會⟫⟪正韻⟫莊皆切,������債平聲。⟪正韻⟫潔也,莊也,恭也。 ⟪廣雅⟫齋,敬也。⟪禮·祭統⟫齋之爲言齊也。

⟪易·繫辭⟫聖人以此齋戒。⟪註⟫洗心曰齋。성인은 이 재(齋)로서 삼갔다. 주)마음을 씻는 것을 재(齋)라 한다.


⑨ 관(觀)

- ⟪설문해자(說文解字)⟫

諦視也


- ⟪강희자전(康熙字典)⟫

⟪三輔黃圖⟫周置兩觀,以表宮門。登之可以遠觀,故謂之觀。주(周)에는 양 관(觀)을 설치하였는데, 궁문이다. 올라 멀리 볼 수 있어 예로부터 관(觀)이라 한다.

3. 누정의 기능

누정이 원림과 산수경관의 중심시설로 자리 잡게 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 건축적 형태에 있어서는 비록 간소한 형식으로 지어졌지만 선비들이 모여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서 선비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60개로 건립이 활발하지 못했던 반면, 조선 중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553개로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누정이 얼마만큼 일반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역별로는 특히 남부지방에서 피서와 유락(遊樂), 시단(詩壇), 산수경관(山水景觀)의 조망(眺望) 등을 위해 산수가 좋은 장소에 누정이 많이 조영되었다(윤일이, 155-156; 155).

 

누정은 주로 호남・영남의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더욱 발달했지만 전국 어디를 가나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 민족과는 각별히 친근한 문화로 이어져 왔다. 전망 좋은 마을 어귀, 발 아래 강을 드리운 언덕받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아늑한 숲 언저리 등, 어디든 풍치나 경관이 빼어난 곳에 누각이나 정자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고려시대의 문인 안축(1287-1348)이 그의 〔취운정기(翠雲亭記)〕에서, “대개 누정이 지어져 있는 곳은 높고 훤히 트인 곳이 아니면 그윽하고 깊숙한 곳이다.”라고 한 바로 그런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누정은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이기에 대부분 일상생활의 번접한 물상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은 당연하다(박영주, 170-171;2001).

 

누정은 다른 전통건축에 비해 단순하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건축이다. 그러면서도 과거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그 존재가치를 그 시대마다 나름대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가치가 그 시대인의 정서와 그 정서의 총체적 합이 정자관 내지는 자연관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서는 종교를 떠나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적인 특히 남성을 중심으로 마음의 안정이나 여유 또는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이면서, 특정한 용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다기능적인 공간을 형성시켰다고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누정에서의 기능적 행태는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기존의 누정연구에 나타난 기능 및 이용행태를 살펴보면 행락(行樂)과 학문연구(學問硏究)2)로 또는 귀거래(歸去來)의 장(場), 선풍(仙風)의 장(場), 학문(學問)과 저술(著述)의 장(場)3)으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소요지소(逍遙之所), 강학지소(講學之所), 추모지소(追慕之所) 등으로 분류4)하기도 하였다. 임의제5)는 조선시대 한양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활쏘는 장소와 회합(會合)의 기능은 물론 독특하게 압승(壓勝)의 기능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왕실 및 국가행사와 관련된 기능(王室遊宴, 使臣接待, 行宮, 軍事施設, 牧馬, 觀稼)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안계복6)은 조선시대 실록에 나타난 누정의 이용행태를 禮, 祭, 遊賞, 戱, 宴, 生活, 講, 行事, 政事 및 기타 행태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정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행태의 동기유발은 경관에의 실경(實景) 즉 관찰자가 자연의 주변환경과의 감각적 교류에서 자아와의 합일을 찾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바로 누정이라는 것이다(이용범외 2인, 89-90;1994).


4. 누정의 유형

4 - 1. 원림누정(園林樓亭)과 산수누정(山水樓亭)

누정은 조성되는 장소가 어디인가에 따라 또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하나는 누정 주위를 인공적으로 조원하지 않고 자연의 경승지에 위치하여 주변의 경관을 차경하는 형식으로 끌어 들여서 바라보는 기능으로 누정건축물만을 세운 것이 있고, 두번째는 경복궁의 경회루나 비원의 부용정, 남원의 광한루처럼 인공적으로 주변 경관을 조경한 공간속에 누정을 위치시키는 경우가 있다(정재훈, 127;2005). 분류의 편의상 전자를 산수누정, 후자를 원림누정이라 부르고자 한다.


4 - 2. 원림누정 : 원림건축으로서의 누정

궁궐이나 관아, 민가의 공간속에 휴식과 조망, 위락의 기능으로 조성된 누정을 특별히 원림건축물이라 부를 수 있다. 원림건축의 기원이 되는 중국에서는 원림건축 자체를 중국건축 역사의 특수한 조건에서 발전된 특수한 산물이라고 분류하고 있으며, 정의하기를 “인류의 건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고 하나는 오락이 주가 되는 것이다.

 

중국 건축역사를 형식에 따라 분류할 때, 일반 건축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며, 대, 누각, 정 등은 오락을 위한 시설이다. 용도에 따라 분류할 때, 도시와 궁실 같은 것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며, 원유(苑囿), 원림(園林)은 오락시설이다...... 중국 문화는 주대(周代) 팔백년 간에 극히 융성하였는데, 세력에 따라 각 방면으로 발전하여 크게는 정치・학문에서부터 작게는 의복・기구에 이르기까지 혼란스럽고 잡다한 것에서 분명하게 정제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살아 숨쉬는 존재가 오랫동안 규범에 속박되다보니 결국 염증이 생겼으며, 그래서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에 노장설(老莊學說)은 인위(人爲)를 반대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돌아가려는 추세를 띄어, 사람의 거처는 궁전에서 원림으로 변하였다. 바로 인위의 극치에서 자연 속에 안위하기를 추구하게된 것이다.”7)

 

이상의 견해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원림건축과 일반건축은 서로 다른 목적에 기초하여 독립적으로 발전된 것이며, 또한 원림건축이 흥성한 사상적 기초는 일반건축이 지닌 규율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처럼 일반건축과 원림건축이 각각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보다는 상보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대・각・사・정으로 대변되는 원림건축은 때로는 건축물의 부속건물로서 휴식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고, 연못가에 자리잡아 연못을 완상하기도 하며, 때로는 높은 언덕이나 인위적으로 쌓은 가산 위에 자리잡아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원림건축은 조성되는 공간의 성격에 따라 궁궐, 관아, 사찰, 민가 등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으나 이 보다는 조성되는 주변시설(경관)과의 관계에 따라 ‘건축물(建築物) 부속형(附屬型)’, ‘지당형(池塘型)’, ‘계류형(溪流型)’, ‘구릉형(丘陵型)’, ‘산림형(山林型)’으로 분류될 수 있다.


 

① 건축물 부속형

이러한 유형은 궁궐이나 관아 또는 사대부의 중심전각의 좌우에 퇴간 또는 부속건물의 형태로 원림건축을 연결하여 짓는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는 창덕궁의 동궁(東宮)에 해당하는 성정각(誠正閣)과 중희당(重喜堂)에서 이러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성정각은 희정당 남쪽에 있다. 세자(世子)의 서연(書筵)을 행하던 곳이다.”라 하였다. 또 다른 궁궐지에는 “성정각은 12칸 이익공집으로....... 동루의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이라 쓴 편액을 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왕세자가 글을 배우던 장소임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희우루와 보춘정은 공부하다가 잠시 쉬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으로 파악된다. 또한 성정각과 인접한 중희당에도 동남쪽 모서리에서 월랑(月廊)을 만들어 육모정인 삼삼와(三三窩)와 연결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뻗치어 팔작기와 지붕의 소주합루(小宙合樓)와 이어져 있다. 중희당의 기능에 대해서는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곳도 왕세자와 관련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성정각과 희우루가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는 ‘장수(藏收)’의 공간이라면 희우루와 보춘정, 삼삼와와 소주합루는 이러한 긴장을 풀어내는 ‘유식(遊息)’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반건축물에 연속되거나 부속된 형태로 나타나는 누정은 주건물의 기능을 보조하거나 또는 ‘긴장과 이완’, ‘일과 쉼’, ‘고정과 비고정’과 ‘동적과 정적’의 음양의 조화와 같은 같은 상보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② 지당형

원림건축물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유형이다. 태초이래로 동서양을 불문하고 정원이나 원림을 만드는 공통적인 행위를 한마디로 ‘천지조산(穿池造山)’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즉, 연못을 파고 판 흙은 연못 주변에 가산(假山)을 쌓고 그 위에 대(臺)나 정자(亭子)를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연못을 조영하면 으레 연못가나 연못에 조성된 섬에는 누정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다시 분류하면 연못가에 누정을 두는 ‘지안형(池岸型)’과 연못의 섬안에 누정을 만드는 ‘지중형(池中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안형으로는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芙蓉亭), 애련정(愛蓮亭), 존덕정(尊德亭), 관람정(觀覽亭) 등이 이에 해당한다. 민가정원으로서는 경북 영양의 서석지원(瑞石池園)의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活來亭), 전남의 명옥헌(鳴玉軒)을 들 수 있다.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 보길도 부용동(芙蓉洞園林)의 세연정(洗然亭), 충재 권벌의 세거지인 닭실마을(유곡마을)의 청암정(靑巖亭), 남원 광한루원의 방장각(方丈閣) 등은 이와는 달라 연못을 파고 연못 안에 조성된 섬에 누정을 두는 지중형의 형태를 보여준다.


 

③ 계류형

이 유형은 원림내 자연계류에 연접하여 누정을 입지시키는 경우이다. 물론 이때의 주요 기능은 주변경관의 조망이고 조망대상은 당연히 흐르는 계류가 된다. 한국전통조경의 백미로 손꼽히는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취한정(翠寒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소요정(逍遙亭), 청의정(淸漪亭)은 모두 주산인 응봉의 계곡에서 발원한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자연계류를 중심으로 조성된 누정들이다.


④ 구릉형

지형적으로 주변 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까지 조망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는 누정의 형태이다. 서양과 대비되는 동양조경의 특징의 하나를 ‘차경(借景)’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차경이란 인위적으로 경관을 조성하기 보다는 가깝거나(鄰借)・멀리 있는 경치(遠借)를 빌려오기도 하고, 또는 내려다보거나(俯借), 올려다보게(仰借)함으로써 좋은 경치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말한다.

 

누정의 일차적인 조성목적이 경관조망이라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경관을 바라다 보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높은 곳에 위치하여 주변의 경치를 한곳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수법의 중심에는 항상 누정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창덕궁 낙선재 후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한정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앞으로는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반월지에 인접한 구릉지에는 승재정(勝在亭)이 입지하여 가까운 연못은 물론 주변의 경치가 모두 시야에 들어오게 하고 있다. 민가에 조성된 원림건축물로서 담양 소쇄원의 대봉대(待鳳臺)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아래의 계류는 물론 건너편의 광풍각과 제월당까지 한눈에 품고 있다.


④ 산림형

자연산림에 위치하여 산림 속의 수목과 기암괴석 등을 조망하기 위한 유형이다. 창덕궁의 청심정(靑心亭)과 능허정(凌虛亭)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형은 시간과 계절적 변화를 느끼기에 적합한 누정이다. 하루의 해가 뜨고 짐, 달이 뜨고 이지러지는 경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변화되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누정이기 때문이다. 중국 원림의 특징으로 차경수법을 설명하고 있는 중국 명시대 계성이 쓴 ‘원야(園冶)’에서는 차경의 으뜸을 ‘응시이차(應時以借)’라고 하였다. 경치를 빌리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보다도 시간적・계절적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경관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借景得體). 즉, ‘사시가경(四時街景)’을 득체(體得)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누정이다.


4 - 3. 산수누정 : 산수경관속의 누정

우리나라의 경관이 수려한 곳에 가면 으레 누정이 있기 마련이다. 누정은 드러나고 튀어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조금 높은 언덕에 깊숙하고 그윽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바위나 나무 그리고 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다. 비록 누정이 인공환경이지만 이런 동화된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선조들은 거부감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어떤 자연경관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오르게 되었다.

 

이 기대감이 인간과 자연, 즉 주와 객의 상호 일치를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서거정, 정인지, 권근 등과 같은 선조들은 “한 고을의 뒤어난 경치들이 모두 이 누각에 모여 있다”, 혹은 “한 고을의 뒤어난 경치들을 독차지 하고 있다”, 혹은 “멀리 뛰어난 경치들이 모두 주렴과 책상 사이에 다 모였다”고 했다(안계복, 5;1995). 즉 이러한 경치를 갖고 있으니 그 경치를 보는 순간 자연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이 일치하고, 주와 객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정이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산수유람의 거점이 된다. 다른 곳을 일일이 가 볼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한국전통조경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안계복, 98;2004).

 

산수유람의 거점인 산수누정은 입지에 ‘강안형(江岸型)’, ‘구상(丘上) 및 산복형(山腹型)’, ‘근린형(近鄰型)’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고(정동오, 27; 1986), 또는 흔히 강변(江邊)이나 호반형(湖畔型), 강해연변형(江海沿邊型), 구릉(丘陵)이나 산정형(山頂型)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중 입지하는 분포가 비교적 높은 계곡이나 계류형(溪流型), 강호(江湖)나 해안형(海岸型), 구릉(丘陵)이나 산정형(山頂型)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다.


① 계곡계류가의 정자

우리나라 옛 누정의 대부분은 계류가에 자리 잡고 있다. 계류를 낀 지역은 대체로 수목이 무성하며 천석이 깨끗하고 분위기도 그윽해서 예로부터 은군자들이 특히 선호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덕유산 용추계곡, 문경・괴산의 선유동계곡, 합천의 홍류동계곡 등 이름난 계곡에 심원정, 학천정, 농산정 등 많은 누정들이 산재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경남 함양의 화림동계류 변에도 농월정, 군자정, 동호정, 거연정 등 크고 작은 정자들이 즐비한데, 여기서도 계류 변을 선호했던 옛 처들의 심중을 읽을 수 있다.

 

선비들에게 있어서 계곡물은 단순히 자연풍광의 하나가 아니라 도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도체로서 존재했고, 그것은 또한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풍광이 빼어난 심산유곡 계류가에 정자 짓기를 선호했고, 그곳에서 계곡물을 관조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사색했던 것이다(허준, 16-18; 2009).


② 강호・해안의 정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많지만, 특히 동해안의 관동팔경이 유명하다. 이것은 관동지방의 여덟가지 빼어난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팔경 중에 총석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 정자가 여섯 개나 포함되어 있다.

문인들은 관동지방의 정자를 찾아와 주변에 전개된 바다와 호수의 풍광을 감상하는 흥취를 맛보았다. 시인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사나 시로 노래했고, 화가들은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물을 좋아하는 선비의 취향은 강변이나 호숫가에도 정자를 짓게 했다. 옛 선비들이 강호 생활을 즐겼던 것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이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동적이고 어진 이는 정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고 인자한 사람은 오래 산다.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論語》라고 한 공자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자기 정화와 수양을 중시하는 선비로서는 강호 자연과 동화된 경지에서 智, 仁을 갖춘 하나의 완전한 인격자가 된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를 가졌기에 선비들은 강호의 정자에서의 생활을 즐겨 마지않았던 것이다(허준, 16-18; 2009).


③ 구릉이나 산정의 정자

누정의 입지는 고저의 위치로 보면 고입지(산정), 중입지(산복), 저입지(평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산정이나 산복에 위치한 누정이 시각특성상 내려다 보는 부감경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치를 조망하기에 유리한 반면, 평지에 위치한 누정은 시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부분은 산수누정은 산정이나 산복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이면서 넓은 경포호의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입지한 경포대(鏡浦臺)와 담양의 면앙정(俛仰亭)이 대표적이다.

 

면앙정은 16세기 호남출신의 대표적 문신이자 면앙정 가단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의 선구자인 면앙정 송순(1493-1582)은 1533년에 창건하였다. 면앙정의 입지를 살펴보면, 상덕리 본가에서 1km정도 떨어진 언덕에 위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仰) 아래로 땅을 굽어 볼 수 있는(俛) 곳에 마치 학처럼 자리하였다8). 높은 곳에 자리함은 단순히 주변경관을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자연경물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이치를 깨닫고(格物致知) 하늘과 땅, 더 나아가 하늘의 본질을 깨닫고(道)를 인간의 이치를 깨닫고자(天人心性合一)의 경지에 닫고자 하는 심원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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