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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변방의 화가 변박


 

최학림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2012-09-01 [08:35:03] | 수정시간: 2012-09-03 [14:17:32] | 23면

18세기 변박은 이른바 변방의 화가였다. '이른 시기의 근대'에 동래 재지(在地) 화가로 변박, 이시눌, 변곤, 변탁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 변박은 한양 이외에서 이름을 알 수 있는 당대 최초·최고의 대표적 화가이다. 그의 재주는 타고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항전을 그린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를 1760년, 고작 20세 약관에 그렸으니 말이다. 비단 한 폭 위에 일목요연하게 농축된 항전의 전 과정이란! '한 폭의 그림이 깊은 참호와 높은 성담과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 하겠다'는 동래부사 홍명한의 말은 갸녀린 붓이 어디에 이를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순절도는 처참한 항전의 뜨거운 기념비적 기록이다.

변박은 우호의 붓도 과시했다. 1763년 조선
통신사 사행 때, 이전부터 그를 마음에 꼽고 있던 통신사 정사 조엄이 변박을 데리고 갔다. 당연히 변박은 막부의 쇼군 앞에서 조선의 공식 화원 김유성과 방불한 뛰어난 솜씨를 뽐냈다. 조엄은 그의 실력을 더 쳤던 것 같다. 그 사행 때 남긴 그림 '송하호도(松下虎圖)'에 애간장이 탔던 일본인들은 16년 뒤인 1779년 초량왜관을 통해 그의 그림을 구해 가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초량왜관도'에 감탄한다. 43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초량왜관의 56개 건물과 그 명칭을 실팍하게 담은 참으로 빼어난 그림이다. 단정한 그림 속의 거기는 아득한 부산이다. 왜 이 그림이 국보나 보물로 아직 지정되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 변방의 것이어서 그런가. 그는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산박물관에 있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 1781년, 부산시 기념물 제52호)의 7행 142자는 잡기가 없는 단정하고 깔끔한 예서다. '잡기 없는 단정함'은 그의 작품과 심성, 그리고 대체로 수식이 적은 당시 재지 문화의 한 갈피를 보여주고 있다.

순절도·초량왜관도 그린 당대 최고급
그에 대한 기록 공백 메울
스토리 필요


일제에 의해 금강공원으로 '쫓겨난'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衛門,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은 원래 동래 관아의 대문이었다. 그 현판을 변박이 썼다. 대원군이 썼다고도 하는 이 문 양쪽 주련,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는 전쟁과 교린이 겹쳐 있는 첨예한 경계 도시 부산을 말하고 있다. 그 주련처럼 변박의 작품이 전쟁과 교린을 그대로 아울렀던 것이다. 그게 변방에 적중한 변박의 면모였다.

변박은
한국의 역대 서화가 1천117명을 망라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나와 있지 않은 변방의 화가다. 그를 알 수 있는 문자 기록도 아주 적다. 누가 그에게 목소리를 입혀 이 역사의 공백과 허무를 메울 수 있을는가. 논설위원 theos@busan.com

 

 

 

 

 

[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6) '정책 이주' 2012-12-22 [08: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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