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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스크랩] ?부산의 포구(浦口)



  포구(浦口)란 배가 드나드는 개(浦)의 어귀(口)를 말한다.

 

개운포   감만포   나릿가포구   남포   다대포   대평포   두모포   모지포  

         부산포   분포      서평포    재송포   청사포   하단포   해운포   기장9포      

         그 외의 포구들...      


  개운포(開雲浦)


  울산의 개운포(開雲浦)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소속의 만호영이 있었다. 그 만호영이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수방(水坊)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부산포로 이관했는데 그 위치는 현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 부근이었다. 본래는 정공단 부근에 부산진 사영이 있었는데 그 첨사영이 오늘날의 부산진지성(자성대)으로 옮겨가고 그 첨사영 자리에 개운포만호영이 옮겨진 것이었다.


  그렇게 개운포에서 부산포로 옮겨와서도 만호영의 이름은 그대로 개운포만호영이라 했다. 그 때문에 개운포만호영이 있던 포구인 부산포를 개운포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개운포라는 이름은 만호영에 따른 일시적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감만포(甘灣浦)


  감만포(甘灣浦)는 남구의 문현로타리에서 바닷길을 따라 우암동을 지나면 감만동이다. 그 감만동 앞바다가 감만포다. 이 감만포도 매축으로 구조가 바뀌어 지난날의 지형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원래는 자연이 형성한 만으로서의 포구였다. 조선초 수군제도가 창설되자 경상좌도수군의 총사령부 격인 수군절도사영이 이 감만포에 설치되었다. 그 뒤 태종 때 이 절도사영이 울산의 개운포로 옮겨졌다. 이후 개운포로 옮겨졌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해운포(수영)로 옮겨져 왔다.


  해운포로 옮겨온 수군절도사영은 인조 13년(1635) 수영강의 물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토사로 병선의 움직임과 장선(藏船)에 지장이 있어 다시 감만포로 옮겼다. 그러나 감만포 맞은편이 두모포 왜관이었다. 왜관에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하여, 효종 3년(1652) 다시 감만포에서 해운포(수영)로 절도사영을 옮겼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두 차례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자리가 감만포다. 이 감만포를 戡蠻이라 썼다. 감은 『이길 감』또는 『찌를 감』이고 만은 『오랑캐 만』인데 이는 『평정할 이』또는 『동쪽오랑캐 이』자다. 오랑캐를 무찔러 평정한다는 뜻이 된다. 이 감만이는 수군절도사영이 있게 되자 수군 영에서 수군이 가진 임무인 오랑캐를 무찔러 평정한다는 수군 본분을 밝힌 곳의 이름이 되고, 포구의 이름이 된 것으로 본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왜적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전멸시켰다고 그리 이름하였다는 말이 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왜군의 포로를 수감했다가 처리한 곳이어서 그리 이름하였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40년의 慶七松의 해사록(海?錄)에 감만포(戡灣浦)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굳어진 이름으로 보아진다

  수군절도사영이 설정된 조선조 초만 해도 이곳은 사람이 그리 살지 않은 곳이어서 우리 이름으로서의 마을 이름도 굳어지지 않았을 것이니 수군의 식자층으로 부쳐진 마을 이름에 포구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가마이」「가마니」로 불러진다고 해서 「가마 부(釜)」의 부산으로 연관지우기도 하나 그 「가마이」「가마니」는 한자어로 된 식자층이 붙인 이름인 「감만이」가 잘 발음되지 않아서 「가마이」「가마니」로 불려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나릿가포구


  나릿가 포구는 영도구 대교동과 봉래 1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바닷가 포구의 옛 지명으로, 이곳은 1934년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전까지 육지로 왕래하던 도선장이였고, 따라서 이곳이 나룻배를 타고 오르내리는 곳이라 하여 나릿가 포구로 불렀다.


  나릿가 포구 일대는 1900연초에 일본인들이 유곽을 설치하면서 유흥지가 되었으며 광복후 특히 6.25전쟁 중에는 온갖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사창가로 변모하여 영도의 면모를 흐린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도시재개발이 진행되어 살기 좋은 주택가로 정화되었다. 특히 이곳 나릿가 포구 자리는 부산대교의 진입로가 되었으며 고층 아파트인 마리나 아파트가 건립되어 과거의 모습은 물론 '나릿가 포구'의 옛 지명도 사라지게 되었다.


  남포(南浦)


  남포동의 앞바다의 지명을 남포(南浦)라고 하면 처음 듣는 이름 같다. 남항(南港)이라고 하면 쉬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갈치 바닷가라면 그 위치가 더 분명해진다.
  남포동을 일제시대 南濱町이라 했다. 『濱』은 『물가 빈』으로 『남쪽 물가』란 뜻으로 일본인들은 미마미하(南濱)라 했지만 우리말로는 빈(濱)자를 그리 쓰지 않고 물가 포(浦)자를 써서 남빈정을 광복 후에 남포동으로 고쳤다. 부산에서 가장 서민적인 바다인 남포의 개척은 개항 이후의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남빈 해수욕장이었다. 실제 지금은 뭍으로 바뀐 자갈치시장 자리는 그때 자갈밭이 되어 물이 맑아 해수욕장으로 적격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 소요되는 채소와 고기와 쌀과 신탄 (장작과 숯)들이 남해안과 김해지역에서 배를 통하여 남빈으로 들어왔다. 또한 생활일용품도 대마도를 거쳐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때도 어항과 상항(商港)구실을 함께 했다.


  지금의 남포동에 있었던 해산물상조합에 들어갈 생선과 건어물도 들어오고, 대청동에 있었던 정미시장에 들어갈 나락〔벼〕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남빈매립공사가 1932년에서 1940년까지 8년간을 이은 이 공사는 남부민동 방파제 공사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충무동 앞과 자갈치시장을 5개의 공구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그렇게 공구를 나눈 것은 순차적인 공사로 항구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때 당시 이곳 남항은 그러한 어항과 상항(商港)의 역할만이 아니었다. 영도다리가 축조되고, 오늘까지도 남포동과 영도 사이로 오가는 도선장이 있지만 영도다리가 서기전에는 나루터로서의 역할도 켰다. 자갈치의 『치』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발치』『아래치』저만치』와 같은 토박이말의 접미사『치』가 붙어 『자갈치』가 된 것이라 한다. 자갈치가 본격적으로 붐비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 때였다. 피난동포들의 생업을 이곳 자갈치에서 이어가면서 자갈치에 난전이 생겨나고 전국의 피난민이 이곳을 터전으로 생업을 이어갔다.
  그래서 자갈치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름이지만 南港이라면 공식성이 풍긴다. 남포동 바닷가의 남포가 불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은 이미 포구의 시대를 지나 港口의 시대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다대포(多大洞)


  다대동(多大洞) 본동 앞바다가 다대포다. 다대포(多大浦)는 지리적으로 좋은 포구의 조건을 갖추어 다대포 또는 다대만(多大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낙동강 하구가 되어 낙동강의 토사가 다대포 서쪽바다와 강을 메워 몰운대 북쪽지대에 다대포해수욕장을 가졌다. 다대포의 지금은 어항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 하구이자 옛부터 일본과는 가장 가까운 거리가 되어 지난날은 국내외의 수군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군사의 요충지였다. 다대포는 지정학적인 영향 아래 외침을 받은 바도 잦았지만 그 외침에 대한 방비 또한 소홀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다대포에 본격적인 수군영이 설치되었다. 그 수군 만호영이 있었던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병선은 9척, 군사는 723명이었다. 다대포진영의 성의 축성은 성종 때로 보아진다. 원래 수군은 군량과 군용품을 배에 싣고 배위에서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해상에서는 수군이 전쟁을 맡고 적이 육지에 오르면 육군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니 계속되는 배에서의 근무로 배의 훼손이 심하고 군사의 고생도 많았다. 적을 맞아도 싸움을 육지에 떠넘기기 위해 피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성종 15년 수군도 포영의 축성을 하게된 것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다대포진영은 장림포에 있다가 지금의 다대포 본동쪽으로 옮겨갔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이다.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무너뜨리고 연이어 서평포진을 무너뜨리고는 다대포 진영으로 침공해 왔다. 이때 윤흥신 다대첨사는 아우인 윤흥제와 함께 군민을 이끌고 선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군민과 함께 전사했다. 그 윤흥신 형제와 군민을 모신 제단이 윤공단이다. 광복 후에는 한때 다대포가 일본에서 밀수를 해 오는 밀수선의 근거지가 되고 이곳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대평포(大平浦)


  영도구 대평동 앞 바다인 대평포(大平浦)는 대풍포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대풍포란 어선들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잠시 피항하는 포구라는 데서 비롯된다. 본래 이곳은 일제 때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영도에서 남포동쪽으로 뻗어 나온 하나의 큰 사주로서,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을숙도와 같은 모래 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0년초 일본의 어선들이 몰려들면서 어선의 피난처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즉 1900년초 우리 나라의 동해안과 남해안까지 출어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어선단이 이곳에서 풍랑을 피하여, 어선을 수리하고 급수를 받는 포구로 이용함으로써 연안어업기지로서 크게 각광을 받았었다.


  두모포(豆毛浦)


  동구 수정동에 있었던 두모포진은 기장에 있던 두모포진을 인조 7년(1629)에 부산포로 옮겨와 진영의 이름은 기장에 있었던 때와 같이 두모포진이라 했다. 이 두모포진은 수정동에 있었던 두모포 왜관이 1678년 용두산 부근의 초량 왜관으로 옮기자 그 왜관 자리에 두모포진을 1680년(숙종 6년) 부산포에서 다시 옮겼다. 종전의 두모포 왜관의 흥리선(장사 물건을 싣고 오가는 배)의 선착장 포구가 두모포 진영의 병선 선착장이 된 것이다. 그 두모포(豆毛浦) 포구는 지금은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침례병원 아래쪽 중앙로 주변이다. 그러나 수정동에는 왜관이 먼저고 두모포 진영이 뒤에 생겼다. 왜관이 있을 때는 두모포란 말도 없었기 때문에 부산왜관이라 했다.


  그런데 용두산으로 옮긴 왜관도 부산왜관이라 하게 되니 왜관이 이전 당시는 부산왜관이라 하면 어느쪽 왜관을 말하는지 그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동에 있었던 왜관을 구관 또는 고관이라 하고 용두산으로 옮긴 왜관을 신관이라 했다. 그와 함께 구관에 두모포 진영이 옮겨와 있으니 그 이름을 따서 지난날에 있었던 구 왜관을 두모포 왜관이라 하고 용두산으로 옮긴 신관의 왜관을 초량 왜관이라 했다. 그러니 수정동에 있을 당시는 두모포 왜관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초량 왜관이란 이름은 용두산을 초량소산이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정동을 지난날엔 豆毛浦里라 했고 『동래부지(1740)』는 두모포를 "동래부 관문에서 22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 두모포리는 두모포진에서 온 말이다. 1914년까지도 수정동은 부산면의 두모포리가 돼 있었다.


  모지포(毛知浦)


  모지포(毛知浦)는 서구 암남동에 있는 혈청소(국립동물검역소) 앞에 있는 해안으로 감천만에 열려있다. '몰치포'라고도 불리는 모지포는 본래 「모짓개」의 개(浦)에서 비롯되어 마을 이름이 생긴 것이다. 모짓개라는 마을의 동쪽 바닷가가 원래의 모짓개라는 포구가 된다. 암남공원의 서쪽 끝인 모지포만 부근에 만입된 작은 포구로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배후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암남동 패총이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후기(1850년경)에는 이곳에 10여명의 어민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가 안쪽에는 모지포 마을이 자연마을로 남아 있다.




  부산포(釜山浦)


  부산포(釜山浦)는 『동국여지승람(1486)』에는 부산(산의 이름) 아래 있다는 포구로 지금의 좌천동의 증산(甑山) 아래가 된다. 지금은 하나의 행정동으로 있으나, 부산포의 거듭된 발전으로 부산포의 얼 안이 넓어지면서 오늘날의 부산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부산포에는 수군진영인 부산진이 있었다. 조선 초에 설치된 그 부산진의 포구는 지금은 매축이 되어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지금의 정공단 자리가 옛부산진성의 남문으로 보고있다.
  또 부산 아래 부산포에는 항거왜호가 있었다고 했다. 이 항거왜호는 항상 머물고 있는 왜인의 집이란 뜻으로 왜의 상인이 장사하러 와서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던 곳이다. 그때 장사하러 오는 배는 부산포로 들어왔다. 지금의 좌천동 바닷가를 부산포라 했을 당시는 동래현과의 거리가 가까운 바닷가가 되어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면 이곳(영가대)에서 배를 띄웠다. 부산포는 군사, 무역, 외교상의 역할을 한 셈이다.


  부산포에 있던 왜관이 지금의 수정동으로 옮겨가고, 용두산 주위로 다시 옮겨가도 처음 부산포에 있었던 왜관이라 해서 우리 쪽에서는 부산왜관(釜山倭館)이라 하고 일본 쪽에서는 부산화관(釜山和館)이라 했다. 따라서 부산과 부산포란 이름은 용두산 얼 안까지 확대되어 갔다. 1740년 발간된『동래부지』에는 동래군 동평면에 속하였다. 부산포의 개항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국제항으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제2조에 3개항(부산, 원산, 인천) 개항을 명문화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1868년 이전에 1개의 부산면이 120년이 채 되지 않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광역시로 발전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분포(盆浦)


  분포(盆浦)는 현재 LG아파트(옛 동국제강)가 있는 남구 용호동 바닷가이다.
  소금을 굽는 분(盆)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이곳을 『분개』라 했는데 그 분개도 소금을 굽는 분(盆)이 있는 개(浦)란 뜻의 분개다.
  이 용호동을 조선말까지만 해도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라 했다. 이 분포는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 전에는 지금의 대연동의 석포마을 동쪽에서 바닷물을 끌어들여 염전을 개발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그 뒤 포구와 함께 염전이 동남쪽으로 옮겨져 가다가 지금의 용호동 본동 자리로 분포의 포구와 함께 염전이 옮겨졌다. 조선시대에는 소금을 굽는 분(盆)이 24개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 직전에는 염전 구역을 6개로 정리하였다.


  1910년 조선총독부 발행의 『재정통계연보』에 다르면 1909년, 이곳 분포의 1년간 제염량은 44만 4천 2백 6근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 이전에 통감부는 이미 이곳에 시험제염 용호출장소를 설치하여 제염시험을 시작했던 것이다. 소금이 전매품이었던 일제때의 분포는 제염을 위한 연료인 석탄과 그 이외의 운영비 일체를 조선총독부에서 지급 받는 대신 생산된 소금은 전매국에 공정가격으로 내었다. 그때의 제염방법은 분포의 포구에 시설을 갖춘 염전의 모래 속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여 햇빛으로 물기를 증발시킨 뒤 모래 속의 염분을 해수로 걸러내었다. 8.15광복 후에도 제염을 하였지만 정부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도 제조된 소금 8할까지는 정부고시가격으로 전매청에 내어야 했다. 그러한 불리한 조건으로 제염 종사자는 의욕을 잃게 되는 가운데 5.16쿠데타 이후 분포는 택지와 공장으로 바뀌어 분포라는 포구와 함께 염전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서평포(西平浦)


  서평포(西平浦)란 구평동의 성개를 말한다. 지금의 성포(城浦)를 성(城)이 있어서 성개라 했는데 그 성개의 북동쪽 바닷가가 지난날의 서평포 포구가 된다. 지금의 구평동 본동은 구서평이라 하다가 구평이 된 것은 서평포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서평포의 서평을 구평이라 한데는 신평동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구평동에는 토성의 자취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그 토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성포에 석성이 쌓기 이전의 성으로 보인다. 이곳 성포인 서평포에 수군진영이 설정된 것은 삼포의 왜란(1510년) 뒤의 중종 17년(1522)부터다. 그 이전은 부산진 첨사영에 속한 작은 보성(堡城)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병 일부는 서평포진을 함락시키고 다대포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부산지방의 임진왜란은 갑작스런 일이 되어서 서평포진 전투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임진왜란으로 성이 무너져 진영의 역할을 할 수 없어 다대포진으로 옮겼다가 다대포진이 좁아서 1668년(현종9) 다시 본래의 서평포로 옮겼다. 부산포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서평포 앞바다서 왜선 9척을 불지른 기록을 보면 이 서평포도 격전지였던 것 같다.




  재송포(裁松浦)


  재송포(裁松浦)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소나무 만주(萬株)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재송동은 소나무가 많아 재송동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포구였다고 하면 어디에 그 포구가 있었을까 의아해질 것이다. 그러나 재송동 남쪽의 충렬로와 동해남부선 철둑길 아래는 언제까지란 것을 확연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해도 배가 드나드는 바다였을 것이다. 옛날 배를 만든 곳으로 추정되는 조선골이란 마을 이름이 재송동에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재송동에 재송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송포는 수영강과 온천천이 합류하는 토사로 바다가 메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컨테이너 하적장 넓은 터는 재송포가 메워진 뒤의 일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지난날의 재송포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없어진 포구이다.


  청사포(靑沙浦)

 
  청사포(靑沙浦)는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포구로 갯바위로 된 해안에 수려한 사빈이 펼쳐지고 배후에 송림이 우거져 보기 드문 해안 경승지를 이룬다.
청사포는 사실 오래 전부터 포구의 기능을 다져온 마을이다.
동해의 최남단, 남해의 최동단 교차점에 자리잡아 난류와 한류가 한데 섞이는 덕에 앞바다에는 늘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청사포에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다. 갓 시집 온 여인이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몇 달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해난사고를 당한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여인이 멀리 수평선을 향해 눈물지으면서 기다리던 큰 소나무와 그 아래 바위가 지금의 수령 350년의 망부송과 망부암이 있다. 청사포(靑沙浦)의 본래 이름은 청사포(靑蛇浦)로 전해진다.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던 여인을 용왕이 보낸 푸른 뱀(靑蛇)이 찾아와 여인을 용궁으로 안내하여 남편을 만나보게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정씨 부인이 바위 위에 앉아 기다리다가 더 먼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기다렸으나 지아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그 당시 바위를 망부석이라 하고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외롭게 죽어간 부부의 혼을 위로하고 해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단지 곱기만 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던 청사포라는 이름은 그 같은 전설로 인해 더욱 더 깊은 인상을 여행자들의 가슴에 심어준다.




  하단포(下端浦)


  사하구 하단동의 하단 나루터가 하단포(下端浦)이며, 바다 아닌 강의 포구로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기슭의 정비가 덜된 상태의 낮은 수심과 주위의 갈대숲과 작은 배들로써 옛 포구 같은 정취를 남기고 있다. 하단(下端)이란 이름은 동래군 사천면을 편의에 따라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때 생겼다. 그때 상단이라 하면 지금의 사상지역을 말하고, 하단이라 하면 사하의 넓은 지역이었다.
  하단은 낙동강 하류의 끝자리로 사천면의 하단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들고 보니 평림리라 불리던 이름이 하단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하단포에서는 김해 대동면과 강서구 명지와 녹산, 을숙도로 오가는 소요객과 낚시꾼을 실어 나르는 정도였다. 이곳에는 소요객을 위한 고시래기회와 재첩국과 대합조개 구이가 명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근대화의 물결은 한적한 낭만의 곳으로 바뀐 하단에도 밀어닥쳤다. 대티터널이 1971년 4월 15일에 뚫어지고, 1973년에는 당리와 하단지구의 구획정리사업이 이루어지고 낙동로가 확장 정비되고 간선도로가 1973년에 개설되면서 도로망이 갖추어졌다. 1988년에는 낙동강 하구 둑이 하단을 기점으로 구축되었다. 하단은 1970년대부터 그 동안의 침체를 벗어나면서 쾌적한 삶의 터인 신흥도시로 바뀌어 옛포구인 강마을의 한적함과 낭만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해운포(海雲浦)


  해운포(海雲浦)는 현재의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포구가 아니고 지금의 수영강이 흐르는 하구쪽 포구를 말한다. 수영강이라 하고 수영이라 하는 이름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지금의 수영으로 옮겨온 뒤 수군절도사영을 줄인 말로 수영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1740년 『동래부지』에 보면, 이곳을 남촌면이라 했다. 이 해운포에도 만호영인 해운포진영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 다대포만호영이 첨사영로 승격되고 해운포만호영은 울산의 염포와 영포, 조포의 만호영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좌수영이 해운포로 옮겨올 때는 해운포만호영은 폐지된 뒤였다. 이 해운포를 지금의 수영강 하구라 하였지만 해운포라 일컬어질 그때는 지금처럼 협소한 수영강 하구가 아니었다. 지난날의 수영비행장으로 수영과 해운대 사이의 모래펄 평지 자리가 바다여서 만의 형태가 돼 있었는데 수영강과 해운대 우동천의 강류가 어울려 모래를 실어내려 그 만(灣)의 형태인 해운포를 메운 것이었다. 해운포에 만호영이 있었을 그때는 지금의 시립미술관 부근의 넓은 포구를 해운포로 보고 있다.




  기장 9포


  기장지역의 포구로 대표되는 것이 9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장읍지』에 수록되어 있는 9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지포(無知浦)는 신암(新岩)마을과 대변리(大邊里)로 무지포의 무는 물이고, 재는 성(城)의 옛말로서 물재가 되고 한역하면 수성(水城)이 된다. 또한 무차포 (武次浦)라고도 한다.


  ② 이을포(伊乙浦)는 이천리(伊川里)로 이을포를 얼개로 이을개라는 말을 줄여서 얼개가 되었다. 이을개는 잇은개〔連結浦〕라는 말로 곧 어량(魚梁)이다. 어량이라는 것은 속어로 얼개라 하는데 강물이 한 군데로만 흐르도록 막아놓고,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이다. 오늘날의 일광해수욕장이 되었다. 이을포는 뒤에 이름이 이천으로 바뀌었다.


  ③ 가을포(加乙浦)는 송정동에 있는 송정천과 그 하구일대는 옛날에 갈대밭이었다. 갈개를 한자음으로 가을포라 표기하였다. 오늘날의 송정해수욕장이 되었다.


  ④ 동백포(冬柏浦)는 동백리의 동(冬)은 동()이 본래의 뜻이다. 동()은 저수지로서 동막이 동이다. 저수지의 제방을 막는 것을 동막이라 하는데서 온 막을 동이다. 백(栢)은 마을이 있는 골을 박골(朴谷)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⑤ 공수포(公須浦)는 공수마을이다. 비옥포(非玉浦), 비옥포(飛玉浦), 비조포 (飛鳥浦)라고도 하는데 비오리라는 물새가 많다는 뜻이다.


  ⑥ 기포(碁浦)는 이동(伊東)마을로 속명으로 바돌개라 한다. 바둑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검은 바둑돌이 많이 깔려 있다.


  ⑦ 독이포(禿伊浦)는 문동리(文東里)로 독이포의 독(禿)은 민둥 禿이다. 마을 뒷산을 민둥산(禿伊山)이라 하고, 갯포를 민둥개라 하였다. 민둥이란 어감이 좋지 못하여 발음이 비슷하고 좋은 글 문(文)자로 바꿔서 민둥이 산을 문산(文山)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문리(文里)라 하였다.


  ⑧ 월래포(月來浦)는 월내리(月內里)로 고대지명에 어래산(御來山), 어라산 (於羅山), 울산(蔚山), 올산(兀山)은 모두 사방을 나무로 흙으로 둘러친 우리, 울타리의 표기이다. 월래해수욕장으로 탈바꿈하였다.


  ⑨ 화사을포(火士乙浦)는 고리(古里)마을로 이를 줄여서 화포(火浦)라 하였다. 화사을포의 화(火)는 불이고, 사을(士乙)은 살(光)이고 포는 개로서 불살개라 하였다. 화사을포는 화철령(火鐵領)이 뻗어 바다에 접한 곳으로 새벽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갯포의 찬연한 광경을 불살개라 한다. 지금 이곳에는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그 외의 포구들


  이외에도 남구 용호동의 白雲浦, 4백년 전만 해도 포구였던 자리가 자연의 힘으로 매립되어 지금은 육지의 한가운데가 된 石浦, 인공적인 매립으로 아파트단지가 된 南川浦, 해운대구 송정동의 구덕마을 앞의 九德浦, 해운대구 중1동의 尾浦, 지금의 충무동 광장과 보수천이 어우러진 자리에 있었던 富民浦, 사하구의 감내(甘內)였던 甘川浦, 북구 구포의 甘同浦, 영도구 대평동의 대풍포(待風浦 : 大風浦), 청학동과 동삼동 사이 복징어(복어)가 많이 잡혀서 복징어포가 복징포(福增浦)가 되면서 포구의 고개 이름도 복징어고개가 된 복징포들 부산에는 아주 많은 포구가 뭍이 바다 또는 강을 둘러싸고 있다. (부산광역시립연산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출처 : 나리의 세상사는 이야기
글쓴이 : 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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