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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부석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부석사

사찰소개

부석사 전경

    • 부석사(浮石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에 속한 사찰이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鳳凰山)은 산의 지세가 봉황과 닮았다고 하는 뛰어난 길지이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올라서서 바라보면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어 협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676년 중국 당나라 유학 후 돌아와 처음으로 지은 절이다. 절 이름을 ‘부석사’라 한 것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대사와 선묘(善妙) 낭자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 또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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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이른바 ‘화엄 10찰’ 가운데 한 곳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사로 여겨졌으며, 창건 이래 의상대사의 법을 전하는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는 한국 전통건축의 모범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전각이 다 잘 갖추어져 있는데, 각종 전각과 석탑, 석등이 높이를 달리하여 굳건히 있어서 신앙과 수행의 도량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공간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수도처로 유명한 취현암은 최근까지도 선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산내암자로 속해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는 부석사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준다.
      최근에는 사찰 내에 성보전시관이 마련되어 부석사의 귀중한 문화재들 또한 일목요연하게 관람할 수 있다.
    •                                                                    부석사에서 바라본 전경

봉황산의 자연환경

 
  • 봉황산(鳳凰山)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과 봉화군 물야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819m이다.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태백산의 한 자락으로서 부석사의 일주문 현판에도 ‘太白山 浮石寺’라고 쓰여 있다. 태백산에서 구룡산-옥돌봉-선달산-소백산으로 서진하던 백두대간이 선달산에서 작은 산줄기 하나를 남으로 내려 보내 봉황산을 이룬다. 산세가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봉황산이라고 부르며, 『여지도서』에는 "…산꼭대기에 옛 성터가 남아 있어 일명 ’왕산(王山)‘이라고도 부른다. 전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 왔을 때 이 산에 올랐기 때문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풍수가들은 부석사가 앉은 형국을 서봉포란형(瑞鳳抱卵形)이라고 하는데, 현재 봉황의 좌우 날개인 청룡백호에 해당되는 곳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었다.
  •                                                                               부석사 풍경
  •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살펴보면, 아래에서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지세가 넓어져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것 같은 형상으로서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가는 절의 배치이다. 따라서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은 무량수전 앞에 서면 소백산맥의 산봉우리가 한 눈에 굽이치고 사방의 경계가 하나의 걸림도 없다.
  • 부석사의 자연환경은 30~40년 된 참나무림이 사찰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뒤로는 봉황산 남측사면 전반에 걸쳐 넓게 형성된 소나무림이 부석사의 배경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진입공간은 별도의 수림대가 확인되지 않으며, 제비꽃, 개별꽃, 광대수염, 민들레, 애기똥풀, 개불알풀, 산괴불주머니 등 우리 산야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그 주변 일대도 대부분 과수원 및 경작지로 개간되었다.
  •                                                                               부석사 진입로
  • 부석사는 유구한 역사에 비해 뚜렷한 거목이 눈에 띠지 않는다. 경내에는 돌배나무, 찰피나무, 밤나무 정도가 확인되는데, 대부분 50년생 내외의 수목들이다. 한편, 조사당 처마 밑에는 선비화(禪扉花)라 불리는 작지만 오래된 나무가 기단 상부에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꽂아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전하며,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입적할 당시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나무의 종명(種名)은 골담초인데, 우리나라 중부이북 지역과 중국 북동부 및 몽고지역에 분포하는 낙엽관목으로 내음성, 내한성, 내병충해성이 매우 강하고 토양에 대한 적응성도 높다. 이 때문에 물도 적고 햇볕도 들지 않는 조사당 처마 밑에서 수백 년을 연명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에서는 1982년부터 보호수(도나무 11-70)로 지정하였으며, 사찰 측에서는 철책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나무로 변했다고 전하는 선비화(禪扉花) 골담초

 

부석사의 역사

    • 부석사는 신라 때인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석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외에도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 「부석사안양루중창기(浮石寺安養樓重創記)」, 원융국사탑비, 몇 가지 묵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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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부석사 삼층석탑
    • 창건 직후 의상대사는 40일 동안 법회를 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로써 부석사는 신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서 성장하였다. 의상대사를 다른 이름으로 부석존자(浮石尊者)라 일컫고, 그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였으니 부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대사의 제자가 무려 3,000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들이 모두 부석사에서 대사의 강론과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대사의 뒤를 이어 부석사에 주석하여 신라 화엄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로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연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무염(無染)·절중(折中) 등이 있다.

      고려시대 들어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부석사에서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였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전한다. 원융국사는 평생을 부석사에서 지냈고, 입적 후 절에 비가 세워졌다. 이후 1101년(숙종 6)에는 왕의 명령으로 의상대사의 공덕비를 건립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왜적의 침탈로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 천희(千熙)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수하였다.
    •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억압받았으나, 부석사는 큰 변화 없이 법등이 이어졌다. 대대적 중창으로는 1580년에 사명대사의 중건과 1746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전각 등을 1748년에 복원한 일을 들 수 있다. 근대 이후에는 1916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의 전면적 해체 보수가 있었다. 1966년에는 현재 가람의 동쪽 옛 가람터에 있던 쌍탑을 범종각 앞으로 옮겼다. 1977년 이후 일주문·천왕문·승당(僧堂) 등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연표

 

        연대                       내용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
1053년 원융국사 대장경 인출
1101년 의상대사 공덕비 건립
1201년 조사당 단청
1250년 총명국사(沖明國師) 각응(覺膺)이 아미타경을 조판하여 판전에 소장함
1358년 왜적의 침입으로 무량수전 등 소실
1376년 원응국사 무량수전 등 복원
1555년 안양루 화재 발생
1580년 안양루 중건
1613년 취현암 중건
1723년 안양문 중수
1746년 화재로 인해 전각과 요사 등이 크게 소실
1748년 승당(僧堂),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 범종각(梵鐘閣), 중수
1916년 무량수전, 응향각 보수, 조사당 보수, 취현암 이건
1966년 ~ 동쪽 옛가람터에 있던 쌍탑을 범종각 앞으로 이건
 

 

 

부석사의 가람배치

* 주요전각 클릭 시 관련설명이 나옵니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번지에 위치한 부석사는 25개 동의 건물 외에 1개의 암자가 있다. 부석사는 의상이 화엄종을 펼치기 위해서 창건한 사찰로 교리와 신앙체계가 요구하는 공간구성을 건축적으로 잘 구현한 곳이다. 의상의 뒤를 이은 법손인 신림 대에 이르러 가람의 틀이 완성됐다. 주요 전각의 배치, 무량수전의 구조미, 교리와 연결된 지형의 해석 등은 한국건축의 빼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뛰어난 구성과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중첩된 장면은 한국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부석사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으로서 구조적 아름다움으로 찬사를 받는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있으며, 다수의 국보 및 보물급의 유물이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체적 건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건물로, 현재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1916년 해체 보수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1358년 왜병의 침탈을 당했다가 1376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보다 앞서고 있으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 사이의 거리가 길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팔작형식의 지붕 경사는 후대 건물에 비해 완만하다. 도리가 9개나 되는 9량집으로 큰 건물이다.

무량수전에서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수법이다. 이것은 모두 착시에 의한 건물의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 구조를 만들기 위한 고도의 기법들이다. 먼저 안허리곡은 건물의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이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우는 것이다. 이 건물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의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다음으로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배흘림 역시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 기둥은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건물 정면은 분합문과 들어 올릴 수 있는 광창을 두었으나, 이는 중수를 거치면서 바뀐 듯 하다. 원래의 창호는 건물 후면에 있는 것과 같이 신방목을 가진 문틀에 널판문을 달고 그 좌우에는 창을 두었을 것이다.

공포는 주심포 양식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전형적인 북방 계통의 수법으로 주두와 소로는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건물만의 특징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을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매우 특이하다.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기둥을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는 매우 드문 방식이며 뛰어난 감각이 느껴지는 구조이다.

 

 

부석사의 국가유산

현재 부석사의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5건, 보물 6건, 시도유형문화재 2건 등이 있다.
연번          종목                                                                            명칭                                                           시대

 

1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통일신라시대
2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시대
3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고려시대(1377년)
4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고려시대
5 국보 제46호 부석사조사당벽화 고려시대(1377년 추정)
6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 통일신라시대
7 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8 보물 제255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통일신라시대
9 보물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고려시대
10 보물 제1562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조선시대
11 보물 제1636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12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7호 부석사원융국사비 고려시대
13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부석사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2015년 6월 기준

부석사 문화재 자세히 보기

 
부석사의 인물
의상대사 (義湘大師, 625~702년)
  •                                                               의상대사 진영(義湘大師, 625~702년)
  • 신라의 승려로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창조이다. 법명은 의상, 속성은 김씨이다.
    644년(선덕여왕13)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 650년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요동(遼東)에서 고구려의 군사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을 따라 다시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서 머무르다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사상을 배웠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은 671년(문무왕11)에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하였다고 한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준다.

    그 뒤 676년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두루 찾아다녔다. 부석사를 비롯하여 전국에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화엄십찰(부석사·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보원사·갑사·국신사·청담사 등)이라 한다. 부석사에 터를 잡은 뒤로는 화엄신앙을 널리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제자로는 3,000명이 있었다고 하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의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 불리는 고승들이 있다.

    702년 세수 78세, 법랍 49년에 입적하였으며, 고려 숙종(肅宗)에게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원융국사 결응 (圓融國師 決凝, 964~1053년)
  •                                                       부석사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 고려 전기의 승려로 법명은 결응, 원융은 시호이다. 부석사에 오래 머물며 가람을 정비하였다.

    12세에 용흥사(龍興寺)에서 출가하여, 복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대장경』을 공부하며 수행을 하였다. 991년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다.

    그 뒤 목종·현종·덕종·정종 등을 겪으며 큰 존경을 받았다. 현종 초 수좌(首座)가 되었고, 정종 초 승통(僧統)에 올랐으며, 1041년(정종7)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왕사(王師)로 봉해졌다. 1043년 문덕전(文德殿)에서 비를 빌면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단비와 천화(天花)가 내렸다고 한다.

    1042년(정종8)에 ‘소나무와 칡덩굴이 있는 곳이 몸을 버릴 곳’이라 하고, 왕의 허락을 얻어 부석사(浮石寺)에 머물렀다. 이때 의상대사의 덕을 사모하여 대장경을 인출하고 부석사와 안국사(安國寺)에 나누어서 봉안하였다. 현재 부석사에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1047년(문종1) 봉은사에서 국사(國師)로 책봉되었으며, 말년에 고향에 절을 창건하자 문종은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는 사액을 내렸다. 그 뒤 부석사에 머물다가 나이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였다.

    문종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부석사에는 원융국사의 비가 남아있다. 제자로는 관증(觀證)·해수(海秀)·해원(海元)·연윤(聯胤) 등 1,438인이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부석사의 설화

의상대사와 부석사
  •                                                                        

                                                                                 선묘각 선묘도(상:2010년대, 하: 현)
  •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속성은 박씨이며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 사람인데,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어 출가하여 산천에 노닐다가 불도에 들었으며 성품은 매우 천연덕스러웠다고 한다
  • 의상대사는 일찍이 법을 구하러 원효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국경에 이르러 폭풍이 심하여 마침 길가의 토굴 속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비로 자욱하고 땅은 질어 이번에는 벽돌 굽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채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괴변을 부렸다. 원효스님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 ‘어젯밤에는 토굴 아닌 무덤에서 잠을 자도 편안했었는데 오늘밤에는 초저녁부터 도깨비굴이 있다 생각하니 탈이 많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일이 생기는구나(一切唯心造).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니 토굴이건 무덤이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라고 하며, 원효스님은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  
  • 그러나 의상스님은 굳은 각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며 당나라로 향하는 상선(商船)을 탔고 669년 당나라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다. 신도의 딸이었던 선묘(善妙)란 처녀는 의상대사를 보고 흠모하게 되었으나, 한번 출가하여 뜻한 바를 정한 대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의상은 그 뒤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智嚴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워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귀국 날짜를 정하고 등주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러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타고 신라로 귀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는 대사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
  •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하며 파도 위로 함을 던졌다. 때 마침 거센 질풍이 불더니 함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에 떨어졌다.
  • 선묘는 다시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龍)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하였다.

  • 의상스님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불법을 펼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봉황산 자락에서 그곳을 찾았으나 이미 500여명의 도적떼가 그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                                                                                  부석사 (浮石寺) 부석 (浮石)
  • 그 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용(善妙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날아다니며 위협하자 많은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그 터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 부석사이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선묘가 변한 커다란 돌로 도적떼를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하며, 부석사 내 선묘각에서는 선묘를 기리고 있다.

 

부석사 안내

  • 주소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 연락처054-633-3464
  • 홈페이지http://www.pusoksa.org
오시는길
  • 고속도로 이용중앙고속도로 → 풍기IC → 부석사
  • 대중교통 이용
  • - 영주공용터미널 건너편에서 부석사행 시내버스 이용 (1시간 30분 소요)
  • - 풍기역 앞에서 부석사행 시내버스 이용 (1시간 10분 소요)
  • 입장료
    개인단체(30인이상)
    어른 1,200 1,000
    청소년 1,000 800
    어린이 800 500
  • 주차료승용차 3000원, 버스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