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은대한민국의 산사(산속에 있는 절) 7곳을 묶어 등재한유네스코세계유산이다. 대한민국의 13번째 세계유산으로,2018년6월 30일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결정되었다. 산지승원의 개념과 고유의 사찰문화를 갖고있는 자랑스러운 7곳의 산사를 내용을 소개코자한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아 산 안쪽에 위치한 입지 특성을 갖고,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수행과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승원이다. 7~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당시 사찰이 수도인 경주 등 도시에 위치한 것과 달리 등재된 7개 산사는 산지에 창건되었다. 산사가 처음 경영되던 7세기에 통도사와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가 차례로 창건되어 교단활동을 이끌었다. 통도사는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자장이 계율을 강조한 사찰로 창건하였고, 화엄종에서는 부석사와 봉정사를 창건하였으며 법상종의 사상적 바탕에서 법주사가 창건되었다. 8세기 말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선종이 유행하게 되자 선 수행의 장소로서 이상적인 입지조건을 갖춘 전국의 명산에 본격적으로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가 이시기에 창건 되었다. 이후 산사의 운영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경영되며 한국불교의 시대적 변모를 담아 왔다.
산사의 가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선암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하 ‘산사’)의 유산요소로 선정된 7개 사찰은 불교 전래 이래 ‘한국불교’로서 지역적 발전 양상을 갖기 시작한 7세기부터 9세기까지 당시의 주요 종파인 계율종, 화엄종, 법상종 및 선종을 기반으로 창건되었다. 이 종파들은 고려시대(918 - 1392)에 더욱 번창하였으나, 배불정책을 표방한 조선시대(1392 - 1910)에 들어 선교양종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역사적 상황은 승가교육에도 반영되어 선 수행과 교리 학습의 양 축으로 확립되었으며, 이 체계가 현대 승가교육에도 이어지고 있다.
스님들은 선 수행과 교리 학습 외에도 산사의 관리를 위한 모든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이 역시 스님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수련의 한 과정이었다. 일상적인 산사의 관리 외에도 스님들은 사찰의 건축 및 보수에 참여하였고, 다양한 불교미술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의 거듭된 전란 후에도 스님들은 사원의 재건과 더불어 불교 의례를 통해 종교적 기능과 사회 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불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축소됨에 따라 스님들은 사찰의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며, 이는 한국불교 교단이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산사’는 한국불교의 교육, 수행, 생활적인 측면이 모두 종합된 공간이며, 한국불교가 발전했던 역사의 전 과정을 유·무형으로 담고 있는 유산이다. 스님과 신도들이 불교신앙공동체를 구성하여 현재까지 단절 없이 수행과 신앙생활을 유지해 온 지속성 측면에서 산사의 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
통도사
산사의 공간
‘산사’는 산사의 사상을 구현하는 건축물을 건립하고 운영하였다. 통도사는 계율종의 사상적 바탕이 금강계단과 대웅보전의 정신성에 반영되었고,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이 동향한 것은 아미타불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미타신앙에 따른 것이며, 다단식 가람 구성은 화엄 수행을 반영한 것이다. 봉정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의 양원 구성은 미타신앙과 석가신앙을 병행하여 구현한 것이며,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법상종 신앙을 가람구성의 핵심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곡사의 대웅보전과 선암사의 대웅전은 석가신앙을, 대흥사의 표충사는 불교와 국가의식을 결합한 신앙을 반영 하여 형성되었다. 이처럼 산사의 가람 구성은 각 산사의 산상과 신앙을 반영하고, 여기에 수행의 적합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통도사 대웅보전
부석사 소조아미타불상
봉정사 석가탄신일 예불모습
일주문은 사찰에 이르는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성스러운 장소와 일반적 장소를 구분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산사의 경내구역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개의 문을 지나 중심 영역에 이르도록 구성된 진입 동선은 장소의 신성감을 확보하기 위한 한국 산사만의 독창적인 형식이다. 산문에서 일주문을 거쳐 중심 영역에 이르기까지 건물들은 각각의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는 유기적 질서 속에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형태로서 한국불교의 시대별 발달 단계를 사상적, 건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산사’는 누각과 주법당과 좌우 요사채가 마당 중심으로 세워진 구조를 기본 틀로 한다. 이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앞마당에 원래 흙바탕 그대로의 널찍한 공간을 확보하고 그 앞으로 누각이 조영되어 사찰의 출입과 경관을 연출하며 마당 좌우에 승방 등 요사채가 자리 잡는 구조이다. 산사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주불전 주변에 보조불전이 건립 되었고 삼성각과 칠성각, 독성각 등 여러 신앙이 융합되어 산사 영역 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산사와 산은 따로 경계를 두지 않고 개방된 공간으로 연결되었고, 산사의 건물군은 산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한 요소로 인식되어 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확장되고 운영되었다. 산사의 건물은 경내의 일정 면적에 집중 배치되어 있으며, 신성한 독립 공간으로서 승려들의 수행과 생활의 장소이면서도 대중들의 신앙처로서 공동체 공간을 형성한다. 또한, 경내의 건축물들은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건립함으로써 주변 지형이나 자연경관과 어울리게 배치하였다.
또한 사찰의 공간은 불보살을 모시는 불전건물과 수행자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강당, 수행자가 참선하는 선원, 사찰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의 요사, 기타 수행과 생활에 필요한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산지가람은 산세, 배경이 되는 봉우리와 지형적 특징을 잘 활용하여 불교교리를 건물 배치와 외부공간으로 표현한다.
우리의 전통산사는 유무형의 불교문화를 담아내고 종합적 수행도량의 성격을 가진다. 사찰에서 수행자나 일반신도들은 부처님 전에 예경을 올리며 불공하고 제사를 지내며 경전을 독송하고 참선하는 수행문화체계를 담아내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특히 선정된 7개 사찰 대다수에는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강당이나 참선하는 선원 건축물이 있어서 한국불교의 종합수행도량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통도사
사찰소개
통도사 전경
통도사(通度寺)는 경상남도 양산시 영축산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영축산(靈鷲山)은 축서산(鷲棲山)이라고도 하는데 산 곳곳에 바위가 많은 바위산이다. 『통도사약지(通度寺略誌)』에 보면 통도사가 위치한 이 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 영축산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영축산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있던 자리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통도사라는 이름이 지어진 유래에 대해서는 ‘이곳 산의 모양이 부처님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 靈鷲山形]’ 하여 통도사라 일컫어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로는 ‘승려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이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라는 뜻과 ‘모든 진리를 통달해 중생을 제도하라[通諸萬法度濟衆生]’는 뜻 또한 담겨있다고 한다.
통도사 대웅보전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 승탑군
통도사는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佛寶寺刹)이다. 따라서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를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이 되었다.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이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대본산(禪敎兩宗大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불보사찰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자장율사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것이다.
영축산(靈鷲山)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과 원동면에 걸쳐 있으며, 영남 알프스의 일부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는 1,087m이다. 신불산 아래에 위치하며 울산광역시와 양산시 경계지역에 있다. 영축산의 발원을 살펴보면, 가지산(迦智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능동산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쪽은 남서쪽으로 향하는 줄기는 밀양의 천황산과 제약산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동쪽으로 내려와 배내고개를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줄기는 간월산과 신불산을 지나 이곳 영축산의 첫머리에서 높이 솟구쳐 계속 남쪽으로 이어진다. 통도사는 이곳 영축산 남쪽 산기슭 해발 170m 지점에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평탄 곳에 남향으로 입지하고 있다. 이 일대는 가지산도립공원 통도사지구에 속하는데, 1979년 11월에 지정되었다. 공원구역은 태백산맥의 여맥에 솟은 가지산을 비롯한 영축산 · 천성산 등의 자연경관과 그들 산지에 있는 전통사찰 경관을 중심으로 석남사지구 · 영축산 통도사지구 ·천성산 내원사지구로 나뉘어 각각 독립된 지구를 이룬다.
극락암 후면 소나무림과 영축산 경관
영축산이라는 명칭은 인도의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의 이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과거에는 산세가 매가 날개를 펴고 내려 않은 모양새와 같다고 하여 축서산(鷲棲山)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이 산의 모양이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유명한 영축산과 통한다고 하여 주로 사명과 더불어 ‘영축산 통도사’로 부르고 있다. 한편 인도의 영축산 또한 수행자와 독수리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통도사 일원에는 ‘통도 8경’으로 이름난 풍광이 있는데, 영축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진입로의 겨울철 바람에 춤추는 소나무 경관(舞風寒松), 안양암에서 조망하는 통도사의 일출 경관(安養東臺), 비로암 폭포의 소리인(毘盧瀑布), 자장암 일대의 계곡과 산세의 경관(慈藏洞天), 영축산의 경관을 담은 극락암의 영지(極樂影池), 백운암의 큰 북소리(白雲鳴鼓), 영축산 정상에 축조한 단조성의 저녁노을(丹城落照), 취운암의 저녁 범종소리(翠雲暮鐘)이다.
통도 8경중 으뜸인 무풍한송(舞風寒松)
사찰림은 전체적으로 노령의 소나무림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국지적으로 활엽수림, 침활혼효림, 잣나무림 등이 산포해 있다. 또한 대광명전에서 금당 후면에는 과거 방풍림으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왕대와 이대로 이루어진 대나무군락이 남아있다. 영축산문을 들어서 양산천을 따라 무풍교, 청류교를 지나 삼문(총림문)에 이르는 소나무숲길은 오래되어 줄기가 용처럼 굽은 적송이 자생하고 있는데, 현재도 잡목을 솎아내고 지주목을 설치하는 등 통도사의 전통경관인 소나무림을 잘 보존해 나가고 있다. 또한 삼문에서 일주문 까지는 느티나무, 팽나무, 굴참나무와 같은 노거수와 근래에 식재한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이 활엽수 가로수길을 형성하고 있다.
담장에 자생하는 느티나무 노거수
통도사 정법교
주요수목으로는 영각 앞에 있는 매실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약 150년 정도이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590~658)가 금강계단을 열고 화엄경을 강의하자 하늘에서 52명의 선녀가 내려와 강의를 듣고, 지식수(智識樹)라는 나무를 식재했는데, 그것이 매실나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의 매실나무는 그 후계목이라 전한다. 이 밖에도 극락암의 왕벚나무, 옥련암의 반송, 백련암의 은행나무와 무환자나무, 안양암의 느티나무 등 사암(寺庵)과 관련된 많은 노거수 및 특이수목들이 있다.
영각 앞 지식수(智識樹) 매실나무
백련암 은행나무
통도사의 역사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고, 창건 이후 신라 ·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 속에 한국 불교의 구심처로 자리 잡았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1085년(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중창을 통하여 면면히 법등(法燈)을 이어 전국 16개 대표사찰가운데 경상남도의 대본산(大本山)이 되었다.
통도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한편 통도사의 역사는 곧 불사리(佛舍利)를 지켜온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시주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그 후 1340년(충혜왕 복위 1)부터 1369년(공민왕 18) 사이에 기존의 법당 외에도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음을 『불종찰약사(佛宗刹略史)』를 통해 알 수 있다. 1377년(우왕 3)에 이르러서는 왜적이 침입하여 불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당시 주지였던 월송대사(月松大師)가 깊이 감추었다가, 1379년에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자 불사리를 모시고 수도 개경까지 피신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통도사 금강계단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왜적에게 불사리를 약탈당하였으나, 동래에 사는 백옥거사(白玉居士)가 왜적에게 잡혀 있다가 사리를 찾아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그러자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사리함 두 개를 금강산의 휴정대사(休靜大師)에게 보내었고, 그 후 전운이 다한 1603년(선조 36)에야 비로소 황폐한 금강계단을 정리하고 다시 사리를 본 자리에 봉안하였다.
그 후 춘파(春波)ㆍ우운(友雲)ㆍ용암(龍岩)ㆍ청성(淸性)ㆍ덕명(德溟)ㆍ탄해(坦亥) 등의 스님이 각 시대에 여러 건물들을 중건, 중수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구하(九河) 스님이 1911년 금강계단을 중수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때 전국 사찰이 31본산 체제로 재편될 때 본산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9대 종정을 역임하신 월하대종사(月下大宗師)께서 계를 받으신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150여 개 말사를 관리하는 본사로서, 자장율사의 계율정신을 계승하며 한국 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의 가람은 영축산 골짜기의 큰 계류를 주축으로 세 개의 영역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금강계단과 대웅전의 경우, 그 축이 계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찰의 진입축과 직교하여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건축적 가치가 높다. 각자 특성 있는 전 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류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세 영역으로 구축되었으며, 이를 통해 시대에 따른 다양한 교리체계와 신앙의 대상들이 하나의 산사 안에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4년(인조 22)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불이문 쪽과 금강계단을 향하여 이중으로 된 합각(合閣)이 양 측면, 전면 3곳에 마련된 것이 이채롭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중기 불당(佛堂)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사방을 돌아가며 각각 다른 편액을 걸어 놓은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 동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서쪽에는 ‘대웅전(大雄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 정면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편액은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있다. 그것은 건물 뒷편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 금강계단 및 대웅전은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도사의 국가유산
현재 통도사의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1점, 보물 18점, 시도유형문화재 50점, 문화재자료 19점, 등록문화재 1점 등 총 89점이 전해지고 있다. 성보박물관을 운영하며 약 3만여 점에 달하는 성보문화재들을 보관·관리하며 전시와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특히 국내 박물관으로는 유일하게 대형괘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정기적으로 괘불을 친견할 수 있다.
연번 종목 명칭 시대
1
국보 제290호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梁山 通度寺 大雄殿 및 金剛戒壇)
조선시대
2
보물 제11-6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통도사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通度寺 銅鍾)
조선시대 (1686년)
3
보물 제33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通度寺 靑銅 銀入絲 香垸)
고려시대
4
보물 제471호
양산 통도사 봉발탑(梁山 通度寺 奉鉢塔)
고려시대
5
보물 제1041호
통도사영산전팔상도(通度寺靈山殿八相圖)
조선시대 (1775년)
6
보물 제1042호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 (通度寺大光明殿三身佛圖)
조선시대 (1759년)
7
보물 제1350호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 (通度寺釋迦如來掛佛幀)
조선시대 (1767년)
8
보물 제1351호
통도사괘불탱(通度寺掛佛幀)
조선시대 (1792년)
9
보물 제1352호
통도사화엄탱(通度寺華嚴幀)
조선시대 (1811년)
10
보물 제1353호
통도사영산회상탱(通度寺靈山會上幀)
조선시대 (1734년)
11
보물 제135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通度寺 靑銅銀入絲香垸)
조선시대 (1674년)
12
보물 제1373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梁山 通度寺 金銅天文圖)
조선시대 (1652년)
13
보물 제1471호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梁山 通度寺 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14
보물 제1472호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通度寺 阿彌陀如來說法圖)
조선시대
15
보물 제1711호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梁山 通度寺 靈山殿 壁畵)
조선시대
16
보물 제1735호
양산 통도사 청동은입사향완 (梁山 通度寺 靑銅銀入絲香垸)
고려시대
17
보물 제1747호
양산 통도사 은제도금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梁山 通度寺 銀製鍍金阿彌陀如來三尊像 및 腹藏遺物)
신라의 고승이자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운 창건주이다. 법명은 자장,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선종랑(善宗郞)으로 진골출신의 귀족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자장의 아버지인 무림은 자식이 없어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킬 것을 축원하였는데, 그리하여 얻은 아들이 자장율사라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왕은 그에게 재상의 자리에 오를 것을 명하였지만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거부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5) 칙명을 받아, 제자인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오대산(五臺山, 다른 이름으로는 淸凉山)에 머물렀다.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하여, 가사와 발우 그리고 정골사리와 치아사리를 받았다. 이후 자장율사는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자장율사는 당 태종이 선사한『대장경』400여함과 당번, 화개 등을 가지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며, 궁중에서『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였고, 황룡사(皇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단을 통괄하였다. 645년(선덕여왕14) 황룡사 9층목탑이 완성되자, 황룡사의 2대 주지가 되어 머물렀다.
646년에 영축산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일조하여 649년(진덕여왕3)에는 왕에게 중국의 복식을 따를 것을 건의하여 신라에서 관복을 입게 했으며, 650년에는 당나라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말년에는 경주를 떠나 강릉(江陵)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太白山)에 석남원(石南院, 현재 淨巖寺)을 세워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에는 신라 10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졌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서는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일본 승려 양충(良忠)의 『법사찬사기(法事讚私記)』 중에 자장의 『아미타경의기』에서 옮긴 구절이 남아 있다.
※ 자료출처 : 통도사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
통도사의 설화
자장율사와 통도사
신라 때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를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러 보니 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이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자장율사가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였다.
그 당시는 통도사 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이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과 경을 읽으며 아홉 마리의 용에게 조용히 이 못을 떠나달라고 청하였으나 용들이 일절 응하지 않자, 법력으로 아홉 마리의 용과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용들은 제각기 앞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세 마리의 용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 당시 부딪힌 바위에 용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후세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통도사 입구 무풍교 근처에 있다. 또한 다섯 마리 용은 통도사의 남서쪽에 있는 영축산 아래의 골짜기에 이르러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곳을 오룡골(五龍-)이라 부른다. 뒷산 중턱에 있는 검붉은 색의 바위는 이 용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구룡지
마지막 한 마리의 용은 자장율사에게 통도사 터를 수호할 것을 맹세하자 자장스님이 조그마한 못을 하나 만들어 용을 살게 했는데, 그 못이 지금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九龍池)인 것이다.
자장율사와 금개구리
어느 날 저녁 자장율사는 공양미를 씻으러 암벽 아래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옹달샘으로 나갔다. 바가지로 막 샘물을 뜨려던 스님은 샘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놀고 있는 개구리 한 쌍을 두 손으로 건져 근처 숲속으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아침 샘가로 나간 스님은 개구리 두 마리가 다시 와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오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아주 멀리 갖다 버리고 왔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개구리는 또 와서 놀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개구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느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는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어 불교와 인연이 있는 개구리임을 알고 샘에서 살도록 그냥 놔두었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자장율사는 겨울잠을 자러 갈 줄 알았던 개구리가 눈이 오고 얼음이 얼어도 늘 샘물 속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스님은 절 뒤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을 손가락으로 찔러 큰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 주었다.
이후 스님은 이렇듯 불가사의한 수기를 내리고는 개구리를 ‘금와(金蛙)’라고 이름 했다. 그 뒤 통도사 스님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 바위를 금와석굴이라 불렀다. 그 속에는 이끼가 파랗게 끼어 있는데 현재까지 개구리 같기도 하고 큰 벌 같기도 한 것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 어떤 관리가 금개구리 이야기를 듣고 자장암을 찾았다. 스님이 금개구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자 관리는 믿으려 하지 않고 금개구리를 보자 그 관리는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잡아 함 속에 넣어 밀폐한 뒤 산문을 나와 함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잡아넣은 개구리는 보이지 않고 함은 비어 있었다. 그 후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금개구리들은 자장율사의 신통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수기를 받아 오늘까지 살아온다고 전해지는 이 금와보살은 통도사 내에 길조가 생길 때면 나타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