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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박창희기자의 "감성터치 다리와 나루" 기사 모음집

박창희기자의 "감성터치 다리와 나루"


"저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은 홀로남은 사공의 눈물이오" 라고 국제신문에 시작된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총 30건의 기사를 모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해당 제목을 클릭하면 원본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사가 연재 될 무렵 많은 독자들에게 관심과 호응을 받았으며 기사를 집필한 박창희 기자는 신문사를 나와 현재 칼럼니스트·스토리랩 수작 대표로 활약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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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 누가 떠나고 남았나

저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은 홀로남은 사공의 눈물이오

이 글은 느림과 빠름, 만남과 떠남에 대한 명상이다. 20세기를 숨가쁘게 건너오면서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 붙잡은 것과 놓쳐버린 것을 짚어보려 한다.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흘러갔다. 단순한 소통을 문화라 하고 질주를 문명이라 우기진 않았던가. 나는 빠름 속에서 느림의 급소를 포착하고자 한다. 이것을 이야기할 상징적이고 구체적인 장소가 나루와 다리이다. 다리에 새겨진 시간과 추억을 안주로 어느 나루터 주막에서 술 한잔 걸치고 싶다. 부디 나의 나룻배에 당신은 행인이 되시길…. 잠자는 감성을 깨워 떠나는 여행의 아침은 설렌다.


▷▶마지막 사공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나루에서 40여 년간 뱃사공 일을 해온 최보식 씨가 나룻배를 손질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다리(우곡교)가 개통되면 대암나루는 자연 폐쇄된다.(사진 위)
최보식(65) 씨는 낙동강 중류 대암나루(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의 현역 뱃사공이다. 요즘도 그는 나룻배(발동기가 달린 철선)를 부리며 강변 주민들을 실어 나른다. 40여년 간 끈덕지게 황소처럼 나루 일을 해왔다. 꿈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일하고도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대암나루 코밑에 건설되고 있는 우곡교(고령군 우곡면~달성군 구지면 연결)가 조만간 개통되면 그의 나룻배는 할 일이 없어진다. 우곡교 개통식이 그의 뱃사공 졸업날이다. 우곡교 개통식엔 내로라는 분들이 참석하겠지만, 최 씨의 뱃사공 졸업식엔 그 혼자 뿐일 지 모른다.

이창학(54) 씨는 안동 하회나루의 뱃사공이다. 최 씨와는 달리, 그는 관광용 나룻배를 부린다. 배는 무동력이며 삿대로 움직인다. 낙동강의 하회 뱃나들(나루)에서 강 건너 부용대까지 오가는데, 3년 새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4월 초 나룻배가 깨어나 관광객을 맞으면 하회의 봄은 터질듯 부풀어 오를 것이다. 다행히 하회마을엔 아직 다리가 없다.

하지만 하회 조금 아래인 광덕 잠수교 위에 무쇠같은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부용대로 이어지는 자동차 길을 새로 놓는 것인데, 새 다리가 놓이고 나서도 하회 나룻배가 온존할 지 궁금하다.

최 씨와 이 씨는 아마도 우리 시대 마지막 뱃사공일테다. 누가 사공의 노래를 불러줄 것인가. 춘삼월이지만 나루에 부는 바람이 아직은 차다.


▷▶나루 위의 질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의 외나무다리.
다리는 대개 나루 위에 놓여진다. 다리가 놓이면 나루는 속절없이 폐쇄된다. 나루는 다리를 염려하지만, 다리는 나루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루는 머물고 다리는 떠난다.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은 바로 나루의 노래가 아닌가.

나루의 시대가 가고, 물밀듯이 도래한 다리의 시대. 소통에 따른 변화는 분초를 다투며 찾아온다. 다리는 소통과 질주를 전제로 태어났다. 많은 다리들은 질주 본능에 충실한 듯하다. 다리 아래에 무엇이 흐르는 지,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 지, 누가 웃고 우는 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 가자, 바쁘다. 시간이 돈이다. 효율이다. 달려, 달려라구…. 빵빵, 야! 빨리 안가고 뭐해?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달려야 한다. 달려야 생이 펴이느니.

경북 예천군 의성포로 들어가는 철다리,
아, 달려야 생이 펴인다니….

눈부신 질주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나루가 가물가물 손짓한다.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어머니가 건너왔던 나루 말이다. 나루의 시대에는 모든 공간이 열려 있었다. 산과 강, 들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이쪽과 저쪽,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성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가슴마다에는 정이 넘쳐 흘렀다. 산하엔 야성이 꿈틀거렸고 야생이 춤을 추었다. 그곳엔 인간이 어떻게 간섭할 수 없는 '발효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무정하다. 애초부터 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편리에 취한 나머지 애써 무시하고 모른 척 했다.

다리엔 기다림이 없다. 아무도 애써 기다려주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후회도 없이 다리의 속도에 적응한 것은 아닌가.

다리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많은 공간이 닫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질주에 빠진 나머지 풍경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 다리에서는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볼 따름이다.

주막의 질펀한 여유와 나루의 느리고 순한 원경은 한갓 기억이 되려 한다. 문명의 첨병처럼 20세기 교량공학이 빠르게 건너간 자리에 나루의 눈물이 있다.
▷▶다리의 시간

경남 마산시 구산면 저도 연륙교(일명 콰이강의 다리),
나루를 생각하며 다리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옛 다리들은 민중사의 숨결이자 문화사의 자취이다. 생각하는 다리들도 점차 늘어난다. 반가운 일이다.

경북 영주시 수도면 무섬마을의 내성천에는 삶의 외줄같은 긴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도 주민들이 일부러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왜? 옛 것, 옛 향기가 그리워서라고 한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에는 지게꾼들이 나무 하러 다니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나무 한짐 해서 널빤지다리를 건너면 연탄 몇 장이 절약된다고 한다.

경남 남지에는 70년 된 철교(남지교)가 있다. 새 다리를 가설하면서 없어질 운명이었으나 주민들의 보존 열망이 문화재청을 움직여 근대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받은 다리이다. 남지교에는 일제가 남긴 근대화의 흔적과 한국전의 상처와 교훈, 남지 주민들의 애틋한 시간과 추억이 새겨져 있다. 남지 사람들에게 남지교는 이미 삶의 일부로 편입된 환경이다.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의 작은 섬 저도에는 그림같은 연륙교 두 개가 놓여 있다. 옛 다리와 새 다리이다. 옛 다리는 흔히 '콰이강의 다리'라 불리면서 많은 연인들이 찾아온다. 손잡고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단다. 3년 전 이곳에 무지개 형태의 아치교가 새로 놓이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이 두 개의 다리는 과잉소통과 인간의 욕망 같은 생각거리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볼거리와 생각거리가 있기 때문일게다.



▷▶진정한 소통과 만남

오늘의 다리들은 생활의 이기나 편리를 넘어 문명의 기호로 자리잡고 있다. 광안대교나 창선-삼천포대교가 말해주듯, 큰 다리 하나가 도시의 표정이 되고 랜드마크가 된다. 변화는 숨가쁘게 찾아오고 지나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동시에 본다.

다리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나루로 내려가 보자. 나루에 가면 자연 품속의 인간, 때묻지 않은 문명과 문화의 진솔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3월의 고운 햇살 속에서 나는 아팠다. 오염된 땅, 더러워진 물, 잘려나간 산허리, 삭막해진 세태 따위를 온 몸으로 마주치고 뒤돌아보니 나루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다리가 씽씽 달린다.

가수 이동원은 '세월에 다리를 놓고'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랐지만, 난 나루에 놓인 다리가 더 이상 무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떤가. '질주하는 것은 바보다'라고. 하긴 볼 것을 못보고 내빼버리니 바보기도 하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30> 발원지를 찾아 [기획시리즈] 2007.11.2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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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한 옛날,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삼수령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 삼수령(三水嶺)의 소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빗물의 운명'이란 제목의 글귀다. 동화적 상상력이 미소를 머금게 하지만, 이야기 속엔 전통지리학의 이치가 스며있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 산 없이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과 강은 하나라는 인식이다. 태백의 삼수령은 이같은 전통지리체계를 설명하는 현장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문화와 정신을 낳은 세 갈래 큰 물줄기가 출발한다.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가 신기하게도 삼수령 부근에 몰려 있다. 그 발원지(發源地)를 찾아간다. 발원의 꿈은 창대하여 겨레의 나루와 다리로 이어지고 있다. 그 꿈은 어디서 샘솟아 흘러내리는가. 삼수령의 바람 삼수령은 태백에서 임계·강릉 방향으로 난 35번 국도를 따라 10여분이면 닿는다. 해발 935m. 태백시 자체가 워낙 고지대(평균 해발 700m)라 많이 오른 느낌은 들지 않지만, 첫눈에도 지형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옛날에는 난리를 피해 오는 고개란 뜻으로 '피재'라 불렀다. 고갯길에 걸린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에는 서쪽-천의봉(매봉산), 동쪽-덕항산 화살표가 선명하다. 동쪽으로 뻗어내린 가파른 산세와 남서쪽으로 굽이치는 백두대간 줄기는 우리 민족의 원대한 기상을 보는 듯하다. 삼수(三水), 즉 세 갈래 큰 물줄기의 원천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Y자 형태로 만나 생기는 계곡이다. 삼수령은 이 세 계곡의 꼭지점, 두 산줄기의 교차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삼수령에 떨어진 빗방울이 세 개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계곡으로 흘러든다. 그곳이 금대봉 기슭의 검룡소(한강), 은대봉 턱밑의 너덜샘 혹은 용소(낙동강) 그리고 도계 점리샘(오십천)이다. 삼수령 고갯길 서편 매봉산 풍력발전단지에 바람이 분다. 키다리 풍력 터빈 8개가 줄기차게 돌아간다. 태백이 살아 숨쉬고 있다. 가슴이 답답한 이들은 삼수령에 올라 심호흡을 해보라. 한반도 큰 물줄기 3개가 그대 지친 가슴에 광명 정기를 불어넣을거니. 검룡소의 용틀임 삼수령을 넘어 35번 국도를 따라 차로 15분 정도 가면 검룡소(儉龍沼)다. 한강의 첫물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겨레의 시원을 찾아가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발원샘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한 자장에 걸린듯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둘레 20m 가량의 '깊은 산속 큰 옹달샘' 속에서 물이 콸콸 솟구친다. 하루 2000t이 용출되고 항시 9도의 수온을 유지한다는 물이다. 해발 900여m의 산중에 무슨 힘이 이 많은 물을 땅속 구멍으로부터 끊임없이 밀어올리는지…. 검룡소의 얕은 돌 둔덕을 탈출한 물은 연녹색 이끼가 덮인 바위홈을 따라 기세좋게 흘러내린다.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용틀임한 흔적이 물줄기가 쏟아지는 바위홈이란다. 어떤 강의 발원지도 이보다 힘차고 이보다 자신있지는 않을테다. 검룡소 물은 골지천을 형성해 정선 아우라지를 거쳐 동강-남한강-한강이 된다. 검룡소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86년. 태백문화원은 전설로 전해지던 소(沼)를 준설, 정비하여 이곳을 한강의 최장 발원지로 규정했다. 이때까지 한강의 발원지는 문헌상에 나오는 오대산 우통수(于筒水)였다. 그런데 도상 실측 결과 검룡소가 우통수보다 27㎞ 더 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1987년 국립지리원도 공식 인정했다. 검룡소 상류에도 크고 작은 샘들이 있다.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 예터굼같은 것들인데, 검룡소의 기운에 눌려 발원지 논란에선 늘 조연일 뿐이다. 검룡소는 요즘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무기가 용틀임한 흔적이라는 검룡소 폭포 옆 이끼는 이미 절반 가량 사라져 버렸고, 소 안에는 관광객이 복을 빈다고 던져놓은 동전들이 어지럽다. 이러다 검룡소의 물구멍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황지, 하늘의 물 낙동강은 어디서 발원하는가. 일반적으로 태백시 황지라고 말하면 틀리진 않지만, 황지 상류에도 엄연히 물길이 있으므로 맞다고도 할 수 없다. 황지를 발원지로 보는 것은 실체보다 문헌적 상징성을 좇은 결과다.옛 지리서에는 황지를 '하늘의 못'이란 의미로 '천황(天潢)'으로 적고 있다. 옛 지도들의 축척 개념이 애매하긴 하지만, 작은 지도에도 황지가 어김없이 표기되어 있다. 황지를 중시한 증거다. 천황! 이는 하늘에서 시작한 강이란 얘기가 아닌가. 신비감을 안겨주는 은유다. 조상들의 상상력 깊이에 또한번 놀란다. 근래 들어 황지(潢池)는 삼수변을 떨구고 황지(黃池)로 쓰는데, 이는 전설에 나오는 황 부자의 성씨인 황(黃)으로 일치시켜 전설과 맞추려 한 결과다. 황지를 빠져나온 물은 태백산 이골 저골의 물을 모아 맹렬한 기세로 태백시 동점동 석굴을 향해 돌진한다. 석회암질의 바위산이 수억년 전에 물에 뚫려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일명 뚜루내(천천·穿川)라 불리는 구문소(求門沼)다. 이로써 '물이 산을 넘어버리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지형이 생겼다. 자연의 조화다. 크게 밝은 땅(太白)에서 하늘의 기운을 받은 낙동강물이 암벽을 만나자 아예 뚫고 나가버린 기세를 어찌 단순한 물흐름이라 하겠는가. 숫제 낙동강의 위대함이다. 낙동강의 첫 물 황지 상류에서 낙동강의 첫물을 찾아본다. 황지에서 지도상 직선거리로 6.5㎞쯤 떨어진 함백산 은대봉의 '너덜샘'(서덜샘 또는 은대샘으로도 불림)을 많은 이들이 발원지로 친다. 지리학자 오세창, 이형석 씨 등의 견해다. 태백에서 정선 고한으로 넘어가는 두문동재(일명 싸리재) 옛 고갯길의 태백 쪽 7부 능선에 너덜샘이 있다. 넓직한 공터에 플라스틱 파이프로 샘물을 끌어다가 만든 식수대가 세워져 있는데, 이 식수대의 원수(原水) 출처가 너덜샘이다. 그러나 너덜샘 표시만 있을 뿐, 낙동강 발원지를 암시하는 어떤 문구도 없다. 태백시가 황지 외엔 어떤 발원샘도 인정하고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논란은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이 있다. 너덜샘은 용출되는 물은 적지 않으나 땅 속으로 흐른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 때문에 너덜샘에서 아래로 3~4㎞ 떨어진 용소(龍沼)를 발원지로 보는 시각이 있다. 김강산 태백문화원 원장은 "낙동강의 발원샘으로는 금대봉 남쪽 기슭의 이첨지터샘 제당샘 서덜샘(너덜샘) 등이 거론되나, 이 물줄기들이 지하로 스며들어 비로소 솟아오르는 태백시 화전2동 용수골의 용소가 명실상부한 낙동강의 발원샘이다"고 주장한다. 용소의 물은 곧장 황지천 상류를 형성한다. 태백산(1567m) 정상에서 100여m 떨어진 만경사의 용정(龍井)을 발원지로 꼽는 이도 있다. 용정은 한국 100대 명수 중의 하나로, 낙동강의 발원샘 중 위치(해발 1500여m)가 가장 높다. 이 물 역시 복류천 형태로 흐르다 반재에서 당골계곡수로 나타난다. 당골광장 옆 청원사 마당의 용담(龍潭)도 발원지 후보 가운데 한곳이다. 용정, 용담의 물은 당골계곡을 거쳐 소도천이 되어 흐르다 태백시 상장동에서 황지천과 합류한다. 낙동강의 첫물은 이처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서 샘솟는다. 그래서 '하늘 강'이라고 한 것일까. 발원샘의 비밀 강물의 발원지를 밝히는 일은 실체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발원지를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 강의 공식적인 길이가 달라진다. 낙동강의 길이는 1918년 일본제국주의가 측량한 525.15㎞부터 513.5㎞, 심지어 506.17㎞까지 자료에 따라 제각각이다. 교과서는 물론 공공기관의 공식 문서도 편의대로 쓰고 있다. 건설교통부의 하천일람(2006년 기준)에는 낙동강의 유역 면적이 2만3384㎢, 하구로부터 최원거리에 위치한 발원지를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삼각점(1442.3m) 동쪽 계곡(황지천 상류)'으로 적시하고 있다. 총 길이는 506.17㎞로 나온다. '어떻게 잰 것이냐'고 물어보니, 건교부 관계자는 "하천정비 기본계획 수립 시 도상 실측을 한 것으로 안다"고만 짧게 답했다. 하천일람에는 한강의 경우 유역면적 2만5953㎢, 길이 494.44㎞,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1418m) 북서쪽 계곡(골지천 상류)'로 돼 있다. 이곳은 검룡소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한강 역시 자료마다 길이가 다르다. 건교부와 수자원공사가 함께 운영하는 '국가수자원관리 종합정보시스템(WAMIS)'의 정보는 하천일람과 또 달라 혼선을 준다. 한국의 큰 강들은 아직 창대한 발원의 뜻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민족을 자부하면서 부끄러운 일이다. 강에는 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물과 함께 모래가 흐르고 정신과 문화가 흐른다. 세느에는 예술의 향기가, 다뉴브에는 왈츠가, 아마존에는 지구의 녹색 호흡이 흐른다. 그리고 한강에는 한반도 역사의 정기가, 낙동강에는 이 땅 정신문화의 맥박이 뛴다. 이게 강이다. 발원지를 밝히는 것은 강의 정신과 사상을 세우는 일이다. 강줄기에 무수히 명멸해간 나루와 새로운 길이 된 다리들은 발원의 비밀을 속시원히 알고 싶고,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9> 낙동나루의 성쇠 [기획시리즈] 2007.09.2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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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뱃사공을 했다는 분들을 만나 보면 대체로 바지런하고 심지가 굳으며 정이 많았다. 억척스런 일을 해서인지 부부 간의 정도 남다른 것 같았다. 사공 일의 고됨을 이겨내려면 믿고 의지하는 반려(伴侶)가 있어야 할 터.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함 속에서도 일의 맥과 흐름을 잃지 않는 삶. 부창부수 강을 닮은 이들. 경북 상주의 낙동나루에서 만난 박봉식(78) 씨 부부가 그랬다. 박 씨 부부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똑같이 인상이 밝고 몸이 단단했다. 삿대를 놓은 지 20년이 넘었다는 박 씨는 나룻배 얘기를 꺼내자 팔뚝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삿대질하던 시절의 인이 몸 속 깊이 배어든 것 같았다. ◇ 뱃사공의 회한 박 씨가 사는 곳은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상주 낙동리 건너편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바로 '뱃사공 하신 분'이란 감이 왔다. 다감하면서도 회한 어린 눈매, 조용한 노안 속에 굳센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낙동나루에서 뱃사공은 언제까지 하셨나요? "그게 언제고? 20여 년 전에 배를 처분했으니까 1986년인가 싶어. 낙단교가 개통될 시점이었으니까. 전두환 시절인데 그때 낙단교 주변이 시설지구로 개발이 됐어요." -마지막 배가 어떤 배였나요. "엄청나게 큰 목선이었지. 군청에서 소유, 관리했는데 내가 경매를 해서 운행권을 딴거지. 버스도 싣고 사람도 실었어. 그 있잖아 왜, 미군 트럭을 개조해 만든 제이에무씨(JMC)라고. 그 버스가 상주~대구를 왔다갔다 했는데 우리 배를 이용한거야." -사람은 몇 명까지 탔고, 요금은 어떻게 받았나요? "많이 타면 500명은 탔지 아마. 버스 2대가 들어갔고 택시 같은 작은 차는 한꺼번에 12대까지 실었으니까. 배삯은 버스 한 대에 500원, 트럭 한 대에 600원이었어." -언제부터 뱃사공 일을 했나요? "군대 갔다와서 시작했으니 근 30년 했지. 나하고 같이 했던 분들은 다 갔어. 난 의성군 낙정 쪽에서 했고, 상주 낙동에도 한두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고인이 됐구먼." -계속 무동력 목선이 다녔습니까? "80년대 초반까지 삿대질하며 목선을 끌었어요. 그 뒤로 엔진을 장착한 철선이 띄워졌지. 나는 철선이 뜰 때까지 했고. 철선이 4~5년 탈탈거리고 다녔나? 다리가 생기면서 접었지." -마지막 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홍수에 떠내려갔지. 상주시가 관리하던 배였는데, 내가 듣기론 저 아래 왜관까지 떠내려가서 어딘가에 걸렸다더만. 상주시가 골치가 좀 아팠어. 가져올 수가 있나 버릴 수가 있나. 고물처리를 하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거든. 모른다고 외면할 수도 없고, 그리 됐어요." ◇ 선거다리 낙단교 낙동나루에선 낙동강 나루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읽힌다. 이름부터 '낙동'이 아닌가! 고대엔 황산하, 황산강 등으로 불린 낙동강이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조 들어서다. '낙동'이란 말은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洛陽)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이름됐다는 설과 '가락(洛=가야)의 동쪽(東)'이란 의미라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든, 낙동나루는 '낙동강 본 나루'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연결하는 낙동나루는 한때 낙동강의 최고 최대 상권을 자랑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4대 수산물 집산지였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뱃길이 열려 있었을 때 부산 구포에서 상주 낙동나루까지의 뱃길이 700리였다. 역참(驛站)이 있던 시절, 낙동나루에 들어선 역(驛)은 조운선의 기착지였고, 영남대로의 본도가 이곳을 지났다.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도 이 길을 주로 이용했다.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 때문에 피해 다녔다는 것. 흥성하던 낙동나루가 쇠퇴한 것은 다리 때문이다. 여기서 아래로 20여리 쯤 떨어진 경북 선산군 도개면에 '일선교'가 놓인 것이 1967년. 그 후 낙동 근처 사람들은 그 다리로 돌아서 다녔다. 그러다 '낙동나루에도 다리를 놔달라'는 민원이 터져나와 '낙단교'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낙단교는 1980년대 초반 다릿발 여섯 개만 세운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국회의원 선거때만 되면 후보들이 '다리 완공'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선거 끝나면 다시 흐지부지 되었다. '선거다리'라는 별칭이 붙을 만했다. 낙단교가 개통된 것은 1986년 8월 30일. '낙단(洛丹)'은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다. 길이 434m 너비 10m(2차로)의 낙단교는 간신히 유지되던 낙동나루를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다리의 위력은 나루터를 삼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낙동-낙정지역의 개발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낙단교 바로 아래엔 얼마전 4차선 산업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접속 교량)가 뚫려 또하나의 다리가 생겼다. ◇ 다시 정류소에서 박봉식 씨 부부는 나룻배와 거룻배가 없어진 뒤, 한동안 농사를 짓다가 낙정리의 '낙정정류소'를 인수받아 운영을 시작했다. 나룻배를 보다 정류소를 지키게 된 것이다. 사람을 실어나르는 물목이란 점에서 나루터와 정류소는 서로 통하니 묘한 유전이다. 상점을 겸하는 낙정정류소에는 박 씨의 부인 정희선(73) 씨가 표를 팔고 있다. 깐은 상점 창문에 매표소 겸 대합실이란 이름까지 내걸었으나 가게가 좁아 몇 명 들어가지도 못한다. 정 씨는 별일이 없는 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표소를 지킨다. "장사가 안돼. 가게도 안되고 차도 안돼요. 마트 있는데 요즘 누가 구멍가게를 오나? 그냥 열어놓고 있는거지. 주변 할마시(할머니)들은 돈도 안되는거 치워버려라 하지만 자식새끼 같은 기 돼 놔서…." 얼마나 파느냐고 묻자 "팔리는 기 있나. 하루 열장 정도지. 다 팔아도 만 원이고 2만 원이야. 마진이 지우(겨우) 10%밖에 안돼. 한두 명이 와도 문은 열어 놔야 해"라고 한다. 낙정정류소는 그래도 지역민의 길눈 구실을 톡톡히 한다. 노선은 선산 구미 대구 가는 버스를 비롯 의성 안계 상주 방면 심지어 서울 가는 버스까지 있다. 길눈이 어두운 시골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어디를 가든 안심이 된다. 박 씨는 몇 년 전 다리를 다쳐 삼발이(세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늘 바쁘다. 틈틈이 상점 일을 돕고, 농사를 짓는가 하면 마을 일도 봐준다. 한 생애를 싣고 온 거룻배를 떠나보낸 뒤 정류소를 붙잡고 사는 이들 노부부의 삶은, 낙동나루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 낙강시제 낙동나루에는 '관수루(觀水樓)'라는 번듯한 누정이 있다. 단밀면 낙정리쪽 강변에 서 있다. 한때는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루로 꼽힌 명루(名樓)다. 고려 중엽에 처음 지어져 조선조에 몇 차례 중수되었고 고종 11년(1843)에 대홍수를 만나 떠내려간 것을 1990년에 복원했다. 관수루 누각에는 낙동강을 노래한 시 10편이 걸려 있어 길손의 시심을 자극한다. 이규보 주세붕 안축 유호인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이황 권상일 허전 등 일세를 풍미한 문인들의 시다. 이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낙강시제(洛江詩祭)를 열었다고 한다. 낙강시제는 상주의 낙동강(퇴강나루-경천대-낙동나루 구간 40리) 일원에서 열린 전통 시회(詩會)다. 고려 명종 26년(1196) 백운 이규보로부터 조선 철종 13년(1862)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간 상주 도남서원과 경천대, 선상, 누정 등에서 치러진 시회가 51회였다고 한다. 한국문인협회 상주지회는 시제의 전통을 잇는 문학행사를 2002년부터 열고 있다. 관수루에 걸린 시들은 낙강시제의 결실들이다. 낙동강을 주제로 한 시편이 이렇게 많이 걸린 곳도 없다. 선인들의 낙동강 사랑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이곳의 주제가는 아무래도 영남학파의 종조(宗祖) 점필제 김종직이 지은 '낙동나루(洛東津)'가 아닐까 싶다. '뱃사공은 이곳 사람 아니지만/관리는 이 고을 사람/삼장의 글로 성주에게 사례하고/나는 말로써 어머니를 위로하네/백조는 돛단배를 맞이하고/청산은 너그러히 손님을 보내네/맑은 강은 한점 흐림이 없으니/이로써 내 몸의 규율로 삼고 싶네'. 퇴계 이황은 한술더 떠 이런 절창을 남겼다. '낙동강은 나의 남쪽 나라(洛水吾南國·낙수오남국)/우러르건대 뭇강 중의 으뜸이라(尊爲衆水君·존위중수군)'. 관수루 누정의 시편을 대하노라면 한자를 잘 모르는 이라도 눈이 밝아진다. 사시사철 공짜로 열리는 이 시회에 동참해보고 싶지 않은가. 낙동나루는 퇴락한 지 오래지만, 옛 터를 지키는 뱃사공 노부부가 있고, 이런 시편들이 남아 아직은 행복하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8> 일본 간몬대교와 모지항 [기획시리즈] 2007.09.1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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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형, 일전에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갔다 왔습니다. 가볍게 갔다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네요. 그곳의 다리가, 아니 나루가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지 뭡니까. 나루와 다리로 보자면, 섬나라인 일본은 우리보다 더 많은 자산과 얘깃거리가 있지요. 시모노세키의 경우, 그게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고요. 소재 확장 차원을 넘어 한 번쯤 능히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게지요. 먼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수많은 배들이 그곳에 들어갔고, 그곳의 많은 배들이 우리 쪽으로 왔지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지인 현해탄(玄海灘)의 가슴이 까맣게 탈만도 하더군요. 거기에 양이전쟁이 있었고, 우호와 교류를 앞세운 간섭과 침략이 있었지요. 그게 역사였음을 현해탄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1. 간몬대교 K형은 보았던가요, 간몬대교(關門大橋)의 위용을. 간몬대교는 웅장하고 다이내믹했습니다. 다리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문득 부산의 광안대교가 생각났는데 솔직히 다이내믹 면에선 광안대교를 압도하더군요. 일본 본토와 규슈섬을 잇는 막중한 역할 때문인지, 지리적 장엄미랄까, 그런 느낌도 안겨들었습니다. 철제 현수교인 간몬대교는 1973년에 완공됐고, 총 길이가 1068m입니다. 주탑과 주탑 사이의 주경간이 712m, 주탑의 높이가 133.8m더군요(광안대교의 주경간은 500m, 주탑 높이는 116.5m임). 수면과 다리(상판) 사이의 높이는 무려 61m(광안대교의 선박통과 높이는 35m)나 됐지요. 이 아득한 높이가 다이내믹함을 연출하고 있었지요. 이곳을 통과하는 각종 선박이 연간 25만5000척이나 된다는군요. 화물선이 가장 많고, 여객선 카페리 어선들이 그 다음을 잇고 있었지요. 철판을 잇대어 만든 격자구조는 무슨 설치예술 같았지요. 하늘빛과 바다빛을 받아 반짝이는 간몬대교를 보고 있자니, 살짝 질투가 나더군요. 이곳엔 다리만 있는게 아니라, 신칸센 철도와 국도 인도 등 각종 해저터널이 무려 7개나 된다는군요. 그런데 상부의 다리는 딱 하나. 존재감이 돋보일 만하죠. 2. 겐페이소하 다리가 걸린 이곳이 그 유명한 간몬해협입니다. 야마구치현의 최서단에 위치하는 시모노세키시는 간몬해협을 끼고 기타규슈(北九州)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이 해협은 국제항로이자 내해로 연결되는 통로로써 일본 해상교통의 요로라죠. 간몬해협의 길이는 27㎞, 폭은 500~1000m, 수심은 대략 12m 정도라고 하더군요. 조류가 세더군요. 최고 10노트(시속 18.5㎞)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간몬해협은 안토쿠(安德) 천황의 패전지라더군요. 패전지란 말이 귀에 짠하게 박히더군요. 12세기 일본 헤이안시대 후기의 얘기입니다. 1180년 안토쿠 천황은 3세의 나이로 천황이 되었는데, 신하로 있던 무사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져 전쟁으로 비화하죠. 일본사에 나오는 '겐페이소하(源平爭覇)'입니다. 이때 천황의 할머니 고시라가와(後白河) 황후는 다이라(平)와 정을 통하는 사이였는데, 권력다툼은 미나모토의 승리로 끝납니다. 최후의 전장이 바로 시모노세키 앞바다인 단노우라(壇の浦)에서 있었는데 패전이 확실해지자 황후는 안토쿠를 안고 간몬해협에 뛰어들죠. 안토쿠 천황이 8세이던 1185년의 일입니다. 이후 미나모토는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열게 되고, 일왕은 700여년간 명목만 유지하죠. 안토쿠 천황이 죽은 후 사람들은 진흙으로 상을 만들거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지요. 1604년 송운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그곳 아미다지(阿彌陀寺, 현 아카마신궁)에 모셔진 안토쿠 천황을 조문하는 글을 쓰지요. 17~18세기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조선통신사들도 그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고요. 하고보니 안토쿠가 예사 역사인물이 아닙니다. 시모노세키시는 매년 5월 '센테이사이(先帝祭)'라는 제사를 지내고, 시민축제인 바칸 마쯔리(馬關まつり)를 통해 그를 대대적으로 추모합니다. 안토쿠는 시노모세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인물이더군요. 3.조슈포 간몬대교 아래 해변 공원에는 단노우라 옛 전장지(戰場址)가 표시돼 있고, 당시 전투를 묘사한 동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역사 속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려 한 것 같았지요. 이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이 그 옆에 설치된 전시용 대포였습니다. 대포는 모두 5기로, 가장 큰 포신은 길이 3.56m, 구경 20㎝였습니다. 일명 조슈포(長州砲)라 불리는 대포인데, 역사적 사연이 있더군요. 막후 말기인 1864년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양이(洋夷)전쟁을 벌입니다. 한국은 이즈음 척왜양이를 외쳤지요. 당시 일본은 간몬해협에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군과 맞서 싸웁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포를 만들어 쏴 댔지만 역부족,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연합군인 프랑스는 전리품으로 조슈포를 자국으로 가져갑니다. 일본역사가 세계사에 개입하는 순간이지요. 이후 일본은 세계사의 조류에 휩쓸려 메이지유신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뺏긴 조슈포를 가져와 복원, 전시한 것이 예의 대포였지요. 간몬해협을 굽어보는 조슈포에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일렁거렸습니다. 에지마 기요시(江島潔·50) 시모노세키 시장은 이 대포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개방을 요구한 연합군에게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졌지만, 조슈번(시모노세키 정치세력)은 끝까지 싸웠다. 그 증표가 이 대포다. 당시의 기술차이를 인정하고 외국문화를 받아들여 변화한다는 표시로 이 대포를 복원했다." 4. 모지항 레트로 K형, 모지항은 보았겠지요?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인터넷에도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더군요. 시모노세키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닿는 곳이라 어렵지않게 들를 수 있었습니다. 모지항은 고색창연한 관광 포구더군요. 이름하여 '모지항 레트로(門司港レトロ)'. 레트로(Retro)란 '옛날을 그리워하다' 또는 '회고적'이란 의미로, 이곳의 콘셉트를 설명해줍니다. 1889년 개항한 모지항은 기타규슈시의 공업화와 함께 국제무역항으로 번영을 구가합니다. 전성기땐 월 200여 척의 외항선이 들어왔고, 연간 6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더군요. 그러나 대동아전쟁을 겪으면서 쇠퇴, 퇴락한 항구가 되었죠. 그런 모지항을 복원, 정비해 운치있고 낭만적인 테마파크로 탄생시켰더군요. 모지코역을 비롯, 구 모지 미쓰이클럽, 구 오사카상선, 구 모지세관, 국제우호기념도서관 등 어느 것 하나 볼거리 아닌 것이 없었지요. 구 모지 미쓰이클럽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묵었던 곳이라고 홍보하더군요. 블루윙 모지가 특히 인상적이었지요. 일본에서 유일한 보행자 전용 개폐식 다리인데, 들리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푸른 바다가 정말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것 같았지요. 다리는 하루에 6번 개폐되며 배가 통과하지 않아도 제 혼자 시간 맞춰 들렸지요. 문득 영도다리가 떠올랐습니다. 영도다리가 다시 들린다면 어떤 풍경이 될까요. 처음인데도 어쩐지 그리운 도시 모지코. 마음의 평온과 감동을 안고 그곳을 벗어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포구가, 나루가 저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구나…. 5. 불의 산 시모노세키시의 전망대 히노야마(火之山) 공원에 올라 간몬해협을 굽어봅니다. 왜 불인가? 양이전쟁 때 포격을 당해 불바다가 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일본인들은 당한 역사를 이처럼 되씹어서 기억합니다. 조슈포가 그렇고 불의 산이 그렇지요. 히노야마 공원에서 보는 간몬대교와 해협은 눈부신 풍경이었습니다. 멀리 기타규슈의 모지항이 보이고 더 멀리로 현해탄이 가물거렸지요. 해발 268m의 불의 산은 후끈거렸습니다. 날씨 탓만이 아니었지요. 한국과 일본의 인연과 악연, 침략의 역사, 새로운 교류…. 시모노세키는 우리에게 아픈 기억을 남긴 곳입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씨앗이 뿌려졌고, 한반도 침략의 발판이 됐던 시모노세키 조약이 여기서 체결됐지요. 관부연락선이 일제 징용자들을 싣고 부린 곳도 이곳이지요. 해협의 아스라한 구름 속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보이고, 그 뒤를 19세기 일본의 정한론자들이 뒤따르는 환상은, 불의 산을 더욱 후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교류하고 믿음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아, 현해탄은 어쩌자고 거센 조류를 간몬해협으로 몰아넣어 이토록 역사를 힘들게 하는지. 나루와 다리는 단순한 낭만과 회고 정서가 아니라, 어제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여는 전략이자 전술임을 시모노세키에서 새삼스레 배웠습니다. K형, 언제 한번 같이 시모노세키에 가시구료.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7> 구포다리를 위한 변명 [기획시리즈] 2007.09.0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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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공격은 무서웠다. 70여년을 굳게 앙버티던 무쇠 다릿발이 순식간에 뽑혀나갔다. 우지끈~ 19번 교각이 붕괴되자 길이 15m짜리 상판 4개가 연달아 떨어졌다. 노도처럼 밀려든 강물은 상판과 교각의 철근, 콘크리트를 곤죽으로 만들어 닥치는대로 집어삼켰다.(2003년 9월 14일) 2년 뒤 다시 홍수가 닥쳤다. 이번에는 21번 교각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부서졌고 상판 하나가 속절없이 또 날아갔다.(2005년 9월 17일) 수모였다. 그렇게 견고하다던 일제의 근대 기술이 아닌가. 통짜 교각받침에 기둥 3개를 1조로 엮어 교각 56개를 촘촘히 세운 플래이트 거더 게루바식 판항교(鈑桁橋)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동강난 구포다리(구포교). 부산 경남을 처음 이었던 다리. 눈물과 추억, 소통의 근대 표지. 철거도 힘들어 철거는 기정 사실로 돼 있다. 2003년 처음 무너졌을 때만 해도 다시 연결해 인도교라도 활용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구포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앞장 섰고 지역주민들이 동조했다. 싫든 좋든 근대의 기념물이고, 추억의 산실이 되어 있으니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2차 붕괴가 있자 이런 목소리는 급속히 잦아들었다. 계속 무너지는 다리를 붙잡고 끝까지 지키자고 요구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었다. 강물은 매정했다. 허술함이나 빈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부산시는 이 때다 싶었던지, 다대항 배후도로 통과를 구실로 구포 쪽의 다리목과 교각 5개를 철거했다. 이로써 구포다리는 확실한 반쪽이 되었다. 지난 연말 철거 용역을 끝낸 부산시는 철거 비용(85억 원) 확보에 고심하고 있다. 부산시는 철거 후 지하철 구포역사에 간단한 사료전시관을 만들 계획이다. 길이 1060m의 구포다리는 두 차례의 홍수로 88m가 붕괴되었고, 다대항 배후도로 통과를 구실로 200m가 뜯겼다. 남은 것은 수중부 211m, 강서 대저쪽 고수부지 구간 561m. 무너지고 동강난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홍수에 유린당하고 인간에 버림받은 구포다리는 냉큼 죽어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내 딸 사이소 그럼에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낙동향토문화원 백이성(61) 원장이다. "구포다리는 역경을 건너온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상징물입니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다리밟기를 하려는 김해와 부산 시민들로 꽉 찰 만큼 지역민들이 삶과 문화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고요. 일부라도 남겨서 관광·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합니다." 요즘도 그는 구포다리를 살릴 방법을 찾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구포다리에는 지역민들의 많은 추억과 애환이 깃들어 있다. 다리 놓일 때의 일화 하나.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일본인 와타나베는 공사비(당시 돈으로 70만 원) 일부를 인근 군·면에 분담시키기로 하고 장익원 구포면장을 불렀다. 김해는 물론 멀리 양산 주민들은 건설비를 갹출한 뒤였다. "공사비를 좀 내야 하지 않겠소?"(와타나베) "아니, 우리는 다리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데 분담이라니요. 다리가 놓이면 구포나루 상권이 무너져요. 우린 못 내겠소."(장익원) (화가 나서)"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소?" (태연하게)"좋소, 그럼 1000원 정도는 내겠소." (더욱 화를 내며)"그런 돈은 안받겠소." (고개를 끄떡이며)"아, 그럼 면제해주는 걸로 알고 가겠소." 장 면장의 배짱으로 구포는 부담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004년 간행된 구포초등학교 제24회 동창회 자료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자료집엔 '낙동장교가설기념비' 멸실 경위도 나와 있다. 일본 연호와 다리 건설에 참여한 일본인 관리 이름이 적힌 이 기념비는 원래 대저쪽에 있었다. 해방 직후 보기 싫다며 누군가가 시멘트로 비문을 지웠고, 1982년 일본 교과서 파동 때 성난 지역청년들이 아예 부숴버렸다는 것이다. 구포 다리목의 배와 딸기 장사 얘기는 아직도 회자된다. 구포다리는 1996년 구포대교가 놓일 때까지 구포와 서부경남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강서에서 구포로 넘어오는 구포 다리목은 버스정류소였는데, 이곳에서 지역민들은 구포의 명물 배와 딸기를 팔았다. 이들이 버스 창가에 매달려 '내 배 사이소' '내 딸 사이소'하는 모습은 웃지못할 소극(笑劇)으로 남아 있다. 구포나루의 님 구포(龜浦)는 흘러간 포구다. 거북의 등처럼 질길 것 같던 포구의 생명력은 다리가 놓이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2호선 구포역이 들어서면서 구포나루는 터를 완전히 잃었다. 구포다리 곁에 구포대교가 건설됐고 강서로 가는 지하철 교량이 놓였다. 게다가 다대항 배후도로(왕복 8차로)가 지나가면서 무수한 다릿발이 박혔다. 강이 뭉턱뭉턱 잘려나간 형국이다. 시인 양우정은 무슨 까닭으로 구포나루 님을 그토록 간절히 찾았을까. 구포에 가면 기다리던 무엇이 있는 것일까. '…메나리꽃 하나 따서/물에 던지면/고이고이 흘러서/끝없이 가지/에-헤루 흘러서 어데를 가나/ 구포나루 님을 찾아 흘러 간다네'(양우정 '낙동강' 중) 구포에는 물목의 흥성함과 일제 수탈의 얼룩이 배어 있다. 구포가 나루터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628년 조창이 설치되면서부터다. 강 연안의 고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3개 였다. 구한말 부산 경남의 상권을 휘어잡던 구포객주와 1912년 조선인들이 세운 구포은행, 1930년대에 번성했던 정미업 등은 모두 구포 조창에서 발원한다. 나루 경기가 활발할 때 구포에는 보부상을 위한 배가 따로 떴다고 한다. 보부상들의 배는 낙동강을 따라 화원 상주 안동까지 갔다. 그 시절의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는 지금 들어도 흥겹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구포교가 놓인 뒤에도 끈질기게 뱃길을 지키던 구포~대동 나룻배는 1980년대 중반께 퇴장했다. 마지막까지 나룻배를 붙잡고 있었다는 이삼용(72) 씨는 세월 저편의 나룻배를 이렇게 기억한다. "하나는 철선, 하나는 목선이었는데 주로 김해 대동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어요. 보따리 들고 다라이 이고 구포장이나 하단장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때 대동 가는 데는 버스보다 배가 더 빨랐어요. 주말이면 행락객도 더러 탔지. 그러다가 사라졌어." 다리가 전하는 말 지난 2월 동강난 구포다리에서 인상깊은 장면이 연출됐다. 양윤호 감독의 영화 '가면'이 촬영된 것. '가면'은 잔인한 연쇄살인 복수극에 숨겨진 충격적 비밀을 파헤친 스릴러물. 구포다리가 시나리오상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양 감독은 1000만 원을 들여 안전감정을 받고 촬영을 감행했다. 주인공 김민선과 김강우는 다리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연했다. 신세대 열혈 형사 김강우는 명품 오토바이 '듀가티'를 타고 끊어진 다리를 비행기 활주로 삼아 달렸다. 당시 장면을 담은 스틸사진을 보니 동강난 구포다리가 세상의 막다른 길 같았다. 철거의 운명을 알고 있는듯 비장함도 묻어났다. 구포다리의 막지막 모습이 스크린 속에 들어간 것은 다행이다. 구포다리의 대저쪽 다리문은 굳게 막혀 있었다. 다리를 지키는 사자상은 여전히 눈을 부라린다. 할수 없이 구포대교 인도를 간신히 따라 걸으며 구포다리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말을 거니 대꾸를 한다. -곧 철거될텐데, 기분이 어때? "철거하고 안하고는 너네 마음 아니니. 이런 흉물 나도 보기 싫어. 철거하든 보존하든 빨리 결정했으면 좋겠어." -철거를 바라는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련이 있구나. "내 나이가 일흔넷이야. 역할을 다 했으니 미련은 없어. 그렇지만 뭔가 아쉬워. 나와 함께한 숱한 시간, 그 많은 추억과 애환은 어디에 내려둔담? 내가 없어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닐까. 그래도 꼭 철거를 해야겠다면 사료관을 멋지게 지어봐. 사자상이나 다리발 몇 개라도 남아 있게.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을 위한 것이니까."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6> 향랑을 찾아서 [기획시리즈] 2007.08.3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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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북 구미시 오태동 낙동강가에서 한 여성의 투신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이름은 향랑(香娘), 나이는 19세. 평범한 서민(양인) 집안의 딸이었던 향랑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 칠봉은 성질이 괴팍했고 외도를 하면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향랑은 3년만에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왜 왔느냐,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라." 친정 부모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는 조용히 개가를 종용했다.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는 더 심했고 이번엔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향랑은 자신의 심경을 초녀(樵女·나무하는 여자 아이)에게 간절하게 전하고 '산유화가(山有花歌)'를 구슬프게 부른 뒤 낙동강 지류인 오태소에 몸을 던졌다. 1. 열녀비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선산부사 조귀상은 향랑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며 조정에 그를 열녀로 추천한다. 품신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릇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부도 어려운 일인데 아낙네, 하물며 시골 계집에 있어서랴….' 2년 뒤 숙종은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향랑은 시골의 무식한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를 알아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또 죽음을 명백히 하였으니, 비록 삼강행실에 수록된 열녀라도 이보다 낫지 않다.' 향랑은 이렇게 정려(旌閭)되어 이름이 남았다. 선산부사는 '선산 읍지-인물조'에 향랑전을 실었고 18, 19세기의 문사들은 향랑의 이야기를 전(傳), 한시, 소설, 잡록 등의 형식으로 남겼다. 그후 잊혀져 있던 향랑 이야기는 1990년 초 구미문화원에 의해 되살아났다. 구미문화원은 구미시 형곡동 산21번지에 있는 향랑의 무덤을 복원하고, 비석과 사당을 세워 그가 자결했다는 음력 9월 6일을 맞춰 묘제(墓祭)를 지내고 있다. 2. 열녀 뒤집어 읽기 향랑의 이야기는 간간이 대학에서 당대 사회상을 조명하는 석·박사 학위 논문의 소재가 되었고 단행본으로도 묶였다. 이 중 압권은 '향랑, 산유화로 지다'(정창권 지음, 풀빛)라는 역사 스릴러물이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17세기말 조선시대 가정사를 복원한다. 일종의 미시사(微視史)다. 향랑의 자살사건을 탐정처럼 추적해 저자가 내린 결론은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께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였다'는 것. 향랑의 죽음은 그녀를 열녀의 길로 내몬 당대 가족제도와 사회 체제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타살이라는 주장이다. 저자의 정치적 입장은 분명하다. 향랑의 존재는, 먼 고대로부터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던 선조 여성들의 정상적인 삶과 단절, 여권(女權)이 억압되던 시기에 나타난 불행한 상징일 뿐이다. 가부장제의 허상과 폐해를 이처럼 극적으로 파헤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3. 불경이부의 뜻 그럼, 향랑의 열녀비를 파내야 하는가? 이 심각한 의문에 대해 구미문화원 김교홍(73) 전 원장은 "하나만 보고 둘을 못본 해석"이라며 되레 일침을 가한다. 김 전 원장은 1992년 향랑묘를 복원할 때 묘갈명을 쓴 사람이다. 그는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도 행하기 어려운 절의를 행했으니 가상한 일이지"라면서 "그 당시로선 그보다 아름다운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향랑 발굴 경위도 설명했다. 1950년대 말 구미시 형곡동 금오산 기슭에서 소류지 공사가 있었다. 한 주민이 계곡에 파묻힌 비석을 발견했다. 해머로 깨뜨려 비석을 끌어올려 글자를 확인하니 '烈女香娘之墓'(열녀향랑지묘)라 적혀 있었다. 여력이 안돼 덮어 두었던 것을 김 전 원장이 문화원을 맡으면서 재발굴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불경이부(不更二夫)는 당시의 생활철학이자 시대적 가치였어요. 시대상황을 도외시하고 보면, 우리가 절의의 상징으로 떠받드는 사육신이나 생육신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향랑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의의 가치 관념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어요." 김 전 원장은 세상이 달라져도 충·효, 예절교육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향랑을 통한 '열녀 뒤집어읽기'는 관점에 따라 옳은 접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건 추리로 열녀의 허상을 밝히는 것이 온당한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열녀가 아니라 열녀 이데올로기가 아닐지…. 향랑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사회의 가족제와 절의 관념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4. 지주중류비 어쨌거나 향랑 이야기는 슬프다. 꽃다운 10대 여성이 타의에 의해 죽었고, 죽음으로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향랑이 목숨을 던졌다는 구미시 오태동의 오태소(吳泰沼)는 도시 변두리의 허다한 샛강이었다. 낙동강 남구미대교에서 300여 m떨어져 있으며, 70년대 구미공단이 들어서면서 원형이 크게 변했다. 구미 오태동에서 45년간 살았다는 장운익(70) 씨는 "이곳에 공단이 서기 전엔 낙동강가에 '신만주'라 불린 너른 농토가 있었다"면서 "향랑 이야기는 어른들로부터 가끔씩 들었으며 그가 죽은 오태소는 낙동강의 지류로 깊이가 자그마치 30m가 넘는다"고 말했다. 향랑이 죽은 자리가 야은 길재(吉再) 선생의 절의를 기려 새겨놓은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경북유형문화재 제167호) 옆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지주중류비는 1587년 인동(구미)현감 유운룡이 세운 비석. '지주(砥柱)'는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산으로, 황하가 범람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충절을 상징한다. 비문의 큰 글씨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이 썼다고 하며, 원래 오태소 옆에 있었으나 지금은 인근 언덕빼기에 옮겨져 있다. 길재와 향랑. 불사이군과 불경이부를 외친 두 인물의 유적이 한 곳에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5. 향랑교의 꿈 이런 곳엔 으레 나루 하나가 있다. 구미시의 향토사학자 김광수(50·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씨에게 넘겨 짚어 물어봤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태소 샛강 아래에 낙동강 낙계나루가 있었죠. 낙동강의 물굽이가 닿는 곳인데 옛 구미 낙계동과 칠곡 석적(중리)을 잇던 나루였지요. 1970년대 초반까지 배가 있었는데 낙동강 호안공사로 사라졌어요." 구미엔 알려지지 않은 나루가 많았다. 아래로부터 꼽아보면 낙계-동락-비산-계동-강정-강창-월파진-송당-신풍-원흥-견탄나루까지 모두 11개다. 10여 년 전 이들 나루를 일일이 실측하며 조사했다는 김 씨는 "1974년 말 구미대교가 놓인 뒤로 나루터가 하나 둘씩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전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싶게, 향랑이 죽었다는 오태동 샛강에 새 다리 하나가 놓이고 있다. 남구미IC 진입로 확장공사로 새로 놓이는 오태동의 '공단교'다. 길이 69m, 폭 35m(4차로)의 '닐센 아치교'인데, 교각 없이 세모꼴의 대형 아치가 케이블로 상판을 들어올리는 구조다. 조감도를 보니 향랑이 생각났다. 빨간색 아치가 절의를 연상시킨다. 강철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교각이 아니라 약해 보이는 케이블이란 것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다리는 200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다리 이름을 바꿀 수 없을까. 무미건조하게 공단교라고 할게 아니라 '향랑교(香娘橋)'로 말이다. 정감도 있으려니와, 이를 통해 산업사회의 무한질주를 되돌아볼 수 있을것이다. '향랑교'가 되면 그 옆에 꼭 세워야할 노래비가 있다. '산유화가'비다. 한번 읊조려 볼거나, 향랑이 죽을 때 불렀다는 그 노래를.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天何高遠)/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地何曠貌)/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天地雖大)/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身靡托)/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寧投此淵)/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葬於魚腹)'.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5> 문경 진남교반 [기획시리즈] 2007.08.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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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 주막거리가 반갑다. 박 선달이 침을 꿀꺽 삼킨다. 막걸리 너 얼마만이냐. 한 사발 시키려는데 분위기가 영 수상쩍다. 주모는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만 요란하다. 아직 개장이 안되었나. 예가 어딘가. 도리도표(道里圖表)를 꺼내 맞춰보니 문경새재 턱밑, 고모산성이렷다. 고모산 자락을 돌아 영강이 씩씩하게 흘러간다. 박 선달이 주막을 요모조모 살핀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옳거니, 예천 땅 낙동강 삼강 뱃가의 그 주막일세. 넉살 좋고 입심 센 주모 할매 죽은 뒤 누가 지킬까 했는데 여기에 한 살림 떡하니 펼쳐놓았구나. 2005년 10월 나이 구십에 세상 버리신 뱃가 할매 유옥련.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 내심 반가움에 다가가 마루에 엉덩이를 걸쳐보지만 허전하구나. 박 선달은 풀려던 괴나리봇짐을 고쳐 매고 뱃가 할매를 떠올린다. 주막은 초가 두 채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 영순의 달지주막을 그대로 재현한 거란다.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의 모습이다. 1. 성황당 주막거리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있다. 5~6m 높이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황당을 앞뒤에서 호위한다. 성황당 앞의 작달막한 느티나무는 의병장 이강년 선생이 1896년 일본군과 고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일 때 화재를 입은 모습 그대로다. 박 선달이 성황당 안을 빼꼼 들여다본다. 모녀의 초상화 한 폭이 모셔져 있다.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에게 허기를 달래주고 요기하며 쉬어가게 했던 떡장수 모녀의 초상화란다. 전설이 슬프다. 과거 보러 한양 가던 한 선비가 이곳에서 떡장수 딸과 눈이 맞았다. 믿는다, 믿어라 혼인 약조까지 했으나 선비는 과거급제 뒤 처녀를 잊고 말았다. 그 선비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이곳을 지난다. 옛 생각이 나서 처녀를 찾았으나 처녀는 목숨을 끊은 뒤였다. 관찰사는 밤마다 꿈에 처녀 귀신을 보게 된다. 까닭을 물으니 사모의 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관찰사는 그 자리에 성황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원래는 서낭당이라고 해서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는데, 300여년 전에 성황당을 지었다고 해요. 이 길이 유명한 영남대로지요. 많은 사람이 오가다보니 이런 전설이 생겨났을테고요." 문경시 엄원식(39) 학예연구사의 설명. 서낭당→성황당의 변천 과정이 흥미롭다. '길이 험하면 원망도 깊어지는 법….' 박 선달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2. 토끼비리 주막거리를 나온 박 선달은 '토끼비리'를 찾는다. 고모산성을 끼고 문경 오정산(805m)의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 1㎞, 폭 1m 가량의 벼랑길. 부산 동래에서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950여 리 중 가장 험난한 길이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새재(鳥嶺)가 사실상 여기서 시작된다. 패랭이를 고쳐 쓴 박 선달이 벼랑길로 접어든다. 한발 두발 그가 내딛는 발걸음을 밟고 지친 길손들이 힘겹게 따라오는 환상에 휩싸인다. 과거 급제를 꿈꾸던 선비, 세곡을 나르던 관리와 역졸, 부임지로 향하는 신임 사또, 괴나리 봇짐을 맨 보부상, 수백리 시집길을 나선 새색시…. 이들 길손이 고갯길 굽이굽이, 잔돌 하나하나에 새긴 애환과 사연은 바로 한민족사가 아닌가. '비리' 또는 '벼리'는 벼랑을 뜻하는 순우리말. 개가 낸 길은 개비리, 토끼가 낸 길은 토끼비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후삼국이 싸울 때 견훤에게 쫓기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알려줘 '토천(兎遷) 또는 '관갑천(串岬遷)'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벼랑길은 얼마나 많이 밟고 다녔는지 닳고 닳아 마치 발자국 화석처럼 돼 있다. 하기야 달리 발디딜 곳이 없어 한곳만 계속 딛다보면 이렇게 움푹 파였을 수도 있을 터. 신기한 느낌이 들어 박 선달도 발을 갖다대 본다. 옛 선인들의 고행이 이입되는 것 같아 종아리가 저릿하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영강이 여울을 만들어 호탕하게 흘러간다. 토끼비리는 바위를 U자 형태로 깎아 만든 고갯길에서 끝난다. 바람의 통로인듯 산바람 강바람이 다리쉼 하는 박 선달의 땀을 식혀준다. 3. 다리 전시장 '과연 장관이로고….' 고모산성 꼭대기에 오른 박 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경북 팔경 중 으뜸이라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물·다리가 어우러져 길의 진경을 연출한다. 고모산을 끼고 흐르는 조령천이 고부산을 돌아나온 농암천을 만나 영강이 되는 지점에 온갖 다리가 걸렸다. 눈에 보이는 다리만 모두 6개다. 먼저 조선시대까지 이용되던 영남대로(토끼비리)는 일제시대에 건설된 구 국도 3호선(구 진남교)에 자리를 내준다. 진남교반 최초의 다리다. 차 한대 지날 정도의 폭인데, 탄광 트럭이 주로 이용했으나 지금은 인도로만 쓰인다. 이어 1960년대 말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문경선이 놓였다. 영강을 건너 고모산 터널을 관통하는 문경선은 1990년대 말까지 석탄을 실어날랐으나 이제 폐선이 되었다. 구 국도 3호선은 1978년에 2차로로 확장된 데 이어 1999년말 다시 4차로로 넓혀졌다. 4차로 확장때 진남2교(길이 180m, 폭 19m)가 놓였다. 그런데 이 새길이 직선 형태로 펴지면서 토끼비리 절경 한자락을 뚫었다. '이런! 길의 탐욕이 역사를 무너뜨렸군.' 박 선달이 혀를 끌끌 찬다. 자연파괴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다. 국도 3호선 아래에는 최근 '된섬교'라는 콘크리트 강교가 걸렸고, 조금 더 내려가면 중부내륙고속도로 교량이 영강을 지나간다. 이곳 국도 3호선의 뿌리는 일제의 신작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5년 일제는 점촌에서 주흘산을 넘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냈다. 이화령(529m)이다. 전망대에 서면 멀리 충청도(괴산군) 땅이 보인다. 문경새재 옛길을 밀어낸 이화령 도로는 1998년 터널로 들어갔고, 그 옆으로 2004년 완공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교량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진남교반의 다리들은 문경 일원 길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새겨놓고 있다. 4. 새 길과 옛 길 문경은 2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계립령이 개통되면서 군사 전략지로 부상한다. 삼국이 영토 쟁탈전에 휩싸일 무렵, 신라는 진남교반 일대를 북진 거점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 고모산성이다. 당시엔 이 산성 아랫길을 통하지 않고는 영남과 한양을 왕래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최근 5세기 대의 지하 목조건축물과 저수지, 토기 목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신라의 점거 흔적이었다. 저수지 바닥에 '沙伐女 上'(사벌녀 상)이라 적힌 청동장식품이 나왔다. '사벌'(沙伐)은 지금의 경북 상주를 말하며 신라시대 문경 일대는 사벌주에 속했다. 새 길이 생기면 옛 길은 소멸하지만, 진남교반에서는 옛길인 다리들이 여전히 발언권을 행사한다. 일제가 놓은 신작로 다리와 산업화시대에 건설된 철도, 신·구 국도의 교량이 각기 역할을 잇거나 분담하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길과 새길이 다리를 건너가며 서로 서로 길을 묻는 것 같다. 구 진남교가 놓인 자리는 원래 뱃가(나루터)였다고 한다. 진남교반에서 지난 1960년대 말부터 '진남매운탕' 식당을 운영해온 김영희(여·47) 씨가 이 얘기를 해 줬다. "일제 때는 이곳까지 낙동강 소금배가 올라왔다고 하대요. 낙동강-영강-조령천이 수운통로였다는 말이죠. 그 소금배에 실린 것들이 새재를 넘었을테고요. 어머니한테서 그 얘길 들었어요." '수운' 이란 말이 걸린다. 실현될 지는 전혀 알수 없지만, 만약, 경부운하가 추진된다면 낙동강-영강-조령천을 따라 물길이 열리게 된다. 무리해서-아주 파괴적으로-운하를 뚫는다고 가정하면 진남교반의 다리 6개 가운데 4~5개는 뜯겨야 한다. 그 때도 진남교반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남아 있을까. 박 선달은 도리질을 친다. 수 천년을 흘러온 산과 물, 길의 역사가 저 영강에 굽이치는데….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4> 영주 청다리 [기획시리즈] 2007.08.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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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다리 밑에서 주워다 길렀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두번쯤 들어봤을 농담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 괜시리 슬프고 심란했다. 엄마 아빠가 엄연히 있는데 주워다 길렀다니….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말이지 않는가. 마음 약한 아이는 "아니다"고 강변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연사냐, 역모냐 '다리밑 자식'의 발원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라고 한다. 여기서 '다리 밑 자식'이 태어났다는 것. 전설은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조선 중기 유생들의 연사(戀事)의 산물이란 거고, 또 하나는 역모(逆謀)의 소산이란 거다. "이 얘기는 소수서원과 관련이 있어요. 소수서원은 국내 최초의 사립대학(사액서원)이었죠. 서원에 공부하러 온 젊은 유생들이 인근의 처자나 주막 기생들과 놀다가 애를 낳았던가 봐요. 키울 수가 없으니 죽계수 청다리 밑에 애를 버렸을테지요. 당시 자식이 없고 후손이 귀한 집에선 이 아이들을 주워다 길렀던 것 같아요. 여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나왔다고 해요. 제가 어렸을 때도 그 소릴 듣곤 했지요." 영주문화원 길인성(46) 사무국장의 얘기다. 영주문화원 홈페이지에도 이같은 내용이 소개돼 있다. 정분이 나서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떤 유생은 처녀와 짜고 부러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려놓고 아이를 주운 것처럼 가장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영주 순흥에서 '청다리 옛집'이란 식당을 운영하는 40대 여주인도 비슷한 얘기를 해 줬다. 이와 달리, 소수서원에서 일하는 박석홍(55) 학예연구원은 정축지변이 낳은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청다리의 원조는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예요. 제월교는 퇴계 이황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죠. 순흥은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돼 참화를 입은 곳입니다. 1457년 정축지변이죠. 그 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주변에서 데려다 키웠는데, 부모를 몰라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법을 사용한 거예요." 청다리의 '청(菁)'자는 우거지다 또는 무(무우)란 뜻을 갖는데, 여자의 다리(종아리)가 무에 비유되곤 하므로, 곧 '이름모를 여성의 다리 밑'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 그럼, 유생들의 불장난이란 얘기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박 연구원은 "그건 일본인들이 퍼뜨린 낭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께 일본인들은 선비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서원·향교철폐령을 내렸는데, 이때 청다리에 얽힌 얄궂은 이야기를 퍼뜨려 유림의 이미지를 안좋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문헌기록이 따로 없거니와 둘 다 전설로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정축지변의 참화 현장이 청다리였다는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피의 역사 순흥(順興)의 역사는 금성대군(1426~1457)이 개입되면서 풍파가 일어난다. 금성대군은 단종을 받들고 있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어 순흥으로 유배된다. 이 와중에도 금성대군은 기개를 꺾지 않고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새로 부임한 순흥 부사 이보흠이 금성대군의 처소를 찾아와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거사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얼마나 되겠소?" "제게 잘 훈련된 군사 삼백이 있고 관속과 경내외 장졸을 합치면 칠백 가량이 됩니다." "부사의 뜻이 참으로 기특하오. 영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세를 규합 합시다. 영월의 상왕(단종)을 하루빨리 복위시켜야 하오." 금성대군은 이보흠의 손을 잡고 어금니를 굳게 깨문다. 치밀하게 진행되던 거사는 순흥도호부의 관노 하나가 밀담을 엿듣고 격문을 훔쳐 조정에 밀고하면서 풍비박산이 된다. 그러잖아도 눈엣가시같은 금성대군을 호시탐탐 제거할 날만 기다리던 수양과 한명회는 일각을 지체 않고 군사를 보내 닥치는대로 베고 찌르고 불태워 순흥을 피바다로 만든다. 관군은 사방 10리 이내의 세살 이상 양반 남자는 모두 참형에 처했다. 죽임 당한 자가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처형지가 '제월교(청다리)'였으며, 당시 핏물이 죽계천을 따라 7km에 달하는 피천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피의 역사는 '피끝'(또는 핏걸)이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세조 3년, 1457년의 일이다. 이후 조정은 순흥도호부를 폐하고 고을 자체를 없애버렸다. 이 사건으로 금성대군은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약을 받는다. 사건이 있은 후 순흥은 230여년 간 이름없는 고을로 숨죽여 살았다. 1738년(영조 14)에 금성대군이 신원되고 역사는 비로소 역모를 절의로 재평가 한다. 위리안치 영주시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차로 10여분 가면 소수서원이다. 서원을 지나 선비촌으로 가다 보면 다리 하나가 나오는데 그게 청다리다. 길이 32m, 폭 11m의 자그마한 콘크리트 강교인데, 겉으론 볼품이 없다. 다리 옆에 '죽계제월교(竹磎霽月橋) 경희경인오월립(康熙庚寅五月立)'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있다. 퇴계가 이름 붙인 제월교를 숙종 36년(1710)에 다시 세웠다는 말이다. 다리 아래로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죽계천의 가녀린 물줄기가 큼직큼직한 강돌을 쓰다듬으며 흐른다. '무심한 역사로고….' 돌아서려다 선비촌 쪽 다리께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본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400m'. 궁금증이 일어 따라가본다. 순흥 향교를 곁눈질하며 향교 앞 다리를 건너 과수원 사잇길로 접어드니 탱자나무 울타리가 나온다. 위리안치? 역사책에서 본듯한 단어다. 사전을 들춰보니,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형벌'로 나온다. 현장에는 돌우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우물은 깊이 2m, 직경2m 정도 돼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답답함과 공포감이 함께 음습해왔다. 유적지를 둘러싼 가시가 권력욕과 탐욕이 빚은 역사를 찌르는 것 같다.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순흥이 다시 보였다. 다리 밑 자식 '다리 밑 자식'이란 말은 중의적이다. 다리(橋)와 다리(脚)는 동음이의어이고,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 밑'에서 태어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리(橋)가 다리(脚)의 은유이고, 다리(脚)가 다리(橋)의 환유(換喩)라는 것도 재미 있다. 헷갈린다고? 그럴 것이다. 이 농담은 그걸 노렸을 수도 있다. 이 농담이 지역성을 갖는다는 것도 흥미롭다. 서울의 경우 청계천이나 염천교, 부산은 영도다리, 대구는 신천교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청다리는 영주에서만 통한다. 그 지역의 대표적 다리가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감을 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순흥의 피의 역사에 끈을 대어 얘기한다면, '다리 밑 자식'은 단순한 우스개로 넘길 수 없다. 다리가 그냥 다리가 아니고, 호통을 치지 않아도 따끔한 '일침'이 될 수 있음이다. 실제로, 어른들은 공연히 이 농담을 늘어놓지 않았다. 아이의 버릇을 고칠 심산이거나, 못된 성질을 길들일 방편으로 '다리밑 자식'을 끄집어냈다. 그러다 아이가 알아들을만하면 슬쩍 웃음으로써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말하자면 이 농담은 자식 사랑의 해학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다리밑 자식'이란 말이 생겨난 그 다리 밑에는 지금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나와 장기나 화투로 세월을 낚거나 피서객들이 더위를 쫓고 있다. 이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아이들을 놀리던 그 어른들이라면 세월이 무상하다. 다리의 야사는 이렇게 또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3> 을숙도의 다리 [기획시리즈] 2007.08.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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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숙도 '똥다리'를 아시는지. 냄새를 맡았다면 당신은 을숙도의 낭만적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다. 이 똥다리는-발음이 좀 뭣하기는 해도-가히 '문화재급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여기서 똥배가 떴고 나룻배(도선)가 오갔으며 선남선녀들의 사랑과 우정이 싹텄다. 그 추억을 공유한 7080이라면 아마 콧등을 씰룩거릴 게다. 아릿한 '후각의 추억'이 강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지럽힌다. 바람 부는 낙동강 하구로 한번 나가볼거나. # 1. 분지(糞地)의 기억 "똥다리요? 아하, 그거 모르면 하단·장림 사람 아니죠. 하단 가락타운 뒤편 갈대밭 선창에 그게 있었어요. 낙동강 쪽으로 길쭉하니 50m 넘게 뻗어 있었고 거기서 똥배가 '물건'을 실어 냈어요. 그 옆에 을숙도 가는 나룻배가 있었고요. 아베크족이 많았는데 들큼한 냄새를 맡고도 모두 즐거워했지요. 푸하하~" 장림 토박이인 김경철(46) 씨는 똥다리 얘기가 나오자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렸다. 얘기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나오더니 급기야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괴정 대티터널 아래에 분뇨수집장이 있었고 거기서 관로를 달아 하단 똥다리까지 연결했대요. 가끔씩 관이 터져서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졌죠." 김 씨는 환경단체 '습지와 새들의 친구'(습새) 사무국장이다. 을숙도에 누구보다 진한 추억을 묻어둔 그가 을숙도 지킴이가 돼 있는 것도 인연이다. 낙동강 하구에서 50여 년간 고기잡이를 해온 황석용(64) 씨는 을숙도에서 그 '물건'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30여 년 전의 일을 그는 어젯일처럼 기억했다. "옛날엔 똥 오줌이 모다 거름 아임미꺼. 을숙도에 그게 부려지면 말리고 삭여 거름으로 썼지예. 을숙도에 한 천평 정도 농토가 있었는데 하루 서른 장군씩은 져 날랐을겁미더. 70년대 초반까지 그럭하고 살았지예." 장군이란 말이 또 후각을 자극한다. 장군은 묽은 액체 따위를 담아 옮길 때 쓰는 용기다. 흔히 '똥장군' '오줌장군'으로 불린다. 부산 위생사업소에 물어보니 당시 분뇨처리 방식이 '산화 분지처리'라고 일러준다. 지금의 을숙도 2차 쓰레기매립장 일대에 넓직한 구덩이를 파서 분뇨를 부어두면, 상등수(윗물)와 하등수(속물)로 분리돼 일부는 떠내려가거나 산화되고 나머지는 거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같은 방식은 1973년 부산 사상구 감전동에 위생사업소가 설치될 때까지 이어졌다. # 2. 똥다리의 추억 을숙도 똥다리는 하구둑 물막이 공사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김경철 씨는 예민한 촉수로 1980년대 초반 분위기를 더듬는다. "83년 9월 하단 갈대 숲속 '전원'에서 친구들과 송별식 하고 군대를 갔는데, 제대하고 돌아오니까 뭡니까, 다 없어졌던걸요. 송별식 때 본 을숙도가 마지막 모습이었죠." 이 시기를 전후해 하단 에덴공원과 그 일대 갈대밭에 들어서 있던 전원, 강나루, 강촌 같은 술집들은 보따리를 쌌다. 하구둑 건설 뒤 을숙도에는 분뇨처리장이 정색을 하고 들어섰고, 199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쓰레기가 압축되어 매립됐다. 을숙도 재활용을 고심하던 부산시는 지난 6월 매립장 들머리에 낙동강하구 에코센터를 열었다. 숱한 개발 와중에도 20여 년 전 을숙도를 말해주는 표식이 하나 남아 있다. 제1, 제2쓰레기매립장을 연결하는 을숙교 아래 수로에 있는 '나무다리'다. 다 뜯겨 나가고 '두 다릿발'만 앙상하게 남았다. 보기에 따라 설치예술 같기도 하고 절간의 당간지주 같기도 하다.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 사람들은 을숙도에 들어가면 통과의례처럼 저 다리를 건넜다. 이곳은 갯벌지대 특유의 분위기와 운치 때문에 한때 영화촬영지로 인기였다. 이문열 연작 소설 '젊은날의 초상' 제2부인 '하구'의 배경이 여기다. 황석용 씨는 "소와 구르마(수레)가 저 다리를 이용했고 젊은 사람들이 오면 한껏 폼을 잡고 사진을 찍곤 했다"면서 "언제부턴가 이곳을 '똥다리'라 부르더라"며 싱긋 웃었다. # 3. 활시위 같은 노선 말 많던 명지대교는 을숙도 하단부를 휘어져 지나간다. 강서구 명지동 75호 광장~사하구 신평동 66호 광장을 잇는 총 연장 5.2km(왕복 6차로)의 매머드급 다리다. 하늘에서 찍은 공사현장 사진을 보니 을숙도 하단부에 거대한 활시위가 당겨진 모습이다. 새들이 하늘에서 보면, 자기들을 쏘는 활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다리가 이처럼 활처럼 휘어진 것은 새들의 땅을 한 치라도 지키려는 보존군(軍)의 요구를 개발군(軍)이 일부 수용한 결과다. 2005년 1월 시작된 공사는 2009년 말에 끝난다. 현 공정률은 28%. 다릿발(교각)은 본선과 램프구간을 포함해 76개가 들어가는데, 쓰레기매립장을 관통할 4개를 제외하곤 거의 다 박혔다. 예견은 됐으나 쓰레기매립장에 교각을 놓는 문제가 복병으로 떠올랐다. 쓰레기를 파내야 하고 침출수 처리 역시 간단치 않다. 환경단체들의 눈초리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시공사인 명지대교(주) 측은 까다롭기는 해도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지대교(주) 홍보 담당 김정훈 과장은 "처음엔 오픈컷(개착식 터파기)으로 하려다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좇아 연직차수벽(흙막이) 공법을 검토 중"이라며 친환경 시공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 복병도 따져보면 자업자득이다. 문화재보호구역에 쓰레기를 매립해 놓고 그 위에 다릿발을 세우려니 문제가 복잡해졌다. 시공사 측은 을숙도와 명지대교의 '공존'을 강조한다. 김 과장은 "교각 수를 줄이려고 경간(교각간 거리)을 당초 45m에서 120~125m로 넓혔고, 조명등엔 갓을 씌워 빛 산란을 최소화하며, 교량 상판은 저소음재를 쓸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공존'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 4. 조감도(鳥瞰圖) 생각 철새들의 낙원이 실낙원(失樂園)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새들은 '새(乙) 많고 물 맑은(淑) 섬'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 인간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골고루 끌어안은 을숙도는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자연친화'를 얘기한다. 환경이 악화되긴 했으나 을숙도 일대의 습지 생태계는 여전히 보존 가치가 크다. 환경론자들은 이를 지상명령으로 여긴다. 박중록 '습새' 운영위원장도 그런 명령을 수행하는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취재에 동행하며 그는 '공존의 조건'을 주로 얘기했다. "저 소리 좀 들어보이소." -무슨 소리죠? "스스스~ 갈대에 스치는 바람소리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곳이 대도시에서 10분 거리에 있는데, 그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갯벌 수로에 있는 저건 도요새인가요. "청다리도요, 뒷부리도요네요. 저기 깝짝대며 걷는 놈은 깝짝도요입니다. 어, 조심하소. 길 위로 말똥게가 올라왔네요." -게들이 왜 도로에 기어오르죠? "원래 저거들 땅 아닙니까. 매립장 없었으면 맘 놓고 놀건데…." -저 명지대교 다릿발들이 아프죠? "그러죠. 가슴에 못이 박히는데…. 반면교사로 삼아야지요. 환경 변화를 꼼꼼히 모니터링해서 더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요." 을숙도 남단에 이르자 옅은 해무가 밀려들었다. 갯벌에 빼곡 들어차 있어야 할 세모고랭이들이 형편없이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이곳은 겨울철 고니가 노는 자리예요. 작년엔 3000여 마리가 왔지요. 세모고랭이가 고니들의 먹이인데, 저게 왜 없어진단 말입니까"라며 격분을 토한다. 갯벌의 환경지표식물인 세모고랭이들이 왜 시름시름 앓을까. 환경단체들은 명지대교가 원인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명지대교(주)는 작년의 낙동강 홍수로 인한 토사유입이 원인일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결과만 있고 원인은 아리송하다. 어쩌면 이는 앞으로 닥칠 후유증의 예고편인지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새들은 훤히 조감(鳥瞰)할 게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새들은 그들의 기억 창고에 낱낱이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필름처럼 풀어놓을테니까. '공존'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2> 들려라, 영도다리 [기획시리즈] 2007.08.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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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가 벌커덕 들린다. "히야~저것 봐라." "어, 다리다리를 드네."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술이 마법과 통하던 시대, 도개(跳開)의 장관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다. 그러다 어느날 철커덕 닫혀버린 다리. 추억은 파도를 탔고 들림은 추억이 되었다. 45도 각도로 번쩍 일어서던 도개의 추억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영도다리 복원 얘기다. 그 말 많고 시끄럽던 다리. 눈물과 상처, 기다림과 만남, 이별과 떠남의 근대 기념물. 우리들 추억의 고향. 1. 자본이란 이름의 전차 영도다리가 결국 '재개발'이란 이름의 전차에 길을 내주고 수술대에 올랐다. 오랜 논란 끝에 내려진 결론은 '복원을 전제로 한 재시공'. 지난 달 6일 부산시와 롯데건설은 영도다리 옆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에서 안전기원제를 겸해 임시교량용 강관파일을 박았다. 공사는 임시교량을 먼저 만들고 본교량을 철거, 복원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교량은 6차로(현 4차로)로 넓어지며 높이가 1m가량 올라간다. 공사비 800억 원은 롯데건설이 전액 부담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자본과 편리의 논리에 맞서 역사 문화적 명분이 체면치레를 한 모양새긴 하다. 명색 부산시 문화재이니 어느 정도 복원은 되겠지만 '현상 변경'은 불가피해졌다. 교각과 상판, 난간을 전부 철거, 해체한 다음 재시공되기 때문이다. 시공사 측은 뜯어 보고 쓸 자재가 있는지 보겠다고 한다. 어쩌면 달콤한 도개의 추억을 앞세워 원형 파괴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말뚝이 꽂혔고 공사가 시작됐다. 영도다리는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 시대를 건너간다. 잘 가라, 영도다리여. '들려서' 다시 만나자. 2. 들림의 추억 영도다리가 다시 '들린다'는 대목은 음미할 만하다. 비록 전시용이라 할지라도, 도개 기능을 되살리기로 한 것은 단순한 기능 재현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도개식 교량으로는 영도다리가 국내 최초 였다. 1934년 11월 23일 개통식이 있었는데, 다리의 일부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을 보기 위해 무려 6만 명이 몰렸다. 들릴 때 법칙이 있었다. 개통 초기엔 하루 7번 한번에 20분간 다리를 들었다. 다리를 올리고 내릴 때는 사이렌으로 신호를 했다. 다리를 드는 횟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 뒤에 가선 하루 두 번(오전 10시, 오후 4시)을 들고 내렸다. 도개 횟수는 다리 위 교통량의 증가와 반비례했다. 통과 선박이 범선인 경우 예인선이 끌고가도록 했다. 도개 기능은 1966년 9월부터 중지된다. 교통량 증가와 급수관 통과, 경제적 부담 등이 이유였다. 다리를 고정시키자 통과 높이인 7.51m(밀물)~8.87m(썰물)에 걸리는 배들은 알아서 딴 데로 갔다. 영도다리엔 아직 도개 장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런데 과연 다시 들릴까? 이런 의문은 '든다'는 것이 간단한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의 속도주의가 이를 용인하고 참아 주겠느냐는 거다. 가령, 다리를 든다고 1시간 정도 영도다리를 막는다고 할때 시민들이 불평하지 않을 것인가. 영도다리의 교통량은 이미 포화 상태다. 최근 한 조사를 보면, 중앙동→영도 구간은 하루 통행량이 2만8000여대, 영도→중앙동은 하루 3만3600여대다. 이 많은 차량을 묶는다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은 역사·문화 마인드가 바탕이 돼 있어야 내릴 수 있다. 3. 영도 도선의 생명력 영도로 들어가는 다리는 1934년 놓인 영도다리(대교)와 1980년 1월 30일 개통된 부산대교 두 개다. 중구 중앙동과 영도구 봉래동을 잇는 부산대교는 길이 260m, 폭 20m, 양쪽 인도가 각 2m, 통과 높이는 14m이다. 바다에 무지개처럼 걸린 빨간 아치가 여수(旅愁)를 자극한다. 영도다리가 형님이라면 부산대교는 아우인 셈. 덩치는 아우가 더 크다. 이 두 다리를 구경하기 좋은 장소가 영도쪽 '봉래나루길'을 따라 북항 쪽으로 조금 가면 만나는 소공원이다. 밤이 되면 형님·아우가 서로 다른 등불을 켜고 소곤소곤 대화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큰 다리가 두 개나 놓였음에도 영도~자갈치 도선(나룻배)은 건재하다.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대도시 한복판에 나룻배같은 도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도선은 영도 대평동과 중구 자갈치를 7~8분만에 건너간다. 버스는 물론 승용차보다 더 빠르다. "영도 대평동이나 신선동에서 택시를 타고 자갈치로 갈 경우 보통 택시비가 2000~3000원 나옵니다. 막히면 더 나오죠. 그런데 배를 타면 막힐 염려가 없는데다 900원(초등생 500원)이면 되죠." 1985년부터 영도 도선을 운영해온 선주 김희수(51) 씨의 얘기다. 영도 도선은 현재 1대(정원 48명) 뿐인데 선장 2명이 교대로 일하며 하루 55~60회 왕복 운항한다. IMF(국제구제금융) 사태 직전엔 하루 1300명까지 이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략 400명 정도라고 한다. 선친의 가업을 잇고 있다는 선주 김 씨는 "영도다리 공사가 본격화되면 손님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면서 "배를 한대 더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도선의 역사는 영도다리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부산시사 등을 보면 1890년 영도 봉래동~용미산(옛 시청 인근) 사이 무동력 나룻배가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뒤로, 1914년 동력선이 자갈치~대평동(2척·일본인 운영), 용미산~봉래동(한국인 운영)을 왕복했다. 이 도선의 전통이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게' 숨쉬고 있다. 4.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 선생은 오늘도 영도다리로 출근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다. 다리 난간에 초생달이 걸리면 '신라의 달밤'을 뽑기도 한다. 영도 쪽 다리 입구에 현인 동상과 노래비가 서 있다. 동상 오른발에 발을 걸치면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 탁탁, 발장단을 맞추다보면 다리 난간에서 추억이 춤을 춘다. 남포동쪽 영도다리 밑길은 입구만 있고 출구가 막혔다. 제2롯데월드 공사장 탓이다. 이곳엔 아직 판잣집이 몇채 남아 있다. "다리 공사가 시작되면 집 절반이 뜯긴다고 하데. 나가야지…. 남의 집이니 보상비는 생각 못하고 이사비나 좀 받을랑가." '소문난 대구 점집'의 배남식(76) 할머니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46년 전 대구에서 내려와 여태껏 이곳에서 버텼다는 할머니다. 유리창엔 '신수·병점·이사·도망·사주·궁합·꿈해몽'이라 적혀 있다. 찾는 단골이 아직 있단다. 그런데 '도망'은 무슨 뜻인가? "도망도 몰라? 내빼는 거. 여자가 도망 갔는데 오겠나 안오겠나 하고들 물어." 이들 점집은 6·25전쟁과 끈이 닿아 있다. 전쟁통에 생이별한 많은 사람들은 영도다리 점집을 찾아 '헤어진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하고 매달렸다고 한다. 배씨 할머니가 써붙여놓은 '도망'도 이런 맥락일테다. '잘 들려야 할텐데…'. 영도다리를 돌아나오며 이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들린다'는 의미는 다의적이다. 병이 걸리다, 신이 덮치다, 밑천이 바닥나다 따위의 부정적 의미도 있지만, 귀를 열고 듣거나 경쾌한 상승감을 뜻하는 긍정적 의미도 품는다. 이왕 영도다리를 들 참이면 부정적 의미는 되도록 경계하고 긍정적 의미에 방점을 찍자. 도개교는 그런 다리다. 뜻 그대로, 여는 다리이면서 열리는 다리다.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고, 갇히기보다 툭 터놓고, 조급해하기보다 기다림의 여유를 가르치는 다리인 것이다. 영도다리의 추억은 이 지점에서 무르익는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영도다리 후사(後史)는 어떤 추억의 무늬가 새겨질까.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1> 영산강의 나루들 [기획시리즈] 2007.07.2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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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강은 작지만 큰 강이다. 전남 담양 용추봉에서 목포까지 물길 115.5㎞. 지리적 길이는 낙동강(525㎞)의 1/4이 안되지만, 속에 감춘 역사와 문화는 조밀하고 웅숭깊다. 유역 곳곳에 고대사의 숨결이 흐르고, 왕건과 이성계가 등장하며 일제와 근·현대의 물살이 넘실거린다. 영산강 나루를 더듬으니 남도의 역사와 정신이 어렴풋이 보였다. #둥구나루의 추억 2004년 봄, 나주시 영강동 영산강변 개흙에서 한 주민이 고대 선박의 잔해를 발견했다. 남도문화재연구원과 나주문화원이 함께 조사해 보니, 배는 길이 40여 m의 초 대형선이었고, 시기는 11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됐다. '혹시 왕건의 병선이 아닐까…'. 발굴단은 그럴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왕건이 나주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서기 903년(신라 효공왕 7년). '고려사'에는 건국 전 왕건이 영산강 일대로 몇 차례 원정을 가게 되는데, 그 때마다 대규모의 수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4차 원정 때는 군선 70여 척에 병사 2000여 명이 동원됐다. 나주에 온 왕건은 어디에 정박했을까? 나주문화원 측은 옛 둥구나루가 아닐까 추측한다. 둥구나루는 현 나주역 자리로, 예전에 강이 둥글게 곡류하는 지점에 있던 천혜의 포구였다. 이 나루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던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이 함께 머물다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를 믿은 죄로 유배를 당한 정약용은 이곳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영산강을 건너 강진으로 갔고, 정약전은 배로 흑산도로 떠났다. 정약용은 형 약전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율정별(栗亭別)'이란 시를 남겼다. 율정(栗亭·밤남정)은 현 나주시 동신대 후문 근처의 지명이다.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 푸르르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을 보노라니 헤어질 일 참담하네/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서로 할말을 잃어/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하네…' 둥구나루는 1989년 영산강 대홍수 뒤 직강화 공사로 사라지고 잘린 강줄기는 우각호(牛角湖)로 변했다. 1913년에 찍은 사진을 보니 선창이 제법 시끌벅적하다. 나룻배 하나에 주민 50여 명이 탔고 선미에 사공이 노를 잡고 힘겨워하고 있다. 상당한 규모의 나루임을 알 수 있다. 200여년 전 정약용 형제가 묵은 주막도 사진 속의 민가 근처였을 것이다. #'꿈여울'의 전설 왕건은 나주와 무안의 경계인 몽탄나루에도 전설 한자락을 남기고 있다. 꿈여울(夢灘) 전설이다. 때는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덕진포(지금의 전남 영암군) 일대에 진을 치고 서로 세력을 다투었다. 한낮 잠깐 졸음에 겨워 잠이 든 왕건에게 신령이 나타났다. '무얼 하고 있느냐. 바람이 잠잠해졌으니 지금 당장 강을 건너라.' 신령의 호통에 놀라 잠을 깬 왕건은 군사를 몰아 강을 건너 화공(火攻)으로 견훤군을 습격해 대승을 낚는다. 나주 사람들은 고려 태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 몽탄나루라고 믿고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장군 시절, 이곳을 침략해온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도 꿈에 신령이 나타나 '지금 여울이 낮아졌으니 어서 건너라'고 계시해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나주시 동강면 몽탄리에는 1994년 6월 길이 680m의 몽탄대교가 놓였다. 다리 오른쪽에 강쪽으로 삐죽 튀어나간 돌무더기가 남아 있는데 그곳이 나루터다. 무안쪽 몽탄에서 마지막 배를 몰았다는 전종회(58·전남 무안군 몽탄면 명산리) 씨는 "내가 최고로 많이 실을 때는 한번에 140명까지 태워 봤당께. 그리 큰 배가 하루아침에 꿈처럼 사라졌부럿구만"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고대사의 들녘 강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들판을 지나 삶과 죽음 사이의 아득한 경계에서 웅웅거린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어 묻힌 자들을 불러 말을 걸고 있지만, 비밀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는 삼한·삼국시대 고분이 즐비하다. 나주시 다시면과 반남면에는 경주의 신라고분, 함안이나 고령의 가야고분에 버금가는 거대한 고분이 무려 400~500기에 이른다. 나주에서 1번 국도를 따라 구진포 방향으로 가다 다시면으로 곧장 들어가면 복암리 고분(사적 제404호)이다. 아득히 펼쳐진 강변 평원에 4기의 대형 고분이 있다. 복암리 3호분이라 명명된 죽은 자들의 집은 발굴 당시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 변의 길이가 40m인 사다리꼴 고분 속에 무덤 41기가 3개 층으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옹관묘-석실묘-석곽묘가 시대를 달리해 배치되었다. 무덤 조성 시기는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약 400년. 세계에 유례 없는 이른바 '아파트형 고분'이다. 이웃 고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발견돼 묻힌 자가 유력자임을 암시했다.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도 7∼8개 씩의 무덤떼가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나주에서 13번 국도를 따라 들어가면 어느 순간 거대한 무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으로 들어서는 듯하다. 여기엔 옹관묘(甕棺墓)가 주종이다. 커다란 독 두서너 개를 포개서 만든 삼국시대 옹관은 영산강 유역에 밀집된 독특한 무덤 형식. 고고학계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사회를 '옹관묘 세력'이라 부르며 마한의 마지막 모습을 유추한다. 언덕 같은, 야산 같은 유순한 고분군을 보노라니 기분이 쓸쓸해지다가도 이내 따뜻해진다. 우리들 내력과 뿌리가 거기 닿아 있음이다. 어떤 것은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닮아 왜(倭) 세력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촉발한다. 마한과 백제, 왜(倭)가 뒤섞여 있는 고대사의 들녘. 영산강은 비밀을 깊이 감춘 채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루마을의 희망 영산강에는 많은 나루가 명멸했다. 나주 영산포 아래로 구진포-동말-회진-터진목-중천포-고운진-사포-신설포-북적포-뒤구지-자구리-몽탄나루 등이 비교적 큰 나루로 꼽힌다. 그러나 어디 할 것 없이 이름만 남았다. 허망한 퇴장이다. 그런데 떠내려가는 나루를 붙잡아 '뱃길 체험'을 하게 만든 곳이 있다.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영산나루마을이다. 42가구 80여 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농사 지으며 살던 강마을에 지난 2005년 변화가 생겼다. 마을 인근에 MBC 드라마 '주몽' 세트장(현재 삼한지 테마파크)이 들어선 것. 주민들은 마을과 테마파크를 잇는 뱃길 체험코스를 개발했다. 강과 농촌, 역사를 결합시킨 독특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원래 이곳이 석관정(石串亭) 나루였어요. 나주 공산면과 함평 학교면을 잇는 곳이죠. 나룻배에 대해 의외로 관심이 많더라구요. 아 이거 되겠다 싶어 홈피를 만들고 얼마 전 전담 총무까지 뽑았당께요." 영산나루마을 이장 김승식(57) 씨는 의욕이 넘쳐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켜 곧바로 뱃사공을 호출했고, 기다렸다는 듯 김길복(52) 씨가 나왔다. "나루로 가볼랑가!" 이장이 앞장서고 뱃사공이 따랐다. 배는 '공산호'라 이름된 동력선으로 20~30명이 탄다고 한다. 어부 출신인 김 씨는 영산강 뱃길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옛날 노 젓던 시절엔 여기서 몽탄까지 7~8시간이 걸렸어라. 강이 뻥 뚫렸을 땐 황서리(조기새끼) 재첩 실뱀장어 참복꺼정 무지 잡았어잉. 헌데, 지금은 토사가 싸여부러 수심이 평균 3~4m 될랑가. 그래도 요새는 수질이 쬐끔 좋아졌는지 붕어 잉어만 잡히다가 쏘가리가 올라온당께." 듣고 있던 김승식 이장이 한마디 거든다. "농약 안치고 채소를 키워서 그런지, 지난 가을엔 메뚜기가 눈에 띄게 많아졌당께요. 생태계가 조금씩 살아난다는 증거로 봐요. 하구둑 터불자는 소리도 있으니 앞으로 더 달라질거요잉." 영산나루마을이 갑자기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0> 나주 영산포 [기획시리즈] 2007.07.1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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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하고 불러야 한다. '!'하나쯤 붙여야 남도의 비릿한 갯내와 숨죽인 슬픔, 혹은 시시껄렁한 얘기가 터져나온다. 그래야 얘기 속에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 얘기가 삶의 물비늘로 튄다. 영산강은 누님이 생각나는 강이다. 멸치젓 향기를 품은 억척 누님. 아무리 힘든 일도 제 물굽이에 받아 넘기시던 누님. 눈물마저 미소이던 강물, 목 메어 부르는 영산강, 부르다 목 멘 영산포.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나해철의 시 '영산포1'를 들고 찾아간 전남 나주의 영산포. 영산강은 간밤의 장대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쿨렁쿨렁 흐르고 있었다. # 등대의 추억 영산포 등대는 말이 없었다. 강가에 우뚝 선 채 무연히 강물만 지켜본다. 등명기는 점멸을 멈췄고, 대신 현대식 컬러 조명등이 들어 앉았다. 저녁이 되면 등대 주변의 투광기 6대가 등대를 비춘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던 등대가 주변 빛의 도움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다. 툭 하면 차고 넘치는 물, 조금만 가물어도 졸아버리는 강. 등대 몸통에 새겨진 수위 표지가 강의 변덕을 조용히 설명한다. 선창의 길과 집들은 일찌감치 높다란 콘크리트 방벽을 쳐놓고 뒤로 물러 앉았다. 강가에는 등대만 남았다. 눈길을 주지 않으면 등대는 웃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영산포에 등대가 들어선 것은 1915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된 그 다음 해다. 일제가 주목한 것은 곡창 나주평야와 영산강 수로였다. 나주 영산포는 영산강의 수운 요지로 수탈 창구로 적격이었다. 영산포 등대는 말하자면 호남 착취의 길잡이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영산포 등대는 근·현대 역사, 그 이상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 있었다. "영산포가 전부 변해 부렀지만 저 한놈만은 용허게 옛 모습 그대로제. 저 등대만 보문 선창에 배 들어오던 시절이 생각 나. 1970년대꺼정 이 곳에 배가 무지 많이 드나들었제. 괴기배가 많았지만 신안 영광 염전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배도 겁나 부렀어. 그 많은 배들이 저 등대 보고 댕겼응께 웬만한 바다 등대보다 저게 더 중한 역할을 한 셈이여." 영산포에 배가 들던 시절 홍어 중개업을 했다는 손석용(69·전남 나주시 영산동) 씨의 얘기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는 뱃길로 120여 리. 나주 영암 해남 목포 신안 사람들은 이 뱃길을 이용해 장사를 하며 살았다. 영산포는 고려시대부터 나주 해상 세력의 중심지였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누르고, 나주 오 씨(장화왕후)를 만나 건국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 나주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영산창이 있었는데, '경국대전'에 당시 선박 53척이 일시에 도열해 있었다고 언급할 정도로 큰 포구였다. 손 씨는 "저 등대 불이 꺼져분께 영산포도 같이 죽어부렀제. 뭣보담도 강물이 맑아져야 혀"라며 수질 오염을 걱정했다. 영산포 등대는 1978년 영산강 뱃길이 끊기면서 불이 꺼졌다가 최근 다시 불이 켜졌다. 나주시는 이 등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궁리를 하고 있다. # 영산포의 다리들 영산포에는 일찍이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진(錦江津:영산포의 옛 이름)에 영산교(榮山橋)가 놓여 1년에 한 번씩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간소한 나무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인 1922년에는 영산포 등대 옆에 '영산구교'라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사진이 남아 있는데, 오늘날 섶다리처럼 나무를 A자로 촘촘히 세워 영산강을 가로지른 모습이다. 등대가 세워지기 전인 1914년 배가 오면 다리를 들어올려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개폐식 목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개폐식 다리는 신의주와 부산 영도다리 두 곳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리학자인 김경수(전남대 사대부고 교사) 씨가 영산포의 개폐식 다리 존재를 연구 결과 밝혀냈다. '영산강 삼백 오십리'(향지사)의 저자이기도 한 김 씨는 "영산포의 이런저런 다리와 수위 측정을 겸한 등대 등은 일제가 수탈을 위해 영산포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영산포 등대 주변에는 일제 때의 건축물이 적지 않다. 영산동에는 일제 때 나주의 최대 일본인 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 남아 있고,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회사의 문서 창고가 온전하다. 일제시대에 개발된 원정통(元町通) 거리는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이다. 이들 일본인 건축물은 역사 상념에 잠기게 한다. 싫든 좋든 근대 문화유산의 격을 얻고 있으니 없애버리자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일제에 짓밟힌 우리 민중들의 한과 눈물은 기억해둬야 한다. 문순태 씨의 소설 '타오르는 강' 서문에 기억해야 할 이유가 적혀 있다. '…영산강에는 한이 흐르고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내 땅'을 지키고 살며, 조금 여유가 있으면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판소리, 육자배기 한바탕 꺾는 것이 꿈의 전부인 이들은 끊임없이 빼앗기고 짓밟혀왔다. …이들은 '한의 실꾸리'를 감지만 않고 풀었다….' 일제의 질곡을 지나온 영산강은 그후 산업화 과정의 오폐수를 한 몸에 받아냈고, 급기야 1981년 말 길이 4.3㎞, 최대 높이 20m의 하구둑에 막혔다. 이때부터 영산강은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있다. # 영산강의 당제 풍습 "경상도 쪽에도 당집이 남아 있나요? 나주에 아주 특이한 당집이 하나 있어요. 이를테면 영산강의 용신을 모신 당집이죠. 그런데 참 인간적이에요. 함 가볼랑가요?" 나주문화원 김준혁(46) 사무국장의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당집·당산(堂山)'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와닿는 요즘 아닌가. 전래 당집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었으나 거의 대부분 자취가 사라졌다. 김 국장이 안내한 곳은 나주시 제창마을의 별봉산(168m) 자락. 그곳에 '용진단(龍津壇)'이라 불리는 한 칸 짜리 당집이 있었다. 영산강 물줄기와 함께 앙암(仰岩)이란 큰 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앙암 아래에 용신이 산다고 해요. 옛날 왜구들이 노략질을 하려고 영산강 거슬러 오르다가 앙암 바우 밑 소용돌이를 못 이겨 되돌아갔다는 얘기도 있어요. 앙암의 용신을 달래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당집이 용진단이죠." 당집 입구엔 '正禮(정례)'라 적힌 비석이 서 있고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당집 안에는 당할아버지의 영정이 걸려 있었는데, 흰 수염이 더부룩한 게 자상한 모습이다. 영정의 진본은 도난당하고 지금의 것은 새로 복원한 것이란다. 당할아버지 떠메 간 '도선생'이 온전했을까 궁금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당산(당집) 주변에 당산나루 네 그루가 방위별로 포진해 있다는 점. 이른바 지신당인 당할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산의 당할머니들이라고 한다. "지신당의 신격은 당산할아버지이고, 사당산의 신격은 당산할머니죠. 사당산의 당산나무는 웃당산, 앞당산, 솔당산, 큰당산이라 불려요. 마을의 동쪽 도로 맞은 편, 마을의 중심부인 마을회관 옆, 서쪽인 미천서원 옆, 그리고 당집 앞에 귀목나무와 팽나무가 서 있죠."(김 사무국장)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열흘 자시에 지내며, 지내기 전 모두 몸가짐을 조심하고 정성을 쏟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당집을 관리한다는 김철중(85·나주시 제창리) 씨를 만났다. "왜 힘들게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조상대대로 지내왔응게 지내지. 지내고 나면 마음이 편허고 일이 잘 된당께." 용진단은 자연에 순응하는 나루터 마을의 전승(傳承)으로, 나루 없는 시대 또 다른 나루의 모습이었다. 나주 제창마을에서만은 당제가 케케묵은 풍습이 아니라 숨쉬는 문화유산이었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9> 저도 연륙교 [기획시리즈] 2007.07.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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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마법을 믿는가. 믿지 않는다면 마산의 남쪽 끝 '저도'를 한번 가 보시라. 필시 마법의 지팡이가 당신의 식은 열정을 후려칠 것이니. 믿는다 해도 갔다올 만하다. 사랑의 마법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사랑의 마법에 슬쩍 걸려들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저도를 갔다. 누구와? 초하의 탑탑한 바람과! 내륙의 강바람에 지친 일상이 '그 파란' 바닷바람에 씻기길 내심 바라면서. # 손잡은 연인들 저도(猪島)는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 구산반도에 딸린 작은 섬이다. 구산반도와 저도 사이에 연륙교 두 개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새 다리는 늠름한 아치형이고, 옛 다리는 빨간색의 예쁜 철교다. 옥빛 바다에 걸린 빨간색이 매혹적이다. 섬은 '코딱지'만하다. 전체 해안선 길이가 10㎞, 최고봉인 용두산이 203m, 인구가 37세대 87명(6월 말 기준)이다. 대부분 산지이고 경지는 9900여 ㎡에 불과하다. 섬의 모양은 마치 돼지 같다. 이 외딴 섬에 연륙교가 놓인 것이 1987년. 길이 170m, 폭 3m, 높이 13.5m의 철제 다리인데, 태국 깐짜나부리의 콰이강의 다리를 닮았다 해서 '콰이강의 다리'란 별칭이 붙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태국에 있는 것보다 휠씬 멋졌다. 이 다리가 뜬 것은 지난 2001년 노효정이 감독한 영화 '인디언 섬머'의 촬영지가 되고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이신영(이미연)이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변호사 서준화(박신양)와 이곳에서 이틀 밤을 보낸다. 그 뒤 가수 거미가 뮤직비디오 '아직도'를 찍으면서 전국적 명소로 부각됐다. 이 다리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전설이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손을 잡고 이 다리를 끝까지 건너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하지만 다리 중간에서 손을 놓게 되면 헤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런 얘기도 있다. 이 다리 위에서 빨간장미 100송이를 선물하면서 프러포즈를 하면 결혼에 골인한다는. 누가 만들어 퍼뜨렸는지 발상이 기특하다. 경남 김해서 왔다는 20대 후반의 여자는 다리를 건너기 전 남자친구에게 "손 놓지 않을거지. 약속해"하며 손가락을 건 다음 걸음을 옮겼다. 사랑의 마법이 통하고 있었다. # 빨간 추억 저도에는 빨간색이 지천이다. '콰이강의 다리'가 온통 빨간색이고 마을 안쪽에 자리한 선착장 주변의 횟집 간판과 난간, 뜬다리(부교) 심지어 화장실 간판까지 빨갛다. '왜 빨간색 일색이냐'는 물음에 한 주민은 "저도의 옛 다리가 빨가니까 빨개졌어. 열정적이고 좋잖어. 손님들도 좋아해"라고 했다. 저도에선 빨강이 컨셉이고 관광 전략이다. 저도에 '다리다리 사이'라는 횟집을 운영하는 김형용(45) 씨는 빨간색과 관련해 씁쓸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오래된 일이지만, 우리 동네에 머리 좋은 한 형님이 사상 문제로 고생한 적이 있었어요. 좌익, 그러니까 빨갱이로 몰렸던거죠. 경찰이 그 형님 잡으려고 섬에 초소까지 지었대요. 지금은 아마 미국에 이민 가 있을걸요." 빨갱이 잡자고 혈안이 됐던 섬이 빨간색으로 들어찼으니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 2002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걷어냈듯이, 저도의 다리와 횟집들은 우리 의식 속의 빨간 이념을 지우고 있다. 빨강은 상징이 다채롭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불멸과 영광' '유혹과 금기' '열정과 소비'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빨강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 때문에 마법사가 이 색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저도의 빨간색을 보고 있노라면 도처에서 마법사가 '콜(Call)'을 외치며 열정을 사랑으로 바꿔놓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 닐센 아치 '콰이강의 다리' 옆에 새 저도 연륙교가 놓인 것은 2004년 12월이다. 길이 180m, 폭 13m의 왕복 2차로와 인도로 된 이 다리는 저도의 고즈넉한 풍광을 떠들석하게 바꿔놓았다. 새 저도 연륙교도 딴은 볼거리다. 마산시의 시조인 괭이갈매기를 형상화한 아치형 조형물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른바 닐센 아치교로, 1929년 스웨덴의 닐센이 고안한 교량 형식이다. 무지개형 대형 아치를 세워 V자형 사재(斜材) 및 사다리꼴 수평재를 붙이고, 케이블로 교량 상판을 매달아 강성과 인장력을 높인 구조다. 거제에서 교량 상판과 아치를 통째로 만들어 해상크레인을 이용해 일괄 가설했는데, 경간 길이 182m, 높이 30m의 거대한 닐센아치가 육지와 섬 사이에 올라앉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다리가 놓이기 전, 저도 주민들은 나룻배로 육지와 교통했다. 섬마을 주민들은 경비를 추렴해 공동으로 나룻배를 운행했고 아이들은 그걸 타고 육지의 학교를 다녔다. 구복리(저도) 반장 김종휴(59) 씨는 "당시 뱃사공은 육지 쪽 구복리에 있었고 주민들이 사공집을 지어주고 운행을 맡겼다"면서 "노 젓는 나룻배가 불편했지만 인정만은 가득 실렸었지"라며 먼 기억을 되살린다. 새 다리가 놓인 뒤 '콰이강의 다리'는 인도로 변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던 시절, 다리 폭이 좁아 걷기를 주저하던 사람들도 이젠 마음놓고 '콰이강의 다리'를 걷는다. 저도는 더 이상 육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다리가 놓인 후 3.3㎡(평)당 몇천 원하던 땅값이 껑충 뛰었고 시내버스가 다니고 유선TV가 들어왔다. 관광객이 늘어 횟집들도 휘바람을 분다. 주민들은 또다른 개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저도 인근에서 '구복예술촌'을 운영하는 노향목(여·53) 씨는 욕망의 과잉을 경계했다. "저도에 새 다리가 필요했을까 싶어요. 사람들의 편리 추구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빨간 다리 하나 있을때가 휠씬 운치가 있었죠. 모자란듯 아쉬움이 저도의 매력이었거든요." 노 씨는 10년 전 저도 인근의 폐교를 열린 예술촌으로 꾸민 서예가(서각) 윤환수(56) 씨의 부인이다. # 마법의 섬 저도는 '마법의 섬'이다. 인구 100명도 안되는 곳에 두 개의 다리가 놓이고, 다리 때문에 '영화'를 누려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가 된 과정이 마치 마법을 보는 듯하다. 이 섬에 들어가면 누구나 반쯤 마법사가 된다. 마법사 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물 건너 가거나 파투의 수순을 밟을지 모른다. 이는 저도를 갔다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전설'이다. 마법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마법에 걸리게 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한다. 눈 뜨고 처음 접하게 되는 세상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순간순간이 기쁨으로 넘친다. 신비하고 경이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게 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쉬운 것은 저도의 빈약한 문화다. 빨간색만 강조할 뿐, 속 깊은 이야기가 없다. 삶의 갈증을 채우는 문화,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도에서 사람이 사랑만으로, 회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복예술촌이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운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음달 17~19일 이곳에서 제11회 바다예술제가 열린다. 어민들과 관광객을 위한 문화행사다. 이를 통해 저도에 '문화의 마법'이 먹혀 들었으면 좋겠다. ☞ 찾아가는 길 =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찾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마산에서 통영·고성 쪽으로 가다 현동검문소를 지나 구산·수정 방향 1035지방도를 타고 들어간다. 구절양장 뻗어난 해안도로를 따라 백령재 반동을 지나면 작은 섬이 '저도요'하고 반긴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8> 군산 째보선창 [기획시리즈] 2007.07.0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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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보선창이 어디에요?" "여가 시방 기여." "……." "긍게 시방 여가 기랑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째보라는 말도 재미있지만, 군산 사투리가 더 재미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접한 군산의 전라도 사투리는 양도의 특징을 배합한듯 억양이 드세고 옴팡진 데가 있다.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긍게' '기여' '아니여' 하고 떠들면 그대로 육자배기 가락이 될 것 같았다. 군산과의 만남은 웃음으로 시작됐다. #날품 인생 째보는 언청이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말이 우습지만, 째보선창의 내력을 더듬으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다. 군산의 타율적 개항과 근대화, 일제의 수탈, 그로 인한 수난사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비린내를 안고 질척거리며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탁류' 그것이었다. 이는 곧 우리 근대사의 역정이다. 째보선창은 찾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금강하구둑 턱아래 '채만식 문학관'에서 우회전해 시내 쪽으로 하구의 넓직한 입을 끼고 달리다 경암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째보선창이다. 선창 주변은 아직 1960~70년대를 지나고 있는 분위기다. 폐선 집합소를 방불케하는 선창에선 퀴퀴한 갯내음이 풍겼고, '듸젤엔진수리'라고 적인 가게 앞엔 '구리스'가 잔뜩 칠해진 쇠고랑이 나뒹굴었다. 용접 불꽃이 튀는 선외기 수리점 옆 선술집에선 대낮인데도 막걸리잔이 돌았다. 길 가던 늙수그레한 60대 주민을 붙잡고 물었다. "이곳을 왜 째보라고 했나요?" "여가 째진 자리라고 그려요. 지금은 복개가 되어 보이질 않는데, 예전엔 금강 하구로 흘러드는 이곳 소하천이 심하게 째져 보였제. 그랑게 째보지. 안그려?" "아직도 그렇게 부르나요?" "째보 말고는 이름이 없어야." 이름을 묻자 "싱거운 사람일세, 남의 이름이 왜 필요혀"라며 꽁무니를 뺀다. 재차 묻자, "죄 지은 거 없어야…. 정용호(62·군산시 영화동)라 혀요" 한다. 강퍅한 인상에도 정이 갔다. 초면의 그를 붙잡고 선술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 되를 시켰더니, 째보선창의 역사가 고구마줄기처럼 달려나왔다. "그려, 일제 때는 여기가 동빈어판장이고, 광복이 되고는 동부어판장이 됫으라. 물론 째보선창이 기여. 그란데, 금강하구둑 막히고 선창 매립되고부터 토사가 흐벌나게 쌓이잖여. 그 길로 선창이 결딴나 부럿어. 배를 댈수가 있나, 뺄수가 있나…. 니이미, 폐선들만 가득 들앉았지 뭐." 정 씨는 젊을 때 배를 탔으며, 10여 년 전까지 째보선창에 있던 동부어판장에서 잡역부로 일했다고 한다. 동부어판장이 해망동 어판장에 통합, 이전되면서 정 씨는 창고 날품팔이가 되었다. 째보선창은 아직도 정 씨같은 날품 인생을 보듬고 있었다. #힘센 째보의 전설 '째보'란 이름의 배경이 궁금해 군산문화원에 문의했더니, 이복웅(62) 원장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원장은 향토사학자로 지명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몇 가지 얘기가 있지요. 먼저, 지리적인 측면에서 금강 하구의 째진 자리에 선창이 들어섰다 하여 그렇게 이름됐어요. 또 하나는, 일제시대 이곳에 째보(언청이)라는 힘센 사람이 있었는데, 외지인들에게 텃세를 부리며 자릿세를 뜯곤 했대요. 그 위세가 대단했겠지…. 어원적으로 이곳의 옛 지명인 '진보'가 '째보'로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어요." 모두 그럴 듯하다. 스토리는 '힘센 째보'가 재미있다. 힘센 째보의 후일담은 전해지지 않지만, 일본인들이 뒷배를 봐주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시대 수탈 구조의 연장선상에 째보선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동빈(동부)어판장은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값비싼 민어나 뱅어 등을 주로 먹었고, 한국인들은 비교적 흔하고 싼 갈치, 숭어, 아구 등을 먹었다고 한다. "째보선창은 그대로 군산항의 역사예요. 1899년 일본은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켜 수탈 기지로 삼지요. 군산은 이때부터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져요. 1934년 통계를 보면 무려 200만 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나갔어요. 째보선창은 이때부터 성시였죠. 그 곳에 힘센 째보가 있었던 겁니다." 이복웅 원장의 말이다. 군산의 정체성에 대해 묻자, 이 원장은 "군산은 원래 옥구(전북) 땅으로, 옥구의 유림문화와 저항정신이 기저에 흐르고 있었는데, 일제 수탈 기지가 되면서 근간이 뒤틀려 버렸다"면서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그린 채만식의 '탁류' 같은 작품이 근대 군산문화의 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탁류' 속으로 쌀 수탈 기지로 '식민 경기'가 살아나자, 군산은 거대한 인간시장이 된다. 군산에 가면 '밥은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거간꾼 쓰리꾼 사기꾼 도적놈 난봉꾼 뚜쟁이 작부 등 별의별 잡놈 잡것들이 째보선창 일대에 모여든 것. '탁류' 도입부에 등장하는 째보선창의 '인간기념물'이 바로 이들이다. '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웅긋쭝긋 떠받고 물이 안 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어 밀렸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 속같이 분주하다….'('탁류' 중) 째보선창은 비운의 공간이다. 소설 속의 정주사가 서천 땅을 처분하고 똑딱선을 타고 건너와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자살을 기도한 곳이 째보선창이다. 선창에서 바라보면 채만식이 금강을 왜 눈물의 강이요 슬픔의 탁류라고 했는지 감이 잡힌다. 금강은 여전히 비장미가 있다. 군산에서 작가 채만식(1902~1950)이 갖는 위상은 절대적이다. 군산 내흥동에 세워진 '문학관'과는 별도로 월명공원에 문학비가 들어서 있고, '탁류'의 무대인 째보선창과 구 조선은행 등에는 '소설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채만식도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다만 해방 직후 유일하게 친일을 고백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일제 수탈의 자취인 구 조선은행은 록카페, 노래연습장 등으로 전전하다 최근 폐업, 유령의 집처럼 돼 있다. #천 씨와 갑술이는 어디에 째보선창 일대에는 아직 '뜬다리'가 몇 개 있다. 뜬다리는 조수 간만의 차가 6~9m에 달하는 서해안의 독특한 항만시설이다. 째보선창이 있는 군산 내항은 뜬다리 없이는 사실 배의 출항도 접안도 어렵다. 옛 여객터미널(현 해양오염방제조합 군산지부)의 뜬다리는 어선들의 선착장으로 변해 있었다. 차량들이 뜬다리 위를 지나갈 때 갯벌이 미세하게 떨렸다. 뜬다리가 있다는 것은, 선창 기능이 유지된다는 말이니 째보선창은 아직 폐항을 거론할 단계는 아닌 듯하다. 일제시대 미곡 반출에 쓰이던 뜬다리는 더 '뜰 일'이 없었는지 얼마전 철거되었다고 한다. 군산이 고향인 시인 고은 씨는 대하시집 '만인보' 7부에 째보선창의 주모와 갑술이, 천 씨를 올려놓고 있다. '거기다 (배)대고/아 이놈들아/어서 술 먹으러 올라와/술국 끊였다/이 씨부럴 놈들아 어서 와…'('째보선창 주모' 일부). 혼자 낄낄거리던 갑술이와 뱅어잡이 나갔던 천 씨는 어디로 갔을까. 째보선창은 한잔 취해 다가가야 사람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있다. 생선 비린내와 걸쭉한 욕지거리는 사라졌지만, 선창의 누군가를 붙잡고 한잔 마중물을 부으면 아리고 구차하고 저릿한 사연들이 줄낚시처럼 낚인다.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사, 서럽다 못해 울분이 넘쳐 막걸리잔에도 눈물이 번지는 곳. 그 눈물이 마침내 너털웃음으로 변해 째보처럼 함께 웃게 되는 곳이 째보선창이다. 해가 다 떨어진 다음에야 째보선창을 나왔다. 선창 한켠에서 한 취객이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었고, 밀물에 아랫도리를 감춘 금강의 빨간 등대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7> 강경 황산나루 [기획시리즈] 2007.06.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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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대교를 지났다. '갱갱이'다. 갱갱이는 충남 논산 근방에서 강경(江景)을 이르는 말. 강경을 충청도 사투리로 길게 발음한 거란다. 해가 금강을 건너 서해로 스르르 넘어간다. 노을이 곱다. 읍내에 들어서자 젓갈 냄새가 온몸에 감겨온다. 향긋하다. 비린내를 풍길 것이란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갱갱이'는 정겨운 우리말임에도 요즘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소멸 직전의 토속어 한마디가 강경포(황산나루)의 성쇠를 대변하는 듯하다. 포구가 쇠락하면서 말이 헐거워졌고, 동시에 삶이 팍팍해졌다. 강경포는 그렇게 시간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황산 메기 옛 백제 땅 어디가 다를까마는, 강경은 특히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다. 씩씩한 금강을 넘어 너른 들판으로 해가 떨어질 때 강경은 노을에 감염된다. 그 누구도 노을을 어쩌지 못한다. 노을을 보며 슬프하거나 행복해하거나는 자유다. 노을은 자유의 화신이니까. 강경의 황산(黃山)나루는 노을이 빚어낸 이름이다. 놀뫼! 이 멋진 이름을 놓고 시인들이 머리깨나 싸맸다. '…하염없는/갯벌/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는 白江 下流/노을 밴 黃山메기/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박용래의 시 '황산메기') 강경에서 부여군 세도면 쪽으로 지는 노을을 보게 되면, '노을 밴 황산메기'란 표현이 얼마나 기막힌 비유인지 안다. 노을에 물든 메기가 산업사회의 강에서 무심코 놀다가 애꾸눈이 되었나 보다. 슬픈 시다. 강경에는 노을에 감염된 지명이 여럿 있다. 황산천과 황산대교, 채운산(彩雲山)이 그렇다. 강경읍 채산리에 있는 채운산은 해발 56m의 야산이지만, 산 너머에 걸리는 노을이 천하의 명작이다. 백제시대 때 왕족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후백제 때에는 그곳 지네와 용이 승천해 노을이 더 빨개졌다는 전설이 있다. 강경 시인 박용래(1925∼1980)는 고향 노을을 끔찍이 사랑했다. 까치말 채운들 부투골 낭청이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그가 지은 시의 '집'에는 맛깔진 우리말이 곰삭아 은은한 향을 풍긴다.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친다/잊었던 무덤 생각난다…'(박용래 '담장' 중) 시인은 노을이 그리웠던지 일찍 죽었다. #'객주'의 그 장터 '…봄과 여름은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느라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토선(土船)과 딴장이, 당도리선들이 황산(黃山)과 세도(世道)로 마주 나누어진 포구에 담처럼 둘러서서 꽹과리를 쳐댔고 화장(火匠)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다시 암회색 바다였다. 한 달에 여섯 번이나 열리는 장에는 전라도의 곡식과 경강(京江)으로 가는 조곡과 화물이 포구에 쌓였다….' 소설가 김주영이 '객주'에 그려놓은 강경 옛 장터의 모습이다. 시끌벅적한 장터 풍경이 선연하다. 강경은 1920년대에 '1원산 2강경'이라 해서 전국 2대 포구였고, 해방 전까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강경천을 낀 옛 장터거리에는 극장, 술집, 요정, 정미소, 젓갈집 등이 즐비했다. "말도 마유. 저기 옥녀봉 아래가 '서포 뱃턱'이라 부른 강경포인디, 한창 때는 하루에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요. 확 트인 자리가 무진장 넓잖소. 금강 수운이 대단했던기라. 내륙의 산물과 군산 쪽의 해산물이 죄다 여기에 모였응게 얼마나 붐볐것수." 강경 토박이라는 봉만영(85) 씨의 말이다. 봉 씨는 "그 대단하던 것이 다 흘러가 부렀어"라며 "이제 볼 것은 젓갈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한층 붉어졌다. 옛 기억을 더듬는 노인의 흐린 눈 속으로 노을이 배어든다. 봉 씨는 "여기 왔으면 미내다리를 보고 가. 그쪽 노을도 참 좋아"라고 일러주곤 자리를 떴다. #나루터가 젓갈 명소로 황산나루터에는 수상레저타운이 들어서 있다. 모터보터, 수상스키, 바나나보트, 웨이크보트 등 탈것들이 선착장에서 해질녘 손님을 기다린다. 수상스키 한대가 강물을 가르며 부여 쪽으로 내달린다. 논산천과 강경천을 받아 흐르는 이 곳의 금강은 '대하'의 풍치가 있다. 강물은 거무죽죽한 탁류다. 황산대교는 나루터 바로 아래에 들어서 있다. 1987년이 준공된 이 다리는 길이 1050m, 폭 12m로 건설 당시 아시아 최장 연속교량이었다. 강경 쪽에서 교각을 놓아 상판을 한번에 16.7m씩 연결하고, 교각마다 미끄럼판을 댄 후 400t급 수평쟈키로 밀어내는 식으로 64번을 반복해 이음매가 없는 교량을 만들었다. 강경쪽 들머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황산대교비'가 당당하게 서 있다. 나루터 옆의 '황산옥' 식당 지배인 모종춘(46) 씨는 "다리 준공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여파가 몇달을 갔다고 한다"며 "요즘도 종종 그 얘길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귀띔한다. '황산옥'은 80여년 간 3대가 대를 이어 운영해온 황복, 메기찌개 집이다. 나루터는 기울었으나 황산옥은 굳세게도 버텼다. 그 사이, 강경은 젓갈 고장으로 변신했다. 읍내에는 온통 젓갈 가게였다. 강경전통맛깔젓사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젓갈 가게만 150여 곳이고, 이 중 30여 곳은 50평 이상의 토굴을 갖춘 '백화점급' 업체다. 맛깔젓조합 박종률(49) 조합장은 "강경 젓갈은 전국 유통의 60%를 점하고 작년 매출이 300억 원에 달했다"며 "가을철 젓갈 축제를 보면 진가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소멸의 꿈 강경에는 일제시대의 얼룩들이 있다. 화려한 젓갈 가게의 간판 뒤에 일제가 세운 건물과 주택, 다릿발이 남아 있다. 쓰러질듯 쓰러지지 않는 잔재들이 강경의 추억을 괴롭힌다. 100여 년의 시간이 이렇게 한 지역 안에 고스란히 공존하는 곳도 찾기 어렵다. '은진(恩津·논산의 옛 지명)은 강경으로 꾸려간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봄철이면 올라오던 황어나 웅어(우여)도 올라오지 않는다. 금강 물길을 따라 서해를 오갔던 고깃배들은 강에서 나와 제방 위에 올라 앉았다. 황산나루 제방에는 놀뫼호, 옥녀호, 금강호, 강경호, 황산호가 줄줄이 늘어서고 그 뒤를 배 형태의 강경젓갈전시관이 지휘하듯 버티고 앉았다. 제방 위의 배들은 명찰을 고쳐 달고 관광객을 부른다. 강이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배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봉 씨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나 '미내다리'를 찾는다. 상강경교 입구에서 강경천 둑을 따라 마치 한 마리 황복처럼 거슬러 올라간다. 1㎞쯤 가자 풀밭에 무지개형 다리가 보인다. 미내(渼奈)다리는 길이 30m, 폭 2.8m의 작은 홍예교다. 조선 영조 7년(1731)에 강경 토호들이 추렴해 만들었다는데, 어느 석공의 작품인지 예술적 기교가 보통이 아니다. 원래는 강경천 지류의 다리였는데 2003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복원했다. 미내다리 옆 강경천에는 시멘트 통짜 교각 4개가 박혀 있다. 일제시대 건설된 호남선 철교였다는데 6·25때 파괴된 뒤 방치된 것이라고 한다. 두 개의 다리가 묘하게 대비된다. 이를테면 미내다리는 관상용(觀賞用)이고 일제의 교각은 폐기물이다. 채운면에 산다는 차복례(72) 할머니는 그래도 미내다리를 섬긴다. "죽으면 염라대왕이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 하고 묻는다잖여. 이 다리를 자기 나이대로 왔다 갔다 하면 오래 산다고 그려…." 황산나루 쪽 하늘이 붉게 타들어간다. 장려한 하루가 지워진다. 태어난 것은 다 소멸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역사든 누구나 아름다운 소멸을 꿈꾼다. 저 다리들도 마찬가지겠지…. 강경, 아니 갱갱이에선 생각조차 젓갈의 짠맛 속에 곰삭아가는 것 같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6> 부여 궁남지 연가 [기획시리즈] 2007.06.2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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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시인. 저는 지금 부여 궁남지(宮南池)에 있습니다. 황톳빛 노을 아래 드넓게 펼쳐진 궁남지가 무척 아름답군요. 백마강(금강) 돌아서 부여를 빠져나가던 중 무심코 들른 곳인데, 제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네요. 뺏겨 얻을 바가 있다면 뺏겨야겠지만, 혼자 감당하기 벅찬 것은 어떻게 감당하지요? 그래서 K시인을 찾은 거라오. 물과 길, 초목, 사람이 온통 초록 세상이구료. 고향의 순한 논배미를 보는 듯하고, 잡힐듯 잡히지 않는 먼 역사의 서정이 떠오릅니다. 내친 걸음이니 연가라도 하나 써야겠지요. 1. 서동요, 천년의 사랑 알고 있겠지요. 궁남지가 어떤 곳인지. 원래 마래방죽이라 불린 늪지였는데 지금은 천하의 명물 원지(園池·정원과 못)가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서동공원이지요. 갔다 온 사람들은 좋다고들 야단 입니다. 초봄엔 풀빛과 물빛이 좋고, 초여름엔 수초와 연꽃이 사람 미치게 만든다지요. 가을엔 은하수 별빛이 좋고, 겨울엔 계수나무 달빛이 그윽하고요. 하니 무엇입니까. 연인들의 환상적 데이트 장소지요. 이 곳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 무대란 것도 알고 있겠지요. '서동요' 가락이 흥얼거려지는군요.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맛동 도련님을(薯童房乙)/밤에 몰래 안고 간다(夜矣卯乙抱遺去如)'. '삼국유사'에는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해 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다고 하지요. 중학교 때 백제 무왕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로 배웠지요. 어릴 적 이름이 서동(薯童, 또는 맛동·마를 판 상인이란 뜻)이라 불린 백제의 총각은 신라의 국정을 탐지하라는 밀명을 받고 마(麻)를 파는 장사로 위장해 서라벌로 잠입합니다. 그러던 중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운명적으로 만나지요. 서동은 요즘으로 치면 대단한 '작업맨'이었더군요. 일개 장사치 신분으로 일국의 공주를 꼬셨으니까요. '서동요'를 지어 퍼뜨리자 퍼나르는 아이들이 생겼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댓글'까지 붙어 사건이 확대되자 왕은 결국 선화공주를 내쫓지요. 서동은 기다렸다는듯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꿈을 이루지요. 역사의 진실이야 어떻든 '서동요'는 하나의 노래요 문학작품입니다. 신분과 계급,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 스탕달이나 에밀졸라의 소설에서 보이는 혁명적 상상력이 삼국시대때 이미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SBS가 '서동요'를 드라마로 만들었던 것도 여기에 감동했기 때문이겠지요. 2. 짚신과 발자국 궁남지는 현존 최고(最古)의 인공 원지라고 합니다. 경주 안압지보다 앞서고, 일본 조경의 원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5년(634) 조에는 '3월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 밖의 물을 끌어들였다. 연못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전설 속의 이상향)을 본떴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궁남지는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지요. '삼국사기'에는 또 '왕이 처첩과 함께 대지(궁남지로 추정)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있지요. 궁남지가 백제 왕실의 유흥장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고 있더군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궁남지 일원을 조사해 수전(水田)유적을 비롯해 목조 저수조, 토기, 연화문 수막새, 목간, 목제품, 실과(實果), 말뼈 등을 찾아냈지요. 이 중 눈길을 끈 것이 짚신 두 점과 사람 발자국이었습니다. 잔존 사람 발자국은 최고 길이 23㎝, 너비 9㎝로 뚜벅뚜벅 걸어간 자취가 뚜렷합니다. 짚신 두점은 동일인의 것으로 보였는데, 재료가 공교롭게도 부들 아니면 삼(麻)이라는군요. 비록 씨만 남았지만 호도 복숭아 살구 등 맛난 과일들도 수북했대요. 짚신과 발자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혹시 서동이 아닐까요. 말뼈는 선화공주가 탄 애마였을까요. 과일 씨는 이들이 먹고 버린 흔적이 아닐까요. 궁남지는 이런 용감한 상상까지 허용합니다. 발굴 전 물이 쏙 빠진 궁남지 사진을 보니, 가지런한 수로 저편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손 잡고 걸어나올 것 같더군요. 감상이 지나친가요. 3. 무지개 다리 잿빛으로 변하는 노을을 벗삼아 궁남지 연못길을 걸어봅니다. 연못가 수양버들이 제 그림자를 물구나무 세웠군요. 산들바람 결에 쇼팽의 '녹턴'이 흐릅니다. 연인 한쌍이 연못 한켠에 정박한 나룻배 옆에 다정히도 앉아 있네요. 연못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동의 노래처럼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아, 저들이 서동과 선화로구나! 놓칠새라 사진을 찍었지요. 모르긴해도, 저 연인은 그냥 말이 통할 것 같았습니다. 저들을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 저들이 바로 세상을 물들이는 '젊은 노을'이 아닐까 싶더군요. K시인, 사랑이 무엇이던가요. 누군가 그랬죠. '사랑은 그의 거울에 내 영혼을 비추는 것'이라고. K시인은 누군가에게 그의 영혼을 비추인 거울인 적 있나요. 누군가의 가슴 북을 둥둥 울려본 적이 있나요. 서동과 선화공주가 걸어갔던 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틋한 그리움으로 새겨지는 걸까요. 궁남지에는 나룻배와 다리가 있습니다. 나룻배야 전시용일 뿐이지만, 연못 속 포룡정(泡龍亭)으로 가는 다리는 1971년부터 지금까지 '사랑의 가교'가 되었다는군요. 석재 교각 18개를 촘촘히 받혀 길이 70m, 폭 1.8m로 길다랗게 만든 나무 다리인데, 마치 연못 위에 살짝 무지개를 띄운듯 곡선미가 일품 입니다. 백제의 선이 저럴까요. 경복궁에 있는 향원정(香遠亭)의 다리를 본따 만들었다는데 아쉽게도 아직 이름을 갖지 못했군요. K시인이 멋진 이름 하나 붙여 보세요. 4. 연꽃 스쳐가는 바람 연못을 나와 서동공원 방죽에 서 봅니다. 전체 규모가 10만여 평. 부여에 이런 아름다운 평원이 있었군요. 논배미처럼 구획된 방죽에 수십 종의 물가·물위·물속 물풀들이 녹색 세상을 펼치고 있습니다. 마름 검정말 나사말 창포 부처꽃 비비추… 갈대 부들 세모고랭이 줄… 자라풀 생이가래 부레옥잠 개구리밥…. 얼마나 싱그러운지 보는 제 눈에 녹색물이 들 지경이었지요. 서동공원의 주제는 뭐니뭐니 해도 연꽃 입니다. 시방 1만여 평의 너른 연밭에 홍련(紅蓮) 백련(白蓮) 수련(睡蓮) 노랑어리연 가시연 등 갖가지 연꽃이 무리지어 '화려한 반란'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필듯 말듯 봉긋 부풀린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과연 어떤 군대가 저 향기를 진압할 수 있을까요. 이곳에서 7월 20일부터 8월 5일까지 '제 5회 부여 서동 연꽃축제'가 열립니다. 사랑을 테마로 한 독특한 축제죠. 연꽃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라지 않습니까. 전국의 선남선녀, 사진작가들이 벌써 줄을 선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K시인, 유월이 가기 전에 궁남지 한번 갔다 오세요. 만개한 연꽃보다는 피려고 몸부림치는 연꽃이 더 시적이겠기에. 혼자 외로울 양이면 친구들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도 도모하시구료. 연꽃 피는 계절에 다산 정약용은 새벽 연지에 나가 꽃피는 소리를 듣는 풍류계를 만들었다지 않습니까. 연꽃 만나 기쁨 잔잔히 지니고 떠나는 바람이 감미롭군요. 여기 시 한수로 마중물을 대신 합니다.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 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 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5> 부여 구드래나루 [기획시리즈] 2007.06.1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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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고은의 '그 꽃' 전문) 가까이 있어, 너무 익숙해 지나치는 것들이 있다. 꽃이나 풀이 그렇고, 역사의 명장면들이 그렇다. 특히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영역임에도, 한번 주입된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사관(史觀)이 고치기 어려운 병이 될수 있음이다. 행선지를 금강으로 잡고 먼저 충남 부여로 간다. 부여(扶餘)는 '부드러운 격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도시다. 북방 고대 한민족의 원류인 부여(夫餘) 유민이 세운 나라가 백제. 꿈꾸는 마을(몽촌)에서 공주로, 다시 부여로, 끝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 낙화(落花)하고 만 나라. '부여!' 하고 부르면, 부여잡고 '낙화'의 사연을 한아름 풀어놓을 것 같다. 부여의 이미지는 아직도 딱하고 섧고 애닯은 그 '무엇'에 휩싸여 있다. # 사공 조강하(趙江夏·70) 씨는 '백제고도부여유선조합'의 선장이다. 쉽게 말하면 백마강 구드래나루의 뱃사공이다. 1975년 말부터 배를 봤다니 30년이 넘었다. 부여군 담당자의 소개로 그를 만났다. -함자(이름)가 재미있네요. "나라 조에 강 강, 여름 하니까 상상이 저절로 되겠지. 주변에서 그래, 천생 백제 뱃사공이라고." -30여 년 전 처음 배를 볼 때 어떤 배였나요. "손으로 돌려서 가는 발통기였어. 그 전엔 노 젓는 나룻배가 있었다고 해. 3~4년 발통기로 운행하다가 경운기 엔진이 나왔고, 90년대 들어 디젤 얌마엔진으로 바뀌었어. 지금 배가 이거야."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요. "수심이지. 수심이 확보 안되면 배가 힘들어. 저 위에 대청댐(1980년) 생기고는 아주 어려웠는데, 금강 하구둑(1990년)이 들어선 뒤로는 강물이 기본 수위를 유지해. 안 좋아진 것도 있어." -그게 뭔데요. "하구둑 없을 땐 썰물로 물이 빠져나가면 배가 그냥 수리 도크에 올라갔어. 수리가 쉬웠지. 그런데 지금은 시프트로 들어올려 도르래로 굴려야 해. 양면이 있는 거지." -이곳은 금강인데, 왜 백마강이라 부르지요. "허허. 다 아는 얘긴데…. 백제가 망할 때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 지키는 호국룡이 된 무왕(의자왕의 아버지)을 낚았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이름 아니야. 전설이 고약해. 이건 소정방의 무용담이잖아. 원래는 이 곳을 사비수 혹은 사자수 등으로 불렀다고 해." -삼천궁녀 전설은 믿나요. "점점 태산이군. 나라가 망할 판이니 백제 왕족과 일가친척이 쫓기다가 부소산 낭떠러지에 닿았지. 더 갈 데가 있나, 뛰어 내렸겠지. 왜 삼천이냐고? 삼백, 삼십이 될 수도 있어. 많다고 삼천이라 했겠지. 백성들도 섞였을거야. 이런 건 실은 일개 사공이 함부로 말할 게 못돼. 전문가들이 조사해 밝혀야지." 백마강에는 세 곳에 나루터가 열려 있다. 구드래·고란사·규암나루다. 조 씨가 소속된 '부여유선조합'에는 선장을 포함, 30여명의 종사원과 배 14척이 있다. 부여군에 따르면 유람선 이용자는 연간 15만여 명(2006년 기준). 이 중 일본인이 2만여 명인데, 한류 바람이 춘천 쪽으로 불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 구드래 구드래나루는 백제시대 도성인 사비성의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왜(일본)를 비롯해 외국의 사신이나 장사치들의 배가 군산포(일명 백강구·白江口)를 거쳐 입항했다. 고대 금강의 내륙 수운은 낙동강, 한강 못지않았다. '구드래'는 어원이 여러 가지다. 먼저 구다라설.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나오는 '구다라'를 말하는데, 그 뜻이 대국, 섬기는 나라, 혹은 백제를 뜻한다는 것. 일본 나라의 호류지에 있는 백제 관음상(일명 구다라 관음상)이 구체적 실례. 구드래를 '굿들개' 즉, 굿을 하며 천지신명에 제사를 모시던 장소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나루터 입구의 유래비에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구들설'을 제시한다. 옛날 백제왕이 강 건너에 있었다는 왕흥사에 가기 전 잠시 머물며 예불을 드리던 바위가 있었는데, 왕이 도착하면 바위가 구들처럼 스스로 따뜻해져 '구들〈구드래'가 되었다는 것. 고지도에 이곳이 구암진(龜巖津·구돌나루)으로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어느 것이든, 백제어의 다채로운 변화 모습을 보여준다. 구드래는 이제 '굿뜰래'로 진화했다. 부여군은 2004년부터 '굿뜰래(Good+Tree)'라는 농특산물 공동 브랜드를 개발, 연간 900여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농특산물의 판로를 개척하고, 농가수입과 지역 이미지를 함께 끌어올리니 일석삼조. 백가제해(百家濟海)의 꿈이 피어나고 있다. # 낙화 배를 타고 고란사로 들어간다. 망국의 슬픔이 배어든 나루에 유람선이 뜬 지 50여 년. 부르고 불러 목이 쉬었으련만 사람들은 또다시 '백마강'을 부르며 삼천궁녀를 찾는다. 낙화암으로 오르다 고란사(皐蘭寺)를 본다. 낙화암 절벽 아래 백마강과 맞닿은 곳에 있는 고란사는 단아하고 애처롭다. 절 이름은 이곳에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절 뒤쪽 바위에 약수가 있다. 한 잔 마실 때마다 3년이 젊어진다는 것을 모른 채, 벌컥벌컥 마셨다가 갓난아기가 되었다는 할아버지 전설이 웃긴다. 드디어 낙화암. 강변 50여m의 아찔한 절벽이 낙화암을 받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떨어져 죽었다'해서 '타사암(墮死巖)'이라 했다는 데, 조선 초에 '낙화암(落花岩)'으로 바뀌었다. 왕조가 바뀌면서 직유에서 은유로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낙화, 낙화라…. 문득 이형기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극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곳에서 꽃잎의 운명을 떠올린 것은, 비틀어보고 싶은 그 '무엇'이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삼천궁녀가 왜 낙화로 은유되는가. 궁녀가 하롱하롱 떨어지는 꽃잎인가. 삼국이 벌인 처절한 피의 각축전과 외세(당나라) 개입의 소용돌이 속에 삼천궁녀가 던져졌다면, 슬픔을 넘어 분노할 일이다. 더욱이 반쪽 삼국통일을 얻고 광활한 북방을 잃은 '거대한 상실'에 주목한다면, 백제 최후를 상징하는 삼천궁녀는 어리석은 민족사의 반면교사일 터. 과감하게 말하자. 이제 비극을 미화하는 감상과 결별할 때라고. '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시 '낙화' 마지막 부분) # 황포돛배 백마강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들머리에 백마강교가, 날머리에 백제교가 우뚝하다. 규암나루가 있는 백제교는 지난 1997년말 신·구 임무교대를 했다. 새 백제교(길이 830m, 폭 20.5m)는 볼품이 없지만, 인도교로 전환된 옛 백제교는 황포돛배 모양의 아치 조형물이 볼거리다. 다리가 있음에도 나루가 온존하는 것은 백제의 힘일 것 같다. 모르긴 해도, 백제가 다시 망하지 않는 한 이곳 나루와 유람선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여군은 역사관광 부흥을 위해 유람선과는 별개로 2척의 황포돛배(승선인원 45명)를 이달 중으로 띄운다. 황포돛배는 백마강 뱃길의 부활 신호로 다가온다. 낙화암에서 다시 고란사 나루로 내려가다, 고란사 뒤쪽 바위 벽에서 고란초를 봤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내려갈 때 보였다! 고란초는 유리 보호곽 속에 숨어 있었지만 상록의 푸르름을 잃지 않았다. 딱딱한 광택의 고란초 잎자루가 비마(飛馬)가 되어 백마강을 휘달리는 환상 속에서 다시 배를 탔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4> 밀양 배다리 [기획시리즈] 2007.06.0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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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무겁다. 한쪽으로 쓸린다. 이고 지고 어디를 가시나. 지게를 진 사람, 연장을 든 일꾼, 상투 틀고 탕건 쓴 양반, 머리에 수건 두른 여인네. 모두 카메라를 의식한 표정들. 까까머리 아이의 천진한 눈빛, 배고픔을 노려보는 듯. 가운데 앉은 이는 퉁소를 부시나 피리를 부시나. 뱃전의 장정은 돌아앉아 강물을 보고, 사공은 어깨 빠져라 노를 젓는다. 밀양강(남천강) 푸른 물에 영남루와 능수버들이 두둥실. 옆의 빈 배는 누굴 태우려나…. 1910년대의 수묵담채 같은 사진 한 장. 조선시대 끝자락이 잡힐듯 말듯, 불러도 대답없는 나룻배. 아스라한 흑백의 대비가 추억의 누선을 건드린다. 100여년 전 영남루엔 사람이 드물구나. 영남루 좌우의 능파각과 침류각, 오른쪽에 정좌한 천진궁은 옛 자리 그대로다. 휘영청 흘러내린 누각의 처마선에 달빛이 내려앉으면 아름드리 소나무에 두견새 울었으리. 한 수 읊을거나. 누각 처마 끝에서 바라보면 한스럽게 굽이치는 밀양강. 인적없는 삼문동, 처마를 맞댄 번잡한 시가. 식민의 시간을 지나는 문화여 풍류여. 저건, 가솔린 자동차. 운전대 잡은 이는 러시아 신사인가, 일본군인가. 멀찌감치서 걸어오는 사람들, 한복에 중절모, 코트에 털모자 쓴 이들. 강 건너편의 산뜻한 일식 가옥들. 식민의 땅에 세워진 근대의 자취, 조선의 눈물들. 배다리(舟橋 또는 浮橋). 일렬 횡대로 도열한 배가 열대여섯 척. 난간 끝에 붙은 이름 '南川橋'. 밟고 지나가면 출렁거릴듯 낭창거릴듯 슬픈 역사. 흘러간 밀양강의 어제. #배다리와 나루터 밀양은 물의 도시다. 밀양 시내로 들어가려면 길손은 먼저 밀양강을 건너야 한다. 지금의 삼문동은 밀양강 물굽이가 낳은 강 속 섬. 100여년 전 삼문동은 강변 늪지대였다. 1910년 이전까지 나룻배가 밀양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영남루 아래의 큰 포구나무에 배가 묶였고 주변 바위들이 자연 나루 역할을 했다. 일제는 교통 요충지인 밀양을 중시했다. 나룻배가 답답했던지, 1910년대 들어 밀양강에 작전 펴듯 배다리를 놓았다. 배다리는 일제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과시하면서 놀라운 풍경을 연출했다. 밀양강의 나룻배들은 하루아침에 배다리 받침으로 들어갔다. "배다리가 놓인 곳이 밀양읍성의 남문 선착장 자리예요. 영남루에서 아래쪽으로 약 50m쯤 떨어진 지점이죠. 이곳을 지나면 시장통 도로가 나오고 지금의 내일동 사무소까지 연결됩니다. 이 길이 당시엔 간선로였어요. 내일동 사무소 일대에 밀양읍성 관아가 있었죠."(향토사학자 손정태 씨) "이 배다리가 밀양 교량사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1935년 남천교로 바뀌고 1995년 대대적으로 개수되어 밀양교가 되었어요. 나이 든 사람들은 밀양교 하면 잘 모르고 배다리라고 해야 쉽게 알아 들어요." (손기현 밀양문화원장) 배다리 이전 영남루 앞엔 나룻배가 다녔다. 이 사실은 옛 사진이 증명한다. 그런데 나루 이름이 아리송하다. 문헌자료는 물론 구전으로도 전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손기현(73) 밀양문화원장은 "나루가 있었을텐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고, 손정태(60) 씨는 "여기선 응천강이라 부르니 응천나루가 아닐까 추측한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밀양시에 물어봐도 "나룻배가 다녔던 것은 분명한데 이름은 글쎄"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작은 나루라도 이름이 있는데, 조선 3대 명루라는 영남루 앞 나루에 이름이 없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남루의 명성이 하도 높아 그곳 나루터가 가려진 것인가. 큰 나무 그늘 속의 작은 나무 그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남루의 증언 영남루는 다 보았을 것이다. 영남사(嶺南寺, 8세기 중반 폐사) 자리에 영남루(1365년)가 서고, 임진왜란(1592년) 때 불 타고, 다시 짓고, 또 불 타고, 다시 고쳐 지어(1844년) 오늘에 이른 숨가쁜 곡절들을. 누(樓)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인 까닭은 사방 팔방을 잘 보기 위한 것. 누가 시를 잘 짓고 누가 잘 놀았는지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누에 오르면 남천강과 용두목, 마암산이 펼쳐내는 진경을 마주한다. 고려 초 시인 임춘이 영남사 누각을 읊은 이래 이곳은 800여년 간 시정의 무대였다. 1344년께 문인 성원도는 "남방 산수의 정령이 밀양에 모여 이 누각을 껴안고 있는 것 같다"고 찬탄했다. 밀양 출신의 학자 점필재(김종직)는 영남루를 찾았다가 시흥을 주체 못하고 밀양강에 배를 띄웠다. '난간 밖 맑은 강엔 일백 이랑 구름이요/그림 배 비껴 건너니 강물에 파문이 이네/해 저물자 반쯤 취해 삿대로 배 잡아 바라보니/양안의 푸른 산이 정녕 그림이로구나.'('嶺南樓下泛舟' 전문) 조선 선조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무려 300여개(밀양문화원 발간 '영남루제영시문' 참고)였고, 뱃놀이하며 쓴 범주시(泛舟詩)가 또한 수십 편에 이른다. 영남루는 가히 '시루(詩樓)'였다. 누가 울고 누가 한을 삭였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경술국치(1910년) 후 일본 헌병들은 영남루 앞 천진궁을 그들의 옥사(獄舍)로 바꾸었다. 천진궁은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한 곳. 단군과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고왕, 가락국 김수로왕, 고려, 조선 태조왕의 넋이 그 치욕을 감내했다. 천진궁은 그 치욕의 길을 지나왔다. 영남루는 밀양의 영욕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었고, 그 자체로 장엄한 '나루'였던 셈이다. #단장천의 진나루 밀양의 나루 이야기를 좇던 중 진나루의 존재를 알았다. 진나루는 밀양시 단장면 구미리에 있는 단장천의 옛 나루. 밀양에서 상류로 20여리 떨어진 곳이다. 밀양문화원 측의 소개로 만난 향토사학자 손흥수(64) 씨는 진나루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었다. "단장면 사촌~금곡을 연결하는 나루였어요. '지너리 삐알'(진나루 언덕)이라고도 했지. 아직도 그렇게 불러요. 구미리 마을회관 앞에 소나무가 많았는데 그곳이 배 묶던 자리라고 해요. 지금은 안법천이라 부르는데 옛날엔 여기가 단장천의 본류였어요. 70여년 전엔 이 물길로 소금배와 젓배가 올라왔대요. 그 배가 밀양 가서 영남루 한 번 쳐다 보고 낙동강으로 내려갔겠지." 손 씨는 이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고 했다.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증거가 있지. 이곳에 1500년 전부터 나루가 있었다지 않소"라며 사촌 유적 이야기를 꺼냈다. 단장면 구미리 앞의 사촌마을은 몇년 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삼국시대 제련로 송풍관 노벽 조각 등 제철 유물을 집중 발굴한 곳이다. 6세기께의 제철 유적이었다. 이 유적의 존재를 학계에 알린 것도 손 씨 였다고 한다. "이곳의 금곡(金谷·쇠골)과 똥뫼(쇠똥산)라는 지명이 야철지 흔적이죠. 얼마 전엔 기와굴(요지)도 찾았는데 발굴이 안된 채 묻어버렸어. 야철지와 제련시설, 기와굴이 그냥 있나요. 당연히 운송 수로가 있었지. 그게 진나루였던 겁니다.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 제기능을 못하게 됐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밀양의 나루사는 놀랍게도 1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남루 앞의 나루가 명함을 못내밀 처지였던 것이다. 손 씨는 "기회가 된다면 단장천 진나루에서 밀양강의 영남루, 삼랑진의 낙동강 합수머리까지 이어지는 옛 뱃길을 답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3> 창녕 임해진의 '물망초' [기획시리즈] 2007.05.3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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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륙이 바다의 기운을 받아 펄펄 뛰던 때가 있었다. 내륙의 나루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리면서' 푸른 꿈을 마중하던 시절, 어부들의 팔뚝엔 힘이 솟았다. 웅어란 힘찬 놈은 하구, 문 없는 문을 박차고 기세도 등등하게 구포, 물금, 삼랑진, 수산을 넘어 창녕 임해진까지 거슬러 치올랐다. 그물에 걸려 인간들의 입속에 씹혀 들어가도 그만이었다. 웅어들은 인간에게 길을 묻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바다의 밀어 임해진(臨海津). 경남 창녕군 부곡면 청암리에 있는 이 나루는 내륙 깊숙이 새겨진 바다 자국이다. 지명 그대로, 바닷물이 낙동강을 거슬러 40여㎞ 떨어진 이곳까지 쳐들어왔음을 증언한다. 내륙 깊숙이 쳐들어온 바다는 적이기는커녕 임이자 물고기였고 살림이었다. 바다와의 먼 교섭 자취는 임해진 바로 아래 학포(창녕군 부곡면)에서도 확인된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 쪽배와 조개무지가 발굴됐다. 바닷물은 장구한 세월을 거슬러 내륙을 넘나들었다. 1987년 하구둑이 막히면서 많은 것이 뒤틀려 버렸다. 바다는 차단되었고 강은 갇힌 꼴이 되었다. 분단된 조국의 강과 바다. 내륙의 강은 바다를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웅어 역시 수천 수만 년 오르내리던 강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고도 삶은 계속 되었다. "대단했지. 잉어 붕어 뱀장어 메기 같은 고기가 막 잡혔어. 낚시는 물론이고 연승 그물로도 잡았는데 무지 올라왔어. 고기 잡아 밥 먹고 집도 지었지." 임해진에서 '물망초 횟집'을 운영하는 김천만(67) 씨는 20여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들려줬다. 그는 펄떡거리는 고기 시늉을 하다가 나룻배의 노 젓는 흉내를 냈다. 강바람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임해진의 마지막 사공이었다. "여기 나룻배는 강 건너 명촌(창원시 북면)을 왔다갔다 했는데, 바람이 불면 얼마나 고생을 했노. 그 때는 바로 건너지 못하고 위쪽으로 한참 올라가 돌아서 다녔어. 바람에 떠내려갈 걸 미리 감안한거지. 그 나룻배가 1990년 초에 사라졌지 아마." 김 씨는 나루선이 끊긴 계기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임해진 아래 학포에서 발생한 대형 뱃사고 때문이었다. 학포에서 부녀자 8명을 태운 나룻배가 전복, 몰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직후 당국에서 보험 가입 등 나룻배 운행 규정을 강화하자 나룻배 경기는 급속히 시들해졌다. 임해진과 학포, 본포의 나룻배들이 이때 줄줄이 사라졌다. 나룻배가 있던 시절, 임해진과 강 건너 명촌은 한동네 같았다. 함께 모여 수산장을 다녔고 경조사를 서로 나눴다. 김 씨의 부인 김외선(64) 씨도 한동안 나룻배를 봤다고 한다. 그는 강이 변했다고 말했다. "요샌 겨울에도 강이 안 얼어요. 그게 20년이 넘었으니 세상이 변했지. 언 강에는 숨구멍이 있는데 보통 사람은 그걸 잘 몰라. 강이 얼었다고 함부로 가다간 빠져 죽어. 죽는 걸 우리 눈으로 봤응게. 사공은 숨구멍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얼음길을 안내하고도 배삯을 받았어." 창녕군 길곡면 사등 태생인 김 씨는 열아홉살에 밀양 무안으로 시집 가서 잠시 창원 명촌에서 지낸 것을 빼고는 줄곧 임해진에서 살았다. 횟집을 연 지도 40년을 헤아린다. #이런 전설 저런 사연 임해진은 남지에서 남강을 끌어안은 낙동강이 힘을 키워 크게 굽이치는 지점이다. 그래서 중·상류에서 떠내려온 온갖 것들이 모인다. 박쪼가리부터 세간 살림, 심지어 시체까지 떠내려와 걸린다.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임해진엔 부자도 많다고 한다. 임해진에서 강길을 끼고 노리, 학포로 이어지는 1022호 지방도는 운치 있는 강변로다. 이름하여 청학로. 지난 1987년 6월 보병 제39사단 공병단이 2㎞ 산판길을 뚫었다. 길 아래가 벼랑의 연속이어서 경관이 탁 트였다. 동행한 김천만 씨가 설을 푼다. "저 아래가 용왕이 산다는 곳인데, 깊이가 어른 키로 열 질이 넘고 명주꾸리 하나가 다 들어갔어. 강이 굽이친다고 구멍바우라 캤어. 큰 물이 들면 굴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지. 그 위의 것이 알바위, 옆의 것이 자라바위, 그 아래 삐죽한 것이 상사바우지." 상사바우엔 이런 전설이 있었다. 옛날 약혼한 남녀가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죽었다. 처녀를 못잊어 한 남자가 뱀으로 변해 처녀의 목을 감자, 그의 부모가 낙동강가 바위에 데려와 원혼을 달래주었다. 이 상사바우에선 요즘도 가끔씩 푸닥거리가 열린다고 한다. 임해진에는 '배 띄운 꼼생원' 이야기도 있다. 김 씨의 딸 김숙이(45) 씨가 그 이야길 해줬다. "임해진 위에 부곡면 굴말이라고 있어요. 옛날부터 부자동네 였어요. 그곳에 자린고비 꼼생원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꼬셨대요. '1년간 나룻배만 띄워 주면 비석을 세워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꼼생원이 배를 사서 진짜로 배를 띄웠대요. 실화예요. 그때 세운 비석이 임해진 제방에 있었는데, 몇 년전에 누가 치웠어요." 듣고 보니 미담이었다. 이웃 등쌀에 밀렸든, 비석에 혹했든, 주민들이 소망한 나룻배가 띄워졌으니 말이다. 강마을엔 간혹 예기치 않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웅어의 길 임해진은 옛날부터 웅어가 많이 잡혔고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다. 웅어철인 요즘 임해진의 횟집들은 저마다 '봄철 특미'란 문구를 내걸고 손님을 유혹한다. 이 웅어는 부산 하단에서 가져오는데 김숙이 씨가 큰 도매상이다. 김 씨는 마산 양산 삼랑진 남지 창녕 심지어 현풍 대구까지 웅어를 공급하고 있다. 하루 공급량이 많을 땐 400~500㎏에 이른다. "웅어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고긴데, 그 성질 때문에 보나 둑에 부딪쳐 많이 죽는다고 해요. 동네 어른들 얘기로는, 임해진에서 웅어가 엄청 잡혔답니다. 하구둑이 들어서고는 얼씬도 안하죠. 그 전통을 도매로 잇고 있으니 임해진에서 웅어축제라도 벌일만하지 않은가요." '웅어축제'란 말이 귓전을 맴돈다. 저 호기로운 고기의 종생을 기억하기 위해 축제를 연다? 그런데 웅어는 수족관에서 바둥거리고 냉동 창고에서 저홀로 은빛 광채를 뿜을 뿐인데…. 김 씨가 기대하는 웅어축제는 꿈이 아닐까. #사라지는 마을 그나저나 임해진은 곧 마을 자체가 사라진다. 낙동강 제방 공사 때문이다. 낙동강 대곡지구 하천개수공사 계획에 따르면, 임해진은 빠르면 내년에 마을이 정리되어 이주하도록 돼 있다. 이 곳의 제방을 높이고 넓혀 새 도로를 낸단다. 공사를 시행하는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사실상 보상 협의만 남았다고 말했다. 임해진에는 13가구가 산다. 비록 작은 강촌이지만 나루의 전통이 흐르고 전설이 숨쉬며 웅어가 뛰놀았던 곳이다. 주민들은 도란도란 횟집과 찻집 등을 운영하고 고기를 잡으며 별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마을 역사는 최소 수백 년을 헤아린다. 마을 당산에 있었다는 수 백년 된 느티나무가 그걸 말해준다. 무슨 일인지, 소도둑들이 임해진에서 잡힌다는 말도 있다. 마을 철거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어떻게 될지 우리도 잘 몰라…." 주민들의 목소리는 국가 시행사업이란 명분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보상 협의가 진행되면 쟁점은 보상가로 바뀔 것이다. 임해진은 자연이 노해 일으키는 홍수의 제물로 찍혀 제몰(堤沒)될 운명을 맞고 있다. 바다의 임을 앗기고 이제 그 터전까지 송두리째 뺏기는 이 강마을을 누가 위로하고 추억할 것인가. '물망초(勿忘草)'란 횟집 간판이 추억의 주제인양 서글프게 다가온다. 임해진이여 나루여 상사바우여, 그곳을 잊지 않으마!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2> 밀양 만어사 '너덜강의 노래' [기획시리즈] 2007.05.2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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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성이 있는 절 #너덜겅 만어사(萬魚寺)엔 왜 가는가. 발길이 저절로 끌려서 간다. 일연(一然) 스님을 만나러 간다. '소리를 보러' 간다. 관음(觀音), 그 넓고 깊은 마음, 생각 위의 생각, 상상, 채워지지 않는 삶의 그리움을 채우러 간다. 만어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성(磁性)이 있는 절이다. 한번 갔다 오면 일상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해진다. 그 활시위에 생각을 얹어 튕기면 상상력이 샘솟곤 한다. 절은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일명 자성산, 670m) 정상 아래 깊숙이 들앉아 있다. 삼랑진읍 삼랑진초등학교 앞에서 우곡리 쪽으로 난 농어촌도로를 10여리 들어가서, 좁고 가파른 비포장 산길을 2㎞ 넘게 낑낑 올라가야 닿는다. 일주문이 없다. 절 마당에는 고려시대 세워진 3층 석탑(보물 제466호) 하나가 얌전하게 서 있고 그 뒤로 대웅전 산신각이 앉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절집과 다르지 않은 풍경. 그런데 석탑 쪽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미륵전 있는 곳으로 가다가 아래를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을 마주한다. 너덜, 너덜겅이라 불리는 암괴지대다. 암괴를 가득 채운 계곡이 자그마치 길이 500여m, 너비 100여m에 이른다. 전면에 굽이치는 산들은 너덜지대를 향해 병풍을 펼친 듯하다. 멀리 낙동강의 물줄기가 가물가물 하다. - 돌을 두드리니 목탁·종·풍경소리 울려 #어산불영 이곳의 너덜지대가 이른바 '어산불영(魚山佛影)'이다. 물고기 산의 부처 그림자…. 그 내력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만어산은 옛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다. 그 이웃에 가락국이 있어 옛날 하늘에서 알이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수로왕이다. 나라 안에 옥지(玉池)라는 못이 있었고 못 속에 독룡(毒龍)이 살았다. 만어산에 다섯 계집 악귀(나찰녀)가 이 독룡과 사귀었다. 그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익지 못했다. 왕이 주문으로도 막을 수 없어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여 물리쳤다.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동해의 용과 물고기들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 종(鐘)과 경(磬)의 소리를 낸다…'. 일연 스님은 '고기(古記)' 등에 전하는 기록의 전거를 찾기 위해 만어사를 답사하고는 돌들이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오늘 내가 몸소 와서 우러러 예불하고 나니, 분명히 믿을 만한 것이 있었다. 골짜기 가득 대부분의 돌들이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하나이다….' 일연 스님은 발로 현장을 찾아다니며 '삼국, 그 나머지의 일'을 썼다. 그래서 글이 밭에서 방금 캐낸 야채처럼 풋풋하다. 거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한민족 삶의 고갱이를 캐냈으니 그 보배로움이란. 조선 세종때는 만어산 경석(磬石)을 채굴해 악기로 삼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어석이 단순한 소리를 넘어 음악 근처에 가 있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직접 두드려 보았더니 과연 소리가 났다. 어떤 것은 '뎅뎅~' 또는 '딩딩~', 어떤 것은 '강강~' 또는 '겅겅~' 한다. 듣기에 따라 목탁소리 종소리 풍경소리로 변주된다. 이곳 암괴는 지질학적으로 2억 년 전인 고생대 말~중생대 초의 퇴적암층인 청석(靑石)이라고 한다. 철분을 함유해 소리가 철철 넘친다는 말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이 쉽지 않다. - 미륵불 직사면엔 동전 쩍쩍 달라붙어 #미륵바위 "만어사는 미륵불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됩니다. 미륵불 옆의 작은 샘(옥지라는 설이 있음)에서 독룡과 다섯 계집 악귀가 나왔다잖아요. 이 때가 가락국 수로왕 시대이니 이 절의 창건 시기도 그때로 볼 수 있는거죠." 만어사 혜안(惠眼·47) 스님의 말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스님은 법명처럼 눈빛이 빛났다. 그는 만어사 창건 시기를 '삼국유사'의 전언대로 가락국 초기로 믿고 있었다. 이 부분은 학계에서도 논란이다. 스님은 기자를 미륵전으로 데리고 갔다. 높이 5m의 삐죽한 자연석 하나가 미륵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스듬히 선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이름하여 미륵불(바위). 만어산을 찾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 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스님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 미륵불을 찍어보라고 했다. "안 보여요? 뭐가 보이죠." 휴대전화 액정에 부처가 일렁거린다. 부처의 빨간 입술과 발가락까지 어렴풋이 드러난다. 다시 보니 가사 장삼을 걸친 미륵불이다. 어, 아기부처가 저쪽에서 웃고 있다. 바위 중간의 흉터 같은 것, 저건 연꽃이다. 바위의 만화경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미륵불은 지난해 9월 KBS '스펀지'에 소개됐다. '밀양시 만어사란 절에는 □가(이) 있다.' 어려운 문제였다. 답은 '동전이 붙는 바위'였다. 동전은 비철금속이라 자성이 없는데, 이 바위의 직사면에선 500원, 100원 짜리 동전이 쩍쩍 달라붙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나요? "저게 업(業)이에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도 부처의 법안에서는 일어나지요." -미륵전 옆 전설의 샘(옥지)은 오염이 심하네요. "원래는 물이 차고 깨끗했는데 작년부터 못쓰게 되었어요. 원인을 몰라요. 땅 속의 일이라…." -절로 올라오는 길이 불편하더군요. "옛날 오솔길에 비하면 지금은 고속도로예요. 불편한 만큼 자연정취가 살아 있지요." - 만어사는 만물의 나루이자 다리 #강 없는 강 만어사엔 강에서 볼 수 있는 나루나 다리가 없다. 이 때문에 고민했다. 이 시리즈에 '만어사'를 표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고민 와중에 일연 스님이 나타나 죽비로 머리를 내리치며 일갈했다. "상상력이 그리도 부족하더냐!" 순간 뇌리에서 번갯불 한줄기가 번쩍 지나갔다. 만어산은 상상력의 보고였다. 이곳에선 돌이 물고기가 되고 '악귀'가 '악기'로 변한다. 물고기떼가 정좌해 불법을 듣고, 그것이 소리가 되고 음악이 된다. 그런가하면 우렁찬 너덜겅은 출렁거리는 '너덜강'으로 둔갑한다. 만어산은 낙동강에서 그리 멀지 않고, 강을 건너면 곧장 김해다. 김해지역에는 기이하게도 물고기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신어산(神魚山)과 은하사의 신어(神魚), 수로왕릉의 쌍어(雙魚)…. 가야인들은 물고기를 신성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만어사는 그런 상징의 정거장이 아닐 지. 무려 '만 마리 물고기(萬魚)'를 가졌으니 말이다. 새벽에 만어사에 가면 산 아래 낙동강에서 운무가 '쳐들어오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때 너덜겅은 운무(雲霧)를 껴입고 운무(雲舞)를 춘다. 온갖 모양의 돌들은 그 생김새대로 고래가 되고 상어가 되며 연어가 되고 갈치가 된다. 거북은 엉금엉금 기고 가오리는 비스듬히 떠다닌다. 폭우가 내리면 만어산 너덜겅은 어떤 풍경이 될까.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의 적멸, 폭우가 쏟아지는 날 물고기들이 내는 장엄한 풍경(風磬)소리를 들으며 만어사의 옛 스님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조용미의 시 '魚飛山' 중). 아니, 스님들은 그 풍경 교향악을 잊지 못해 열반에 들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너덜겅을 거친 빗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그 물을 부산 경남 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한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도 인연인지…. 세상의 비애로운 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관음(觀音)이라면, 만어사야말로 내 마음의 소리로 세상에 화음을 전하는 그 자리이다. 만어사에선 머물고 건너가는 것이 모두 나루요, 다리였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1> 의령 정암나루와 정암교 [기획시리즈] 2007.05.1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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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것도 무쇠 가마솥이. 장작불 땐 무쇠솥등은 얼마나 따뜻하던가. 끓어넘치는 솥의 눈물, 가마솥맛 소고기국은 또 어떻고…. 솥은 인류를 먹여살린 도구다. 석기시대엔 돌솥이, 토기시대엔 토기솥이, 청동기시대엔 동복(銅腹)이, 철기시대엔 철복(鐵腹)이 밥을 해 냈다. 이후 알루미늄제·스테인리스제 솥이 나오고 첨단 전기압력솥이 등장했지만, 진짜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0> 충주 목계나루와 그 장터 [기획시리즈] 2007.05.1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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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들 떠돌이가 되고 싶으랴. 어딘가에 짐 부리고 쉬고 싶지만, 떠돌이 장돌뱅이들은 정처가 없다. 떠돌아야 먹고 사는 삶. 하늘은 구름이 되라 하고 산은 잔돌이 되라 하지만, 방물장수는 오늘도 이 나루 저 나루를 바람처럼 떠돈다. #시가 된 나루 충북 충주시 엄정면 목계나루는 시가 키우고 지킨 나루다. 남한강 중류의 은성한 한 시절을 시가 너끈하게 붙잡아 놓았다.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가 있어 목계나루는 잊히지 않는다. 잊힐만하면 시가 나루의 혼을 불러내 난장을 펼친다. '산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세파 속에서도 시비는 굳건하다. 시의 힘이다. 호젓한 옛 나루에 고깃배 두어 척이 '봄볕도 서럽게' 뒤척인다. 유유하고 자적한 강물 위에 부유물이 떠다닌다. 목계대교 아래에 낚싯배 한 척이 정물처럼 떠 있다. 세월을 낚는 강태공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변화가 무섭다. 토방 툇마루가 횟집으로 바뀌고, 다리가 두 개나 놓이고, 제방이 올라서고, 포크레인이 모래를 퍼간다. 옛날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유장한 강굽이와 시비 뿐이다. 충주호를 겨우 빠져나온 남한강은 목계 부근에서 물살을 키워 한강이 될 채비를 한다. 숨죽였던 강이 쿨렁쿨렁 숨소리를 낸다. 먼 데 산악의 기운이 흘러 내려 물비늘로 튄다. #노시인의 바람 신경림(72) 시인은 뭐하고 계실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노시인은 또랑또랑 가는 목소리로 목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목계는 그의 고향(충주시 노은면 연하리)에서 멀지 않은 강촌이다. -'목계장터'가 발표된 지 30년이 넘었군요. 어떻게 해서 쓰게 되었나요? "시를 쓴 거죠. 삶의 고뇌를 그렸다고 할까. 당시 시대 상황의 은유일 수도 있죠."(이 은유는 유신체제를 말한다. 신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1975년인가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자, 원주에 있던 그를 만나고 돌아오다가 목계에서 이 시를 착상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발표 당시에도 목계장터가 있었나요. "이미 없어진 뒤였어요. 목계장은 50년대 말에 사라졌어요. 정말 대단한 장이었는데." -목계리가 '문화·역사마을가꾸기 사업' 대상지가 되었다죠. "듣고 있어요. 목계 일대는 신라 백제 고구려 문화가 부딪친 자리예요. 그게 중원 문화죠. 목계가 갖는 상징성이 커요. 나루도 그렇지만 별신굿과 줄다리기가 유명하죠. 문화마을이 되면 좋죠. 다만 상업성을 키우면 안돼요." 신 시인이 1976년 발표한 '목계장터'는 현재 고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된 한국인의 애송시다. 민요의 맛으로 민중의 정서를 우려내 시대를 초월해 심금을 울린다. 시인은 이야기 끝에 다시 "그저 시를 쓴거지 그게 뭐" 한다. 이런 소탈하고 욕심없는 자세가 절창을 빚게 했을 것도 같다. #가뭇없는 가흥창 목계나루 제방에 대형 목선 한척이 끌어올려져 있었다. 모조품인가 했더니 "진짜 배지유~"하고 동행한 목계리 이장 김현해(54) 씨가 일러준다. 길이가 15m, 폭이 5m 돛대 높이가 17m였다. 돛대 밑에서 쳐다보니 높이가 주는 상승감이 아득했다. 황포로 만든 돛은 얼마 전 강풍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만한 황포돛배가 수십 척 머물렀다고 하니 나루가 얼마나 컸겠수. 1973년 목계교가 놓일 때까지 차배 짐배가 다녔어요. 목계 사람들이 강 건너 솔밭 쪽으로 가서 농사까지 지었지유. 내가 중학 1학년땐가엔 서커스 들어오고 줄다리기 하고 난리였지유 난리." 때마침 제방에 나와 있던 주민 김광남(66) 씨도 한마디 거든다. "일제땐 금융조합이 있었다 안하요. 돈이 많이 돌았단 말이지. 뿐인가, 헌병대에 우체국, 지소, 담배창, 누에고치장, 게다가 장터는 얼마나 붐볐다고요. 새장터, 새터, 창말, 골마을 같은 지명들이 당시 경기를 말해주고 있지유." 사실이 그렇다.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수운 거점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의 종점이기도 했다. '갯벌장'이라 불리는 부정기 시장이 섰고, 주막과 색시집에선 장구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목계나루 건너에는 세곡 창고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다. 가흥창은 조선조 전기 조창 9곳에서 거둬들이는 총 세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전성기땐 한양~가흥을 오가는 배가 한 해에 800척이 넘었고 일꾼이 500여 명에 달했다. 가흥창은 자취가 없었다.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에서 흔적을 찾던 중 가흥창의 땅 주인을 만났다. 귀가 어두운 80대 초반의 노인이었는데, 땅의 내력을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70년 초에 그 땅을 내가 샀지. 내 땅만 900평이 될까말까 해. 농사 지어먹고 살았지. 어떤 대학이 발굴을 해서 주춧돌과 기와편 등을 찾았어. 얼마 전에 서울 사람한테 그 땅을 팔아 먹었어." 땅값을 묻자 노인은 손가락 4개를 펼쳐보였다. 평당 40만 원쯤 생각했는데, 노인은 "평당 4만 원이야. 일시불로 준다기에 얼른 팔았어"라고 했다. 가흥창 터는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막흐래기 여울 목계에서 '막흐래기'라는 재미있는 지명 하나를 알았다. 가흥리 아래의 남한강변 강촌이 막흐래기인데, 물살 센 여울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목계에서 한양 가는 큰 배들은 세곡이나 교역물품을 실어 흔히 강 복판으로 운행했고, 올라오는 배들은 강가로 붙어 통행했다. 문제는 여울이었다. 막흐래기 여울은 남한강에서도 사납기로 악명이 높았다. 여울에서 배를 끌어주고 임금을 받는 끌패들 중에서도 막흐래기 패가 가장 유명했다. 이런 위험 지대를 지날 땐 웃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생긴 말이 막희락탄(莫喜樂灘). '희희낙락 해선 안되는 여울'이란 의미이다. '막희락'이 변해 '막흐래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말 '웃지못할' 지명 유래담이다. 목계나루의 전통 별신굿은 이같은 배 사고를 막자는 데 뜻이 있다. 신경림 시의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별신(別神)은 자기 지역의 산신이 아닌 다른 신을 모신다는 말. 산에는 산신이 있고 마을에는 수살(守煞)이 있어 고정적인 의례가 벌어지지만, 별신은 특별행사로서 좀더 크고 재미있는 일을 벌인다. 줄다리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제에 의해 반세기 동안 중단되었던 별신굿이 1977년 재현되었을 때 3만여 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후 목계에선 매년 별신을 챙기고 있다. #떠돌이들의 고향 목계나루 들머리의 소공원에는 이것 저것 비석이 많았다. '목계장터' 시비가 2개, 나루터 유래비와 목계 기념비(아! 사랑하는 목계-김영종), 누군가의 송덕비에다 별신굿 유래비까지 6개의 비석이 키재기 하고 있었다. 한 장소에 같은 시비 2개를 세운 것은 '과공(過恭)'으로 보였다. 비석들이 저들끼리 눈치보며 서 있는 꼴이란! 신 시인이 문화마을의 상업성을 염려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게다. 목계나루는 옛 목계교와 2002년 말 준공된 목계대교(길이 1300m, 폭 19m) 사이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나루는 의연하다. 아니 의연해지려 강다짐하는 모습이다. 나루는 머물지만 머물지 않는다. 강물은 '집착하지 말라' 소리치며 떠돌이들을 떠나보낸다. 인생은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것. 누구나 제게 주어진 배를 타고 길 떠나야 하리. 그러고 보면 목계는 이 땅 나루들의 이정표가 될만하다. 떠돌이들이 어디로 갈지, 어떻게 흘러야 할지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욕망이 부딪히고 으깨져 여울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가는 남한강 목계에서 새삼 여울의 무서움을 배운다. 막흐래기! 여울이 이럴진대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을 재촉할 수는 없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9> 장회나루서 두향을 찾다 [기획시리즈] 2007.05.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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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향아, 얼굴이 어둡구나.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아무 일도 아니옵니다." "허면 내가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 것이냐?" "…." 두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먹을 갈던 벼루와 화선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화선지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로 떠난다는 소식은 두향에게 청천벽력이었다. 9개월만의 이별. 견뎌야 한다는 마음과 잊어야 한다는 마음이 맹렬하게 싸웠다. 목숨같은 정을 끊고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 상사별곡(相思別曲) 퇴계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1548년이다. 둘째 부인과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퇴계는 두향을 만났다. 두향은 비록 관기(官妓)였으나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했고 몸가짐이 반듯해 일찍 퇴계의 눈에 들었다. 두향은 매화를 좋아했고, 퇴계는 그런 두향을 좋아했다. 두향은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였다. 당시 퇴계의 나이는 48살, 두향은 18살이었다. 두 사람은 신분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연분을 나누었다. 태산 같던 퇴계도 두향 앞에선 인간이었고 남정네였다. 퇴계의 마음도 시리긴 마찬가지였다. 새 임지로 관기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두향의 눈물이 번져난 화선지에 퇴계가 붓을 세웠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生別常惻測) 퇴계는 떠나고 두향은 남았다. 단양과 풍기는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임을 두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더니…. 떠나는 퇴계의 봇짐 속에는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분이 들어 있었다.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신관 사또에게 자신을 기적(妓籍)에서 삭제해 달라고 청했다. 한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른 남자를 모실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기녀인 까닭에 천대받았던 두향은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절(守節). 단심으로 그리움을 가슴에 재우던 두향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비련에 목 메이다 남한강 강선대에서 몸을 던진다. 나이 스물 여섯. 철쭉꽃이 난분분하던 어느 봄날의 낙화였다. 여기까지는 '기문총화(記聞叢話)'와 단양 향토지 등에 전해지는 퇴계와 두향의 연애담이다. # 두향 생각 두향(杜香)의 존재를 부각시킨 이는 소설가 정비석이다. 그가 쓴 '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두향이 풍기로 가는 죽령고개의 먼 발치에서 퇴계를 바라보고 젖은 눈으로 돌아오는 애틋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 최인호가 장편 '유림'에 두향 이야기를 운치있게 그려 놓았다. 충북 단양 사람들은 두향을 퇴계의 연인으로 이해하고 끔찍이 챙긴다. 이곳 주민들은 1985년 충주호 조성으로 강선대(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인근의 두향묘가 수몰될 처지가 되자, 묘를 그 위쪽으로 이장하고 이듬해부터 두향제를 지내고 있다. 오는 12일 제21회 두향제가 열린다. 두향의 자취를 좇던 중 단성향토문화연구회 서천석(48) 회장을 만났다. 그는 두향이 실존인물임을 강조했다. -두향의 무덤이 있다지요. "있지요. 비석도 세워진걸요. '杜香之墓'라고 적혀 있어요." -벌초도 합니까? "당연히 하죠. 추석 때면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 배를 타고 들어가 벌초를 합니다. 술도 한잔씩 쳐 놓지요." -두향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단성면 두항리라고 전해져요. 두향의 고향이라서 두항리가 됐을 것으로 봐요. 본시엔 기녀(妓女)가 아니었는데,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살때 어머니마저 사별, 퇴기(退妓)인 수양모 아래에서 자라 13세때 기적에 올랐다고 합니다. 연고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기생인 두향을 챙깁니까? "수절 기생으로 춘향이 있지만 그는 소설 속 인물입니다. 반면 두향은 실존 인물인데다 내용이 춘향전보다 감동적이잖아요." 두향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낮퇴계'와 달리 '밤퇴계'가 어린 관기와 연애를 하고, '나으리'가 전근하자 수절 종신했다는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요즘 페미니즘 시각으론 오히려 두향이 바보일 수 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두향이 따라 죽었다는 결말에선 괜히 심술이 난다. 두향이 죽은 시점도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향제는 아름답다. 한갓 관기의 인간해방을 얘기하고, 수절의 넋을 기리며, 지역문화의 한 축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 나루 유전(流轉) 장회나루로 간다. 단양팔경의 중심인 장회나루에는 두향의 자취가 머물러 있다. 두향의 묘가 나루터 건너편에 있고 두향제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장회리는 원래 남한강 나루로 유명했던 곳이다. 장회리 장신일(65) 이장은 "해방될 시점까지 서해안의 소금배가 올라왔고, 뗏목이 엮여져 한강으로 운송되기도 했다"며 "역참에 주막까지 있었으니 번성했다고 봐야지"라고 말한다. 장회리는 수몰되기 전 74가구였는데, 다 흩어지고 지금은 너덧 가구가 남았다. 월악산 국립공원 구역이어서 주민들의 삶이 제약받는 것도 아픔이라고 한다. 나루는 기업처럼 굴러간다. 장회나루에만 유람선이 3척(195인승 1척, 77인승 2척)이며 한해 60여만 명이 이용한다. 수학여행과 효도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은 지도 오래다. 도선처럼 운행되는 충주호 관광선도 5척(464인승 2척, 123인승 3척) 있다. 도선은 충주나루-월악나루-청풍나루-장회나루-신단양나루(수위 따라 제한 운영)를 오간다. 충주~장회나루를 잇는 뱃길 52㎞는 우리나라 내륙에서 가장 길고 멋진 유람 코스다. 산업화에 밀려 사라졌던 충주 일대 옛 남한강 나루들이 또다른 산업화(충주댐)에 힘입어 되살아난 것은 흥미로운 나루 유전(流轉)이다. 잠자던 나루들이 깨어나 돈을 벌어주고 있다. # 옥순대교 경치 하나로 먹고 살 것 같았던 장외나루 주변에도 어김없이 다리가 놓였다. 옥순대교(玉筍大橋)다. 충북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상천리(군도 20호선)를 잇는 길이 450m 2차선 다리인데 2001년 말 개통됐다. 청풍호반의 푸른 기운이 하늘을 만나는 기세가 눈부시다. 옥순봉 등 천하절경을 끼고 앉았으니 눈부실 수밖에. 역동적으로 치솟은 두 개의 빨간색 트러스는 산뜻하다 못해 매혹적이다. 옥순대교를 보노라니 상념이 교차한다. 자연과 문명의 잘못된 만남이라고 비판하기엔 현대 교량공학이 너무 빛나고, 교량공학이 자연에 가한 상처를 생각하니 머리가 어찔하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상념이 두향을 불러낸다. 두향은 왜 꽃다운 나이에 남한강에 뛰어 들었던가. 그건 현명한 선택인가. 단양팔경의 절경 속에 첨벙 뛰어든 옥순대교가 저와 같지 않은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선택한 '투신'이, 청풍호반을 질주하는 다리와 다르지 않음이다. 두향이야 죽어서 단양의 '영원한 나루'로 남았지만, 저 옥순대교는 두고 두고 원망의 기념물이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퇴계가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화두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8> 청령포 애가 [기획시리즈] 2007.04.2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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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西江)은 영월 청령포(淸泠浦)에 이르러 물굽이를 한 바퀴 돌려 심호흡을 한다. 물굽이 진 곳에 반달같은 물돌이땅이 생겨났다. 호젓한 소나무 숲 속의 은거지. 동·북·서쪽 3면이 강이고 남쪽이 절벽이다. 숨어들어 한세상 보내기 딱 좋아 보이는 저 아름다운 곳이 유배지라니, 비사(悲史)의 현장이라니. 이런 부조화가! # 短宗 혹은 斷宗 단종(端宗·1441~1457). 그의 짧은 생몰연도는 슬픔의 심도를 드러낸다. 자꾸만 '短宗·斷宗'으로 읽히려는 것은 어쩐 일인지. 1452년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세조 3년) '천만리 머나먼'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청령포에서 여름 두 달을 나고 늦장마에 쫓겨 영월 관풍헌(觀風軒)으로 이송된 그는 사약을 받는다. "유배 보냈으면 됐지, 죽이긴 왜 죽여?" 세인들은 흔히 이런 의문을 품는다.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이강백의 희곡 '영월행 일기'이다. 작가는 1457년 신숙주의 하인이 영월을 오가며 썼으리라는 가상의 일기를 통해 그 원인을 찾는다. 서울~영월 400리 길을 세 번이나 왕복한 그 하인에 따르면, 유폐당한 노산군(단종을 낮춘 이름)의 얼굴은 출발할 때는 무표정이다가 슬픈 표정, 기쁜 표정으로 변주된다. 왕위를 빼앗은 세조가 참지 못하고 사약을 내린 것은 그 표정 때문이었다고 작가는 상상한다. '살고 싶다면 죽을 듯 슬퍼하든지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거늘…'. 어린 임금이 감당했어야 할 통한의 무게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열여섯 사내의 무서운 외로움과 막막했을 심정은 미루어 짐작이 된다.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슬픔의 뿌리는 서슬 퍼런 역사에 닿아 산천으로 퍼지고 영월 땅 구석구석에 잠긴다. # 550년만의 국장(國葬) 단종 사후 영월 땅은 오랫동안 흉흉했다. 나그네들은 말을 삼갔고 관리들은 영월 부임을 기피했다. 제 소리를 내는 것은 산새와 강물뿐이었다. 서슬퍼런 와중에서 영월사람들은 단종의 주검을 거두어 주었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는 야음을 틈타 냇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둘러메고 을지산 기슭에 묻어 주고 통곡했다. 그것의 보답일까. 유배지였던 청령포(남면 광천리)와 그가 묻힌 장릉(영월읍 소재, 사적 제196호), 사약을 받은 관풍헌 등 단종의 자취가 머문 유적지에는 사철 관광객이 북적인다. 이 세 곳을 찾는 관광객이 한해 60여만 명이라고 한다. 영월군 인구(3월 현재 4만195명)의 열다섯 배다. 영월에서 단종은 문화이면서 영험의 화신이다. 그의 영정이 서낭당에 모셔지는 등 조상신으로 등장한 지도 오래다. 모든 백성이 잘 살기를 바란 단종의 넋이,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처럼 다음 생에도 영월 땅을 떠나지 못한 것일까. 영월을 찾는 이들에게 '단종의 영험'은 역사의 선물일 것 같다. 장릉에 그저 참배만 했다는 데도 일이 잘 풀린다는 입소문이 돈다. 영월 군민들은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단종문화제를 매년 열고 있다. 올해 41회째 단종문화제(27~29일)는 특별히 단종 국장(國葬)을 거행한다. 단종 사후 550년만의 상례이다. '임금 단종이시여 영면하소서!'라는 주제로 28일 오전 8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큰 상여인 대여(大輿)를 앞세우고 전통 상례를 시현한다. 단종의 애사를 지역사랑으로 바꾸고, 그것을 지역 이미지 고양에 적극 활용하는 영월 사람들을 보노라면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 서강의 사공들 -단종이 유배되어 청령포로 들어갈 때 어떤 배를 탔을까요? "나무로 만든 쪽배라고 해요. 서너 명이 탈까 말까하는 작은 배겠죠. 야사에는 삿대를 저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몇년 전 단종과 사육신과의 재회가 있었다고 하던데. "제39회 단종문화제 때 그런 행사가 있었지요. 사육신이 황포돛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가 청령포 단종 어소에서 가슴 저릿한 역사적 재회를 했지요." -영월군민에게 단종은 무엇입니까? "신격화된 존재죠. 태백산 산신령으로 환생했다고 믿기도 해요. 영월에 부임하는 주요 공직자들은 들어오고 나갈 때 장릉에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어요. 참배하고 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 해요." 영월군청 문화재 관리담당 안백운(41) 계장과 나눈 얘기다. 청령포 나룻배를 그가 관리한다. 그 역시 단종 팬이다. 지난 1998~1999년 청령포의 단종 어소를 발굴할 때 와편과 그릇조각 등이 나오자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라고 했다. 청령포 나룻배는 관광객과 단종을 이어주는 '다리'다. 나룻배는 3대로 모두 동력선이다. 청령1호와 2호가 번갈아 움직이고 목선 한 척은 행사 때 쓴다. 배에는 단종의 한과 아픔이 함께 실린다. 뱃사공은 2명인데 모두 젊다. 배본 지 8년 됐다는 전장호(37) 씨는 "처음에는 줄배였는데 지금은 70마력짜리 동력선(50인승)이 다닌다"면서 "이 배가 보기와 달리 휘발유를 펑펑 먹는다"고 말했다. 신참 뱃사공인 문덕기(31) 씨는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난해 수해때 큰 물이 졌어요. 매표소까지 물이 차 올랐지요. 청령포 아름드리 소나무가 잠기고 '어가'도 위태위태 했어요. 그 바람에 반달처럼 이쁜 청령포 백사장이 한쪽으로 쏠렸어요. 보기에도 삐뚜름하잖아요." 문 씨는 이렇게 된 게 매표소 앞의 인위적인 석축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석축이 천연의 물 흐름을 방해해 강 건너편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곳 역시 나루터의 경사가 문제였다. 매표소 앞에서 청령포까지는 직선거리로 80m 정도인데, 배 댈 곳이 마땅치 않아 아래쪽으로 내려가 200m 거리를 운행하고 있다는 것. 관광객들이 한 줄로 승선하지 않고 가끔씩 우르르 몰려 타기 때문에 배가 곧잘 뭍에 얹혀 애를 먹는다고 뱃사공들은 투덜댔다. # 금표비 생각 청령포로 통하는 다리는 없다. 꼭 걸어 가려면 기찻길을 이용해야 한다. 태백선을 타면 연당역을 지나 영월역에 들어서기 전, 왼편에 수려한 청령포 후미를 잠깐 볼 수 있다. 세상이 좋아하는 다리가 없는 것이 청령포로선 자랑이다.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금지구역으로 남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만져지지 않는 슬픔은 강 건너 멀찌감치서 보아야 느낌이 더 짙어질테니까. 이곳은 원래 '접근금지' 구역이었다. 영조 2년(1726)에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그걸 말해준다. 비석 뒷면에는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이라 적혀 있다. 유배지 보호를 위해 백성들의 출입을 금한 비석이지만, 단종에게 허용된 행동반경으로도 읽힌다. 다시 '금표'에 영을 세운다면 뱃사공들이 데모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금표'의 뜻을 살렸어야 했다. 여름철 피서객들이 청령포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런 생각이 한층 간절해진다. 배를 타고 돌아나와 낙조 속에서 청령포를 본다. 청령포 속을 봐서 그런지 더 이상 슬픔이 돋아나지 않는다. 발길을 돌리다 청령포 나루에 선 시비 하나를 발견한다. 단종을 영월에 모셔다 두고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떠나기 전날 밤에 지었다는 시조가 적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 님 여의옵고/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서강도 '내 안 같아' 이제 나룻배 뱃길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어떨 땐 힘겨운 일을 하는 뱃사공들이 고맙기도 하다. 다만, 역사의 슬픔을 헤아리는 길을, 저 뱃길에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7> 아우라지 별곡 [기획시리즈] 2007.04.1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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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갔다가 울고 왔다. 강원도 정선 땅 아우라지는 멀었다. 고속·국도·지방도를 번갈아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구절양장 동강 줄기를 밟고, 조양강 윗물의 마중을 받고서야 두메는 보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부산서 출발한 지 6시간 만이었다. 길은 강을 따라 흘렀고 강은 길을 동무하며 뻗어 있었다. 맑아서 서러운 땅. 첩첩의 산과 골골의 물, 그속에 깃들어 사는 욕심 없는 사람들. 두메는 '날나와 더불어 살자'고 밤새 꼬드겼다. 도시의 마음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소리 없이 비가 내렸다. 대지의 숨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여니 사위를 감싼 안개 구름, 처량한 물소리. 아으, 아우라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 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를 싸고 도는 강과 강변 지명이다. 강인 양 산인 양 살아온 민초들이 붙인 이름이다. 노추산을 휘돌아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리는 송천과 중봉산 임계를 지나 여량으로 흐르는 골지천이 여기서 만난다. '여량(餘糧)'은 식량이 남아돈다는 뜻이지만, 이네들의 삶은 풍족하지 못했다. 물은 툭하면 넘쳤고 산은 한없이 깊었으며 길은 막혔고 살림살이는 팍팍했다. 새벽 가랑비에 강물이 젖나 했더니, 물살에 제법 힘이 붙었다. 돌돌돌. 아우라지는 두견새만큼 구슬픈 소리를 흩뿌리며 흘렀다. 흐르지 않았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두메의 힘겹고 팍팍한 일상은 흘러가야 견딜 수 있는 것이니까. 바로 이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김진갑(70) 씨는 줄배를 보고 있었다. 줄배는 여량리와 갈금리를 잇는 교통수단이다. 지난달 불어난 강물에 섶다리가 떠내려간 후 김 씨의 뱃일이 바빠졌다. "오늘 내 손님들께 아우라지 얘기 하나 할까요. 돌이 많은 송천은 물 흐름이 빠르고 힘차다고 해서 숫물, 골지천은 느리고 순하다 해서 암물이라 불렀다오. 해서 여기가 예로부터 암캉(江) 수캉(江), 음수와 양수의 오묘한 조화가 감돌고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싹트는 곳이라요." 가운데 음절을 유독 올리는 강원도 사투리. 뱃사공의 구수한 입담속에서 전설과 현실이 뒤섞이고 두메의 희로애락이 아우러졌다. 가락을 붙이면 그대로 '아라리'(정선아리랑의 별칭)가 될 것 같았다. 떼돈 번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시울이 포르르 떨렸다. "여기가 궁궐목 기둥목을 공급하는 뗏목의 출발지라요. 임계 고양산 등지에서 벌채된 통나무가 뗏목이 되어 한강까지 가는 데는 한 보름이 걸리지. 한양에 도착한 뗏목들은 아주 비싼 값에 팔려 떼돈을 번다는 말이 생겼지요. 그 돈은 목숨 걸고 번 돈이라요. 거친 물살과 여울을 넘어야 만질 수 있는 돈인거라, 한 서린 돈이라." 김 씨는 지난 2004년 6월 아우라지 줄배를 1200만 원에 인수해 이날까지 보고 있다고 했다. 나루엔 뱃막(사공막)도 있었다. 줄은 관에서 설치해주고 있으나 사선(私船)이어서 관리는 개인이 한다. -하루 얼마나 버나요? "떼돈 벌 일은 없소. 평일엔 담뱃값도 안 나오는디." -배삯을 어떻게 받습니까? "가면 500원, 갔다 오면 1000원이야. 이것도 안 주고 가는 사람이 있소." 아우라지 뱃사공은 유래가 있다. 정선문화원에 따르면, 여량리에 옛날 지유성(池有成)이란 장구 잘 치는 사람이 있었다. 1920년대부터 뱃사공을 시작해 40여년간 나룻배를 봤다는 실존 인물이다.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 명창이었다. 마을 경사가 있을 땐 으레 장구를 메고 나가 가락을 뽑곤 해 '지장구'란 별명이 붙었다. 정선아리랑에 등장하는 뱃사공은 바로 '지장구 아저씨'라고 한다. # 옥산장의 돌 이야기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사시사철 님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뱃사공이 등장하는 아라리 한 자락을 운좋게 아우라지에서 '옥산장'이란 여관 겸 식당을 운영하는 전옥매(71)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전 씨의 긴 장단 아라리에 주책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고 말았다. 여태 들어본 소리 중 가장 슬픈 가락이었다. 곱상하고 다감한 눈빛을 가진 전 씨는 아우라지의 문화전도사 였다. 아우라지 어느 한 곳 그의 손길과 눈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었다. 눈 멀고 중풍 든 시어머니와 다리 저는 남편을 모시고 살면서 돌과 벗하며 간난신고를 이겨낸 그의 삶은 또 하나의 아라리였다. 두 차례 효부상을 받고 수석(壽石)전시장을 열어 아라리를 전파해온 그는 최근 그 모든 아우러지는 것들을 모아 '아우라지 별곡'(지식더미)이란 책까지 펴냈다. 전 씨는 지난 1990년 초 유홍준 영남대 교수(현 문화재청장)와의 만남을 잊지 못했다. 답사단을 이끌고 아우라지를 찾은 유 교수가 옥산장에 두 차례 묵었다고 한다. 그게 인연이 되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1994년 발간)에 옥산장이 소개되었고, 한낱 시골여관에 불과했던 그곳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유 청장님이 다녀갔어요. 세상에 이런 인연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지요. 그로부터 제 삶도 전기를 맞았어요. 고단한 삶을 인내하고 사랑하면 복으로 돌려받게 되는가 봐요." 만남의 매개는 돌이었다. 전 씨는 서럽고 힘겨운 생활을 이기려고 20여년 전부터 탐석을 시작했다.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강이 그를 불러냈다. 그때마다 그는 강으로 나가 강돌에 아로새겨진 무늬를 매만지며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모은 돌이 1000여 점. 옥산장 내 '돌과 이야기' 전시장에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아라리를 부른다. 돌을 통해 진정한 인간 관계와 손님맞이의 정신, 인고의 삶을 배웠다는 전 씨는 그러한 정신을 고스란히 옥산장 운영에 적용하고 있다. 며느리와 딸 등 온 가족이 나서 손님을 가족처럼 대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그래선지 한번 다녀간 이들은 옥산장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 그곳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낯선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돌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 아라리, 두 물의 만남 강은 강이 그립다. 두 줄기 물이 아우러지는 것은 그 그리움 때문일테다. 아니다. 외로워, 서러워, 한스러워 아우러진다. 한 물이 다른 물을 부르고, 한 강이 다른 강을 불러 한 세상 어깨겯고 가자고 아우성친다. 그렇게 섞이고 아우러져 흐르는 가락이 아라리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모춘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울어/아침저녁 돌아가는 구름은 산끝에서 자는데/예와 이제 흐르는 물은 돌부리에서만 운다.' 아우라지에서 강을 건너는 방법은 세 가지다. 지난 2001년 8월 콘크리트 강교 형식의 아우라지교(길이 306m, 폭 12.5m)가 놓인 뒤 차들은 그쪽으로 에돌아간다. 겨울에는 섶다리와 돌다리가 놓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줄배가 강 길을 잇는다. 아우라지에선 다리가 배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강 건너 갈금리 주민(30가구 거주)들과 관광객들은 돌아가는 아우라지교 대신 배를 타거나 섶다리를 밟으려 한다. 이렇듯, 아우라지에는 아직 희망이 숨쉰다. 나룻배는 나룻배대로, 섶다리와 돌다리는 또 그것대로, 게다가 입담 좋은 뱃사공과 돌처럼 강하게 살아온 전옥매 씨 같은 아름다운 이들이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선 지금 유적 발굴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어두운 부분을 밝혀줄 유물이 쏟아져 고고학계가 눈을 번쩍 떴다. 이로 인해 애초 관광단지 조성 계획이 선사유적공원으로 바뀔 판이다. 아우라지가 가질 생각의 힘이 커지게 되어 다행이다. 바라건대, 삶의 배냇고향 같은 원초적 기운과 아라리 같은 마음들이 변치 않기를.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6> 늑도와 창선 · 삼천포대교 [기획시리즈] 2007.04.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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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늑도에 가 보셨는지. 경남 삼천포항과 남해 창선 사이의 작은 섬. 면적이 0.46㎢,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면 20분 만에 닿는 곳. 말 굴레(재갈)를 닮아 굴레섬(勒島)이라 이름된 곳. 겉으로는 별로 볼 것이 없다. 횟집 너댓 개와 올망졸망 야산에 들러붙은 어촌 그리고 바다뿐이니까. 그러나 속에 감춰진 역사는 유구하다. 이 섬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아했고, 2000여년 전엔 중국·낙랑·일본을 잇고 엮는 중계무역이 이뤄졌다. 고고학 자료들은 그 이상을 말해준다. 패총과 무덤유구, 주거지, 토기가마, 한·중·일의 각종 토기류, 반량전·오수전 같은 고대 동전까지 엄청난 유물이 출토됐다. 이로써 한반도 초기 철기시대가 되살아났다. 말하자면 선사·고대사의 타임캡슐 같은 곳이 늑도다. ●늑도 사람들 늑도에는 98세대 230여명의 주민이 애오라지 고기잡이하며 살고 있다. 여름에는 볼락과 농어 문어를, 겨울엔 노래미를 주로 잡는다. 주민들의 관심사는 역사가 아니라 고기잡이다. 늑도 주민들에게 역사는 끌어안을 수도, 던져버릴 수도 없는 애물이다. 말없는 역사를 안고 말 못하고 살아온 삶. 밭을 갈면 토기 쪼가리가 나오고 갯벌을 뒤지면 옹기, 철기 쪼가리가 걸린다고 한다. 사적(제 450호)으로 지정돼 있는 것도 주민들로선 솔직히 달갑지 않다. 늑도어촌계장을 지낸 천정남(66) 씨는 "딴 건 잘 몰라도 늑도의 흙 하나는 기가 막히지"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우리가 어릴 땐 개흙을 뭉쳐 구슬을 만들어 놀곤 했는데, 오래 놔 둬도 깨지지 않았어요. 흙이 좋았다는 말이지. 이 흙으로 토기를 만들고 했을거야." 고조 때부터 늑도에서 배를 부리고 살았다는 천 씨는 50년 전의 실화라며 늑도 '금부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주민이 밭에서 우연히 금부처를 발견했대요. 언제 것인지는 모르지. 집에 가져와보니 순금이야. 그걸 쪼개 식구들 이빨 해 넣는 데 쓰고 나머지는 장농에 보관했다더만. 경찰이 그걸 알고 압수해 갔다는 것까지 우리가 알고 있지." 정작 귀담아 들을 전설은 마부할매 서답돌 이야기였다. 늑도의 북서쪽 해안에는 무게 2~4t씩 되는 돌덩이가 거대한 석성(石城)처럼 돌무더기를 형성해 삼천포 쪽으로 놓여 있다. 이 중 큰 돌 하나가 '마부할매'가 빨래할 때 쓰던 '서답돌'이라고 한다. 마부할매가 늑도-삼천포를 잇는 징검다리를 바다에 놓으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지. 다리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는 말이 아닐까 싶소. 이런 전설이 있어 언젠가는 다리가 놓일 거라고들 했지." 전설의 조화인가 싶게, 창선-삼천포대교는 지금 늑도 중앙부를 지난다. 꿈같은 일이 실현된 지도 벌써 6년째다. ●다리가 바꾼 세상 늑도를 관통하는 창선-삼천포대교는 21세기 교량공학의 걸작이란 찬사를 듣는다. 형식과 내용, 주제에서 모두 그렇다. 세계 어디에 이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다리가 있던가. 교량은 모두 6개로 세트처럼 연결돼 있다. 사천시 대방동에서 출발하면 접속교-삼천포대교(사장교)-초양교(스틸 아치교)-늑도대교(PC박스 상자형교)-단항대교(스틸 아치교)-엉개교(상자형교)를 한달음에 통과한다. 총 연장 3.4km. 빨리 가고 싶지 않다. 형형의 모양과 색색의 자태로 이어진 연륙(連陸)·연도교(連島橋)는 나그네를 기어이 차에게 끌어내리고야 만다. 다리마다 인도가 있어 작정하고 걸을 수도 있다. 단, 바람 맞을 각오는 해야 한다. 남해의 섬과 섬 사이는 해수가 빠르게 흐르므로 바람이 세다. 이달 초 초양도를 찾았을 땐 유채꽃이 만발해 섬과 바다, 다리에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했다. 초양도는 은은한 유채향에 넋을 잃고 있었다. 항공사진을 보면 창선-삼천포대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바다와 섬, 교량이 엮은 감동의 파노라마. 삼천포항에서 물수제비뜨듯 담방담방 뛰어나간 자잘한 섬들이 도로에 굴비 두릅처럼 엮여 있다. 이건 숫제 다리이기 이전에 그림이고, 교통이기 이전에 시다. 삼천포 고향 바다를 '환한 꽃밭 같다'고 노래한 박재삼 시인의 말처럼, 천 년전의 바람이 다시 불고, 그 바람에 바다는 아직도 간지럼을 태운다. 바람은 바다를 유혹하고 바다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삼백리 한려수도가 다리에 '놀아나고' 있다. ●행정선은 끊기고 다리가 놓인 후 늑도엔 행정선이 끊겼다. '차가 다니는데 뭔 배냐'는 것이 끊긴 이유라지만, 차가 없는 주민들은 불편하기만 하다. "다리 놓인 뒤로 배가 안와요. 삼천포 버스가 하루 다섯 번 오는데 늑도대교 입구까지 가야 타요. 동네에서 한참을 가야 해요. 버스 놓치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한 콜이 3000원이라. 노인네들이 와 툴툴거리지 않겠소? 행정선 다닐 때는 동네 코 앞에 배가 왔고 요금도 1000원이면 왕복을 했는데…." 늑도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석정자(여·65)씨의 말이다. 다리 놓이고부터는 자장면 배달도 안되고 통닭을 시키면 배달비가 붙는다고 석 씨는 투덜댔다. 육지서 늑도로 시집 온 첫 외지인이라는 그는 "지난 45년간 늑도는 인정으로 똘똘 뭉치고 살았던 곳"이라면서 "다리가 생겨 좋기는 한데 저 먹고 살기에 바빠 단합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1960년대까지 늑도엔 나룻배가 있었다. 돛을 달고 다니는 목선이었다. 학섬 신도 초양도를 넘겨다보며 삼천포항까지 가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후 70년대에 똑딱선(일명 야키다마)이 등장했고, 뒤이어 시에서 지원하는 디젤엔진을 단 행정선이 다녔다. 섬의 일상은 배와 함께 돌아갔다. 느린 만큼 여유가 있었고, 가난한 만큼 나눔이 있었다. 다리가 놓인 늑도와 초양도엔 행정선이 끊겼으나 인근 신도(15가구 거주)에는 여전히 행정선이 다닌다. 요즘 늑도와 신도 사람들은 서로 서로 부러워한다. 다리가 가져온 섬 지역의 역설적인 명암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섬에서 깜냥껏 살아온 이들. 펄떡이는 어깨로 고기를 건져올려 인정과 유대로 함박웃음을 피우던 사람들은 지금 장중한 대교 아래서 무엇을 타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한다. ●아득함에 대하여 늑도의 변화는 나그네를 잠시 아득하게 만든다. 얻으면 잃고, 잃으면 얻는 것인가. 무엇이 삶의 겉멋이고 속멋인가. 문명은 정녕 인간 편인가. 늑도의 4월 해풍은 역사의 주문(呪文) 같은 난감한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해 보라고 채근한다. 가파른 늑도의 진출입로를 낑낑 돌아 늑도대교에 오른다. 이 곳이 늑도 유적 발굴지라고 하는데 아무런 표식이 없다. 일부 유적은 도로에 밀려 제대로 발굴이 되지 않은 채 파묻혔다고 한다. 물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삼천포로 빠지니 유람선 선착장에 시비 하나가 멀거니 바다를 보고 서 있다. '해와 달, 별까지의/거리 말인가/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사랑하는 사람과/나의 거리도/자로 재지 못할 바엔/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박재삼 '아득하면 되리라' 부분) 고향과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다간 시인이, 난감한 질문에 한가지 답을 해주는 것 같다. 사람과의 거리, 문명을 향한 간격은 아무리 잰걸음으로 걸어도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 사랑은, 그리고 자연과 임은, 아득한 거리에 있음이니. 늑도 주민들은 화려한 개발을 꿈꾸지만 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육지를 그리워하던 섬들은 이제 또다른 갈망에 목말라한다. 아득하여라, 문명이여.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5> 대암나루 부부 뱃사공 [기획시리즈] 2007.04.0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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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뱃사공으로 산다는 것은, 강 한자락을 떠메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강이 되어 물의 지혜를 터득하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업(業)이다. 이 업은 농사보다 질기고 고기잡이보다 억세다. 가는 곳이 물가고 닿는 곳이 모래며 부대끼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뱃사공은 배포가 좋고 지혜로워야 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사공(沙工)인지 모른다. 모래를 떡 주무르듯 하는 기술자(工人). 배가 닿는 곳은 대개 모래밭이므로, 사공은 물길과 함께 모래가 어떻게 쌓이고 허물어지는 지를 헤아려야 한다. 배를 잘못 대면 뭍에 얹힌다. 홍수로 강물이 불어 배가 나루 언덕까지 기어오르면 배가 아니라 골치덩어리가 된다. 밀고 당기고 지렛대를 지르고 울력을 쏟아도 배는 쇳덩이처럼 무겁다. 이 무거운 일이 사공의 업이다. ● 몸에 밴 강심(江心) 나루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최보식(65) 정순득(59) 씨 부부를 만났다. '나룻배가 있다'는 정보에 귀가 번쩍 뜨여 다짜고짜 찾아간 대암(臺岩)나루 였다. 대암나루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1리에 있는 낙동강의 나루다. 그 곳에선 대바우 또는 대방우라고 했다. 강으로 이어진 오솔길과 다듬지 않은 나루터 말고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그 곳에서 최 씨 부부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쪼매(조금) 있어예. 하루 서너바리(3~4번 정도의 왕복) 함미더. 이것도 얼마나 갈란지…." 최 씨는 말수가 적고 사근사근한 사람이었다. 강심(江心)이 몸에 밴 탓일까. 뱃일의 고된 역정이 훤히 보일듯한데도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 대답하기 곤란한 대목에선 볼웃음을 지으며 '허허~'하고 웃었다. 노잡이 시절부터 치면 배와 함께 한 시간이 어언 40여년이다. 전통 수운을 외면하는 산업사회의 풍파 속에서도 그는 황소처럼, 시계추처럼 노를 저었다. '나룻배를 타고 싶다'고 하자, 최 씨는 "따라 오소"라며 장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최 씨의 집에서 나루터까지는 걸어서 3~4분 거리. 나룻배에 오른 최 씨는 배를 묶어둔 밧줄을 푼 뒤, 삿대를 이용해 배를 나루에서 떼어내고는 시동을 건다. 탈~탈~탈~. 배는 12마력짜리 경운기 엔진을 장착한 철선(일명 너벅배)이다. 어른 40~50명을 태우고 2톤짜리 트럭도 싣는다. 한옴큼 탁한 연기를 내뱉은 엔진은 이내 기세를 올린다. 배가 강으로 쑥쑥 나아간다. 강을 건너는 데는 불과 10여 분이다. "사람들은 내가 팔자 좋은 사람인 줄 아는데, 이 일 아무나 몬함미더. 농사 없이 매달려도 힘이 부쳐요. 봄엔 바람 불어 고생, 여름엔 물이 불어, 겨울엔 강이 얼어 고생이라요. 철따라 애로가 있지만 여름 홍수철이 제일 무섭구만요." 홍수를 이야기할 때 최 씨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마엔 겹 주름살이 졌다. ● 부창부수 노를 잡고 최보식-정순득 씨는 이를테면 부부 뱃사공이다. 피치못할 운명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선친의 업을 이어받아 사공 일을 시작한 최 씨는 일이 힘들었던지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 최 씨의 빈자리를 부득불 아내인 정 씨가 채웠다. "내가 배 볼 거라고는 생각 안했지예. 남편이 아프니까 도리가 있슴미꺼. 먹고 살자고 한 일이지예. 마, 그리 됐어예." '그리 되어' 흘러온 뱃사공의 삶이 30여 년. 정 씨는 대암리 일대에서 '억척 여장부'로 소문나 있었다. 남자도 하기 어려운 뱃일을 여자가, 그것도 혼자서 해 냈다고 하니 그런 별칭이 붙을만도 했다. 70, 80년대에 최 씨 부부는 나룻배 2대를 부렸다. 큰 배로는 소를 실었고 작은 배로는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다. 소는 평균 4∼5마리, 사람은 15~20명 정도 탔다. 손님이 많을 땐 줄잡아 하루 150~200명이 북적거렸다. 뱃사공은 바빴다. 초여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 달성군 현풍과 구지, 창녕군 이방쪽의 인부들이 고령군 우곡쪽으로 건너가 일을 했다. 단골 통학생이 있었고 장날엔 장꾼들이 줄을 이었다. 바지런을 떨었지만 돈은 되지 않았다. 배삯은 대개 현물이었다. 단골 이용자는 보리 거둘 때 보리 한 말, 나락 거둘 때 나락 한 말씩을 뱃사공에게 주었다. 그나마 나이드신 어른들은 그냥 탔다. 그게 뱃사공의 인심이었다. 뱃사공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정 씨는 삿대로 배를 보던 시절, 얼음 깨던 일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친다. "말도 마소. 한겨울에 얼음 깨고 뱃길 만들라카모 손발이 다 얼고 몸까지 굳어예. 얼음 깨는 곰배(나무 망치)만도 다섯 개나 싣고 다녔어예." 이들은 뱃사공 일을 '배 본다'라고 표현했다. 뱃사공의 배포가 실린 말 같다. 배를 몬다, 끈다, 돌린다, 운행한다고 하지 않고 '본다'고 한 것은 강을 보고, 사람을 보고, 나아가 뜻밖의 사고가 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다. ● 마지막 사공의 회한 최 씨 부부는 우직하고도 정직하게 배를 봤던 것 같다. 수 십년간 뱃일을 하면서도 인명사고 한번 없었고, 몸에 밴 안전의식과 친절 덕에 군에서 주는 '봉사상'까지 받았다. 정 씨는 그간의 무사고를 강의 은덕으로 돌린다. "이날 이때까지 아무 사고 없이 배를 볼 수 있었던 건, 낙동강 용왕님 덕택일거라예. 용왕 할배가 돌봤응게 강을 잘 건넜지예." 최 씨 부부의 길고긴 뱃사공 역정도 종착점이 보인다. 대암나루 코 밑에 우곡교가 놓이고 있다. 우곡교는 경북 고령군 우곡면과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을 잇는 길이 780m, 폭 11.5m의 낙동강 횡단 교량으로 올 하반기 개통된다. 지난 2001년말 착공되어 골조가 우뚝하다. 다리가 뚫리면 최 씨의 나룻배는 할 일이 없어진다. 최 씨는 "요즘 잠이 안온다. 그저 멍멍하다. 먹고 살일이 걱정이다. 나룻배 없어지고 나면 군청에서 어업허가증이라도 하나 줄란지…"라며 막막해 했다. 지긋지긋한 뱃일. 그게 끝난다는 데, 그걸 털어버린다는 데 무슨 미련이 있을까. 무거운 업보를 벗게 됐으니 홀가분할 법도 한데, 최 씨와 정 씨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미련이, 그것도 감당할 수 없는 미련이 남아 일상을 뒤흔든다. 하긴, 한 강물의 소용돌이가 한 생애를 꿀꺽 삼겼으니 어찌 미련과 회한이 없을텐가. 애써 서운함을 감춘 아내 정 씨는 "힘껏 살았응게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며 입술을 굳게 깨문다. ● 이 땅의 뱃사공들 대암나루를 빠져나오면서 뱃사공을 생각한다. 강촌에서 풀처럼, 강물처럼, 바람처럼 살아온 사람들. 뱃사공은 단순히 배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생물, 화물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이야말로 세상의 다리다. 한때는 사공을 선부(船夫), 선인(船人) 초공(梢工) 따위로 부르며 경시한 적도 있었으나, 이들만큼 고된 생활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도 없다. 간혹 뱃사공 했다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안쓰럽고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우리 문화사는 이 땅의 뱃사공들을 한번도 제대로 조명한 적이 없다. 최 씨 부부는 아마도, 낙동강의 마지막 현역 뱃사공일 것이다. 이들에게 붙는 '마지막'이란 말은 개발 세기가 안겨준 낙인처럼 아리다. 지금 우리는 나루의 사라짐을 정면에서 목도하고 있다. 잘 보아둘 일이다. 편리함이 어떻게 나루를 쫓아내고, 다리가 뱃사공을 어떻게 몰아내고 있는지를. 다리 때문에 나루에 흐르던 문화와 거기 깃들었던 삶을 통째로 잃는다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 어리석은 일이다. 대암나루가 폐쇄되기 전 꼭 한번 더 가 보고 싶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4> 화개나루와 남도대교 [기획시리즈] 2007.03.2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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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화주막'은 시끌벅적했다. 한 무리의 길손들 틈에 장꾼들이 끼어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식탁에는 희미하게 김이 나는 재첩국과 아사삭한 은어튀김이 올려져 있다. 육자배기라도 터져나올 법한 주막 문전에서 '옥화'는 파전을 부치느라 바빴다. -장사가 잘 됩니까? "잘 되지요. 항시 장이 서니까예." -하루에 얼마나 팝니까? "짬이 없지예. 평일엔 한 백명, 주말엔 한 이 삼백 명이 오구만요." -이 집 특미가 뭔가요? "더덕동동주, 녹차동동주도 좋고, 은어튀김, 산채비빔밥도 좋아예. 시아버지밥상이 특미라요. 참게장 은어튀김 묵 재첩국이 다 나오니까. 그란데 와 꼬치꼬치 묻소?" 경남 하동 화개장터 내 '옥화주막'의 안주인 김옥순(48) 씨는 이것저것 묻는 기자가 신기한지 대답하다 말고 눈을 치켜 뜬다. 후덕한 눈매다. 그에게서 김동리 소설 '역마(驛馬)'의 옥화를 연상한 건 주막 이름 때문이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가운데 이름 '옥'자도 같다. 묘한 인연이다 싶어 다잡고 이야기를 하려드니 "바쁘다"면서 그의 남편(정병주·53)을 불러 앉힌다. 난데없이 붙들린 정 씨가 주섬주섬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화개장이 되살아난 덕에 장사가 잘 됩미더. 문 연 지 7년 됐고예. 여기 음식은 친환경 농산물이라요. 저 아래 악양들에서 재배한 야채를 식재료로 쓰니까요." 이야기가 시원시원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로부터 섬진강 화개-운천나루의 한 시절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젖먹이 같던 나루들 "20여년 전엔 큰 배가 다녔지예. 여기 섬진강은 물살이 있고 수심이 깊어 사공 두 사람이 앞뒤에 붙어 삿대질을 했어예. 소도 타고 개도 타고 농기구도 싣고 그랬심더. 장날이 되면 배가 정신이 없었고예." 화개 태생인 정 씨는 전남 구례쪽 간문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됨)를 나왔다. 하동 사람이 구례 가고, 구례 사람이 하동 오고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강이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화개(탑리)와 운천은 한동네 같았다. 화개에 5일장(1, 6일)이 서면 화갯골 사람들은 고사리·더덕·감자를, 하동 포구에선 김 미역 명태를, 구례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부산·마산의 배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나루터 시절로 돌아가자 정 씨는 신바람이 나 있었다. "강이 제 기능을 할땐 화개-운천나루 아래로 염창나루, 금천나루 한동나루 섬진나루가 줄줄이 강의 젖먹이처럼 붙어 있었지예. 그 많던 기 간다 온다 소리도 없이 다 가 버렸네 허허." 멍하니 강쪽으로 시선을 던진 정 씨는 "이제 섬진강 나룻배 이야기를 해줄 사람도 몇명 없다"면서 "배를 보려거든 강 건너편 '쉴만한 물가'로 가 보라"고 귀띔해 준다. ●'쉴만한 물가'의 변화 목마른 길손의 심정으로 '쉴만한 물가'를 찾는다. 남도대교를 건너 구례 간전면 쪽으로 접어드니 민물고기·장어구이 전문이라 써 붙인 '쉴만한 물가' 식당이 나왔다. 식당을 끼고 물가로 내려가니 나룻배가 한 척이 떠 있다. 이곳이 운천나루이다. 순한 강바람에 배가 화답하듯 까딱까딱 한다. 주인을 잃지 않고 용케 버텨온 게 가상하다. 선주는 '쉴만한 물가'의 주인 손영일(54) 씨다. "3년째 배가 쉬고 있어요. 원래 줄배였죠. 2004년까지 군에서 보조금이 나왔는데 중단되면서 줄이 끊어졌어요. 가끔씩 놀러온 사람들이나 학생들이 배를 태워달라고 하는 것 말고는 늘 저렇게 혼자 떠 있다오." 손 씨는 지난 20여년간 운천나루의 변화를 지켜봤다고 한다. 뱃사공은 아니지만 구례 운중(운천·중대리)도선위원회에도 참여했고 1990년대 초 줄배가 들어설땐 직접 밧줄을 매기도 했다. "나룻배가 잘 돌아갈땐 지역의 정보센터였어요. 장터의 쌀값이 얼마인지, 고사리와 더덕이 많이 나왔는지, 누구의 결혼식이 열리고 누가 죽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오갔으니까요."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손씨는 "사람이 있어야지"하면서 식당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불러온다. 묵은 나룻배에 사람이 오르자 배가 뒤뚱, 생기를 얻는다. 나루터 언덕과 강가의 미루나무 그림자가 강물에 거꾸로 비친다. 찰칵! 찰칵! 수묵화같은 추억 한 컷이 연출된다. 손 씨의 얼굴에 알지 못할 회한이 드리워진다. "제가 도와줄 건 이런 거죠. 방송사도 가끔씩 오고는 해요. 이 배도 15년쯤 됐으니 퇴역할 날이 멀지 않았죠. 관리가 쉽지 않아요. 요즘엔 FRP선이 유행이지만 그래도 강에서는 목선이 좋죠. FRP선은 전복되거나 사고로 물이 차면 가라앉지만, 목선은 뒤집어져도 다시 떠오르거든요. 롤링, 그러니까 배의 야릇한 흔들림도 FRP선은 도저히 목선을 못따라와요." 운천나루 일대에는 수달이 많다. 자연 생태가 아직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나 섬진강 옥류도 날이 갈수록 탁해지고 있다. 옥색 강물 곳곳에 씻기지 않을 세제 거품이 떠다닌다. 섬진강 오염은 나루선이 끊기고부터 더 심해지고 있다고 손 씨는 걱정했다. ●잡으려는 욕망들 화개장터 주변의 물길은 세 갈래로 길과 함께 흐른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 내려 섬진강으로 빠져든다. 쌍계사로 가는 길은 선보러 나온 숫처녀처럼 발그레하게 부풀어 올랐다. 화개천의 버들개지는 속이 터져라 제살을 찢고 있다. 외지 길손들은 남도대교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바쁘다. "차 오는디 싸게 찍으랑께!" "화개 녹차 맛 좀 보자카이!" 엿장수 가위 소리를 뚫고 걸쭉한 경상도·전라도 사투리가 뒤섞인다. 남도대교(길이 358.8m·너비 13.5m)가 개통된 것은 2003년 7월28일이다. 구례 간전면과 하동 화개 사이의 먼길이 엎어지면 코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지금은 광양의 시내버스가 화개까지 들어온다. 이 다리는 '동서화합' '지역감정 극복'이란 정치적 상징이 입혀져 있다. 사업비 217억 원은 나라에서 132억 원을 충당하고, 경남도·전남도가 85억 원을 분담했다. 설계의 컨셉트도 화합이다. 이른바 닐슨 아치교라는 것이다. 교량 상판을 케이블로 매달아 하중을 메인 아치에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형태로만 보면 동과 서가 무지개를 그리며 손을 맞잡은 모습이다. 양쪽 난간 아치를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칠해 강물에 비치면 태극 문양이 나타난다. 교각 사이 3개 경간을 산 능선처럼 만들어 지리산과 백운산(광양)이 이어지게 형상화한 것도 흥미롭다. 한데, 너무 요란하지 않은가. 호들갑스럽다는 인상을 지우기도 어렵다. 하동과 구례는 1970년대 지역감정이란 말이 있기 전까지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불편했을지언정 나룻배 하나로도 그런대로 소통이 되었다. '화합' '지역감정' 어쩌구 하지 않아도 화합이 되었다는 말이다. 굳이 다리를 놓아야 했다면, 낮은 자세로 대자연에 다가가야 하지 않았을까. 여인의 저고리 옷고름 같은 섬진강엔 거대한 철골아치보다 자연친화형 가교가 제격이다. 지나친 욕심이 부조화와 이질감을 불러왔다. 저 서늘한 정치적 아치에 무지갯빛 추억이 감돌게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가야할 것 같다. "교통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줄배의 줄이 끊겼고, 산골의 인심과 인정으로 영위되던 강촌의 살가운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손영일 씨) '잡으려는 욕망이 오히려 떠나게 만드는 것을…'. 소설 '역마'의 주제 의식이 새삼 가슴을 짓누르는 화려한 봄날이다. 섬진강의 봄은, 아름답지 않은 것조차도 아름답게 만들어서 탈이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3> 웃개나루와 남지철교 [기획시리즈] 2007.03.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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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데서 온 손님 2006년 7월16일, 창녕 남지철교에 귀한 손님 두 분이 찾아왔다. 일본인 나가지마(中島) 여사와 그의 장성한 아들이었다. 60대 중반의 이 여인은 감회에 젖어 철교를 살폈다. 녹슨 철골을 손으로 만지고 리벳 이음까지 관찰하는 모습은 여느 관광객과 달랐다. 이들은 놀랍게도, 일제시대 남지철교와 의령 정암교를 설계한 이야마(井山安藏) 씨의 딸과 손자였다. 당시 이들을 안내한 남지철교보존대책위원회(이하 남지철교보존회) 김부열(45) 위원장에 따르면, 나가지마 여사는 아버지의 생전 자취를 더듬기 위해 방한한 것이었다. 이들은 남지철교와 함께 의령 정암교도 찾았으며, 70여년 전의 자료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기이한 해후였다. 우리의 슬픈 역사가 그들에겐 또다른 추억으로 숙성돼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들에게도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남지철교를 설계한 이야마 씨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 분의 부인, 즉 찾아오신 일본 손님의 어머니(현재 94세라고 함)는 그때 홀로 되었고 세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함께 방문하려고 했는데 노령과 건강을 걱정하여 따님과 손자만 방한하게 되었다는군요. 그러니까 이들의 방한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자 연로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었던 것 같아요."(김부열 위원장) 이 사연을 전한 김 위원장은 "그때 만남이 계기가 되어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 받고 있다"면서 남지철교가 현해탄을 건너 민간외교까지 담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첨단 공법의 구조 남지철교는 민족사의 굴곡과 지역민의 애환이 서린 다리이다. 일제때 건설되어 6·25전쟁때 두동강이 났고, 얼마전엔 철거될 운명이었다가 가까스로 등록문화재가 된 이력은 그대로 현대사의 단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철교를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자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남지철교 보존운동이 펼쳐지면서 뜻밖의 진귀한 기록과 자료가 확보되었다. 지난 2004년 남지철교 철거 논의가 불거지던 시점, 동아대 강영조(도시계획 조경학부) 교수는 일본 도쿄대를 통해 우연히 남지철교의 설계도와 공사 보고가 담긴 문건을 찾아냈다. 1932년 12월 남지철교 준공을 앞두고 작성된 '공사 휘보(彙報) 제18권'이 그것인데, 실로 70여년 만의 자료 발굴이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남지철교는 1931년 9월에 착공, 1933년 3월에 준공되었다. 시공사는 오사카 횡하교량제작소(大阪橫河橋梁製作所). 가설 목적은 '남지는 한반도 주요 도시인 마산~대구를 잇는 교통요지에 있고, 종래 도선 연락을 하였지만 위험하고 불편해 궁민구제사업으로 철교를 세운다'고 돼 있다. 철교의 길이는 390m, 폭은 6m. 공사비는 26만6000원('엔'의 오기인듯)이었다. 공사 과정도 드러난다. '콘크리트 사용 총량은 2822㎥. 콘크리트 작업은 기계 대신 노임이 싸므로 손으로 반죽함. 1932년 10월 현재 동원된 인부는 2만3000명임.' 인부는 대부분 조선인일 것이었다. 강영조 교수는 "남지철교에 적용된 게르버식 연속 트러스는 당시로선 첨단 공법으로, 교량 기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ㅁ자 교각은 육상선수의 다리처럼 군살 하나 없고, 교량 진입부의 경사 단주(端柱)는 시치미를 뚝 뗀 미인의 맨얼굴을 보는 듯하다. 트러스를 이루는 가지런한 수직재(垂直材)와 사재(斜材), 상판 아래의 격자구조는 '뼈속에 힘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주요 부재에는 요즘처럼 볼트-너트를 쓴 게 아니라, 일일이 리벳으로 용접해 붙였다. 70여년을 버티게 한 원천이 첨단 공법과 수작업에 있었던 것이다. ●추억과 향수 남지철교는 최소한 남지 주민들에게 삶의 일부로 편입된 환경이다. 철교는 놀이터이자 데이트 코스였고 다른 지역에서 부러워하는 자랑거리였다. 아이들은 철교 난간을 타고 올라가 높다란 트러스 위를 깨금발로 건너뛰곤 했다. 사진을 찍어도 철교가 배경이 되었고, 외지에서 돌아와도 철교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일제 잔재라는 꼬리표는 추억을 끝없이 괴롭혔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나이든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일본사람이 설계하고 공사를 주도했어도, 현장에서 피땀 흘리며 다리를 세운 주역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 따라서 '철교는 우리 것'이라는 논리였다. 철교 매점을 운영하는 남지 토박이 황규익(69) 씨는 "철교가 폭파된 직후 나룻배가 물자를 옮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부서진 다리를 땜질하며 복구한 사람도 모두 남지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의 산물인 철교는, 이처럼 복잡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낙동강을 건너고 있었다. 낙동강이 남강을 끌어안아 터를 넓히는 남지에는 일찍이 나루가 흥했다. 철교에서 아래로 500여m 떨어진 강가엔 웃개나루가 있었다. 웃개의 '개(浦)'는 물가를 뜻한다. '동국여지승람' 영산현 조에는 웃개가 칠원현의 우질포(于叱浦) 또는 상포(上浦)로 나온다. 이후 남지 쪽에선 영산 웃개, 강 건너 함안쪽에선 칠원 웃개라 불렸다. 웃개는 땅과 낯을 가리지 않았다. 나루는 두 개인데 이름이 하나라는 것은 제대로 통했다는 의미이다. 18세기에 발간된 '해동지도'에는 남지읍 일대가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에 이르는 다섯 번째 대로로서, 마방과 여각 객주집이 즐비한 수운의 중심지라고 소개돼 있다. 또 17세기초 함안의 선비 조임도(趙任道)가 정리한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는 남지 건너편인 함안 도흥나루의 흥성했던 한 시절이 그려져 있다. 남지의 나루 전통이 남지철교를 서게 한 바탕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철교의 이면에 나루가 흐르고 있음이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그 나루를 다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상생의 나루를 찾아 철교는 이제 두 개로 흐른다. 구 철교 옆에 신 철교가 나란히 놓이고 있다. 신 철교는 길이 745m, 폭 13m으로 규모가 구 철교의 배다. 주황색의 늠름한 트러스 철골 구조는 구 철교를 압도한다. 그런데 왠지 낯설고 허전하다. 이런 부조화는 애초 구 철교의 철거를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앞뒤 돌아보지 않은 질주 행정의 귀결같아 씁쓰레하다. 어쨌든 이제 상생을 말해야 할 때이다. 구 철교와 신 철교는 20세기와 21세기의 조우,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공존의 방법론 한 가지는 잃어버린 나루를 되찾는 것이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다. 구 철교 자체가 나루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철교의 평면 공간만 자그마치 730여평이다. 여기에다 낙동강의 하늘과 물, 입체적 트러스와 난간을 활용한다면 살아있는 문화공간이 될 수 있다. 이미 세차례 열린 철교 사진전은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남지철교가 지닌 역사성을 씨줄로, 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날줄로 엮어 '쌍끌이'를 한다면 우리는 나루없는 시대에 아주 괜찮은 나루 하나를 가질 수 있다. 남지의 낙동강 둔치에선 내달 21~29일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꽃밭이 7만 평으로 전국 최대라고 한다. 그 곳에 시방 유채꽃이, 모든 싹눈과 꽃눈, 잎눈이 어둠을 뚫고 나오려고 아우성이다. 신·구 철교의 임무교대를 보려고! 그 장관을 꼭 봐야겠다. # "철교는 우리네 어머니" - 주민 힘모아 철거 저지 - 남지철교 지킴이들 남지철교는 2004년 2월 철거 선고를 받았다. 교량안전등급 D급. 차량통행이 금지됐다. 신 철교 가설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구 철교는 철거될 운명이었다. "뭐라꼬? 철교를 없앤다꼬?" 중년 이상의 남지 주민들이 발끈했다. 이들은 철교 없는 남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철교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다. 깃발을 든 이는 김부열(45·마산 의신여중 교사) 씨와 이상주(45) 씨 등 남지의 중년 세대들. 남지철교보존비상대책위가 조직됐고, 온-오프라인을 통한 철거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대책위는 철교 사진전과 천막극장 등을 마련, 주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남지철교는 어머니입니다…'. 남지의 출향인들이 가세하고, 언론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대책위가 생각해낸 것은 남지철교의 문화재 지정. 지역사료를 모으고 당위성을 적극 홍보한 끝에 문화재청의 실사가 이뤄지고, 마침내 2004년 12월말 '등록 문화재 145호'로 지정되었다. 남지철교의 문화재 지정은 지역문화운동의 개가였다. 운동 과정에서 지역사료가 발굴되고 주민들의 애향심과 문화의식이 고취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김부열 씨는 취재소식을 듣고 마산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왔다. '문화재 지킴이'로 문화재청으로부터 우수상까지 받은 바 있는 김씨는 "우리의 무기는 상상력과 순수성이다. 즐거운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의욕이 넘쳐 있었다. 대책위는 얼마 전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새 조직을 만들었다. 철교 뿐만아니라 지역문제 전반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 개편된 것. 이 모임의 공동대표인 박태명(58·남지동물병원 원장) 씨는 "이제 지평을 넓혀 60만평에 이르는 남지의 낙동강 둔치를 문화와 환경 레저가 어우러지는 생명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화부장 chpark@kookje.co.kr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2> 예천 '묵은 여울'의 외나무다리 [기획시리즈] 2007.03.1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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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나무다리는 외롭다. 사람이 건너가도 한 명이고 달빛이 내려앉아도 한 뼘이다. 그래서 임이 생각나는지 모른다. 복사꽃 능금꽃 그늘에 어리는 눈썹달같은 임이. 그런 눈썹달을 닮은 어여쁜 임이 있을테다. 지금은 싸늘한 별빛 속에 숨어 들었을지라도. 아무래도 좋다. 떠오르는 것이 추억이고 삶의 너끈함이라면.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 내성천(乃城川)에는 삶의 외줄같은 외나무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초겨울에 태어나 봄이 되면 죽는다. 죽고 살고는 자연이 결정한다. 내성천에 눈석임물이 섞이고 강물이 불어나면 외나무다리는 발붙일 곳을 잃는다. 강물이 줄어 유순해지는 초겨울이 되면 주민들은 다시 어기영차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놓는다. '뗐다-놓았다' 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목숨같은 농사가 거기 매달려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 묵은 여울 사람들 경북 북중부의 오지인 예천 신월마을은 '묵은 여울'로도 불린다. 물살이 빠르고 옛날 소금을 싣고 온 배가 마을에서 하루 이틀 묵어간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내성천(106km )은 경북 중북부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제1지류다. 소금배가 다니던 시절엔 동네 앞에 나룻배도 있었다고 한다. 묵은 여울 이장 권상기(63) 씨는 "외나무다리를 놓을 수 없는 여름철엔 나룻배가 다녔다"면서 "10여년 전까지 3대가 있었고, 그 중 한 대를 방죽에 끌어올려 놓았는데 저절로 썩어버렸어"라고 말했다. 묵은 여울엔 45가구 100여명이 살고 있고, 강 건너 논밭이 3만 평을 웃돈다. 마을 전체 농토의 3분의 2에 달한다. 주민들은 강을 건너가서 벼농사나 고추 마늘 고구마 따위를 재배해왔다. 다행히 강이 얕아 다리 없이도 소는 저벅저벅, 사람은 자박자박 조심스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외나무다리가 놓이는 겨울철에 주민들은 나무하기 바빴다. 마을 토박이라는 이상춘(76) 씨는 "한 평생이 지게 인생이었어. 그 놈의 나무 징허게 했지"라며 나무와의 질긴 인연을 떠올린다. "저 강 건너에 호(오)골과 신(잉)골이 있는데, 한창 나무를 할땐 산에 온통 사람이었어. 우리는 오전에 지게로 한 짐, 오후에 한 짐씩 해 날랐어. 한창 할땐 밥 싸들고 가서 하고 저녁 늦게서야 돌아왔구만. 십리고 십오리고 저 멀리까지도 갔어. " 나무하고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외나무다리가 기다렸다. 한짐을 가득 이고 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발을 잘못 디뎌 강물에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강물이 얕아 사고로 이어지진 않지만, 나무고 옷이고 다 버리는 꼴이 되면서 주위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렇게 울고 웃으면서 주민들은 시린 겨울날을 보냈다. ● 추억 상품으로 부상 '놓고-떼기'를 반복하던 묵은 여울의 외나무다리는 1990년대 초반 농가에 기름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추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경제난에다 고유가 사태가 겹치면서 주민들은 다시 땔감에 눈을 돌렸다. 땔감을 하자니 외나무다리가 필요했다. 지난 2004년 말 묵은 여울 주민들은 한동안 잊었던 외나무다리를 다시 놓았다. 고유가가 추억의 다리를 되살린 것이다. 이곳의 외나무다리는 전체 길이가 80여m, 폭이 한뼘 정도다. 하천 변의 미루나무나 인근 야산의 적송을 베어와 세로로 쪼갠 뒤 대충대충 다듬어 두드려 맞추었다. 우둘투둘한 표면에 세로로 길게 흘러간 나이테가 마치 농부의 심줄 같다. "처음 만들 땐 한 사나흘 걸렸는데, 이젠 요령이 생겨 하루나 이틀만에 뚝딱 놓아요. 모두 우리가 베고 찍어내고 다듬고 박고 끼우고 하지요. 땔감을 하려고 만들어 놨더니 매스컴이 주목하고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와요. 아, 이거 추억상품이 되겠다는 생각도 듭디다."(이장 권상기 씨) 이 다리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아련한 향수에 젖게 되고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걷는 게 장난이 아니다. 몇 발자국 안옮겨 외나무가 떨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평행봉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어렵다. 건들 바람이라도 불면 자빠질 것 같다. 놀라운 것은, 묵은 여울의 주민 대부분은 나무를 한 짐 지고도 자박자박 외나무다리를 잘도 지나 다닌다는 사실. 물론 작대기는 짚는다. 하지만 작대기는 균형을 잡아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 물에 빠지는 사람을 구해주진 못한다. ● 건너가고 오는 것들 묵은 여울의 외나무다리는 믿음의 가교다. 다리 중간에서 사람이 마주쳐도 "먼저 가이소…"하면 된다. '원수'를 보내주라고 다리 중간에 비킴다리 두 곳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을, 아우는 형님을, 남자는 여자를 먼저 건너게 하는 것은 이 마을의 불문율이다. 외지인에겐 작대기를 빌려준다. 이게 추억상품이 된 것은 욕심없이 살아온 이들에 대한 자연의 보너스가 아닐까. 묵은 여울에선 삶이, 일상이 아주 천천히 흐른다. 나무 한 짐을 지고 느릿느릿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노래 한 자락은 저절로 흘러나올 것 같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 다리….'(최무룡의 '외나무다리' 중) 묵은 여울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조차 하나 없다. 대신 첩첩산골 아니면 구경하기 어려운 일소가 두 마리나 있다. 농촌이라도 비육우 아니면 번식우 뿐인 현실에서, 일소가 있다는 것은 농경사회의 기초 질서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소가 음식이 아니라 가족인 곳. 등골 빠져라 쟁기를 끌고 사래 긴 밭 갈고 돌아오면 주인이 뜨듯한 쇠죽을 쑤어 주고 쇠등을 긁어주는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은 눈물겨운 희망이다. 두 집에 한 집 꼴로 아궁이에 불을 때며 사는 묵은 여울이 오래 눈에 어른거린다. 겨울이 완연한 봄을 부를 때까지, 그곳 주민들은 도란도란 외나무다리를 건너 나무를 계속 할 것이다. 머지않아 복사꽃 능금꽃이 피어날테다. # "달짝지근 밤고구마 맛이 전국 최고랑께" - 마을 소득 '효자' 작목으로 고구마는 묵은 여울(신월1리)의 또 다른 효자다. 간식거리가 될 뿐더러 무시못할 소득원도 된다. 예천군 보문신월 고구마작목반에는 주민 31명이 약 4㏊의 고구마를 재배한다. 지난해 고구마 판매수입은 총 1억3000여만 원. 가구당 수백만원씩 돌아갔다. 이달 초 마을을 찾았을 때 주민들은 비닐하우스 묘상(苗床)에 씨 고구마를 내고 있었다. 왁자지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고 누군가 삶은 고구마를 내왔다. 바알간 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구미가 당긴다. 먹어보니 꼭 달달한 밤맛이다. 강촌의 인심에 목이 메인다. "이래뵈도 여 고매가 최고랑께. 전국적으로 유명해. 맛이 어뗘?" 품앗이 나왔다는 권계화(75) 씨는 동네 손님이 반가운지 고구마 챙겨주기에 바쁘다. 9남매를 낳아 모두 출가시켰다는 그는 요새도 외나무다리를 건너 나무하러 다닌다고 한다. 옆에 있던 '몸빼' 차림의 한 아낙이 거든다. "이 고매가 다이어트에 좋고 껍질째먹으면 암도 안걸린다 하요. 할 얘기는 아니지만, 고매 무우마(먹으면) 똥도 쑥쑥 잘 나온다 안하요. 마이 무우소." 이건 맞는 말이다. 고구마는 한방서적에 나오듯이, 위장과 위를 튼튼히 하고 혈액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요즘 심은 씨 고구마는 4월말께 싹이 나오고 싹을 잘라 심으면 여름에 주렁주렁 자식같은 뿌리를 단다. 묵은 여울의 고구마는 강변의 비옥한 마사토로 인해 당도가 높고 색깔이 특히 곱다. 지난해 작목반장을 맡았던 이우직(46) 씨는 "싹(모종)은 싹대로, 뿌리는 뿌리대로 팔고 거둔다"면서 이 강촌에 이만한 효자가 없다고 자랑했다.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1> 누가 떠나고 남았나 [기획시리즈] 2007.03.0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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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느림과 빠름, 만남과 떠남에 대한 명상이다. 20세기를 숨가쁘게 건너오면서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 붙잡은 것과 놓쳐버린 것을 짚어보려 한다.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흘러갔다. 단순한 소통을 문화라 하고 질주를 문명이라 우기진 않았던가. 나는 빠름 속에서 느림의 급소를 포착하고자 한다. 이것을 이야기할 상징적이고 구체적인 장소가 나루와 다리이다. 다리에 새겨진 시간과 추억을 안주로 어느 나루터 주막에서 술 한잔 걸치고 싶다. 부디 나의 나룻배에 당신은 행인이 되시길…. 잠자는 감성을 깨워 떠나는 여행의 아침은 설렌다. ▷▶마지막 사공 최보식(65) 씨는 낙동강 중류 대암나루(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의 현역 뱃사공이다. 요즘도 그는 나룻배(발동기가 달린 철선)를 부리며 강변 주민들을 실어 나른다. 40여년 간 끈덕지게 황소처럼 나루 일을 해왔다. 꿈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일하고도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대암나루 코밑에 건설되고 있는 우곡교(고령군 우곡면~달성군 구지면 연결)가 조만간 개통되면 그의 나룻배는 할 일이 없어진다. 우곡교 개통식이 그의 뱃사공 졸업날이다. 우곡교 개통식엔 내로라는 분들이 참석하겠지만, 최 씨의 뱃사공 졸업식엔 그 혼자 뿐일 지 모른다. 이창학(54) 씨는 안동 하회나루의 뱃사공이다. 최 씨와는 달리, 그는 관광용 나룻배를 부린다. 배는 무동력이며 삿대로 움직인다. 낙동강의 하회 뱃나들(나루)에서 강 건너 부용대까지 오가는데, 3년 새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4월 초 나룻배가 깨어나 관광객을 맞으면 하회의 봄은 터질듯 부풀어 오를 것이다. 다행히 하회마을엔 아직 다리가 없다. 하지만 하회 조금 아래인 광덕 잠수교 위에 무쇠같은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부용대로 이어지는 자동차 길을 새로 놓는 것인데, 새 다리가 놓이고 나서도 하회 나룻배가 온존할 지 궁금하다. 최 씨와 이 씨는 아마도 우리 시대 마지막 뱃사공일테다. 누가 사공의 노래를 불러줄 것인가. 춘삼월이지만 나루에 부는 바람이 아직은 차다. ▷▶나루 위의 질주 다리는 대개 나루 위에 놓여진다. 다리가 놓이면 나루는 속절없이 폐쇄된다. 나루는 다리를 염려하지만, 다리는 나루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루는 머물고 다리는 떠난다.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은 바로 나루의 노래가 아닌가. 나루의 시대가 가고, 물밀듯이 도래한 다리의 시대. 소통에 따른 변화는 분초를 다투며 찾아온다. 다리는 소통과 질주를 전제로 태어났다. 많은 다리들은 질주 본능에 충실한 듯하다. 다리 아래에 무엇이 흐르는 지,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 지, 누가 웃고 우는 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 가자, 바쁘다. 시간이 돈이다. 효율이다. 달려, 달려라구…. 빵빵, 야! 빨리 안가고 뭐해?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달려야 한다. 달려야 생이 펴이느니. 아, 달려야 생이 펴인다니…. 눈부신 질주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나루가 가물가물 손짓한다.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어머니가 건너왔던 나루 말이다. 나루의 시대에는 모든 공간이 열려 있었다. 산과 강, 들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이쪽과 저쪽,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성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가슴마다에는 정이 넘쳐 흘렀다. 산하엔 야성이 꿈틀거렸고 야생이 춤을 추었다. 그곳엔 인간이 어떻게 간섭할 수 없는 '발효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무정하다. 애초부터 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편리에 취한 나머지 애써 무시하고 모른 척 했다. 다리엔 기다림이 없다. 아무도 애써 기다려주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후회도 없이 다리의 속도에 적응한 것은 아닌가. 다리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많은 공간이 닫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질주에 빠진 나머지 풍경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 다리에서는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볼 따름이다. 주막의 질펀한 여유와 나루의 느리고 순한 원경은 한갓 기억이 되려 한다. 문명의 첨병처럼 20세기 교량공학이 빠르게 건너간 자리에 나루의 눈물이 있다. ▷▶다리의 시간 나루를 생각하며 다리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옛 다리들은 민중사의 숨결이자 문화사의 자취이다. 생각하는 다리들도 점차 늘어난다. 반가운 일이다. 경북 영주시 수도면 무섬마을의 내성천에는 삶의 외줄같은 긴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도 주민들이 일부러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왜? 옛 것, 옛 향기가 그리워서라고 한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에는 지게꾼들이 나무 하러 다니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나무 한짐 해서 널빤지다리를 건너면 연탄 몇 장이 절약된다고 한다. 경남 남지에는 70년 된 철교(남지교)가 있다. 새 다리를 가설하면서 없어질 운명이었으나 주민들의 보존 열망이 문화재청을 움직여 근대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받은 다리이다. 남지교에는 일제가 남긴 근대화의 흔적과 한국전의 상처와 교훈, 남지 주민들의 애틋한 시간과 추억이 새겨져 있다. 남지 사람들에게 남지교는 이미 삶의 일부로 편입된 환경이다.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의 작은 섬 저도에는 그림같은 연륙교 두 개가 놓여 있다. 옛 다리와 새 다리이다. 옛 다리는 흔히 '콰이강의 다리'라 불리면서 많은 연인들이 찾아온다. 손잡고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단다. 3년 전 이곳에 무지개 형태의 아치교가 새로 놓이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이 두 개의 다리는 과잉소통과 인간의 욕망 같은 생각거리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볼거리와 생각거리가 있기 때문일게다. ▷▶진정한 소통과 만남 오늘의 다리들은 생활의 이기나 편리를 넘어 문명의 기호로 자리잡고 있다. 광안대교나 창선-삼천포대교가 말해주듯, 큰 다리 하나가 도시의 표정이 되고 랜드마크가 된다. 변화는 숨가쁘게 찾아오고 지나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동시에 본다. 다리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나루로 내려가 보자. 나루에 가면 자연 품속의 인간, 때묻지 않은 문명과 문화의 진솔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3월의 고운 햇살 속에서 나는 아팠다. 오염된 땅, 더러워진 물, 잘려나간 산허리, 삭막해진 세태 따위를 온 몸으로 마주치고 뒤돌아보니 나루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다리가 씽씽 달린다. 가수 이동원은 '세월에 다리를 놓고'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랐지만, 난 나루에 놓인 다리가 더 이상 무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떤가. '질주하는 것은 바보다'라고. 하긴 볼 것을 못보고 내빼버리니 바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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