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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

만년의 추사가 쓴 전주최씨 최성간 묘비가 전북 임실에서 발견된 뉴스를 접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2002년 전북중앙일보에서 보도한 "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상)


추사의 고증학과 서법

추사는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인으로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등과 교분을 맺어 경학과 금석학 등에 대한 담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연경학계는 고증학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난숙해갔고, 종래 경학의 보조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 및 서예사의 연구로 독자적인 분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에는 금석학연구에 몰두하여 금석자료의 수집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 ‘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으며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또 그는 무엇보다도 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 발전을 보여온 조선 고유의 글씨와 그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 조선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의 서론의 연원을 살펴보면 그가 연경에 간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즉 연경에서  명유들과 교유하고 거기서 많은 진적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一新)한 것이다. 즉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예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 가르침의 영향으로 서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는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소급하여 한․위 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예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고법을 익히는데 부단히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모든 서체의 장점에 대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것을 창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朴淸高)한 추사체이다. 추사는 글씨 이외에 난을 잘 쳤는데 난 치는 법을 예서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고, 또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국보인 세한도와 모질도․부작란도가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별호가 많고 전각을 많이 하였는데 전각에 있어서의 그의 각법(刻法)은 매우 독특하여 하나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추사의 간단한 생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이 낳은 문학자․실학자․서화가로  본관은 경주인이다. 자는 춘원(元春)이고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등 200여 종류가 넘는다. 추사는 예산 출신으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김노영에게 출계하였다.

  1819년(순조 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설교․검교․대교․시강원보덕을 지냈다. 그러나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조정됐다는 혐의로 추사는 고금도로 유배되었으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추사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여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는 다시 10년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추사는  현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으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다시 연루되어 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에 풀려났다.
이때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문 정진에 몰두하였다.



추사가 귀양길에 전라도에서(유배지에서 새롭게 태어난 추사체)

추사는 헌종6년(1840) 6월 동지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윤상도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전주에 들르게 되었다. 그 때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9월을 지날 무렵으로 온 산은 만산홍엽이었다. 추사는 창암을 전라감염에 청하여 만나고는 남원으로 향하였다.

남원에서는 물론 아무리 귀양길이지만 광한루도 보았을 것이고, 그 곳에서 ‘모질도’를  제작하게 된다. 이 그림의 소재는 성난 다람쥐로 발문에는 ‘耄耋圖作於帶方道中(모질도를 대방 길에서 그리다)’이라고 썼다.

이 다람쥐 그림은 남원을 지나면서 그린 것으로 아마도 추사 자신의 억울함과 귀양가는 심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치 다람쥐인가 언뜻 보면 아주 화가난 고양이와도 같은 느낌을 그림에서 받을 수 있다. 

추사는 남원을 지나 땅끝 마을이 있는 해남 대흥사(구명은 대둔사)의 일지암으로 향했다. 비록 유배가는 길이지만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윽고 대흥사에 도착하여 원교가 쓴 ‘침계루’ 누각과 대웅전의 ‘대웅보전(원교가 신지도에 유배와서 쓴 글씨)’이라는 편액을 보고는 마음이 뒤틀려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면서 원교의 ‘대웅보전’편액을 떼어내라고 청하였다. 이유인즉 원교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치는 사람이고 글씨에 속기가 있어서 법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사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만이 최고라는 상태에서 ‘대웅보전’의 4글자와 바로 옆 선방의 ‘무량수각’ 편액을 써주었다.

추사는 대흥사에서 초의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다음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화북진으로 향한다. 화북진에 도착하여 유배지인 대정읍성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학문에도 물론 열정을 다했지만, 더 나아가서 서법과 화법연구에도 온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서울 본가댁으로 편지를 해서 유석암 소동파 성친왕 요희전 양동서의 필첩을 가져오게 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직 괴로운 마음을 표현 할 길은 글씨와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또 이겨내 마침내 추사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추사체가 형성되는 계기는 글씨 형태의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추사의 마음이 완전히 추기급인(推己及人: 자기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생각에 미치는 경지)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추사는 드디어 제주도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기가 써 준 ‘대웅보전’ 편액을 보고는, ‘역시 원교의 글씨가 낫다’고 하면서 다시 원교 글씨를 걸어 놓았다. 추사는 이미 귀양살이 가기 전 자기도취의 모습이 아니라, 세한을 이겨낸 노송이 되었던 것이다. /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 연구원>  

추사가 남원(대방은 남원의 구명)을 지나가면서 그린 ‘모질도’이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 가기 전에 대흥사에 들러 원교의 글씨 ‘대웅보전’편액을  뜯어낸 작품이다. 그렇지만 추사가 유배지에서 풀려날 때 다시 걸라고 하여 지금은 대흥사에 걸려있다.  대흥사에서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무량수각’의 편액이다.


대흥사에 있는 ‘일노향실’의 추사 편액 
임실에 있는 효충서원의 추사편액이다. 작은 월석비도 추사가 직접 썼다.


http://www.j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49#092a



추사가 남긴 전라도 금석(하)


  • 김영애
  • 승인 2002.12.06 11:14


추사와 선사(禪師)들의 인연

  추사는 불교와도 인연이 많은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충남 예산군 용궁리 자택 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사찰이 있어,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추사는 당대의 고승들과 친교를 맺었고,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와의 관계는 돈독하여 다도와 불경에 대하여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때부터 중흥하게 된다. 초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즉 차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깨끗한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초의에게는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또한 시와 선도 둘이 아니었다. 

  초의와 추사는 동갑내기로 항상 편지글에는 웃음과 농이 넘쳐흘렀으며, 혹시 초의선사의 정성어린 햇차가 좀 늦게 당도하면 추사는 아부로, 때론 공갈과 협박으로 차를 원하였다. 아무튼 그리하여 차 한 봉지라도 얻으면 그 차향에 취하여 용솟음치는 우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을 움직여 글씨를 썼다. 초의에게 써준 "명선(茗禪)"이라는 불후의 명작이나 현재 대흥사에 걸려있는 "一爐香室(일로향실)" "運百福(운백복)"이란 현판글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차향을 머금게 한다. 또 제주도 귀향살이 때 써운 반야심경 한 벌은 그야말로 또박또박한 해서로 구도자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백파선사비에 대하여

   백파는 고창군 도솔산 선운사에 기거하였고, 그의 선사상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죽음과 삶이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특히 ‘선문수경’ 을 세상에 내놓자 이에 반박 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였다.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라고 지칭되는바, 그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깨달으면 교(敎)가 선(禪)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벗이며 불교에 박식한 추사가 끼여 들어 백파의 오류를 적어 보냈고, 백파는 추사에게 13가지로  논증한 답신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추사는 또 「백파망증 15조」로 반박을 했고,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그 추사에 그 백파라고나 해야하겠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길에 백파를 만나기 위해 정읍의 조월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으나 그때 두 사람은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다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 있는사이 백파가 입적을 하여 다시는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입적한 후에 설두와 백암스님이 추사를 찾아와 백파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그는 백파와의 옛 일을 회상하면서 붓을 잡아 지금의 "백파선사비"가 탄생하게 되었다.  

추사는 비문 중에 "자기와 백파와의 논쟁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아무리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스님을 일으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즉 범부들은 백파와 추사가 나눈 선문답을 모르고 다만 그 들만이 그 진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선운사 백파선사비(白坡禪師碑)는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번지 도솔산 선운사 부도전 내에 현존하고 있다. 이 비는 1986년 9월 9일 지방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전면에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고 썼는데, 이것은 추사가 백파를 화엄종주요 대율사라 칭송한 것이다.     

  추사의 작품 중에 많은 비갈(碑碣)이 있으나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선운사 백파선사비(일명 백파대율사비)로, 추사가 타계하기 1년전인 1855년(철종 6년)에 썼다.

백파선사비의 명문(陰記)를 보면 건립연도가 "숭정기원후사무오오월 일입(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858년이다. 그렇다면 백파의 문도들은 비문을 받아서 바로 세우지 않았다. 즉 추사가 비문을 써서 설두와 백암 등에게 증(贈)하였다. 그러나 여건상 이 비를 바로 세우지 않고 약 3년 정도 간직해 두었다가 후(추사가 몰함)에 세우려고 하니 음기의 왼쪽 부분이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하여 추사체를 집자하여 비석 세운 날짜를 기록하였다고 임창순 선생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또 다른 부분에 의심이 있는데, 즉 본문의 마지막 줄 빈(貧)자부터 전(轉)자까지는 추사가 직접 쓰지 않고 집자한 흔적이 보인다. 왜냐하면 추사의 획은 가로획이 약 15도 이상 위를 향하고 있으나 마지막 줄의 압(壓), 풍(風), 불(不)자 등의 가로획은 너무 수평으로 가고 있어 힘을 잃고 있으며, 또 글자의 간격을 앞 글자들에 비하여 너무 비좁게 붙여 놓았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추사의 마지막 줄도  추사가 직접 써 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집자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고창 선운사에 가면 꼭 부도전에 들러 백파선사비를 한번 탐독해보기 바란다.   
  

임실에 있는 효자비

임실읍 정월리 당목 마을에 위치한 효자비각은 임실읍을 거쳐 강진쪽으로 칠팔백m 가면 왼쪽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자세히 보면 김복규 부자의 효심을 기리는 효충서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은 1855년 나라의 명으로 효행을 기록하기 위하여 전주시 삼천동에 세웠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김복규는 효성이 지극하여 16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중 천신의 현몽으로 신약을 얻어 달여드리니 그의 부모가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이 같은 행장을 찬양하여 나라에서 증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의 벼슬을 제수했다. 김기종은 부친의 효심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상에는 3년간을 묘소에 초막을 짓고 그 애통하는 곡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울음처럼 산야를 메아리쳐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이름까지 호동(虎洞)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김복규와 김기종의 효자비"는 현재 비각과 비석 전체를 임실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옆에는 효충서원이 있어 아산 송하영이가 쓴 편액과 주련이 있다. 이 효자비의 전면은 모두 예서체로 썼는데, 이미 추사체의 완성 단계로 중국의 어떤 예서의 필법도 들어있지 않고, 추사의 독자적인 자가풍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특히 추사만의 독특한 예서획을 구사하고  있으며 공(公)자의 두 점을 보면 마치 새가 창공을 비행하는 느낌을 갖게된다. 그리고 효자각 비액은 추사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비의 후면을 보면 추사의 활달한 해서체를 볼 수 있는데, 어느 한곳도 소홀함이 없고, 단지 무심의 상태에서 붓끝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추사가 남긴 전라도의 금석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운사의 백파선사비, 임실의 김복규와 김기종의 효자비 및 효자각 편액, 완주군 용진면의 정부인광산김씨묘비,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비가 있다. 각 행정기관들은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 것이고, 이미 지정된 것은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 연구원>



<관련 기사>

추사 김정희가 만년에 쓴 비문, 임실서 발견

전주최씨 최성간 묘비…"장중하면서 짜임새 있는 작품"


추사 김정희가 쓴 최성간 묘비
추사 김정희가 쓴 최성간 묘비[전라금석문연구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전북 임실에서 발견됐다.

전라금석문연구회와 임실문화원은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에 있는 전주최씨 만육파 후손 최성간(1777∼1850) 묘비를 분석해 앞쪽 글씨를 추사가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김진돈 연구회장은 "임실군 김철배 학예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며 "묘소는 사륜차로도 들어갈 수 없는 오지에 있으며, 금석문이 학계에 보고된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최성간 묘비 글은 조카인 최한중이 1851년 10월에 지었다. 그런데 김정희는 1851년 7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기 때문에 이듬해 10월 해배 이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묘비 뒤쪽 글씨는 추사 외가인 기계유씨 가문 유화주(1797∼1860) 작품이다. 비석을 세운 장소는 '임실(任實) 하신덕면(下新德面) 율치(栗峙)'로 기록됐다.

김 회장은 "추사만의 독특한 좌우 대칭을 이룬 균형 있는 필획이 나타난다"며 "예서(隷書·고대 서체인 전세를 간략하게 만든 서체)로 쓰면서도 '중'(中)자와 '사'(事)자 등에서는 해서(정자체) 특징이 보인다"고 말했다.

추사 연구자인 박철상 박사는 "묘비 글씨는 추사체가 완성돼 가던 시기에 썼다는 점에서 김정희 서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자료로, 이 시기 추사의 예서는 많지 않다"며 "전서, 예서, 해서 등 여러 서체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 확인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람 인(人)자는 추사가 말년에 종종 사용한 형태의 글씨인데, 비문에서는 처음 발견됐다"며 "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김정희가 말년에 남긴 묘비 금석문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추사 김정희가 쓴 최성간 묘비 탁본
추사 김정희가 쓴 최성간 묘비 탁본[전라금석문연구회 제공]

연구회와 임실문화원 측은 고창 선운사 '백파선사비'(白坡禪師碑), 완주 '전주유씨 묘비', 임실 '정려비' 등 전북 지역에 유독 김정희 글씨가 많은 데에는 추사의 인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 회장은 "추사와 교유한 초의선사는 효성이 지극했던 임실 지역 인물 김기종과 친했고, 김기종은 최한중과 친교 관계를 유지했다"며 "최한중은 추사와 친교했고, 최성간 묘비를 세우는 데에도 많은 공적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05/16 14:07 송고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90516103800005?input=openapi&apinput=search&domainput=jj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