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방 이야기

"해양문화의 명장면" 기사모음

"해양문화의 명장면" 


국제신문에서 2018년 1월부터 관심속에 연재한 "해양문화의 명장면"의 기사 모음을 소개한다.

상세한 기사내용은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기사를 읽을 수 있다.                                   


1 2 3 4 5
해양문화의 명장면 <11> 천원지방 사상, 주역 그리고 바다 [문화]2018.03.20(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1> 천원지방 사상, 주역 그리고 바다
- 땅·바다 네모라고 생각한 중국인 - 천주교 전하러 온 마테오 리치의 - 둥근 모양 세계지도 보고 ‘경악’ - ‘산해여지전도’란 이름으로 번역 -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2> 중국인 장더이의 세계일주와 대양항해 [문화]2018.03.27(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2> 중국인 장더이의 세계일주와 대양항해
    - 동문관서 외국어 배운 장더이 - 민간사절단 따라 첫 유럽여행 - 이 후 淸 공식사절단 통역사 등 - 평생 여덟 번 해외 나들이 떠나 - 여덟 권의 ‘세계견문록’ 남겨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3> 조선통신사 국서전명식 그림 [문화]2018.04.03(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3> 조선통신사 국서전명식 그림
    - 그리스도교·남만문화 급속 확대에 - 17세기 중엽 쇄국정책 편 에도막부 - 조선하고만 정식 외교관계 맺고 교류 - 대표 사절단 통신사 곳곳에 흔적 남겨 - 에도시대 화...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4> ‘해동제국기’ 속 기묘한 지도 한 장 [문화]2018.04.10(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4> ‘해동제국기’ 속 기묘한 지도 한 장
    - 성종 때 완성된 ‘해동제국기’ - 조선에 쌓인 일본 정보 집대성 - 책에 실린 ‘일본국대마도지도’ - 모양 왜곡됐지만 포구·군 이름 - 유력 인물들 정보 낱낱이 기...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5> 코르테스의 아메리카 원정 [문화]2018.04.17(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5> 코르테스의 아메리카 원정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가는 항로 개척 - 에스파냐 탐험가들의 ‘금’ 욕망 촉발 -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 휘하 코르테스 - 멕시코 원정 계기 국왕권한 위임 받아 - 아즈테카...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6> 오징어의 박물학, 오징어의 정치학 [문화]2018.04.24(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6> 오징어의 박물학, 오징어의 정치학
    - 실재 동물에 상상력 덧붙여 - 이색괴물 만든 중국 ‘산해경’ - 한자 ‘오적어’서 이름 유래된 - 오징어를 머리 하나 몸 10개 - ‘하라어’라는 물고기로 소개 -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17> 영남해로, 민족사와 함께한 경상도 바닷길 [문화]2018.05.08(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7> 영남해로, 민족사와 함께한 경상도 바닷길
    ...해양문화의 대동맥 전통시대 길에는 육로와 해로가 있었다. 농업문화가 육로, 토지, 농촌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면 해양문화는 수로로서 해로, 포구, 어촌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8> 정성공 정권과 해양 대만 [문화]2018.05.15(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8> 정성공 정권과 해양 대만
    - 중일 무역상이던 중국인 아버지 -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 명·청 교체기 ‘반청복명’ 아래 - 4000척 함선으로 대만해협 건너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몰아내...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19> 부산포 초량왜관의 생활상 [문화]2018.05.22(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19> 부산포 초량왜관의 생활상
    - 유일한 일본인 외국 거주지였던 - 부산의 절영도·두모포·초량왜관 - 180년여 걸친 관수의 일기들 - 한일 교류 다양한 실상 알려줘 - 10만 평에 가옥·상가·사찰 배...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0> 조선의 ‘해동제국기’ 왜 대단한가 [문화]2018.05.29(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0> 조선의 ‘해동제국기’ 왜 대단한가
    - 1470년대 유럽서 인쇄지도 출현 - 해동제국기 원본도 1471년 완성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집 - 1453년 후쿠오카 승려에게 획득 - 지도집에 실린 ‘일본본...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1> 인도양 ‘해상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알부케르케 [문화]2018.06.05(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1> 인도양 ‘해상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알부케르케
    - 13~14세기 중반까지 인도양은 - 유럽·아시아 잇는 세계경제 중심 - 아랍·페르시아·중국·인도 등 - 세력 간 우위 확보 경쟁 치열 - 16세기 초 진출한 알부케르케...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2> 조선 선비, 청어장사를 하다 [문화]2018.06.12(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2> 조선 선비, 청어장사를 하다
    - 사계절 전 해역서 많이 잡힌 - 조선 시대 대표 어종 ‘청어’ - 경북 성주 유배된 선비 이문건 - 여러 경로로 13만 마리 사들여 - 문경새재 넘어 전국으로 유통 -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3> 미역국과 쌀밥, 한국인을 낳고 기르다 [문화]2018.06.19(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3> 미역국과 쌀밥, 한국인을 낳고 기르다
    - 산모들 아이 출산 후 먹는 음식 - 중국선 오래전부터 오골계 사용 - 中 문화·의학 받아들인 한반도는 - 이미 미역국 먹는 풍습 자리잡아 - 어미 고래가 먹는 모습서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4> 항구에서 바라본 부산화교 [문화]2018.06.26(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4> 항구에서 바라본 부산화교
    - 日서 활동하던 화상 황야오동 - 부산 일본거류지서 상점 내려다 - 현지 일본인 상인들과 충돌 발생 - 왜관 같은 청관거리 건설 계기돼 - 해삼수출·포목점·음식점 등 운...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5> 초량왜관 스캔들 [문화]2018.07.03(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5> 초량왜관 스캔들
    -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 외국 유일 일본인 도시 초량왜관 - 임진왜란 이후 가족 거주 제한 - 엄격한 조선인 출입 통제에도 - 숙종 때 ‘왜관 교간사건’ 발생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6월 독자권익위원회 [메인]2018.07.08(일)  
    6월 독자권익위원회
    ...해양문화의 명장면’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그동안 항구 포구 등을 다룬 콘텐츠는 많았는데, 해양문화에 대한 조명은 참신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창작물의 원재료가 될 수 있어 ...

    관련키워드 독자칼럼

  • 해양문화의 명장면 <26> 바다 멀리 보석의 나라가 있다-유구국(琉球國) [문화]2018.07.10(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6> 바다 멀리 보석의 나라가 있다-유구국(琉球國)
    - 일본 남단 위치한 오키나와 - 동남아 물산, 韓·中·日과 교역 - 16세기까지 번성했던 유구국 - 조선 태종 때 통신관 이예 파견 - 팔려간 조선인 44명 귀환시켜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2018 신년특집

  • 해양문화의 명장면 <27> 바야돌리드 논쟁-해양공간을 통해 접촉한 ‘타자’ [문화]2018.07.17(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7> 바야돌리드 논쟁-해양공간을 통해  접촉한 ‘타자’
    - 콜럼버스 등 에스파냐 초기 정복자들 - 원주민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 간주 - 야만적 노동력 착취 통해 이익 극대화 - 기독교 전파 지장 준다는 우려에 - 성직자·신학...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28> 청어, 임진왜란을 알리다 [문화]2018.07.31(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8> 청어, 임진왜란을 알리다
    - 동해 ‘조선물고기’ 청어가 서해로 - 다시 중국 요동 앞바다로 이동 - 유성룡 ‘징비록’ 녹후잡기에 - 임진왜란 조짐으로 보았으나 - 17세기 전후 동아시아 소빙기 탓...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29> 상어가죽, 조선의 가죽공예를 대표하다 [문화]2018.08.07(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29> 상어가죽, 조선의 가죽공예를 대표하다
    - 가야·진한지역 패총·고분서 - 발굴된 상어 이빨·척추뼈 통해 - 선사시대부터 어획해 식용 후 - 뼈로 장식품 등 제작 활용 추정 - 모래알 같은 돌기 돋은 가죽 - 거...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0> 황해에서 요동친 조선과 청나라 [문화]2018.08.21(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0> 황해에서 요동친 조선과 청나라
    - 청 권력자 리홍장 영국전함 구매 - 황해 북쪽 방어 위해 부대 창설 - 임오군란 중 흥선대원군 납치 등 - 조선 문제에 직접적인 군사 개입 - 日이 지지한 갑신정변 제...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1> 관수일기로 본 300여 년 전 부산포 날씨 [문화]2018.08.28(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1> 관수일기로 본 300여 년 전 부산포 날씨
    ...해양문화의 교류 측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어쨌든 호되게 더운 이번 여름을 보내며 지구 온난화가 현대사회의 재앙이 되지 않도록 좀 더 겸손하고 지혜롭게 환경문제를 고민하고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2> 조선에서 일본 지도 ‘양극화’ 가 의미한 것은? [문화]2018.09.11(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2> 조선에서 일본 지도 ‘양극화’  가 의미한 것은?
    -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통일 후 - 정세 안정돼 지리정보 관심 급증 - 서양과 접촉 후 측량기술도 발전 - 열도 전체 정밀 지도 제작 노력 - 석천류선·마연자고암 등이...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3> 마데이라 와인과 미국혁명 [문화]2018.09.18(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3> 마데이라 와인과 미국혁명
    - 포르투갈 대서양 진출 과정 속 - 식민지 된 아프리카 마데이라섬 - 인도양 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 - 도수 높고 독특한 풍미나는 와인 - 17세기부터 주력 수출품 부각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4> 델프트의 푸른빛 : 청어와 네덜란드의 번영 [문화]2018.10.02(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4> 델프트의 푸른빛 : 청어와 네덜란드의 번영
    ...해양문화의 명장면 제4회). 그랬던 청어가 15세기에는 발트해에서 점차 사라지더니 네덜란드의 앞바다인 북해로 이동해버렸다. 유럽의 궁벽했던 이 ‘저지대(Nederland...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5> 곰솔, 조선의 해양문화를 떠받치다 [문화]2018.10.16(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5> 곰솔, 조선의 해양문화를 떠받치다
    - 명 ‘해금 정책’ 영향받은 조선 - 연근해 지역 소극적 방어 치중 - 수군용 판옥선·조운선 등 재료 - 단단하고 무거운 ‘곰솔’이 제격 - 군 기지 건설 등 다방면에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6> 장더이가 본 빅토리아 시대 영국 해양문명 [문화]2018.10.23(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6> 장더이가 본 빅토리아 시대 영국 해양문명
    - 중국인 최초 세계 일주한 장더이 - 통역관으로 여러 차례 영국 방문 - 도시시설·종교·의학·요리 등 - 다양한 분야 자세한 기록 남겨 - 신식 군함·무기에 특히 주목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7> 동래부 무관 이지항의 홋카이도 표류기 [문화]2018.10.30(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7> 동래부 무관 이지항의 홋카이도 표류기
    - 이지항 타고 가던 강원도행 배 - 큰 바람·파도 때문에 길 잃어 - 북동 방향으로 며칠 흘러가다 - 조선인 최초 북해도 닿아 탐험 - 얼굴색 검은 원주민 아이누인 - ...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8>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가 있었다 [문화]2018.11.06(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8>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가 있었다
    - 조선이 건국 후 처음 접촉한 - 일본 무로마찌 막부 정권 - 유력 무사들 연합체인데다 - 남북조·전국시대와 겹쳐 - 내란 들끓는 통제불능 상태 - 외교문서 트집 잡고,...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39> 설탕 제국주의 : 해양공간의 교류가 만든 일상의 변화 [문화]2018.11.13(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39> 설탕 제국주의 : 해양공간의  교류가 만든 일상의 변화
    - 인도·중국행 신항로 개척 속에 - 식민지 차지하던 유럽 해상세력 - 천연자원 수탈 한계 도달하자 - 사치품 설탕 원료 사탕수수 재배 - 경작지·가공공장 등 생산 중심지...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40> 바렌츠의 꿈: 북극항로와 환동해시대의 개막 [문화]2018.11.20(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0> 바렌츠의 꿈: 북극항로와 환동해시대의 개막
    ...해양문화의 명장면 34회 참고). 그렇다면 고래는 네덜란드의 번영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멜이 조선에 머물렀던 동안에 네덜란드의 포경어업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고래는 청...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41> 매향비, 바닷가 사람들의 천년 소원을 기록하다 [문화]2018.11.27(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1> 매향비, 바닷가 사람들의 천년 소원을 기록하다
    - 삼국시대에 주류 신앙된 불교 - 천상·중간·지하계로 우주 나눈 - 옛 샤머니즘과 닮은 점 많아 - 대부분 민초 최고의 소망은 - 해탈 아닌 천상계서 태어나는 것 - 고...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42> 만국공법과 근대 동북아 해양분쟁 [문화]2018.12.04(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2> 만국공법과 근대 동북아 해양분쟁
    - 청나라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 국제법 서적 번역 ‘만국공법’ 출간 - ‘영해’조항 등 해양 관련 법률 망라 - 프로이센 군함, 톈진항구 주변서 - 덴마크 선박 나...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43> 바다 건넌 조선 매, 쇼군을 매료시키다 [문화]2018.12.11(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3> 바다 건넌 조선 매, 쇼군을  매료시키다
    - 日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 - 귀족·영주들 매사냥 금지시켜 - 쇼군가문이 독점, 권위 상징돼 - “매 보내달라” 막부 간절한 요청 - 조선, 12차례 통신사 방문 통...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해양문화의 명장면 <44> 고려대장경 바다를 건너다 [문화]2018.12.18(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4> 고려대장경 바다를 건너다
    - 무로마치막부 쇼군 요시모치 - 조선이 대마도 정벌하자 - 진의 파악하려 보낸 사절단 - 인쇄본 1부 선물 받기도 - 경판 제작기술 뒤처졌던 일본 - 팔만대장경 갖길 원...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조봉권의 문화현장 <44> 부산의 해양문화·해양인문학을 위하여 [문화]2018.12.24(월)  
    조봉권의 문화현장 <44> 부산의 해양문화·해양인문학을 위하여
    ...해양문화의 명장면’ 목차와 내용을 다시금 들여다봤다. ‘근대의 갈림길, 조선의 지도’(제2회)에서 필자인 부경대 사학과 이근우 교수는 설명한다. “조선은 1402년 혼일강리...

    관련키워드 조봉권의 문화현장

  • 해양문화의 명장면 <45> 흑해, 러시아의 해양 진출 스토리 [문화]2018.12.25(화)  
    해양문화의 명장면 <45> 흑해, 러시아의 해양 진출  스토리
    - 러시아, 흑해 진출 하기 위해 - 17세기부터 투르크와 대립 - 1783년 크림반도 세바스토플에 - ‘흑해 함대’ 창설해 본격 시도 - 19세기 중반 정치·종교 문제로...

    관련키워드 해양문화의 명장면

  •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1> 프롤로그-다시, 바다로 [문화]2019.01.03(목)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1> 프롤로그-다시, 바다로
    ...해양문화의 명장면’ 시리즈 후속 - 부경대 HK+사업단과 손잡고 - 동북아 해역 중심 새 연재 시작 - 다양한 필진 흥미로운 역사 소개 ‘시즌 2’를 한다는 것은 ‘시즌 ...

    관련키워드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 [피플&피플] 손동주 부경대 HK+단장 [메인]2019.01.24(목)  
    [피플&피플] 손동주 부경대 HK+단장
    ...해양문화의 명장면’ 시리즈를 교양 총서로 내고, 올해부터 부경대 HK+ 사업단과 국제신문이 공동 기획해 연재를 시작한 ‘동북아 바다, 인문학으로 항해하다’도 중요한 사업으로...

    관련키워드 피플&피플



  • 해양문화의 명장면 <1> 프롤로그

    해양인문학의 ‘알쓸신잡’ 펼쳐집니다

    • 국제신문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18-01-02 18:54:36
    •  |  본지 22면


    - 독보적인 해양인문학 성과 구축
    - 부경대 CORE 사업단의 엔진
    - 사학과 교수진 6명 모두 참여
    - 시민·독자들에 흥미롭게 전달

    국제신문은 부경대 사학과와 공동으로 기획한 ‘해양문화의 명장면’을 새해부터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부경대 사학과는 한국에서 ‘해양인문학’을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개척한 학과다. 대학의 ‘개별 학과’ 차원에서 보아도, 국내에서 독보적이라 할 해양인문학 성과를 축적했다. 그뿐 아니다. 부경대는 2016년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시행한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코어 사업)에 선정됐다. 부경대 CORE 사업단(단장 정해조)은 2016, 2017, 2018년 3년 동안 해마다 26억 원씩 모두 78억 원을 지원받는다.

       
    새해부터 새 기획 연재 ‘해양문화의 명장면’을 본지에 집필하는 부경대 사학과 교수진 6명이 지난달 27일 부경대 해양인문학자료실에서 다양한 지도와 해도를 펼쳐놓고 글의 주제와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근우 신명호 박원용 박화진 조세현 김문기 교수.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부경대 CORE 사업단은 ‘해양인문학 특성화’를 내세워 CORE사업에 선정됐다. 부경대 CORE 사업단이 2016년부터 전력투구하는 해양인문학 특성화 사업에서 지난 10년간, 한발 앞서 해양인문학을 개척한 사학과는 핵심적 ‘엔진’ 구실을 한다. 이 기획에는 해양인문학의 최전선에서 연구와 교육을 펼쳐온 부경대 사학과 교수 6명 모두 필진으로 참여한다. 지난달 27일 부경대 대연캠퍼스 해양인문학 자료실에서 6인의 필진 김문기 박원용 박화진 신명호 이근우 조세현 교수를 만나 새 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해양인문학 연구의 ‘엔진’

       

    부경대 대연캠퍼스 중앙도서관 2층에는 ‘해양인문학 자료실’이 있다. 167㎡ 넓이에 해양인문학 관련 책과 자료를 8000권 가까이 갖췄다. 사학과 교수진의 일원이면서 부경대 도서관장도 맡고 있는 조세현 교수는 “부경대 CORE사업의 일환으로 해양인문학 자료실을 지난해 3월 열었다. 순수한 해양인문학 관련 도서만 1만 권 모으는 것이 목표다. 해양인문학에 특화된 이런 공간은 전국에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사학과 학과장인 김문기 교수가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는 부경대 CORE 사업단 차원에서 ‘한국해양수산아카이브’(marinearchive.pknu.ac.kr)를 개소했다. 여기서는 희귀한 해양수산 자료를 누구나 온라인으로 검색하고 활용할 수 있다. 아카이빙을 끝낸 책이 아직은 250권 정도지만, 계속 발전할 것이다. 이 아카이브를 활성화하는 데서도 사학과가 할 일이 많다.” 이와 함께, 부경대 CORE 사업단은 해양인문학 전문가 양성을 위한 학사-석사 연계 과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물론, 사학과 교수진은 여기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한다.

    ■ 10년 전부터 바다의 인문학 주창

    ‘바다’를 기반으로 출발해 ‘해양’에 지극히 관심이 높은 국립부경대(부경대는 1941년 문을 연 부산수산대와 1924년 시작한 부산공업대가 1996년 통합해 출범했다)와 해양도시 부산의 신문으로 꾸준히 해양문화 기획을 해온 국제신문이 “어떻게 하면 해양인문학을 시민과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할까” 고민하다 나온 것이 ‘해양문화의 명장면’이다.

    그런데 이 기획에 부경대 사학과 교수진 전원이 필진으로 참여하는 것은 솔직히 좀 놀랍다. 전공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를 쟁쟁하고 신중한 학자 6명이 해양인문학이라는 기치 아래 신속히 단일대오를 이뤄 대중적 글쓰기 필진으로 기꺼이 나서는 광경은 학계에서 흔치 않을 장면이다. 실력과 내공이야 소문난 것이고, ‘팀워크’가 웬만큼 좋지 않고서야 한 학과 교수진 모두 ‘오케이 사인’을 동시에 낼 수 있을까.

    한국고대사를 전공했고 대마도 연구, 해도(海圖)와 지도(地圖) 연구 등을 활발히 하는 이근우 교수의 설명이다. “2007년 ‘조선 전기 해양 개척과 대마도’(부경대 해양문화연구소 지음)를 시작으로 2008년 ‘19세기 동북아 4개국의 도서 분쟁과 해양 경계’(이근우 김문기 신명호 조세현 박원용), 2009년 ‘조선 시대 해양환경과 명태’(해양문화연구소), ‘부산과 대마도 2천년’(부경대 대마도연구센터) 등을 꾸준히 내는 데 교수님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해양문화와 해양사에 관한 공감이 이 뤄졌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 다채로운 성과를 축적하다

    이런 분위기는 개개인이 다양한 성과를 쌓는 것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사, 조선 왕실 문화·역사에 관해 많은 책을 내 잘 알려진 신명호 교수는 부경대 해양문화연구소장을 지내며 이근우 교수와 ‘한국수산지’를 번역하는 등 해양인문학을 연구하고 주제를 발굴해나갔다. 그는 ‘해양문화의 명장면’에서 “불교가 융성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관음 신앙을 해양문화 관점에서 조명하고, ‘주역’ ‘영남 해로’ ‘해상 진상품 ’ 등을 통해 유교 나라인 조선의 해양 인식을 비교해볼 예정”이라고 했다.

    중국 사상문화사와 동아시아 아나키즘을 깊이 섭렵한 조세현 교수는 해양 시각으로 본 근대 중국 형성을 주제로 책 ‘천하의 바다에서 국가의 바다로’, ‘부산 화교의 역사’를 냈다. 그는 “청나라 최강 북양함대가 일거에 몰락하는 과정, 중국 ‘해양영웅’ 정성공, 화교 이야기를 할까 한다”고 했다. 서양 근현대사 전공이며 ‘E. H. 카 평전’(조너선 해슬럼 지음), ‘10월 혁명’(프레더릭 C. 코니 지음)의 번역자 박원용 교수는 2017년 부경대 해양인문학연구소장으로 굵직한 해양인문학 학술대회를 잇달아 주최했다. 그는 ‘19세기 동북아 4개국의 도서 분쟁과 해양 경계’에 ‘변경의 관점에서 본 쿠릴 열도 영유권 분쟁’을 썼고, 이번 기획연재에서 ”유럽의 근대적 국가 성립에서 국가 권력과 독립적 해상세력(쉽게 말해 해적) 관계”를 풀어본다.

    ■해도·청어·왜관스캔들·해적…

    환경사, 해양사, 기후 관련 역사를 연구해 ‘청어 한 마리 놓고 밤새 역사 이야기한다’는 평을 듣는 김문기 교수는 “청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청어는 유럽 한자동맹, 네덜란드의 성장 등 세계사에 영향이 컸고, 임진왜란이나 조선이 19세기에 바다를 중국에 여는 상황 등에서 흥미롭고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소개했다.

    여기에 조선통신사 연구의 권위자 박화진 교수가 가세한다. 일본 도쿄대에서 바다와 관련한 인문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조선통신사, 왜관 등 바다를 매개로 한 한· 일 관계사를 깊이 연구했다. 박 교수는 “해양교류 측면에서, 한·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왕래길과 유산, ‘초량왜관 스캔들’ 등에 관해 들려드릴까 한다”고 예고했다. 바야흐로 해양문화의 명장면이 매주 독자를 찾아간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해양문화의 명장면 <2> 근대의 갈림길, 조선의 지도

    위풍당당 조선 건국의 기개 담긴 ‘혼일도’(1402년 제작)… 이집트 나일강까지 표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1-09 18:53:06
    •  |  본지 22면


    - 현존 동아시아 最古 세계지도
    - 커다란 한반도·왜소한 日 대비
    - 아프리카 대륙도 정확히 담아
    - 연안 따라 표시된 수군기지
    - 강력했던 조선 해군 나타내

    - 이후 지도 300여개 만들었지만
    - 육지에 얽매여 ‘海圖’ 등한시
    - 지리정보의 폐쇄성도 한 몫
    - 조잡한 세계지도만 나돌게 돼

    - 유럽 따라 바다지도 만든 日
    - 목판·동판 인쇄해 민간에 판매
    - 결국 바다에 대한 지식·활용
    - 두 나라의 근대화 흐름 결정

    근대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바다에 대한 지식과 활용이 근대의 지평을 결정하였다. 수평이 지평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제국은 육지를 아우른 결과였으나, 근대의 제국은 바다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은 왜 근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그 해답은 지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1402년(조선 태종 2년)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며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반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근우 교수 제공

    ■혼일도

    조선은 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도)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동으로는 일본열도부터 서로는 아프리카까지 나타낸 세계지도이자,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지도 중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다.

    놀랍게도 ‘혼일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한 때가 1486년이고, 이곳을 지나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것은 1498년이다. 그보다 80여 년 전에 조선이 제작한 ‘혼일도’에 이미 아프리카 대륙 전체 모습이 거의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알렉산드리아 팔로스의 등대, 나일강과 그 수원지인 달의 산도 표시되어 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의 지리상의 발견을 배우면서 그들의 ‘발견’만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 지도는 몽골제국이 입수한 정보를 고려가 입수하였고, 이를 다시 조선이 이어받아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부분은 중국의 지도를 참조했을 테지만, 조선 지도는 스스로 제작했을 것이고, 거기에 일본에서 입수한 일본지도를 적당히 배치하였다. 당시 유럽 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미지의 공간, 가상의 공간은 일체 배제되었다.

    ■혼일도 속 수군기지

       
    ‘혼일도’에 표시된 부산 근처 수군 기지들(바닷가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위)과 아프리카·아라비아.

    ‘혼일도’ 속의 조선은 당당하다. 중국을 지도의 한가운데 그렸지만 동쪽에 자리한 조선은 중국과 겨룰 자신이 있다는 듯 그 크기를 과시하고 있다. 일본은 바다 속에 기울어진 채 왜소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 건국 직후의 기개가 느껴진다.

    지도를 좀 더 들여다보면, 해안을 따라서 둥근 원들이 그려져 있다. 자칫 섬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이 설치한 수군기지다. 부산 주변을 보면, 서생포, 두모포, 해운포, 부산포, 안골포가 보인다. ‘혼일도’는 단순히 지리를 보여주는 지도가 아니었다. 조선이 왜구의 침략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왜구를 막기 위해 극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켰고, 세종 대에는 수군의 수가 5만 명이 넘었다. 지금 우리나라 해군의 수가 5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많은 수군을 양성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강력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에 이르러 진가를 발휘했다. 수십 문의 함포를 갖춘 수백 척 전선으로 일본군을 해상에서 제압할 수 있었다. 일본이 50만 정의 화승총으로 무장한 세계 최강 육군을 보유했다면,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으로 맞서 싸웠다. 고려 시대 최무선의 진포 대첩(1380년)은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해상전투였다. 이후 조선도 해상에서 왜구를 포착하여 화포로 침몰시키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공로를 이순신에게만 돌릴 수 없다. 조선이 만들어내고 운용한 시스템도 중요했다.

    ‘혼일도’ 이후에도 조선은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실로 다양한 지도가 있다. 300개가 넘는 현 단위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도의 대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대동여지도’조차 조선이 제작한 지도 전체에서 보면 빙산의 일각이다.

    ■삼남해방도

    그러나 땅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가 아니라 바다를 그린 해도로 가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조선에는 해도가 없다. 조선 후기 ‘삼남해방도(三南海防圖)’가 그나마 자세하게 바닷길을 나타낸다. ‘삼남해방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지도는 충청·전라·경상도의 해안과 바다의 방어체제를 그렸다. 섬 사이를 지나는 수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곳곳에 각 지점 사이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부산 주변을 보면 거제도, 대마도, 울산 등으로 이어진 해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삼남해방도’는 연안의 물길을 그리는 데 그쳤다. 철저하게 연안에 집착한다. 다도해에서도 ‘바깥 바다(外洋)’라고 표시할 지경이다. 항해를 위한 해도(chart)가 아니라 육지의 연안을 그린 지도(map)다. 바다는 외부로 향한 진출보다 그저 침략과 일탈의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의 ‘천하도’

    조선 후기 세계지도는 퇴보를 계속하였다. ‘혼일도’는 자취를 감추고 ‘천하도’라는 왜곡된 지도가 유행한다. 한가운데 중국을 그리고, 조선은 그 옆에 작은 반도로 그렸다. ‘혼일도’의 지리정보는 사라지고, 지도 주변에 가상적인 원형의 대륙과 바다가 나타난다. 심지어 이런 ‘천하도’가 ‘혼일도’를 심하게 왜곡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조선 내부는 대단히 자세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계를 벗어나면 애매하기 그지없는 세상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큰 학자 최한기가 마테오 리치의 ‘만국전도’를 한 차례가 그렸지만, 개인적 관심에 머물렀고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일본의 세계지도와 해도

    이웃 일본은 달랐다.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인의 거주 지역을 만들어 놓고, 그들로부터 꾸준히 세계가 돌아가는 사정을 듣고, 신대륙을 포함한 세계지도도 입수하였다. 세상의 다양한 인종을 함께 그린 세계지도까지 제작하였고, 이를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유럽의 해도를 모방하여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해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일본 자체에 대해서도 아주 정밀한 지도를 제외하고는 민간에 유통되도록 하였고, 목판·동판으로 인쇄해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쉽게 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지도를 그린 병풍도 만들고, 심지어 자기 나라 지도를 그려 넣은 접시도 만들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를 사서 자기 나라의 형편도 알고, 당시 알려진 세계 모습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오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페리 제독의 목적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지도를 깊이 감추어 두려고만 하였다. 규장각과 장서각에 많은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는 이유다. 시중에 나도는 지도는 대단히 조잡한 지도로, 겨우 한반도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해도는 단 한 장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육지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리정보를 비밀에 붙이려고 한 조선은 근대라는 흐름에 올라탈 수 없었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바깥세상에 관심이 있는가?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해양문화의 명장면 <14> ‘해동제국기’ 속 기묘한 지도 한 장

    조선초 제작 추정 말굽모양 지도 한 장, 대마도 정보 결정체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4-10 18:57:44
    •  |  본지 22면 
         


    - 성종 때 완성된 ‘해동제국기’
    - 조선에 쌓인 일본 정보 집대성

    - 책에 실린 ‘일본국대마도지도’
    - 모양 왜곡됐지만 포구·군 이름
    - 유력 인물들 정보 낱낱이 기록
    - 세종 1년 이종무 장군의 정벌군
    - 공격 지점 이름·항로 거의 일치

    - 제작자로 추정되는 외교관 이예
    - 헌신적 노력 덕에 정벌도 가능

    기묘한 지도 한 장이 ‘해동제국기’(신숙주 편, 1471년)라는 책에 실려 있다. 얼핏 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도 알기 어렵다. 흰 부분이 땅이고 조개 무더기처럼 보이는 것이 바다다. 그렇게 보면 비로소 울퉁불퉁한 말굽처럼 생긴 땅의 윤곽이 떠오른다. 그러나 말발굽처럼 매끈하지 않고 들쑥날쑥하게 그려져 있다. 더 자세히 보면 오목하게 들어간 곳마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쓰여 있다. 또 네모난 칸에 대마도(對馬島), 미녀군(美女郡) 같은 좀 더 큰 글씨도 보인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일본국대마도지도(日本國對馬島之圖)라는 큰 글씨가 보인다. 바로 대마도 지도다.
       
    대마도의 명소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아소만 전경.

    원래 대마도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70km가 조금 넘고, 동서 최대폭은 20km가 되지 않는 길쭉한 형태의 섬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남북으로 길쭉한 섬을 마치 동그랗게 말아놓은 것처럼 그려놓았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왜 이런 이상한 지도를 그렸을까? 조선이 대마도 지형을 제대로 몰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지도에는 82개 포구 이름이 기록돼 있으며 8개의 군 이름, 당시 도주 종정국(宗貞國)과 전 도주였던 종성직(宗盛職)이 사는 지역까지 정확히 표시했다.

    일본조차도 17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마도의 구체적인 모습과 지명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471년 이미 조선은 대마도의 모든 포구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동제국기’ 본문에는 각 포구에 있는 가옥 수와 유력한 인물 정보도 낱낱이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왜 대마도를 이렇게 그렸을까? 해답은 바다 위에 그려진 흰 선에서 찾을 수 있다. 흰 선은 항로를 뜻한다.

    왼쪽 위에서 내려온 흰 선은 대마도 한가운데 그려진 만(灣)을 통과해 ‘훈라곶(訓羅串)’이라 쓰인 곳에 이르러서는 다시 반대편인 오른쪽 위로 이어진다. 훈라곶은 ‘후나코시(船越·선월)’라는 일본어 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후나코시’는 배를 넘긴다는 뜻이며, 육지로 배를 끌어 올려 반대편으로 넘길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현재도 이곳에는 ‘소선월(小船越)’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양쪽 바다 사이 거리는 600m 정도이고 최고 높이는 15m 전후다. 거친 바다를 100km 이상 우회하는 것보다, 육지로 배를 끌어서 넘기는 편이 훨씬 편했던 것이다. 또한 쫓기는 상황에서 이곳에 이르러 배를 반대편으로 넘기면 손쉽게 추적을 따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마도 지도를 제작한 사람은 이곳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 기해동정과 아소만

       
    ‘해동제국기’에 실린 기이한 형태의 대마도 지도. 지도 속 훈라곶이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반대편 바다로 옮기던 곳이다.
    고려 말부터 빈번하게 쳐들어온 왜구의 소굴이기도 하다. 훈라곶 또한 당시 왜구가 자주 사용한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로 기해동정(1419년 세종 1년 조선의 대마도 정벌) 때 이종무 장군이 이끈 정벌군은 아소만 입구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왜구 소굴을 소탕하고, 곧바로 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 훈라곶에 목책을 쌓고 왜구의 왕래를 차단했다. 그리고 다시 북쪽 해안으로 이동해 대마도를 지배하던 무사들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이처럼 대마도 지도의 서쪽에서 아소만으로 이어지는 항로는 기해동정 당시 항로와 일치한다.

    병선 227척, 병사 1만7000여 명을 동원한 대규모 정벌을 단행하는데, 대마도 형세를 보여주는 지도 한 장 없이 바다를 건넜을 리가 없다. ‘해동제국기’의 대마도 지도가 기해동정 당시 지도라 단정할 수 없지만, 최소한 이와 비슷한 지도가 있었을 것이다. 대마도 지도의 전체 윤곽은 크게 왜곡됐지만, 정벌군이 공격해야 할 아소만 내부를 크고 자세히 나타내는 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대마도 형태를 제대로 그린다면 아소만은 좁게 그릴 수밖에 없고, 결국 아소만 내부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다. 실제로 공격한 지점을 현재 지도에 표시해 보면, ‘해동제국기’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 지도의 제작자는?

       
    흔히 ‘해동제국기’의 저자를 신숙주라고 생각한다. 또한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를 저술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일본과 대마도를 딱 1차례 왕래했을 뿐이다. 그는 편찬책임자였고, ‘해동제국기’는 당시까지 조선이 축적한 일본과 유구(지금의 오키나와)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 본문에서는 대마도 지도의 훈라곶이라는 표기와 달리, ‘선월(船越)’이라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예(1373~1445년)라는 인물의 계문에서 대마도 지도와 동일한 지명 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지도에 기록된 대로 기해동정 때 처음으로 정벌군이 공격한 왜구의 소굴을 두지동, 정벌군이 목책을 설치한 장소를 훈라곶, 항로의 출발점을 내이포로 표기한 사례는 이예의 계문밖에 없다.

    훈라곶과 함께 내이포라는 표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제포의 제(薺)는 ‘냉이’라는 뜻이고, 우리말 ‘냉이’를 소리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 내이포(乃而浦)다. 내이포는 태종 6년(1406년)부터 문종 1년(1451년)까지 보이고, 단종 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 지리지부터 제포라는 표기가 나타난다. 이후 ‘해동제국기’가 완성되는 성종 2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로지 제포라는 표기만 사용했다. 따라서 신숙주가 대마도 지도 제작에 간여하였다면 당연히 제포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20년 전부터 쓰이지 않게 된 내이포라는 지명이 버젓이 ‘해동제국기’에 수록돼 있다.

    ■ 이예는 누구인가

       
    국립외교원에는 서희와 더불어 이예의 동상이 서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1396년 왜구에게 붙잡혀가는 상관을 따라가 스스로 포로가 됐다. 왜구의 소굴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그는 1400년 다시 어머니를 찾아 대마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이후 40여 차례 대마도와 일본을 왕래했다. 그야말로 대마도와 일본에 관한 한 당대 최고 전문가였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탁월한 정보력에 힘입어 조선은 1443년 대마도와 계해약조를 체결했고, 1350년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왜구의 활동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기해동정이라는 채찍과 계해약조라는 당근으로 왜구의 침입을 왜인의 교역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모두 조선이 왜구의 근거지에 대한 정밀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묘한 지도 한 장은 조선이 획득한 대마도 정보의 결정체이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해양문화의 명장면 <20> 조선의 ‘해동제국기’ 왜 대단한가

    15세기 지리정보 결합된 조선 시대 ‘아틀라스’(지도집)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5-29 18:47:58
    •  |  본지 22면  
         


    - 1470년대 유럽서 인쇄지도 출현
    - 해동제국기 원본도 1471년 완성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집

    - 1453년 후쿠오카 승려에게 획득
    - 지도집에 실린 ‘일본본국지도’
    - 세계 최초로 인쇄된 일본 지도

    - 조선통신사가 이용한 해로와
    - 日 내부 해로·기항하는 포구까지
    - 무로마찌 막부 상황 상세히 기록

    조선 전기에는 실로 다양한 책이 제작되고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해동제국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집 중 하나이다. 지도집은 아틀라스(atlas)라고 한다. 지도첩을 뜻하는 아틀라스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제라두스 메르카토르가 1595년에 ‘지도집 또는 우주의 창조에 대한 우주지리학적 명상과 창조된 우주’라는 다소 긴 제목의 지도집을 발행한 때이다. 그러나 그전에도 지도집은 존재했다. 다만, 인쇄된 지도집의 역사는 길지 않다.
       
    신숙주가 책임자가 되어 만든 조선 시대의 ‘해동제국기’에 실린 ‘일본본국지도’. 이근우 교수 제공
    ■ 인쇄지도의 역사

    전근대 시기의 지도는 대개 회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즉, 손으로 일일이 그린 것이다. 지도를 인쇄할 수 있게 되면, 대량으로 제작이 가능해지고 지리정보가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 그래서 지도를 인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사소하지 않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인쇄지도는 언제 제작되었을까? 사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나라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당연히 유럽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인쇄지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세계지도 분야에서 최초로 인쇄지도를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2세기에 편찬됐으며 1477년 라틴어로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최초의 인쇄지도로 거론되는 것이 독일 아우구스부르그에서 1472년 군터 자이너가 인쇄한 ‘기원(Isidore of Seville‘s Etymologiae)’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는 TO 형 세계 지도이다. 그림에서 보듯 실로 간단한 지도이다. 지도라기보다는 개념도에 가깝다.

    그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1475년 루카스 브란디스(Lucas Brandis, 1450~1500)의 ‘초심자를 위한 핸드북’이라는 책에 들어있는 중동 지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스러운 땅이라는 제목의 지도이다. 이 지도를 세계 최초의 근대적 인쇄 지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1477년에는 라틴어로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간행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원래 2세기에 편찬되었으나, 그것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번역·인쇄되었다. 이 지도집에는 26폭의 지도가 들어있는데, 이 지도는 엄밀하게 인쇄지도라고 할 수 없다. 인쇄된 책 속에 들어 있지만, 지도는 손으로 작업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사용한 지도로도 유명하다.

    유럽보다 인쇄지도 역사가 오래된 곳은 당연히 중국이다. 인쇄술을 발명한 곳이므로, 당연히 일찍부터 지도를 인쇄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지도집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1185년에 쓴 조무덕(趙武德)의 서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사본은 명나라 때 간행된 것이고, 일본의 동양문고에 소장된 사본만 송나라 때 제작된 것이라 한다. 이 책에 실린 지도를 보면, 중국과 그 주변 지역 일부를 그린 것이고, 동일한 지도에 지방 조직 및 지명의 시대적 변화 등을 기입하고 있다. 따라서 지리보다는 역사에 중점을 둔 역사지도집이라 부르는 편이 옳다.

    1470년대는 유럽에서 비로소 인쇄지도가 출현한 시기이다. 현재 남아있는 ‘해동제국기’의 판본은 17세기에 간행된 목활자본이지만, 그 원본이 완성된 시기는 1471년이다. 그런 점에서 ‘해동제국기’의 지도는 유럽 최초의 인쇄지도와 동시대에 해당한다. 편찬 당시부터 이미 6종류의 지도가 실려 있었고, 모든 지도는 그 당시의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 일본본국지도

       
    유럽에서 최초 인쇄지도로 거론되는 군터 자이너의 ‘기원’(1472년). 지도라기보다는 개념도로 보인다.
    ‘해동제국기’에 실린 지도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본국지도’이다. 우선, 이 지도는 세계 최초로 인쇄된 일본지도이다. 일본에서도 일본 지도를 본격적으로 인쇄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쇄된 책에 실려 있는 지도로 가장 오래된 것은 ‘습개초(拾芥抄)’의 ‘대일본국도(大日本國圖)’인데, 최초의 제작연도는 12세기 말이지만, 인쇄되어 출간된 것은 주로 17세기 말이다. ‘해동제국기’ 속 ‘일본본국지도’와 ‘대일본국도’를 비교해서 그 차이를 확인해 보자.

    얼핏 보면 두 지도는 비슷하다. 그러나 세부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대일본국도’에는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보인다. 이 도로망을 칠도(七道)라 하며, 일본 고대의 행정구역이자 전국을 연결하는 관용도로이다. 그러나 ‘일본본국지도’에는 내부의 도로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앞의 지도에는 도로망의 중심에 ‘산성(山城)’이라 기록돼 있고, 이곳은 현재의 교토(京都)이다. 그러나 뒤의 지도에는 같은 위치에 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일본국도(日本國都), 천황전(天皇殿), 국왕전(國王殿) 등의 내용을 써넣었다. 이때 국왕은 ‘무로마찌’ 막부의 장군(將軍)을 의미한다. 현재의 도쿄 부근은 겸창전(鎌倉殿)이라 기록했다. 이를 통해 앞의 지도는 일본 고대의 상황을 나타낸 지도이고, 뒤의 지도는 무로마찌 시대(1336~1573년)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해동제국기’의 ‘일본본국지도’는 1453년 조선이 후쿠오카의 승려 종금(宗金)에게서 입수한 것이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일본 지도 중 유일하게 무로마찌 시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 북해항로

    다시 ‘일본본국지도’에 주목해 보면, ‘대일본국도’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육지 도로망이 사라진 대신, 바다 위에 흰 선으로 해로가 그려져 있다. 이 해로는 조선의 통신사가 이용한 해로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내부에서 사용되던 해로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해로의 중간중간에 기항하는 포구들도 기재돼 있다.

    조선 전기의 통신사는 대마도와 후쿠오카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이르면 현재의 세토 내해(內海)를 지나, 오사카·교토에 이르렀다. ‘해동제국기’ 편찬 책임을 맡은 신숙주도 이 길을 따라 일본을 왕래했다. 그러나 ‘일본본국지도’에는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혼슈의 북쪽을 따라 항해하는 ‘북해항로’가 그려져 있다. 이 해로야말로 일본 내부의 항로이다. ‘해동제국기’ 본문에는 일본의 수린이라는 승려가 세조의 명에 따라 이 항로를 항해하여 무로마찌 막부 장군에게 외교문서와 예물을 전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446년 5월 세조의 명을 받은 수린은 6월에 규슈의 상송포(上松浦)에 돌아가 배를 수리하고 나서, 1467년 2월 교토로 가고자 하였다. 마침 교토에서는 병란이 일어나고 바다에는 해적이 설쳐 남해(南海)의 길이 막히자 북해(北海)를 경유하여 6월께 교토에 도착했다. 수린은 동복사에 머물게 되었으나, 무로마찌 막부의 장군도 전란에 휘말려 세조의 국서에 답장을 써주지 못하다가 1468년 2월에 답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수린은 1470년(성종 1년)에 조선에 돌아와 그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 해는 ‘해동제국기’가 완성되기 1년 전이다.

       
    ‘해동제국기’는 지도 자체가 갖는 가치도 크지만, 지도가 갖는 의미를 지리정보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할 문헌이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



    해양문화의 명장면 <32> 조선에서 일본 지도 ‘양극화’ 가 의미한 것은?

    통신사가 가져온 에도시대 지도… 일본의 변화 알리는 상징이었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9-11 18:46:28
    •  |  본지 20면

              


    -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통일 후
    - 정세 안정돼 지리정보 관심 급증
    - 서양과 접촉 후 측량기술도 발전
    - 열도 전체 정밀 지도 제작 노력

    - 석천류선·마연자고암 등이 제작
    - 지역 명소·도로·숙박업소 표기된
    - 상업적 지도는 일반인에 팔기도

    - 사절단 통해 입수한 日 새 지도
    - 조선 정부 중요하게 처리 안 해
    - 사신단 끊긴 뒤 정보 완전 단절

    1471년 편찬된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는 동시대의 어떤 일본 지도보다 크고 자세한 지도였다. 이 지도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의 일본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에 시기적으로 근접하는 지도 한 장이 최근에 일본에서 확인되었다. 히로시마 역사박물관은 올해 7월 15일 ‘일본부상국지도’를 공개했다. 가로 122㎝, 세로 57㎝인 이 지도는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전체를 그린 지도 중에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일본의 석천류선이 그린 본조도감강목 계열의 일본 지도(위)와 마연자고암이 그린 대일본총도 계열의 일본 지도. 마연자고암 지도의 왼쪽 동그라미 친 곳이 나가사키 가도이다. 이근우 제공
    지도에서는 서쪽이 위이고 동쪽이 아래이며, 교토를 기점으로 각지로 연결되는 육로와 해로가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항로 상의 항구의 이름이 많이 기재돼 있어서, 해운이 활발하였던 무로마찌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지도는 14세기 중엽 이후에서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며, 지도의 기본적인 틀은 고대적인 인식 위에 중세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한 것이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 역시 그러한 예이다.

    ■근세 일본의 지도 제작

       
    조선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에 다녀온 원중거가 개인적으로 편찬한 책 ‘화국지’에 실린 일본 지도 ‘팔도68주전도’.
    그러나 무로마찌 시대 후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서양 선박들이 일본의 변경 지역에 나타났고, 서양의 지도와 지구의(地球儀)도 전해졌다. 에도시대 들어 일본 국내 정세가 안정되면서, 비로소 전국의 지리정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측량기술도 발전하였다. 전국적인 측량사업이 진행되었고, 지역별로 제작한 지도를 모아 일본 열도 전체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에도막부가 작성한 정밀한 지도는 기밀이었으나, 일본 열도의 전체 윤곽과 기본 정보를 담은 지도는 민간에 공개됐다. 신사 참배와 명소 관광이 유행하면서, 각 지역 도로와 숙박지에 대한 정보가 지도에 담기게 되었다. 드디어 상업적인 지도가 제작돼 일반인에게 판매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지도들이 연이어 나타났으며, 일본에서 석천류선(石川流宣)이 그린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 계열, 마연자고암(馬淵自藁庵)이 그린 대일본총도(大日本總圖) 계열, 장구보적수(長久保赤水)가 그린 일본여지로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 계열이 대표적이다.

    ■통신사들이 가져온 일본 지도

    그중 조선에 전해진 것은 석천류선이 그린 지도와 마연자고암이 그린 지도였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는 ‘일본여도’라는 지도를 남겼는데, 이 지도는 석천류선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윤두서의 생존연도(1668~1715), 석천류선의 지도가 제작된 시기(1687~1703), 통신사가 왕래한 시기(1682, 1711, 1719년)를 고려하면, 1711년에 조태억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가져온 지도를 윤두서가 입수해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한편 마연자고암이 그린 지도를 가져온 것은 영조 39년(1673)에 파견된 조엄을 정사로 한 통신사였다. 정사 조엄은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통신사 일행은 특별히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정사 조엄은 통신사 기록을 모아 ‘해행총재’를 편찬했고, 제술관 남옥(南玉)은 ‘일관기(日觀記)’, 서기 원중거(元重擧)는 ‘화국지(和國志)’와 ‘승사록(乘槎錄)’, 서기 성대중(成大中)은 ‘사상기(槎上記)’와 ‘일본록(日本錄)’을 남겼다.

    원중거의 ‘화국지’에는 여러 장 일본 지도가 실려 있고, 성대중이 가져온 지도도 현재까지 남아있으며(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에도 ‘조선사자용 일본지도’라는 제목의 일본 지도가 전하는데, 이 지도 모두 마연자고암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조선 전기의 일본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처럼 여러 장의 지도로 구성돼 있지만, 지도 내용은 다르다. 전자에는 해로 상의 주요한 포구를 제외하면 내륙의 지명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에는 규슈의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서 수십 개 지명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이 길은 북규슈의 고쿠라에서 규슈 서쪽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나가사키 가도이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된 나가사키에 이르는 도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는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의 정보를 가져온 메신저들이었다. 원중거는 일본에서 일본지도를 입수해 조선으로 가지고 왔는지, 일본에서 지도를 베껴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상황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해동제국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책이고, 당시 영의정이던 신숙주가 편찬을 지휘하였다. 또한 이 책은 후대까지 조선이 일본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지침서로 기능하였다. 당연히 조선 시대 후기까지 여러 차례 재판을 거듭하였다.

    ■양극화되는 일본 지도

    그러나 ‘화국지’는 원중거라는 중급 관인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편찬한 책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32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하급 관리로 근무하다가 1763년 계미사절단의 서기로 발탁돼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몇몇 관직을 거쳐 규장각에서 같은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해동읍지’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의 책 속에는 당시로서는 조선에서 가장 정밀한 일본지도가 실려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통신사 일행이 입수한 일본 지도는 당연히 국가 차원의 중요한 정보로 규장각과 같은 국가기관에 소장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화국지’는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등과 같이 북학파 연암 그룹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듯하고, 책 속 지도를 이덕무의 ‘청령국지’에 그대로 전재한 경우도 있었다. 새롭고 자세한 일본 지도는 공교롭게도 대부분 서얼 출신들이 남긴 것이다. 성대중, 원중거, 이덕무가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일본 지도에 대해서 조선 정부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원중거의 ‘화국지’도 유일본으로 일본에만 남아있다. 비변사에서 제작한 ‘각국도’에도 성대중이 가져온 지도가 들어있지만, 조선이 제작한 지도는 훨씬 개략적이고 단순한 지도로 변해 있다.

       
    또한 이들은 인쇄된 지도가 아니고 손으로 그린 지도다. 오히려 인쇄되어 유통된 일본 지도의 대부분은 대단히 조잡하고 왜곡된 형태다. 일본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일부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이 일본 지도로 상징되는 일본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국가 전체로 보면 그 관심은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동시에 1763년 이후 조선은 더 이상 일본 본토에 사신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에 대한 정보는 단절되었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해양문화의 명장면 <26> 바다 멀리 보석의 나라가 있다-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 동아시아 연결하는 중개무역 국가였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7-10 19:20:26
    •  |  본지 21면

        

    - 일본 남단 위치한 오키나와
    - 동남아 물산, 韓·中·日과 교역
    - 16세기까지 번성했던 유구국

    - 조선 태종 때 통신관 이예 파견
    - 팔려간 조선인 44명 귀환시켜

    - 항로 방향·거리·유구언어 등
    - 사절단 활동으로 얻은 정보
    - 기존 있던 지도에 수정·보완
    - ‘해동제국기’에 자세히 기록
    - 세계서 가장 오래된 유구국 지도로 평가

    일본과 대만 사이에 여러 개 작은 섬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일본 규슈 남단에서 대만까지 잇고 있다. 현재는 이 섬들을 오키나와라 부른다. 범선을 사용하던 시대에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갈 경우,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것보다는 섬들에 의지할 수 있는 오키나와 항로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섬들은 동중국해와 서태평양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에 있는 수리성(首里城). 옛날 유구국의 궁전이다. 이근우 제공
    이곳에 왕국이 성립된 것은 13세기 말이었다. 1372년에 ‘찰도 왕통’이 성립되고, 유구국이 조선에 사신을 처음 보낸 것은 이 무렵이다. 태조 원년(1392) 조선에 온 유구국 사신은 조회에 참여했다. 이 해,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왜구에 사로잡혔던 조선인 남녀 8명을 송환하기도 했다. 태종 9년(1409년), 중산왕 사소(思紹)가 사신을 보내 후추와 상아, 모직물·견직물을 염색하는 데 꼭 필요한 백반(白礬), 약재로도 쓰고 붉은색 염료로도 쓰는 소목(蘇木) 등을 바쳤다. 모두 조선에서 나지 않는 동남아시아 특산물이다. 설탕, 물소 뿔, 침향(沈香), 장뇌(樟腦) 등을 보내기도 했다. 조선에서 나지 않는 남방의 물산을 실어오는 유구국은 그야말로 보석과 같은 나라였다.

    상씨(尙氏)를 왕으로 하는 유구국(상씨 왕조)은 1406년 건국돼 1879년(일본 명치 12년)에 일본에 합병됐다. 인구 20만이 되지 않는 작은 왕국이었지만, 당시 조선을 비롯해 명·청, 일본이 모두 바다를 통한 왕래와 교역을 제한하는 가운데, 유구국은 이들 여러 나라 모두와 교역하였다. 지리적 이점을 살려 특히 동남아시아 물산을 중계무역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남쪽으로 현재의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 교역했으며, 특히 말래카 왕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조선이 만든 ‘해동제국기’에 실린 ‘유구국지도’의 일부와 ‘유구국 언어’.
    ■ 조선 관인 이예 유구국을 가다

    유구국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내자, 조선 조정에서는 직접 유구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드디어 태종 16년(1416년) 이예(李藝)라는 인물을 통신관(通信官)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호조판서 황희가 유구국은 물길이 멀고 험하며, 또 사람을 보내려면 비용이 아주 많이 드니 파견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 다르지 않다. 만약 신분이 높은 사람의 집안에 왜구에 붙잡혀 간 사람이 있으면 번거롭고 비용이 드는 것을 따지겠느냐고 하여 황희의 반대를 물리쳤다. 6개월 만에 이예는 왜구에게 붙잡혀 유구국에 팔려간 조선 사람 44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중 태조 3년 을해년(1394년) 14살 때 왜구에 붙잡혀 갔다가 22년만에 돌아온 전언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에 태종은 옷과 천, 쌀과 콩을 내려 부모의 상을 치르도록 배려하였다.

    이처럼 이예는 태종·세종 대에 대마도·일본·유구국 외교관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국립외교원에는 서희의 동상과 함께 이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외교적 역량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예는 유구국을 다녀온 유일한 조선 관리이다.

    ■ 해동제국기의 유구국 지도

    조선 초기에 조선과 빈번하게 통교하던 유구국을 그린 지도 한 장이 조선이 만든 ‘해동제국기’(1471년 간행)에 남아 있다. 이 지도는 유구국 전 지역을 상세하게 나타낸 세계 최초 지도다. 이 지도는 후쿠오카의 승려 도안이 조선에 가져온 유구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일찍부터 지적돼 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3년(단종 1년) 하카타(博多)의 상인이자 유구국 사절을 자처하는 승려 도안(道安)이 여러 장의 지도를 가지고 왔다. 그중 하카타·사쓰마와 유구국 사이의 거리를 나타낸 지도가 있었다. 이 지도야말로 ‘해동제국기’에 실린 ‘유구국 지도’일 것이다. 하카타의 상인이던 도안은 상선을 타고 유구국까지 교역을 하러 다녔고, 이때 유구국 중산왕이 자신이 데리고 있던 조선인을 도안의 배에 태워 돌려보냈다고 한다.

    ‘해동제국기’의 유구국 지도에는 북규슈의 상송포를 기점으로 중간 기착지와 유구국 수도인 수리성에 이르는 거리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섬 이름뿐 아니라, 사람이 산다든가, 유구에 속한다는 등의 설명도 들어 있다.

    ■ 오키나와박물관의 ‘유구국도’

       
    충숙공 이예 선양회가 울산시 남구 달동문화공원에 세운 조선 시대 대표 외교관 이예(1373~1445) 선생 동상. 국제신문 DB
    공교롭게도 ‘해동제국기’의 ‘유구국 지도’와 흡사한 지도가 오키나와현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몇 년 전 밝혀졌다. 이 지도는 오키나와현립박물관이 1978년 구입한 것이라 하는데, 1696년(원록 9년) 모사된 것이다. 두 지도는 형태가 아주 흡사한데, 다만 ‘해동제국기’의 지도와 달리 하카타를 기점으로 유구국에 이르는 거리가 기록돼 있다. 두 지도 모두 1609년 사쓰마번이 유구국을 침공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유구 침공 이후 규슈 남단의 사쓰마번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인 유구국은 1696년 유구 지역 상황을 보여주는 유구국 지도를 작성했다.

    유구 침공 전후 차이를 여러 지도로 살펴보면, 원래 유구국에 공조를 바치던 오미제도(奄美諸島)가 사쓰마번의 직할지가 됐다는 점, 16세기 중엽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하던 무역이 쇠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구 침공 이전에는 유구인, 일본인, 중국 강남인이 섞여 사는 상황이었고, 남만(南蠻)이라 하는 동남아시아의 선박도 유구국 수도 나하(那覇)에 입항했다. 그러나 오미제도가 더는 공조를 바치지 않게 됐고, 남만무역의 중심도 규슈의 호오쯔(坊津)와 나가사키(長崎)로 옮겨가면서, 사람과 선박이 붐비고 물품이 넘치던 유구국은 쇠퇴했다. 구스쿠라 불리는 유구국의 성채도 ‘유구국도’에 보이는 것처럼 이전에는 많았지만, 침공 뒤에는 수리성 등 몇 개만 남았다.

    ■ 같은 원본에서 나온 두 지도

       
    한편 이예는 1416년 유구국을 ‘왕환’(갔다가 돌아옴)하였다. 당시 조선의 관인은 외국에 사절로 파견되면, 반드시 왕환 과정을 거치고 획득한 정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중 항로 방향이나 거리를 상세히 표시한 것이 적지 않다. 이예의 유구 왕환 경험이 상송포(上松浦)를 기점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에서 유구국으로 갈 때는 하카타를 거칠 필요 없이, 대마도·일기(잇키)도에서 상송포·오도 열도를 경유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승려 도안에게서 입수한 유구국 지도를 조선의 정보로 수정·보완해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를 작성했을 것이다. ‘해동제국기’ 말미에는 당시 유구국 언어에 대한 정보도 실렸고, 이는 유구어(琉球語)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높이 평가된다. 조선은 ‘해동제국기’라는 책 속에 당시까지 축적한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를 고스란히 응축해 놓았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해양문화의 명장면 <38>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가 있었다

    막부는 푸대접, 왜구는 약탈질…조선초 통신사는 ‘고난의 행렬’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1-06 19:08:17
    •  |  본지 21면  
      
    - 조선이 건국 후 처음 접촉한
    - 일본 무로마찌 막부 정권
    - 유력 무사들 연합체인데다
    - 남북조·전국시대와 겹쳐
    - 내란 들끓는 통제불능 상태

    - 외교문서 트집 잡고, 내쫓고…
    - 에도막부와 달리 치욕적 응대
    - 해적 공격 받아도 수수방관

    - 한 때 사절단 파견 무용론 불구
    - 막부 왕·장군 사망 때마다
    - 조정, 조문단 보내 애도 표현

    ■무로마찌시대와 에도시대

       
    일본 전국시대 전투를 그린 옛 그림. 조선 전기는 일본에서 무로마찌시대에 해당한다. 무로마찌시대는 일본의 남북조시대·전국시대와 겹치는데 이 시기는 일본이 전국적으로 내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일본에 조문 사절을 보냈다. 이근우 제공
    조선 전기는 일본에서는 무로마찌시대에 해당하고, 조선 후기는 에도시대에 해당한다. 조선에서는 500년 동안 한 왕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정치 권력의 중심이 교토에서 에도(현재의 도쿄)로 이동하였다. 무로마찌시대는 다시 남북조시대(1336~1392년) 및 전국시대(1493~1590년)와도 겹친다.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 일본은 전국적으로 내란 상태였다. 또한 무로마찌 막부는 유력한 무사들의 연합정권이어서, 일본 전역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에도막부가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를 시행한 것과는 큰 차이가 났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의 사정도 시대에 따라서 한결같지 않았다. 에도시대에는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대마도에서 사람을 보내 인도하였고, 전체 일정을 에도막부가 계획하고 지원하였다. 양국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었고, 통신사 일행은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일본 해적의 공격을 받은 통신사

    그러나 무로마찌시대는 상황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무로마찌 막부는 조선과 통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통신사가 교토에 왔을 때 누가 비용을 댈 것인가를 논란하였고, 사신을 돌려보낼 핑계를 대기 위해서 가져온 외교문서에서 잘못을 찾아 트집을 잡을 정도였다. 조선이나 명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막부가 금지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국을 노략질하는 왜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로마찌 막부에 대한 통신사나 조문사를 해적이 약탈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현재의 시모노세키에서 고베에 이르는 해로에서 조선의 통신사들이 공격받아 물건을 빼앗기고 배가 부서지는 일이 생겼다. 최초의 일본 국왕이라 할 수 있는 아시카가 요시미쯔의 조문 사절로 파견된 양수가 그랬고, 회례사로 파견된 이예가 그랬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예가 해적의 공격을 받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배가 바다 가운데 좌초하여 창졸간 위급한 때, 홀연히 해적선 35척이 나타나 일본이 준 외교문서와 예물 그리고 본국이 무역한 여러가지 물품과 우리 군사의 의복·양식까지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부서진 배를 타고 해안에 도착하여 맨몸으로 걸어서 대내전(大內殿, 일본 혼슈 서부 지역 최대의 유력 무사)을 향하여 얻어먹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면서, 8일 동안 달려서 적간관(赤間關, 현재의 시모노세키)에 이르렀습니다. 통사 김원(金元)을 왜왕(倭王)에게 보내어 호소하게 하였습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6월 7일)

    ■통신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막부의 장군에게 호소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막부가 이들을 체포하거나 처벌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조선은 무로마찌 막부의 장군이 일본 국왕이므로, 조선의 경우처럼 그의 명령 한마디로 왜구가 사라질 줄 알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443년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제6대 장군 아시카가 요리노리(1394~1441년)가 암살당한 직후에 교토를 방문하였다. 그때는 요리노리의 어린 아들인 요리카쯔가 장군직을 계승하였고, 통신사들은 불과 9살의 장군을 만났다. 그러나 그 역시 6월 19일에 조선통신사를 만난 직후인 7월 21일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불과 8세인 요리나리가 장군이 되었다. 변효문 일행은 요리카쯔가 죽은 것 알고 돌아왔으며, 무로마찌 막부 장군의 실상을 파악하였을 것이다.이처럼 막부의 장군이 신하에게 암살되기도 하고, 어린 장군이 취임하였다가 2년 만에 죽기도 하는 상황을 보면서, 조선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조선은 차라리 대마도나 규슈 북부의 유력자들과 통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종 대의 영의정 성석린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일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일본의 해적선이 해마다 중국을 침입하므로, 황제가 노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욕을 씻으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나라의 사신도 일찍이 들은 바이니, 죄를 성토하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설령 지금 적으로 삼고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사신을 보내어 서로 통교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지난번에 양수(梁需)가 일본 땅에 갔다가, 외교문서와 예물을 모두 약탈당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왕(막부 장군)이 그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였으니,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습니다. 서로 통교하지 않더라도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태종실록, 태종 14년 2월 1일)

    ■이어지는 조문 행렬

    그러나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통신사의 행렬은 이어졌다. 조선 후기처럼 환대를 기대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한 치 앞 운명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왜 통신사는 계속 파견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일본 국왕의 죽음에 대한 조문 때문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처음 접촉한 무로마찌 막부 장군은 아시카가 요시미쯔와 요시모찌였다. 1408년 요시미쯔가 죽자 1410년 태종은 양수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1429년에 요시모찌가 죽자 다음 해 역시 박서생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1441년에 요시노리가 죽자, 1443년에 변효문을 보내어 조문하였고, 이때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동행하였다. 그 이후에도 장군이 죽었을 때 물품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다만 나이가 어린 장군이 죽으면 직접 사신을 파견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이웃 나라의 왕이 죽으면 반드시 조문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상가는 꼭 찾아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고, 의례 중에서 상례와 제례가 가장 중요하다. 그만큼 교린하는 상대국에 대한 조문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장례는 불교식이었고, 장군들은 절에 모셔졌다. 무로마찌 막부의 장군이 죽어도 직접 부고를 전하는 사신을 파견하는 일도 드물었다. 오히려 대마도나 하카타에서 장군이 죽은 사실을 알려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래도 죽은 사실을 알고 조문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해동정(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노략질은 급감하였고, 막부 장군이 일본의 왜구를 금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군이 죽을 때마다 조문사절을 파견한 조선은 어떤 나라였는가? 예의와 교린의 참뜻을 알고 실천하는 나라는 아니었던가? 이웃의 슬픔을 슬퍼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때 바닷길은 아름답게 빛났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해양문화의 명장면 <44> 고려대장경 바다를 건너다

    “대장경 달라” 65차례 요구한 왜국 … 경판 약탈 계획도 세웠었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12-18 19:12:26
    •  |  본지 21면

            


    - 무로마치막부 쇼군 요시모치
    - 조선이 대마도 정벌하자
    - 진의 파악하려 보낸 사절단
    - 인쇄본 1부 선물 받기도

    - 경판 제작기술 뒤처졌던 일본
    - 팔만대장경 갖길 원했지만
    - 조선 다른 경판 보내 달래기도
    - 日 현재 대장경 9사례 남아

    - 인쇄본 모두 손으로 베껴쓰며
    - 日 독자적 대장경 기틀 확립

    조선 세종 1년 11월 20일 일본 국왕사가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한 지 6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1월 6일 세종을 알현하였다.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소중히 보관된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조선 전기에 일본은 팔만대장경 인쇄본뿐 아니라 경판 자체를 달라고 자주 요청했다. 국제신문 DB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군신의 조하를 평상시와 같이 받았는데, 비로소 풍악을 썼다. 일본국 사신 양예(亮倪)가 그 부하를 거느리고 반열을 따라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양예 등을 서반(西班) 종품의 반열에 서게 하였다. 예가 끝나매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에게 명하여 양예를 인도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풍수(風水)가 험한 길에 수고롭게 왔소” 하니, 양예가 엎드려 대답하기를 “임금의 덕택을 말로써 다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양예가 대답하기를 “대장경(大藏經)뿐이올시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하다. 그러나 1부(部)는 주겠다” 하니, 양예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받은 임금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년 1월 6일)

    사실 양예가 조선을 찾아온 것은 기해동정(조선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의 진의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이 명과 함께 일본을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실정막부(무로마치막부) 3대 장군 족리의만(아시카가 요시미쓰)은 명으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고 사신을 파견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족리의지(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책봉을 거부했고, 명과 긴장관계를 조성했다. 게다가 명의 해안을 왜구가 빈번하게 노략질하고 있었다. 따라서 책봉 거부 문제만이 아니라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서도 명은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조선이 대마도를 쳤고(기해동정), 일본은 조선과 명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양예 등을 보내 조선의 진의와 명의 동향을 탐문하려 한 것이다. 양예는 세종 앞에서 기해동정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오로지 ‘대장경’을 바랄 뿐이라 하였다. 이에 조선은 대장경 인쇄본 1부를 보내는 한편, 송희경 일행을 보내 기해동정이 왜구 소굴인 대마도만 공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때 사신으로 간 송희경이 남긴 기록이 유명한 ‘노송당일본행록’이다. 이 책은 우리가 남긴 최초의 일본 사행록이자, 일본에 대한 세계 최초의 여행기라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 ‘경판’까지 요구

       
    고려대장경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일본 실정막부(무로마치막부)의 지도자 족리의지(아시카가 요시모치).
    일본은 대장경의 인쇄본을 얻으려 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심지어 팔만대장경 경판 자체를 요구했다. 이미 출가하여 승려 신분이던 실정막부의 4대 장군 족리의지는 팔만대장경판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규주(圭籌)와 범령(梵齡)이라는 승려를 보내 이를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유일한 대장경의 판목이므로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규주 등은 족리의지에게 무력을 행사해서 대장경판을 빼앗자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보내려 하였다. 이 사실이 미리 발각되었고, 조선은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막고자 깊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이 대장경판을 확보하려 한 의욕이 얼마나 강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이에 대해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과 같은 경판을 비롯해 대장경 1부를 규주에게 주었다. 이렇게 다른 여러 경판과 불경을 전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송희경 일행은 현재의 시모노세키에서 무려 55일간 체류하는 등, 족리의지는 고려대장경판을 받지 못한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때뿐 아니라, 일본이 대장경을 요구하는 것은 65회에 이르고, 이에 따라서 많게는 44장(藏) 즉 팔만대장경 전부가 44차례에 걸쳐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본다.

    ■대장경이란

    대장경은 모든 불교경전의 집대성을 뜻하며,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불교경전 전체의 목록이 작성됐고, 송대인 983년 황제의 명령으로 처음으로 대장경이 제작됐다. 이후 여러 종류 대장경이 만들어졌으나, 고려가 1011년 제작에 착수한 초조대장경이 착수 시점으로 보면, 역사상 두 번째 대장경에 해당한다.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르며, 1236년 시작해 1251년 완성하였다. 분량은 1511부, 6802권, 8만1258판이고, 쪽수로는 16만 쪽에 이른다. 당시 책은 한 면에 인쇄해 반으로 접어 만들었기에, 요즘 책으로 따지면 400쪽 책 8000권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본 국왕사 규주가 대장경 전질이 7000권이라 한 것은 팔만대장경 규모를 정확히 언급한 셈이다.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고려대장경은 모두 9 사례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말 우왕 때인 1381년 인쇄된 것으로 일본 경도(교토)의 대곡대학(오오타니대학)에 있다. 이 대장경에는 이색의 발문이 붙어 있다.

    조선 시대 인쇄된 사례로는 일본 금강봉사(金剛峰寺)의 고려대장경이 있는데, 6285첩(帖)으로 구성돼 있다. 고야산 금강봉사는 일본 진언종의 총본산으로 1200년 역사를 가진 절이다. 이 팔만대장경 인쇄본은 원래 대마도에 있던 것으로 동경(도쿄)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돼 있는 대장경은 한꺼번에 50부를 인쇄한 사실과 관련된 발문이 붙어 있어 세조 3년 1458년 인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절은 덕천(도쿠가와)막부 장군가의 보리사이다.

    경도 상국사(相國寺)에 있는 대장경 역시 세조 3년에 인쇄된 것이다. 상국사는 실정막부 장군가의 보리사이다. 이처럼 현재 일본에는 15곳에 고려대장경이 전해지는데, 그중 9곳의 대장경이 조선 전기 일본으로 갔다.

    ■왜 대장경을 요구했을까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은 대장경을 만들지 못했다. 중국 송대에 최초로 대장경이 만들어진 후 그 인쇄본은 비슷한 시기 고려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 이를 바탕으로 대장경 경판을 판각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이 최초로 대장경을 완성한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이처럼 대장경이 출현한 10세기 이후 일본은 700년간 스스로 대장경판을 만들지 못했기에,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 와서 대장경을 요구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송과 거란이 제작한 대장경의 내용을 교정한 것으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일본 정토종 승려 인징(1645~1711)은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을 지적하였고, 일본 근대에 만들어진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이나 대정 연간에 만든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역시 팔만대장경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경도 북야사에 전하는 일체경은 1412년 불경 전체를 필사한 것인데, 그 저본 중 하나가 역시 팔만대장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쇄된 팔만대장경을 얻지 못하자, 대장경 인쇄본을 모두 베껴 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일체경은 일본 필사본 일체경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례이다.

       
    이처럼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의 대장경은 실로 방대한 분량이었으며, 대장경은 일본 불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의 실상은 이제부터 밝혀할 일이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