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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추억 아련한 구포 둑길과 편안한 생태공원길

부산사람 추억 아련한 구포 둑길… 어머니 품처럼 편안한 길 걷기

Written by 이상미 in Category 여행

부산광역시

태백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광활한 평야를 가로지르고, 그 물길을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 들었다. 강가에 자리 잡은 수많은 민초들의 웃음과 눈물이 녹아 있는 낙동강 700리 길 하구에는 바람이 실어 나른 흙모래가 쌓여 모래섬을 만들었다.
이 모래톱 마을과 한데 어우러졌던 넓은 강은 탁 트인 바다와 만나 비로소 쉼 없는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제 더 큰 세상을 꿈꾸며 떠나가는 강물을 대신해 철마다 날아드는 철새가 남은 이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낙동강물이 굽이굽이 산과 들을 감돌아 흘러내린 구곡장류(九曲腸流)의 끝자락에는 수많은 이들의 애환과 희로애락이 오롯이 간직돼 있다.

낙동강 둑길과 구포다리에 얽힌 추억

도시철도 구포역을 빠져나와 낙동강 둑길을 따라 걷는다. 둑 아랫길엔 일제시대 당시 만들어진 구포다리 자취가 남아 있다. 어릴적 구포다리를 건너 강 너머 외갓집을 숱하게 드나들었다. 지금은 거대한 콘크리트 교량에 자리를 빼앗겨 버린 늙은 돌다리에 지나지 않지만, 구포다리는 내겐 강 저편에 얽힌 추억들이 옥수수 알맹이처럼 알알이 박혀있는 다리다. 구포다리처럼 유년의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흔적들이 조금씩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좁은 길이 얼마쯤 이어지고 나선 곧바로 넓은 길이 나타났다. 봄이면 벚꽃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고, 길가에 동백꽃과 조팝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 산책로도 예전엔 우범지대로 악명이 높았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줄지어 선 가로수 그늘을 디디고 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곳의 어두운 과거를 아는 이가 몇이나 될는지…, 세월은 아름다운 기억만 지우고 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제법 땀이 배어나올 만큼 걸었을 때, 사상 그린웨이 표지판을 만났다. 그 아래쪽에 있는 조그만 굴다리를 지나자 삼락강변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동강 위의 맑은 바람과 갈대밭의 저녁 놀, 원두막 아래의 딸기밭’이라는 세 가지 즐거움으로 인해 ‘삼락’(三樂)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곳은 강을 따라 펼쳐진 갈대숲과 늪지대가 장관이다. 아쉽게도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온통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터라 아름다운 본연의 모습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곳곳에서 수해(水害)의 흔적을 지우느라 분주한 와중에 원추리꽃 무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자연의 품속 따라 걷기

습지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강나루 길로 들어가본다. 내심 낙동강 둔치의 멋진 풍광을 기대했건만, 맞은편에는 먼지를 일으키며 대규모 매립과 준설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하구언 건설로 인해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지 못하면서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생물들이 많아진 터이다.
둑과 보에 막혀 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면 철새들의 먹이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먹을거리가 부족한 도래지엔 새들도 날갯짓을 힘차게 펼치지 못할 것이다. 강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행여 물길을 막고 새들의 쉼터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전거도로로 돌아 나와 삼락습지생태원으로 향한다. 초입부터 부용, 붓꽃, 범부채, 무늬둥글레, 기린초 등 제각각 의 이름표를 단 야생화 군락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조그만 돌로 울타리를 두른 모습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집 안마당 한 쪽에 정성스레 가꾼 화단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이곳에는 들꽃뿐만 아니라 연꽃 단지와 물억새 군락지를 볼 수 있고, 철마다 고구마 심기나 모내기 등의 농사 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생태공원이라는 취지에 맞게 주변 지형과의 조화를 잘 살린 농로가 구불구 불 이어져 있는 것이 마치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다. 풀 하나 돌 하나에도 지나침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 이곳의 미덕같다.

 

야생화단지에서 어린이 물놀이장까지

습지원을 나서자 곧바로 넓은 체육공원이 펼쳐졌다. 운동장에는 불볕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땀 흘리며 공을 차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의 모습에선 햇볕 가릴 곳을 찾느라 군데군데 세워진 원두막을 찾아 헤매는 내가 부끄러울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목을 축이느라 잠시 들른 정자 앞으로 인공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말라비틀어진 갈색 연꽃대가 고개를 꺾고 있는 것이 마치 폐허 같다. 한참 꽃을 피워야 할 시기에 감당하기 힘든 수마(水魔)를 겪은 탓이리라.
녹음의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무채색의 풍경이 주는 느낌은 왠지 을씨년스럽다.

무채색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옆 어린이 물놀이장은 원색의 향연이다. 울긋불긋 색색의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이 깔깔대며 물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 어떤 생명이든 싱그러움을 간직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
내친 김에 감전야생화단지도 둘러보려 하지만 구름다리 보수공사로 인해 길이 끊겨버렸다. 큰길로 다시 돌아나가면 들어가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이미 한풀 꺾인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공원을 빠져나와 강변대로를 따라 곧장 을숙도로 향한다. 왼편으로 크고 작은 공장들이 즐비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차들로 분주하다. 하지만, 반대편에선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강물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 문득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에 가로막
혀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온 낙동강은 남해에 당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굴곡을 겪어왔을지 궁금해진다.

낙동강 물길 휴식처 을숙도에 발을 딛다

봉화에서 대구를 거쳐 김해평야에 이르는 긴 여정을 너른 들을 적시거나 마른 갈밭을 헤치며 오로지 내달리기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맑은 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한다.

사상구에서 사하구로 넘어서는 경계에서부터는 다시 조그만 강변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따라 하굿둑 다리를 건너면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 을숙도가 기다리고 있다. 넓은 삼각주 지형에다 수심이 얕아서 조류의 먹이가 풍부했던 이곳은 한때 무분별한 개발 계획으로 그 명성을 잃어버릴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낙동강을 지키려는 많은 부산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덕분에 물 위를 낮게 떠다니며 먹이를 낚아채는 쇠제비갈매기나 사철을 두고 머무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철새 떼가 발길을 끊어버려 새들이 살지 않게 된 섬은 인간도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닫게 되어 다행스럽다.

물가 버드나무 뒤에 모여 잠을 청하는 수천 마리의 백로떼와 갓 깨어난 새끼들을 데리고 헤엄치는 쇠물닭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것 - 그것이 바로 아홉 구비를 달려온 낙동강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원본출처: http://www.netkoa.org/netkoa/www.netkoa.com2/ko/read.php?no=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