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품은 부산 소막마을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 일명 소막마을로 불리는 곳입니다.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09년부터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소 검역소를 세웠던 해입니다.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소들이 검역소를 거쳐 일본으로 수출됐죠. 일본 사람들은 소 전염병이 일본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 검역에 각별한 신경을 썼습니다. 당시 소막사를 비롯해 검역소, 해부실, 소각장 등 약 40동 정도가 189번지에 모여 있었죠. 소막마을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소막사에서 키워졌던 조선의 소들은 성질이 온순했습니다. 건강하고 힘도 좋아 돌길, 산길 가리지 않고 잘 다녔습니다. 그런 반면 값싼 사료를 먹여도 까다롭게 굴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이었죠. 체구가 작고 다리도 짧은 일본 소와 비교됐습니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건 당연했고요.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일본 소 절반 값에 팔려나갔습니다. 맛도 좋고, 일도 잘하는 데 값마저 싸니 일본 사람들은 조선 소를 데리고 가는 데 혈안이 돼 있었죠. 일제 강점기 동안 150만 마리 소가 189번지 소 검역소를 거쳐 일본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출'이 아니고 '수탈'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겪으면서 189번지는 또 한 번 바뀌었습니다. 해방 이후 가축 검역소의 운영은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정부로 이양됐습니다. 하지만 수출 물량 자체가 없을뿐더러, 외국에서 소가 들어온다 한들 제대로 된 검역 기준도 없었죠. 그래서 소들이 있어야 할 소막사는 점차 비게 됐는데, 그러면서 일부가 일본과 중국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 차지가 됐습니다. 또 일부는 주둔한 미군의 병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일부 소막사에는 소들이 있었으니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죠.
이후 189번지의 주인이 완전히 변한 것은 한국전쟁 때입니다. 40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들이 부산 각지의 수용시설로 분산됐는데, 우암동은 대표적인 수용 지역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빈 소막사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란민을 맞을 준비가 돼 있지 않던 정부는 189번지 소막사를 피란민 수용소로 재활용 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죽음을 피해 고향을 빠져놓은 피란민들에게 소막사는 당장 자리를 펴고 누울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장소였던 셈이죠.
당시 피란민 만여 명이 우암동으로 몰렸습니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피란민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가마니 한 장씩을 받은 피란민들의 본격적인 소막사 생활이 시작된 거죠. 폭 9m, 길이 40여 m 소막사에 수백 명씩 살았습니다. 햇빛이 통하지 않는 데다, 오랫동안 소들이 살고 있었기에 위생 상태가 좋았을 리 없죠. 그래도 소막사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다행이었습니다. 여기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산비탈, 공동묘지까지 빈 땅만 있으면 판잣집을 지어,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또 한두 해가 지났습니다. 소막의 형태도 점차 바뀌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소막 내부에 통로를 만들었죠. 가마니와 이불 등으로 서로의 경계를 냈습니다. 소막은 자연스럽게 칸칸이 나누어졌습니다. 내부 통로를 기준으로 가운데 벽이 만들어지고 양쪽으로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선 것입니다. 주민들은 옆집을 사들이거나 길 쪽으로 집을 확장해 부엌이나 방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형태와 비슷하게 바뀌었죠.
당시 우암동 피란민들의 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수시로 일어난 불이었습니다. 피란 생활의 고달픔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죠. 특히 한국전쟁 3년 뒤에 일어난 화재로 350여 가구가 불에 타고 3명이 숨졌습니다. 그때 현재의 소막사도 상당수 사라지게 됐습니다.
늘 암울하기만 했던 189번지에도 잠시 해뜰날이 있었습니다. 피란민들이 몰리고, 공장도 함께 들어서면서 60년대부터는 이 동네도 꽤 살만해졌습니다. 활기가 넘쳤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8, 90년대부터 공장이 죄다 옮겨가고 인구도 줄면서 소막마을은 다시 쇠락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위기는 몇년 전 한번 더 찾아왔습니다. 189번지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죄다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될까요?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재개발 구역이 해제됐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실망했지만, 그때부터 소막마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민관의 연구가 시작됐고 소막마을의 역사도 차츰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부터는 이곳을 복원하려는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관청에서 30억원을 들여 소막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역사관도 건립합니다.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남은 소막사는 몇 채 안 됩니다. 하지만 형태는 또렷합니다. 지붕에는 파란색 방수 페인트가 덕지덕지 칠해져 있지만 소막의 지붕과 환기창의 모습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명암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는 우암동 189번지 소막마을,
부산에 오시면 한번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연관 기사]
6·25 피란민들 흔적…‘소막사 마을’ 아시나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간 피란민 중 일부는 소 막사에서 생활 했는데요.
아직도 부산 남구에는 피란민들이 살던 소 막사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애환을 잘 보여주는 소 막사 마을을 장성길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만 명이 정착했던 부산 남구 우암동.
일제 강점기 시절엔 한국의 소를 수탈하는 전초기지였습니다.
세모꼴 형태 지붕 건물은 집이 아닌 소 막사.
전쟁 당시 피란민들은 남아 있던 소막사를 거처로 삼았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40곳 가량 있던 소 막사는 개보수를 거쳐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10여 곳에서는 당시의 지붕과, 환기창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내부 곳곳도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김유자(79살/소 막사 마을 거주) : "(원래는) 소마구(소막사)인데 사람이 살려고, 이것을(지붕 보) 붙였던 거죠."
한국전쟁 피란 시절, 길이 40m, 폭 9m 가량의 소 막사 한 동에 수백 명의 피란민이 거주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인터뷰> 김석렬(부산시 남구청 도시재생담당) : "피란민들이 갈 곳이 없어서 정부에서 이곳 소막사로 안내를 하면서 이주를 하게 됐는데, 일부는 소막사에 들어갔고, 일부는 그것도 부족해 초막 형태 집에서 (살았습니다)"
배고팠던 피란민들이 냉면을 밀가루로 만든 '부산 밀면'도 이곳 소 막사 마을에서 시작됐습니다.
남구청은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애환과 삶의 의지를 어느 곳보다 생생히 보여주는 이곳의 원형을 복원해 후세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KBS 뉴스 장성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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