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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초빼이'의 술은 막걸리

강점기 日 자본가 청주·소주시장 장악했지만 부산 '초빼이'의 술은 막걸리

   

우리나라 최초의 술 공장인 후쿠다 양조장. 1887년 부산에 세워진 이 양조장에서 만든 청주에는 '코요(向陽)'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산박물관 제공

 

- 1887년 부산 후쿠다 양조장
- 조선 첫 술공장으로 청주 생산
- 1926년엔 부평동에 소주공장
- '힛꼬 소주' 전국에 팔려 나가

- 수백년 내공 필요한 탁주
- 일본인들 따라하기 어려워
- 박학술의 영주동 탁주 공장
- 크게 성공하며 자존심 지켜

- 1932년 부산 연간 술 소비량
- 탁주가 청주의 39배 넘어
- 일제의 합병 강제·도수 규제
- 술맛 떨어지는 부작용 낳아

■부산의 술맛, 산성 막걸리

   
일본주류양조주식회사가 부산에 세운 대선양조주식회사 내부.
10리만 떨어져도 풍속이 다르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마을마다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술은 마을의 문화를 가름하는 척도였다.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나 길목에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다. 나그네가 주막에 들어서면 먼저 막걸리(濁酒·탁주)를 시켰다. 탁주로 그 지역의 맛과 문화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주세령(酒稅令)이 공포되면서 가정에서 제조됐던 가양주(家釀酒)가 사라졌다. 대대로 전래하는 집안 특유의 술 문화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부산에서는 다행히 산성 막걸리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산성 막걸리의 역사는 금정산성이 축성되던 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축성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백성의 고통과 피로를 덜어주던 술이 산성 막걸리였다. 이후 산성 막걸리를 빚었던 누룩이 유명해졌으며, 일제 강점기 한 달 평균 100여 가마의 누룩이 마차에 실려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산업화 시기 산성 막걸리는 울다가 웃었다. 1968년 주세법의 강화와 밀주 단속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산성 막걸리는 당시 부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판로가 열렸다. 현재 산성 막걸리는 부산 민속주의 브랜드가 되어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 첫 술 공장, 후쿠다 양조장

'초빼이'는 경상도 말로 술고래, 주당을 이른다. 항구 도시 부산에는 유달리 초빼이가 많았다. 거친 바다와 싸우면서 힘겹게 일하는 부산 사람이 많은 탓일까. 아니면 근대 부산에서 세워진 수많은 술 공장 때문일까. 근대기 부산은 양조장에서 제조한 술 냄새가 가득 풍겼던 도시였다.

1887년 부산에 세워진 후쿠다 양조장(福田釀造場)은 우리나라 최초의 술 공장이었다. 이 양조장을 세운 인물은 후쿠다 마스효에이다. 그는 개항 초기인 1871년 부산으로 건너와 청주(淸酒) 양조장을 세웠다.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 양조장에서 제조된 청주에 '코요(向陽)'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산 중구 대청동에 있었던 후쿠다의 별장인 향양원(向陽園)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20년 그가 죽은 뒤 가업을 이어받은 부인 쓰네코는 후쿠다 양조장을 더욱 키웠다. 부산의 후쿠다 양조장은 청주 공장의 효시가 돼 인천, 경성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04년 야마니시 소키치가 부산 부평동에 마루킨주조회사(丸金酒造株式會社)를 세웠으며, 이곳에서 제조된 청주는 향기가 진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오모 카즈타로가 부산 초장동에 설립한 호리이즈미(堀泉) 양조장도 이름이 난 곳이다. 1910년 그가 죽자 동생인 다케지로가 히로시마의 유명한 술 공장인 복미인(福美人) 양조장에 가서 술을 빚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호리이즈미를 발전시켰다.

■부산의 탁주, 청주, 소주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청주, 소주, 탁주, 과실주 등 종류가 다양하다. 지역별로 마시는 술의 종류가 달랐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는 주로 경기 이북 지역에서 애용했다. 반면, 탁주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 백성이 사시사철 마시는 술이었다. 막걸리는 특히 따뜻한 삼남 지역 농민이 일하다 마시는 농주(農酒)였다. 농주는 흔히 주막에서 만들어 팔았으며, 각 가정에서도 누룩으로 막걸리를 담갔다.

부산의 대표적 술은 막걸리, 청주, 소주였다. 일본인이 양조장에서 대규모로 제조하는 청주와 소주, 그리고 조선인이 만드는 탁주가 경쟁했다. 개항 이후 일본인의 청주 공장이 대규모로 세워지면서 조선의 청주는 직격탄을 맞았다. 일제는 술 종류를 분류할 때 일본 술만을 청주라 했으며, 조선 청주는 약주에 끼워 넣었다. 약주는 원래 약재를 가미한 약용 술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이 말을 널리 사용하면서 모든 술을 일컫는 말로 변했다.

부산의 일본인은 소주 공략에도 나섰다. 1908년 부산으로 건너와 견직물과 주류상을 겸업하던 이치마쯔는 1926년 부평동에 소주 공장을 지었다. 여기에 소주 증류기를 설치하고, '힛꼬(日光) 소주'를 만들어 조선 전역에 판매했다. 이 회사는 남쪽 지역 소주 양조의 효시가 됐다. 소주의 시장성을 간파한 일본인은 부산에 대규모 소주 공장을 만들었다. 바로 1930년 일본주류양조주식회사가 창립한 대선양조주식회사(大鮮釀造株式會社)이다. 이 공장은 최신 양조 설비를 설치했고, 연간 3만 석(石·일제 강점기 단위·1석은 15말) 이상의 소주를 생산했다.

 

■부산 초빼이가 좋아하는 막걸리

부산의 청주와 소주 시장은 거의 일본인이 장악했다. 부산 술의 자존심은 막걸리가 지켰다. 탁주를 빚는 기법은 일본인이 쉽게 따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술맛을 내기도 어려웠다. 탁주를 제조하려면 수백 년간 축적된 내공이 필요했다. 일본인의 청주와 소주 공략에도 불구하고 탁주의 대세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졌다.

1925년 부산에서 탁주업자가 325명에 달했다.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가정에서 탁주를 빚는 가내 양조도 여전했다. 부산에서 막걸리를 생산해 술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대표적 인물이 박학술이다. 해운업에 종사하던 그는 1927년부터 영주동에 탁주 양조장인 연수주조장(延壽酒造場)을 설립해 매년 2500석 이상의 탁주를 생산했다. 주조업계의 총아로 떠오른 박학술은 이후 경영난에 빠진 진수학원을 맡아 운영하는 등 교육계까지 진출했다.

부산에서 공식적인 술의 소비량도 탁주가 최고였다. 부산의 초빼이는 대부분 막걸리를 마셨다. 1932년 부산에서 연간 소비되는 술의 통계를 내보니 탁주가 3만1500석, 소주가 2000석, 일본 청주가 800석이었다. 1934년 하루 동안 부산의 서민이 마시는 막걸리가 무려 1000말에 달했다고 한다. 막걸리는 유통기간이 길어지면 맛이 변하고 부패하는 단점이 있었다. 맛이 변한 막걸리에 합성 감미료인 사카린을 타서 파는, 꼼수를 부리는 탁주업체가 생겨났다. 각 가정에서 소비되었던 막걸리가 장기 유통이 필요한 술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생긴 일이다.

■탁주의 독점으로 술맛 떨어지다

1937년 부산의 막걸리 양조장이 난립하자 탁주업자들은 지역별로 합동회사를 차리려고 시도한다. 당시 부산에서는 비교적 큰 탁주양조장이 28개나 있었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이윤이 하락하고, 자꾸 늘어나는 양조장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다.

해결책은 구역별로 나눈 뒤 여러 양조장을 하나의 주식회사로 합치는 것이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탁주를 소규모로 생산하는 업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합동회사 설립에 따른 주식 배당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조선인 탁주업자들은 크게 6개 구역으로 회사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번에는 세무서가 딴죽을 걸었다. 6개 회사가 아닌 3개 회사로 압축하라는 것이다. 회사를 줄일수록 일제의 통제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또, 세무당국은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를 7도 이상으로 규제해 획일화한 탁주를 요구했다.

   
결국 1938년 부산의 탁주양조회사는 부산양조주식회사, 초량주조주식회사, 서부주조주식회사 등 3개 회사로 재편됐다. 부산에서 3개 회사가 막걸리를 독점 판매하자 오히려 술맛은 떨어졌다. 술값을 올리고, 현금 거래를 강제하자 부산의 막걸리 소매업자들은 술에 물을 타서 팔았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막걸리가 이렇게 생겨났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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