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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친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친 “이은숙”

[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2)

편집부  |  suwon@su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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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일시 [2012-06-27 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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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충신 목은 이색 집안의 피를 이은 스무 살 규수
고향땅 떠나 살 에이는 추위 속 첩첩산중 험준한 고개 넘어
강냉이 좁쌀 죽 기다리는 만주땅 횡도천 시집살이

바닥난 뒤주 긁어
조국광복 꿈꾸며 문지방 드나들던
수십 명 투사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독립투사 아내의 길 묵묵히 걸어온 삶
 
만주로 상해로 불철주야 뛰던 남편 소식 끊어지고
어느 해 쓸쓸한 가을
노오란 국화만 고향의 그리움을 더하던 날
총 들고 몰려든 마적 떼에 총상 입고
어린 남매와 피투성이 되어 사경을 헤맨 것과
 
어린 아들 화롯불 뒤집어쓰고
사랑하는 딸 천식으로 죽어 가도 치료비 없어
기침 소리 유난히 가슴을 치던 그 밤의 슬픔들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이 잉태한 천형(天刑)이었어라

애오라지 독립의 횃불 들던 낭군을 위해
유곽의 삯바느질 마다치 않고
바늘 끝에 수없이 찔려 피 흘리며
독립자금 마련한 그 모진 풍파
가냘픈 붓끝으로 다 그리지 못해

가슴에 한을 품고 사무친 마음으로
님에게로 돌아갔으리
무심히 흰 눈송이 내리던 날에.


   
▲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애국지사의 아내 이은숙 여사. <사진=우당기념관>
● 이은숙(李恩淑, 1889.8.8 - 1979.12.11)

1889년 충남 공주에서 아버님 이덕규(한산 이씨)와 어머님 남양 홍씨의 외동딸로 태어나서 1908년 우당 이회영 선생과 결혼하였다. 이때 이회영 선생은 나이 42살로 상처를 한 상태이고 이은숙 여사는 스무 살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던 해까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내조하면서도 일시 귀국 중에는 민족혁명 배후에서 내외 연락과 독립자금을 마련하느라 모진 고생을 감내하였다.

1932년 남편인 우당 이회영은 한일연합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자 만주로 향하던 중 대련에서 왜경에 잡혀 11월 17일 66살의 일기로 고문치사 당하여 순국하였다. 당시 이은숙 여사 나이 44살이었다. 이후 77살 되던 해에 자서전을 집필하여 1975년 ≪독립운동가의 아내 수기≫를 펴냈는데 이후 이 책은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일명 서간도시종기≫로 엮어 나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서간도시종기≫라는 책을 통해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의 삶을 알았다. 이 책을 손에 집어들고 마땅히 독립운동 아내들이 겪는 그런 고생이려니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이들의 삶은 처절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남편을 둔 아내로서의 삶은 상상을 뛰어넘는 고난의 연속임을 알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는 희망이란 낱말을 찾아내었다. 구절구절 나라의 운명에 긍정적으로 동참하는 이은숙 여사의 마음은 청정한 호숫가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고 깨끗했으며 단아했다.

예전에 어머니들이 “내 고생을 다 말하면 책 몇 권은 나온다.”라는 말들을 하곤 했지만 그것은 대개가 자신의 고생담에 불과하다. 그런 고생담 하나 없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아 낸 분들의 고생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맞바꾼 삶이었기에 질이나 양으로 고난의 농도면에서도 그러하다.

“여성은 독립운동에서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생활 대부분을 떠맡고 아이들 양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남성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집안일은 전적으로 여성이 책임을 진다. 만주 이역에서 도와줄 일가가 없을 때
그 책임은 무한대이다. 체포되어 감옥에라도 가면 옥바라지도 떠맡아야 한다. 이처럼 독립운동은 여성의 엄청난 노고와 희생이 필요하였다.” 서중석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에서 여성의 독립운동 지위를 그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무한책임’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 ‘무한책임’을 담당했던 여성들은 광복군에 가입하여 뛰고 싶어도 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광복군이나 각종 애국단체에서 활약하고 싶어도 집에 몰려드는 독립운동가들 수발만으로도 벅찼기에 이들의 이름 석 자는 그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았으며 이들의 ‘무한책임 독립운동’은 그동안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남편이 북경으로 돌아와 3천 리 타향에 부부상봉하고 살림을 시작하게 되니 든든하고 반갑기가 세상에 나 한 사람인 듯하였다. 연약한 체질에 피로도 돌보지 않고 사랑에 계시는 남편 동지 수삼십 명의 조석 식사를 날마다 접대하는데 혹시나 결례나 있어서 빈객들의 마음이 불안할까, 남편에게 불명예를 불러올까 조심하고 지낸 것이 남편을 위할 뿐 아니라 남편의 동지도 위해서였던 것이다.” -≪서간도시종기≫, 이은숙지음 -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독립군의 뒷바라지라면 이골이 난 분이다. 양식이라도 충분하면 그래도 덜 고달프다. 곽 여사는 상하이 뒷골목 푸성귀 시장에 버려지는 배춧잎을 주어다 된장국을 끓여대었지만 나중에는 그조차 구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린다. 이은숙 여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날 오후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씨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하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 먹는 것이지만 이것도 수가 좋아야 먹게 되는지라 살 수가 없었다. 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것으로 연명하니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때가 여러 번이었다.” -≪서간도시종기≫-

눈물 없이는 안사람들의 고생담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보살피고 뒷바라지한 것이기에 이들의 피나는 고생은 독립운동가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역사는 이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 여성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숱한 대학에서 역사 전공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만주벌판에서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며 독립투사로 뛸 수 있게 측면 지원한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편이다. 그나마 광복군 출신이거나 각종 애국단체에 이름 석 자라도 올라온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이나마 있지만 이은숙 여사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던 집안의 안사람에 대한 연구는 논문 한 편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부분에 많은 연구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더보기>

전 세계에 유례없는 6형제의 독립운동
그 중 넷째 우당 이회영은 이은숙 여사의 남편


          
이회영(李會榮, 1867.3.17- 1932.11.17)

 

“동서 역사상에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신 의사가 비백비천(非百非千)이지만 우당 군과 같이 6형제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 거국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미거(美擧)를 두고 볼 때 우당은 이른바 유시형(有是兄)이요, 유시제(有是弟)로구나. 진실로 6명의 절의는 백세청풍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絶好)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월남 이상재-

우당 이회영 선생은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선조때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다. 아호는 우당(友堂).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를 창립하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고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885년에 달성 서 씨와 결혼하였으나 상처하고 1908년 10월 20일 이은숙 여사와 상동 교회에서 재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동생인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귀국했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우당 선생의 손자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관련기사>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나서였다.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우당 일가의 치열한 독립운동 뒤엔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지도층으로서의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처절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우당 일가의 숭고한 독립투쟁은 지배층이 그에 걸맞은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외면하는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

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회영은 마흔네살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91)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치사 당하고 만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섯의 나이였다.

이회영의 형제, 그들의 자제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중 많은 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 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

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은 덜 알려진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그의 사상적 측면이 조금씩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만주 독립운동 시절 우리 민족의 사회 건설 방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민족간에 민족자결의 원칙 수립 ▲독립한 민족 내부에서 자유 평등 원칙 실현 ▲독립 후 지방 분권적 지방자치제 확립·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구조 구성 ▲일체 재산의 사회화 및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 ▲교육의 사회적 공영화 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다”며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였으며 독립후에는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해방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대, 그것도 이름있는 양반가 출신인 이회영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경이”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현 시점에 자유 평등에 기초한 그의 이상과 신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막내 규동씨가 전한 ‘고난의 가족사’

우당 이회영의 막내아들 규동씨(78)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여섯살 때인 1932년 11월28일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련에서 고문으로 사망해 화장된 뒤 한 줌의 재로 고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지난 3월2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만난 규동씨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며 “돌이켜 보니 참 기구한 인생”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규동씨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어머니(이은숙·1979년 작고)는 자금조달책으로 국내에 계셨다”며 “하지만 일제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이씨는 바느질삯, 식모일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모은 돈 대부분을 만주로 송금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규동씨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지였으며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순국 뒤에도 비참한 가족사는 이어졌다. 1935년 규동씨의 형 규창씨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국내로 압송됐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형 옥바라지를 하느라 국내에 남았고, 나는 만주로 떠나 누님들과 함께 지냈다”며 “그때의 어려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규동씨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가족 모두가 해방 이후에 갖은 고초와 가문이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었다”면서 “사촌 형제 대부분이 근근이 사는 형편으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그다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6형제의 당시 선택을 원망한 적은 없었느냐’는 우문에 “윗대의 큰 결정은 여전히 내게 큰 자랑이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항상 우러러 보며 살았다”고 답했다.

규동씨의 큰 아들은 현역 국회의원인 종걸씨다. 규동씨는 “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도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규동씨는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찾겠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거꾸로 가는 역사가 안타까웠다”며 “누가 누구를 복수하는 문제가 아니며 과거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당 이회영 (1867~1932)

< 좌우의 이념대립을 거치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우당 이회영 (1867~1932) >

 

그는 일제의 극악무도한 고문으로 4,5일 만에 죽어서 나왔다. 자유란 무엇인가 ?

천지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회영 아내(이은숙)가 쓴 책 "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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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SBS스페셜’은 지난 1일 '우당 이회영-애국의 길을 묻다'를 방영했다. 100년 전 한일합방 당시 거액의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길러낸 명문가 출신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삶을 재조명해 선보인 것.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 그러나 우당 이회영 일가는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전 가족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정예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제작진은 "함께 망명의 길을 택했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이 아니었다면 그가 걸어온 독립운동의 발자취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 이어 "한지 200장에 빼곡히 써내려간 아내의 기록에는 100년 전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밝혔다.

[스포츠서울TV 새이름 SSTV|www.ahaTV.co.kr]

 

그의 형제중..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우당 이회영의 막내아들 규동씨(78)

규동씨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어머니(이은숙·1979년 작고)는 자금조달책으로 국내에 계셨다”며 “하지만 일제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이씨는 바느질삯, 식모일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모은 돈 대부분을 만주로 송금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규동씨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지였으며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최근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규동씨는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찾겠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거꾸로 가는 역사가 안타까웠다”며 “누가 누구를 복수하는 문제가 아니며 과거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http://cafe.daum.net/trutharoundSeoul/Rhux/611?docid=1FQq6|Rhux|611|20090302094539&q=%C0%CC%C8%B8%BF%B5%20%BC%B1%BB%FD&srchid=CCB1FQq6|Rhux|611|20090302094539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방송일시 : 2009년 3월 1일 (일) 밤 11시 10분 (60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