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이 만난 부산을 지키는 꾼·쟁이들 <39> 구포 향토사 연구가 백이성
30년 걸쳐 낙동강문화 뿌리 찾기 집대성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10-27 20:33:33
- / 본지 25면
낙동향토문화원을 설립해 요즘도 '북구향토지'를 집필하고 있는 백이성 전 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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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낙동문화연구회 발족
- 민속민요집 등 저술활동 활발
- 1994년 구포장타령 발굴도
최근 전 북구 낙동문화원장 백이성(67) 씨를 만났다. 2011년 3월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재현 후 건강이 악화돼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그였기에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는 스스로 창안한 호흡법 등으로 병을 다스려 혁혁한 눈빛과 패기에 찬 목소리로 향토사학자로서의 의지와 끈기를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병상 중 몸을 추스를 즈음부터 '북구향토지'를 집필하고 있었다. 1980년도 '북구지'와 1991년도 '북구향토지'를 취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산 북구 구포3동 시랑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대구에서 굴지의 지주였으나 일찍 별세하면서 집안이 흩어진다. 일제시대 바이올린을 전공한 부친은 1943년 양산에서 시랑골로 들어와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해 5남 2녀의 7남매도 흩어졌다.
그러나 소년 백이성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철모르며 따라 불렀던 이은상 작사의 '낙동강'이 성인이 되고서는 그의 뇌리에 더욱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 흐른 듯 잠겨 있는 기나긴 강물 /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낙동강변에서 나고 자라면서, 생명의 근원이요 역사와 문화의 근간이 되어온 '오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을 인생의 좌표로 삼은 것이다.
1960년 후반 배상도를 중심으로 향토(구포)를 사랑하는 모임 '청구회'(靑龜會)를 결성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회원들과 함께 진주·거창·함안 등의 향토예술제를 찾아갔다. 그들의 향토사랑은 어떠하며 어떤 방법으로 주민들을 계도하고, 재원은 어떻게 충당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돌아와 우선 조기청소부터 시작했다. 삼락동 딸기밭에도 청소년 선도반을 만들어 주먹패들을 선도했다. 차츰 젊은 향토길라잡이 '청구회'의 이름이 알려지지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백이성은 1970년 청구예술제를 기획한다. 예산도 없이 시작부터 하고 보았다. 노산 이은상 선생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파성 설창수 선생의 시·서예 초대전도 마련했다. 특히 노산은 백이성이 낙동강 사랑을 실천하게끔 용기와 희망을 준 분이기에 그 의미가 사뭇 컸다. 비록 3회로 멈춰 버렸지만 지역 인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돼 이후 그들로부터 예산지원도 받게 되었다.
예부터 밖에서 보는 구포사람은 별나 보였다. 자부심과 애향심도 강했다. 구포읍 시절에는 타지방 사람들과 치고받는 다툼이 일어도 결코 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의 대단한 애향심에 금정산과 낙동강의 환경과 더불어 역사로서 향토문화의 뿌리를 찾아야 했다.
웅변학원을 그만두고 향토문화의 뿌리 찾는 일에 엎어졌다. 돈도 안 되는 일에 젊음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78년 뜻있는 친구들과 '낙동문화연구회'를 발족시켜 '낙동예술제' 준비에 한창일 때 10·26사태로 취소된다. 이 해에 네 살 차 정읍 처자 윤채수와 늦깎이 결혼을 한다.
그의 낙동강 사랑은 삼락동 강변에서 벌인 낙동강살리기 캠페인에서 나타난다. 1984년 '낙동민속예술제'를 열었고, 민요경연에 참여한 박복령 할머니로부터 '구포장타령'을 발굴한다. 흔히들 각설이타령이라 부르는 '장타령'은 각설이패들이 장을 옮겨 다니면서 전승돼온 것으로, 전국에 걸쳐 분포돼 있지만 '구포장타령'에 묘사되는 장(場)들의 특징은 유머까지 갖추고 있어 그 의미가 컸다. 1989년 '낙동향토문화원'을 부산시에 등록하고 '낙동강사람들'을 창간, 현재 22호(2012)가 발간됐다. 1991년 '북구향토지'를 집필, 발간하면서 그 옛날 삼락동이 섬이었으며, 유도강(샛강)이 있어 삼차수의 하나였음을 밝혀낸다. 향토지 발간 후 구포를 제외한 사상과 엄궁 일원의 마을어른들을 찾아나서, 이를 토대로 1993년 '강서구지'를 집필, 낙동향토문화원 이름으로 발행한다. 당시 이도희(지금의 낙동문화원장) 씨의 차량 도움을 받아 6개월간 마을답사 후 이를 정리한 일종의 마을사이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낙동강안 45개 시·군을 답사하며 채록한 '낙동강 유역 민속민요집'(1993·북구청)은 낙동강을 울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의 민문화를 연구 집대성한 것이다. 2000년 제15회 전국향토문화 연구논문 사료부문에 '동래부사천면 고문서의 내용과 자료분석'으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지역 향토사학자로서 입지를 분명히 했다.
"구포는 금정산과 낙동강이 아우르는 배산임수의 땅으로 이만큼 좋은 길지는 없다고 봅니더. 벌이 좋고 풍수가 좋으면(명당자리) 훌륭한 인물이 배태된다 안 캅니꺼. 화명동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지예."
그는 조선시대 뱃길을 이용하여 번성한 지역으로 화명동을 꼽는다. 구포에서 6㎞ 상관에 금곡·동원진·감동진 등의 나루가 있었고, 화명동 용당포(龍堂浦)에는 '적석용당'(赤石龍堂)이 있어서 상용당·옥지연용당과 함께 하용당으로 용왕제를 올리던 곳이었던 사실을 최근 향토지를 집필하면서 고증했다.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편찮은 사람 같지 않는 날쌘 기운이 이야기속에 넘쳐난다.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힌 향토사 연구가 잘 짜여진 꽃돗자리보듯 펼쳐진다. 그의 온몸은 금정산 낙동강 그리고 구포이야기로 도배돼 있다. 다행히 살림을 아내가 말없이 맡아 주었기에 가능했다. 두 딸 양지와 양인은 음악(클라리넷과 플루트)을 전공한다. 성악을 전공하려던 아내의 영향을 받은 듯 독일로 유학가서도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는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어 부부를 기쁘게 한다.
천리벌판을 적셔온 낙동강물이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듯 백이성의 향토사랑과 연구도 유장할 것이다. 앞으로도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연구가로서 낙동강에서 보람을 찾을 것이다.
문의 010-3716-5334 /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