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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이야기

낙동강 연안의 문학과 예술

 

낙동강 연안의 문학과 예술

 

가. 낙동강 수계 경상남도 지방의 전래민요

시 군

지역특성민요

특성 및 유래

거창군

두레삼민요

품앗이 삼을 삼으면서 부녀자들이 애환을 노래함

김해시

모심기노래

김해평야에서 모심기하면서 부름

밀양시

밀양아리랑

영남지역의 전통적인 아리랑

밀양수산다리

수산다리를 놓고난 뒤 지음

무안노래

무안지방을 자랑하는 내용

산천군

길삼노래

길삼을 하며 부르는 노래

양산군

효충마을 달노래

신라의 박제상을 칭송함

3장수의 민요

(방아노래)

양산출신 3장수를 노래함

의령군

정암 뱃사공의 노래

일제시대부터 6·25때까지의 정암나루터에

얽힌 내

진주시

의암요

논개를 칭송함

진양농요

진양군 금산면을 중심으로 불리어 졌음

창녕군

흔들개노래

기생이 지방 한량들과 놀면서 부른 노래

여치노래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의 심정을 그림

창원시

모심기 농요

개천예술제 전국 모내기노래 입상

함양군

함양질 굿내기

용추폭포를 배경으로 함

함양아리랑

함양의 지명이 들어 있는 아리랑곡

합천군

영화로세

합천 삼가지역을 노래함


나. 낙동강 수계 대구 및 부산시의 전래민요

시 군

지역 특성 민요

특성 및 유래

대구광역시

공산민요

팔공산 기슭 공산들판에서 부름

여창가곡

남창24곡, 여창 15곡을 한바탕으로 함

영제시조

경상도 사람의 기풍을 나타냄

부산광역시

구포장타령

구포장터에서 각설이가 부른 노래

구포선창노래

구포의 나루터 선창에서 부르던 노동요

 

 

다. 낙동강 유역권의 전래가요

낙동강 유역권은 아득히 가야 신라문화의 발상지인 만큼 가야국의 개국을 예고하는 노래라 할 수 있는 '구지가'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에서 '구지가'가 불렸고 거기서 나온 금합에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지가'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밀어라(首其現也)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 먹어리리라(燔灼而喫也)


 

구지가(龜旨歌)는 서기 1세기 중엽, 가락국의 생성설화를 전해주는 신비스러운 리듬이자, 낙동강 최초의 노래였다.


 

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흐르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오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산들아 물을 누벼 일천삼백리

구비구비 여울여울 이 강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오 낙동강 오오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이여.


 

이은상의 '낙동강'은 강에 스민 역사적 연원과 유역민들의 굳센 기상을 담은 대표적인 낙동강 시다. 이 '낙동강' 시편은 50년대초 '경남도민의 노래'(윤이상 곡)로 불리기도 했으며, 환경단체 등에서는 지금도 '낙동강 노래'라 하여 애창하고 있다.


 

구포다리, 아련한 뱃노래

'구포 선창노래'는 조선의 역부가 맨 처음 불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노래는 이후 구포장에 모이던 보부상들도 따라 불렀다. 보부상들은 장이 파할 때쯤, 사발 막걸리를 거나하게 걸치고 나루로 내려와 뱃전을 두드리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 제꼈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 놓고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 춤추네.


 

보부상들이 뱃전에서 노래가락을 뽑으면 일반 장꾼들은 이에 질세라 '구포 장타령으로 응수했다. 두사람 또는 세 사람이 한조가 되어 질펀하게 불러 제끼는 이 장타령은 문전걸식(門前乞食)을 위해 각설이들이 부르던 것을 장사꾼들이 신명을 더해 따라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샛바람 반지 하단장

너무 칩어서 못 보고

나리건너 명호장 선개없어 못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질못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보고

벌판겉은 김해장 여빗돈이 없어 못보고

고개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 넓어서 못 보고

이 산 저 산 양산장 산이 많아서 못 보고

울루루 갔다 울산장 하도 바빠 못 보고

코 풀었다 홍해장 미끄러워서 못 보고

똥 쌌다 구례장 냄시가 나서 못 보고

언제볼까 언양장 어정어정 못보고

남실남실 남창(南昌)장 물이 짚어서 못보고

이리저리 못보고 장꾼신세가 말 아니네

이장 저장 못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이장 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이세

 

전국의 각설이들이 대체로 6.25동란을 전후해 모습을 감추었는데 반해, 구포장에서는 60년대 초까지도 이 장타령이 불려졌다고 한다.

 

 


라. 낙동강 유역권의 시

시의 세계에서 낙동강은 민족이 발을 붙이고 사는 생활의 터전, 젖과 꿀이 흐르는 민족의 샘, 혹은 어머니와 사랑 등으로 추구되고 있다.

 

낙동강이 소재가 된 옛 시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부사'가 손꼽힌다. 조선조의 어지러운 당쟁을 피하여 조용히 자연으로 찾아드는 선비들에게 낙동강은 안식처와 귀의처가 되었다. 백구와 물고기, 그리고 너울너울 흘러가는 뜬구름 속에서 세상의 소용돌이를 잊고 한가로이 강호가를 읊조리며 소요하는 선비들의 심경이 낙동강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세상일 모두 떨치고

바위위에 몇 개 나무가지를 얽었다

검은 구름 걷히니 산들이 얼굴을 내밀고

단비가 개니 풀들이 방긋 그린다.

달빛이 집안에 넘치니 정신이 맑고

바람이 파도에 우니 꿈이 자주 놀란다

한가로이 낚시대 드리우니 어지로운 생각 씻겨나가고

오늘에야 물가에서 옛 성현의 뜻을 알겠구나.


 

곽재우가 35세때 부친상을 당한 후 예연 서원 동쪽 20리쯤에 떨어진 선산 구지산에서 3년 시묘를 끝낸 그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기강이라는 곳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고기와 세월을 낚는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그때까지 곽재우는 무명의 시골선비에 불과했다. 그 즈음 곽재우가 지었다는 풍류시이다.


 

김용호는 1938년 사해공론에 1백97행으로 된 장시 '낙동강'을 발표하여 일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유랑의 길을 떠나는 민족의 참상과 애환을 노래하였다.


 

북쪽은 구름이 깃들인 고향

우리들은 구름의 의도를 따라

북쪽으로 간다.


 

바로 생명이나 다름없는 토지를 빼앗기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처절한 모습을 낙동강을 통하여 절규한다.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중략)......

초조와 불안과 공포가

나흘 낮 사흘 밤

우리들의 앞가슴을 차고 뜯고

울대처럼 선 왼 산맥의 침묵이 깨어질 때

뻣뻣한 대지를

고슴도치처럼 한 손에 휘어잡고 메어친

꽝하는 너의 최후의 선인은

우리들의 절망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아! 그리운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너는 왜 말이 없느냐

너의 슬픔은 무어며

너의 기쁨은 무어냐


 

유치환은 1950년대 중반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를 발표하여 낙동강에 대한 사랑을 읊었다.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

흘러흘러 삼랑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

기름진 옛 가락 백리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중략) ......

낙동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

순탄하고 가난한 겨레와 더불어

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중략) ......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

낙동의 가람이요,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이달희는 '낙동강'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를 이어 열한편의 연작시를 수록한 시집 <물의 상징법>을 1971년에 펴내었다.

 

싸르륵 사르륵

마른 갈밭을 헤치는 회오리바람을 지나

모랫바람이 불꽃처럼 확확 타오르는 강변을 지나

대한날

얼어붙은 낙동강을

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

호호 언 손 불어주시던

사천년의

그 면면한 사랑


 

그의 시 '낙동강 4'에는 낙동강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우리 겨레의 한 같은 것이 깔려 있다. 그리고,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최화국은 일본에서 '낙동강'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낙동강은 향수의 거울이 되고 있다. 이밖에 김상열이 1971년 <낙동강>이라는 시집을 발표하였다.


 

부산 시인 박현서(작고)는 지난 90년 '낙동강'을 소재로 한 연작시집을 발간, 일괄된 시정신을 보여주었다.

강물이

물빛으로 말할 때

푸른 하늘빛으로 가득차 있었네

강물이

더 깊은 가슴을 헐어 보일 때

허연 물거품만 지고 있었네

강물이 말이 없을 때

하늘은 비어 있었네

('낙동강38-서시'전문)


 

'낙동강 시인' '자갈치 시인'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던 박현서는 연작 낙동강 시편 44번까지 써놓고, 살아생전 그토록 갈구했던 '푸른 물빛'을 '가슴속의 기억'으로만 품은 채, 지난 92년 11월 24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우리모두

푸른 하늘도 들여 앉히고

한때는 우리모두

푸른 강물도 들여 앉혔지

이제 더러는

이 시대의

세찬 물굽이를 거슬러

희디흰 작은 포말로 지워져 가고

핏빛 포도주잔 속에도

쭈그리고 들어앉은 하늘이여

푸른 서슬은 접어두고

허옇게 지워져가는 작은 포말위에

적막한 허공을 드리우라

안아들여도

마셔보아도

내 안에 머물지 않고

흘러만 가는 내

푸른 물빛이여

('낙동강37-푸른 물빛의 기억'전문)


 

부산 강서구 낙동강 제방에는 '시비(詩碑)공원'이 조성돼 길손들의 시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 시비공원에는 낙동강을 소재로 다감한 우정과 순연한 시심을 나눈 조지훈과 박목월의 원숙한 교분도 야문 돌비석에 아로새겨져 있다


 

차운산 바위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길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은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조지훈의 '완화삼'중)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그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나그네'전문)


 

낙동강은 태백산의 어느 골짜기에서 최초의 흐름을 열었다. 한번 터진 물꼬는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고 이산 저산에서 합장하듯 흘러내린 물줄기를 다시 모아 도도한 물길을 냈다. 이 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물길을 따라 모듬살이를 벌이면서, 강변에 독특한 삶과 문화를 일구었다. 낙동강의 문화는 영남의 문화였고 한국의 역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낙동강 유역의 오염의 현 실태를 보면 낙동강 하구에 날아오는 새들은 이곳을 결코 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을숙도를 찾던 새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인근의 경남 주남 저수지로 서식처를 옮겼다. 누가 철새들을 쫓았는가.

부산의 젊은 시인 최영철은 몇 년전 을숙도 철새들을 이렇게 조상(弔喪)했다.


 

새들은 더 이상 날아들지 않을 것이다

섬에서 불어오는 갈대바람과

어머니 살속같은 모래벌에 유년을 부비며 커온

이곳 장림동(長林洞)의 아이들까지도

까마득히 잊게 될 것이다

태초에 새들이 살았고

새들 따라 정처없이 떠나온 사람들

언제부턴가 땅을 일구며 살아 왔다는 것도

끝내는 잊게 될 것이다

어제의 새들이 어디론가 떠나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을숙도 근처'전문)


 

떠난 철새들을 조상하는 최영철의 목소리 위에, 이동순은 가슴속의 서러움과 울분을 마침내 폭발시키듯, 강에 부정한 손길을 뻗치는 개발의 마수를 향해 자연의 준엄한 경고를 그의 '낙동강' 마지막 연에 새겨놓는다.


 

 

마. 낙동강 유역권의 미술

미술작품에서의 낙동강은 극히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노송이 우거진 절경이나 배 위에서 유유히 낚시나 즐기는 그림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낙동강에 대한 실경산수화로서 본격적인 그림이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임정규는 1984년 낙동강 1천3백리를 세로 80m 가로 1.1m의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발원지 황야로부터 부산의 다대포 앞 하구에 이르는 낙동강 전역을 한장의 화선지에 그려 '낙동대장강'이라 하였다.

 

이 그림은 크기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대로 기록된다. 그림은 굽이굽이 산과 들을 감돌아 흘러내리는 낙동강 전역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를 통하여 기록성과 사실성 회화성에 최대의 역점이 주어졌다. 나룻배가 있고 철교가 있고 전통촌락이 있는가 하면 공장의 굴뚝이 숲을 이룬 공업단지와 고속도로가 있다. 특히 강의 하류인 을숙도 부근에는 하구둑이 건설되기 이전의 풍경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변하기 전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그림 가운데에는 이의주의 그림도 손꼽힐 만하다. 1982년도 기록화로 그린 이 그림은 강 하류인 하단 앞의 하구를 그린 것으로 크기가 500호에 이른다. 갈대밭과 농가의 채소밭, 모래톱, 물살이 주요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 그림 역시 하구둑을 건설하기 이전의 하구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kowon.dongseo.ac.kr/~nakdong/4-1-6%B9%AE%C8%AD%BF%CD%BF%B9%BC%F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