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국 10대왕이자 마지막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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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 구형왕(仇衡王) / 구해왕(仇亥王) / 구충왕(仇衝王) |
성 | 김(金) |
휘 | 구해(仇亥) / 구차휴(仇次休) |
생몰년도 | ? ~ ? |
재위기간 | 521년 4월 8일 ~ 532년 9월 (11년) |
1 삼국유사 가락국기 ¶
김씨이다. 정광 2년에 즉위해 42년 동안 다스렸다. 보정 2년[3] 임오 9월에 신라 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친이 군졸을 지휘했다, 그러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 맞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우 탈지이질금(탈지잇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나라에 머물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등을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인데,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에는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4]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사관은 논한다. 《삼국사》를 상고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임자를 국토로 바치고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인 임인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까지 490년이나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 2년 임오이니 30년을 더해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제 두 설을 모두 기록해둔다.
2 생애 ¶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이라 불리우며 김해김씨 족보에는 양왕(讓王)[5]이라고도 불리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중략)수로의 9세손인 구해(仇亥)에 이르렀는데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부가 된다.(후략)"이라고 되어 있어서 구차휴라고도 불리었는듯. 부인은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인 계화(桂花)이고 아들이 세명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이름들이 다 다르게 기재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첫째가 노종(奴宗), 둘째가 무덕(武德), 셋째가 무력(武力)으로 나와 있으며 삼국 유사에는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6]
이시기에 굉장히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반로국이 가야연맹의 맹주노릇을 하고 있던 시기고 신라와 백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가야연맹의 생존을 모색하던 도중 열렸던 안라회의도 구형왕때 열리게 된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당시 금관국[7]이 한 일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는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안라국을 쳐서 가야에 대한 세력권을 확대해나아갔고 신라는 이것에 다급해 졌다. 안라회의가 개최된지 1년후인 532년. 재위 11년째 되던 해에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3천의 병력을 주어 가야를 치게 하였고 이사부는 다다라원(多多羅原, 현재 다대포)에 주둔하며 석달이나 군사시위를 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이로 인하여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를 보내 무리 3천을 이끌고 와서 조칙 듣기를 청했다. 게나노오미(毛野臣)는 멀리서 병장기에 둘러 쌓여 있는 무리 수천을 보고 웅천(熊川)에서 임나(任那) 기질기리성(己叱己利成)에 들어갔다. 이질부례지간기가 다다라(多多羅)벌에 머무르면서 삼가 돌아가지 않고 석달을 기다리며 자주 칙명을 듣고자 청했으나, 끝내 전하지 않았다. (중략) 상신은 4촌【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의 네촌이다. 다른 책에서는 수나라(須那羅, 현재 김해), 화다(和多), 비지(費智, 현재 웅천 부근)의 네촌이라고 하였다.】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 《일본서기》계체기 23년 4월조.
이러한 군사적 시위에도 가야와 백제, 왜가 반응이 없자 낙동강을 건너 다다라,수나라(須那羅, 현재 김해), 화다(和多), 비지(費智, 현재 웅천 부근)등 4촌을 점령하고 점령 주민들을 신라로 이주시켰다. 기록상으론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금관국은 저항을 했지만 곧 포기한듯 보인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성왕의 말을 빌려 "남가라[8]는 작고 협소하여 갑자기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 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어쨋든 이사부의 공격을 받은 금관국(남가라)는 더이상의 저항을 그만두고 항복을 선택했다.
(중략)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다음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게 자기나라의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 하였다. 왕은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관위를 주었으며, 본래 그들 나라를 식읍으로 삼아 주었다. 아들 무력은 각간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법흥왕 19년
하지만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이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정벌과 백제 성왕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진골 신분을 받고 신라 왕족에 편입되었고,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이 신라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옷고름을 밟는 바람에 김유신의 여동생인 김문희와 김춘추가 만나
3 멸망 시기 ¶
사관은 논한다. 《삼국사》를 상고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임자를 국토로 바치고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인 임인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까지 490년이나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원위(元魏)[10] 보정 2년 임오이니 30년을 더해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제[11] 두 설을 모두 기록해둔다.
라고 적어 놨는데 562년은 반로국의 멸망시기이다(...). 일연이 기록을 하다 착각을 해서 인지, 아니면 가야국기에 금관국 말고 다른 나라 기록들도 있어서 혼재되어 있었는지 실수를 한 부분.
5 전구형왕릉[13] ¶
현재 구형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 위치해 있다. 1971년 2월 9일부로 사적 제214호으로 지정되었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으로 이루어 져있다. 총 7층으로 이루어 져있으며 무덤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 돌무덤에 대해서도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석탑이라는 이유는 안동과 의성지방에 이와 유사한 모양의 석탑들이 산재되어 있기 때문. 반면 왕릉이라고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의 산음현 산천조에 기록때문이다.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이 있고 세간에는 왕릉이라 전한다. -《동국여지승람》권 31, 산음현(山陰縣) 산천조(山川條)
그리고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무덤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왕산사기를 발견한 내용이 기록 되어있는데
약 200년전 산청군 유생 민경원이 산에 올라 기우재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비가 내려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도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목궤를 발견하였는데 왕산사에서 구형왕릉의 내력을 적은 산사기(山寺記)를 발견하고, 구형왕과 왕비의 옷과 칼, 그리고 영정까지 찾아냈다. 이에 정조 17년인 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는 만큼 아직도 왕릉인지 석탑인지에 대해 불분명하다.[14] 그때문에 이곳의 정싱 명칭도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 라는 명칭인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다.
《산청현유지》라는 책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라는 기록을 필자가 잘못이해하고 기입했기 때문이다.
5.1 왕릉부정론 ¶
냉정하게 바라 보았을시에 이 석조구조물이 구형왕릉일 확률은 극히 낮은 편이라는 주장이 있다.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대구사학 86집"에 투고한 논문에도 "구형왕릉은 <만들어진 역사>의 전형이다. 불탑임이 명백한 이 석축구조물이 처음으로 문자화 해서 나타난 것은 조선초기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이다. 여기서 이 지역의 전승임을 전제로 "왕릉이라한다"고 기록했다."라고 밝힌 것이 대표적. 불탑으로 세워졌다가 신라 왕릉으로 알려지고, 이후 다시 구형왕릉으로 변해 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조선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전엔 구형왕릉이라는 언급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증보문헌비고》에 와서 민간 전승을 인용하면서 "신라왕릉"이라고 했었고, 1798년에 구형왕릉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사중기(寺中記)[16]인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등장하고, 1964년 김정호가 편천한 《대동지지》에 와서는 "왕산사는 가야 구형왕의 수정궁터이며 그옆의 무덤은 구형왕릉"으로 표기가 되었다.
위에 언급된 신라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 의해서도 왕릉과 같은 고분일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밝혔고 2007년에 조사한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가야 수정궁터라고 기록된 왕산사터를 발굴했지만 조선 중기 형식의 물품들만 발견되었다. 구형왕릉,加耶(가야)역사 입증할 유물 출토 안돼
그리고 구형왕릉의 내역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왕산사기》의 존재 여부도 불투명하지만 이것이 실존했다 한들 조선 효종대에 호란으로 인해 폐허가된 왕산사를 중수 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왕산사기는 아무리 빨라도 효종의 재건 당시 지어졌음을 추측할수 있다. 그때문에 기록의 사실성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판단 되는 것.
이또한 하나의 설이기 때문에거의 확실한 가설이지만 좀더 자세한 조사등을 통해 밝혀지기 전까진 논란이 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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