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산의 근대 건물과 거리
1. 부산제1공립상업학교(경남상고·현 부경고)
1905년 부산거류민단회에서 결의해 이듬해 4월 개교했다. 1907년 보수동에 새로운 학교를 지어 운영되던 이 학교는 1912년 6월 조선공립상업전수학교로 개칭했다. 그해 5월 대신동으로 교사를 신축이전하고 1916년 서관 5개 교실을 증축해 1922년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한다. 1923년 3월 31일 부산공립상업학교가 폐교됨에 동시에 부산제1공립상업학교로 개칭됐다. 1927년 본관을 증축하고 이듬해 5월 강당도 증축했다. 현재 남아있는 부경고의 건물이 이때 것이다. 해방후 경남상고로 오랫동안 교명이 사용되다 2005년부터 부산부경고등학교로 개칭했다.
2. 부산형무소(동대신동 삼익아파트)
동대신동 삼익아파트 자리는 부산감옥소(釜山監獄所) 자리였는데, 그 전에는 일본군 수비대가 1906년부터 들어서서 연병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만여평의 자리에 부산감옥소가 선 것은 1923년 4월의 일이었는데, 그 이듬해 부산형무소로, 1962년 11월 23일에는 부산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1973년 12월 23일에 부산구치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북구 주례동으로 새 청사를 옮겼다.
3. 부산수비대(서여고)
4. 경남도청(동아대 부민캠퍼스 내 박물관)
경상남도 청사는 1925년 4월 준공하였으며, 준공과 함께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왔다.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며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이 변형된 건물로서 강한 정면성의 입면과 좌우 대칭의 평면이 특징이다. 처음 준공 당시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건물이 1960년대의 극심한 증?개축으로 인해 미음자형과(ㅁ字形) 으로 변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부산이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자 정부는 경남도청의 본관은 정부청사로, 상무관은 국회의사당으로, 경찰국은 군경합동작전사령부로 사용했다.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가고 난 뒤 1984년부터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으로 이용됐다. 2001년 10월 거제동으로 법원과 검찰청사가 옮기고 난 뒤 2002년 동아대에서 인수해 2009년 5월 동아대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5. 경남도지사 관사(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경남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당시의 부산으로 옮겨온 것은 1925년 4월 17일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지어졌다.
이후 줄곧 지사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수도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기게 되면서, 도지사 관사를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 관저(官邸)로 사용하게 되었다.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돼 부산시가 관리하고 있다.
6. 부산지방법원(동아대 부민캠퍼스)
1896년 재판소구성법에 의거하여 동래 부사였던 지석영을 초대판사로 근대적 의미의 법원인 부산재판소가 설립되었다. 그 해 부산항재판소로 개칭했다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산지방법원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미 군정시기에는 부산지방심리원으로, 1948년 6월 1일에는 남조선과도정부법령제192호에 의해 부산지방법원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7. 부산부립병원(부산대학교 병원)
부산부립병원은 1876년 11월 일본 거류민의 진료를 위해 일본 해군성이 건립한 관립 제생의원으로 출발했다. 그 후 공립병원, 부산민단립병원을 거쳐 1914년 부산부립병원이 되었으며 부산시립병원 등을 거쳐 1956년 부산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광복동 로얄호텔 자리에 있던 제생병원이 1934년 현 부산대학교 병원 자리에 공사를 시작해 1936년 6월 부지 3천97평 건물 930평으로 준공됐다.
8. 부평정공설시장(부평동 부평맨션)
부평정에 위치한 시장이다. 1910년 6월 개인이 개설했다가 1915년 부산부가 운영했던, 부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이었다. 일용잡화를 주로 취급했다. 일제시대 부평동 시장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둘 뿐이었다. 이발소와 여관이 그것이고, 나머지 가게는 죄다 일본상인이 운영했다.
9. 남선전기(토성동 한국전력공사 부산전력관리처)
1932년 지금의 부산 서구 토성동 1가 23-1번지에 남선(南鮮)전기(주) 사옥으로 지어졌다. 부산에서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다.
내부 구조와 인조대리석을 이용한 계단실 난간, 엘리베이터 출입구 장식, 대형 벽면금고, 라디에이터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근대 오피스빌딩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0. 대정공원(서구청)
충무동로터리에서 현 서구청 일대는 낮은 언덕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이곳에 대정공원을 만들었다. 대정(大正)은 일본 천황의 연호. 1918년 공원이 조성됐는데, 당시로서는 부산에서 제일 넓은 광장이자 운동장이었다. 일제 때는 연례행사로 전국자전거대회가 열리기도 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인이 대륙침략의 기지로 삼아 공원에 병영을 짓고 군사훈련과 군마를 기르기도 했다.
충무동 광장이라 이름을 바꾼 해방 뒤에도 각종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1952년 말부터 이 광장에 충무초등학교가 서고 충무동 교차로에 상가가 형성되면서 공원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1. 송도해수욕장
일본의 3대 명승지인 미야기현에 있는 마츠시마(松島)와 비슷한 풍광으로 만든 조선 최초의 해수욕장이다.
1913년 일제는 거북섬에 수정이라는 휴게소를 설치해 바다기슭의 사장을 해수욕장으로 개발했다. 남포동 광복동에 밀집해 있던 일본인들이 접근하기 쉬워서 여름철 해수욕장으로 즐겨 찾았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여관과 해수탕, 부산부에서 운영하던 휴게소와 탈의시설, 구급시설 등을 갖추게 됐다. 여름이면 매일 남포동 도선장에서 송도까지 1시간 마다 발동선을 운항해 연 6만명의 관광객이 찾았다고 한다.
12. 조선상업은행 부산지점(신한은행 영주동지점, 옛 조흥은행 영주동지점)
1899년 대한천일은행으로 출발했다. 조선인 주주로 설립됐으며,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했다. 부산지점은 1922년 개설했다. 당시 조선인이 경영하는 가장 오래된 최대 민간보통은행이었다.
13. 봉래소학교,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봉래초등학교, 부산상고·현 개성고)
일찍이 초량왜관의 소통사로 활약했던 박기종이 1895년 초량 지역유지들과 뜻을 같이 해 근대학교의 설립에 앞장 섰던 데서 시작된다. 학교설립을 위해 박기종은 육군예비상무학교 교사를 지낸 아라나미와 의논한 끝에 현재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남족 언덕 약 1천평의 부지에 6동의 건물을 지어 1896년 2월 14일 사립부산개성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부산지역 근대학교의 출발이었다. 개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학생 100여 명을 모아 그해 3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봉래소학교는 한국 국민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1922년까지는 감리서 자리를 교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부산봉래국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이다.
14. 봉래권번(영주동 525번지)
1922년 12월 30일 오늘의 중구 영주동 52번지에 ‘봉래권번(逢萊券番)’이라는 기생조합이 생겼다. 봉래권번은 1915년께 영주동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초량에서 출발했다. 봉래권번 소속 기생들은 처음에는 영주동과 초량 일대에서 위탁 판매업을 벌이고 있던 객주업자들이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의 동해안에서 명태와 북어 따위를 배에 싣고 부산에 찾아들었던 수산물 상인들에게 식을 제공했을 때 청요리를 시켜 사랑방에다가 떡 벌어지게 차려 놓았던 술자리에서 시중을 들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객주업자들은 화주(貨主)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는 한편으로 위탁받은 상품의 판매고에 따라 수수료를 받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번창해 나가던 영주동~초량 일대의 객주업도 일본 수산업자들의 대거 진출로 1920년대에 접어 들면서 아주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봉래권번이 영주동 525번지에 1922년 새집을 짓고 옮긴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회 변화 추이에 따른 결과였다.
봉래권번 기생들은 대부분 영주동에 살고 있었는데, 봉래권번이 전성기를 이루던 1939년께는 조합원 수가 70명을 훨씬 웃돌았다고 한다.
봉래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敗色)이 짙어지던 무렵인 1944년 3월 12일 전국 예기(藝妓) 영업 폐지 조치에 따라 마침내 문을 닫게 되고 말았다.
15. 영도다리 건설 희생자 위령탑(동광동 옛 영선고개길 힐사이트 호텔 뒤)
16. 옛 영선고개(동광동 인쇄골목~영주시장)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코모도호텔 앞~메리놀병원 앞~가톨릭센터 앞~대청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를 영선고개라고 부르는데, 이 고개는 원래 영선고개가 아니라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렸었다. 6.25 전쟁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아스팔트 길을 냄으로써 ‘부산 아스팔트 도로 제1호’가 됐던 것.
원래 영선고개는 유엔도로 동쪽 밑에 있는 언덕 바로 윗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로, 영주동 시장 남쪽 입구~부원아파트 뒤~논치시장~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영선고개 착평공사(1909~1912)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 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이름을 따서 붙인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갯길은 초량왜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낮에조차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던 소름끼치는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함부로 넘어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영선고개를 넘기위해서는 대낮에도 무리를 지어 다녔다. 영선고개 오솔길을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은 1912년 영선산이 깡그리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닦인 뒤부터였다.
17. 관해루(동광동 부원아파트 뒤)
18. 부산경찰서(중부경찰서)
일제강점기 부산부 본정(釜山府 本町, 지금의 중구 동광동) 주변을 중심으로 부산부청 등 관청 건물이 밀집해 있었다.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는 지금의 중구 광복동 1가 기업은행 부산경남지역 본부 뒤편 경복빌딩 부근에 있었다. 부산경찰서에서는 일제의 정책에 비방 등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 조선인들은 리스트에 올라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하거나 연행하여 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1920년 9월 13일 독립투사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장실에 폭탄을 투척하여 서장을 즉사시키고, 다수의 경찰관을 부상시키는 등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 있었다. 그 뒤 지금의 중부경찰서 자리로 옮겼다.
19. 조선키네마주식회사(중구청 밑 중국집 한성각)
1924년 대청동 복병산 기슭 러시아 영사관 건물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 해의 비곡(1924년), 운영전(1925년), 암광(1925년), 촌의 영웅(1925년) 등 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짧은 시간에많은 작품을 촬영했지만, 1925년 조직 내부의 갈등과 자금압박으로 회사는 해산되었다.
20. 부산공회당(중앙동 외환은행 부산지점)
1926년 8월 일본인 유지들의 기부와 만주철도주식회사의 부지 무상대부로 기공돼 1928년 4월 완공된 연와(煉瓦) 및 철근콘크리트 혼합의 근세식 4층 건물이다.
현재 중앙동 사거리 위쪽 외환은행이 잇는 곳으로 각종 영화, 연극, 무용, 음악 등의 문화행사들과 각종 시국강연과 회합 등이 이뤄졌다. 2층 대회의실은 192평으로 통로까지 활용한다면 1천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21. 부산역(중앙동 교보생명보험)
부산역은 비잔틴풍이 가미된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1908년 6월 공사를 시작해 1910년 10월 31일 준공했다. 매축지였던 이곳은 지반이 약해 땅속 깊이까지 말뚝을 박고 요소요소에 콘크리트를 넣어 붉은 벽돌 말장을 걸친 다음에 기초부분 전부를 연결시켜 놓았다.
건물은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로 외관 장식은 벽돌 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부산역과 그 주변에는 최신의 서양식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간선도로와 전차가 부설됐으며, 세관과 잔교 관광안내소 여관 등이 세워졌다.
역사 옆으로 2층으로 증축된 철도호텔과 공회당, 산업장려관 등이 연이어 있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됐다.
22. 부산세관
1910년 11월께 완공한 영국풍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벽돌 건물이다. 길모퉁이를 따라 그 평면이 ㄱ자의 건물로, 우측 모퉁이에 8각 4층의 탑을 세웠다. 벽돌과 잘 다듬은 화강암을 잘 조화시킨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돼 있었다. 건물의 중앙 현관문 좌우측에 있는 창출부는 우측에 비해서 좌측이 작은데, 그 상부에 좌보다는 2배 높이의 탑을 얹음으로써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 모통이의 탑신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쌓여 있는 한편 아치 창문을 내달아 아담한 모습이 돋보이게 해놓았다.
1973년 부산시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으나 1979년 6월 2일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됐다. 건물 4층 탑두부는 현 청사 내 전시되고 있다.
23. 제1잔교(국제여객부두)
1913년 3월 29일 개통됐다. 압록강 가교, 만주 안봉선(안동-봉천) 등 대륙연결시설이 완성되는 것과 연계해 진행됐다. 잔교 내에 식장, 휴게소 식당을 갖췄다. 철로를 부두로 끌어들여 연락선과 열차가 곧바로 연결될 수 있게 했다.
24. 부산측후소(부산지방기상청 대청동관측소)
부산측후소는 일본중앙기상청 제1임시측후소로 1904년에 창립되었다. 1904년 4월 기상관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관측이었다. 1934년 1월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복병산 꼭대기에 청사를 신축 이전하였다. 건물의 외관은 배 모양으로 맨 윗층과 지붕모습은 배의 선장실을 상징한다. 건물에 부착된 타일은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 부산측후소 건물은 현재 부산시 지정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25. 부산공립제1심상소학교(광일초등학교)
초량왜관 시절 연향대청이 위치해 있던, 현재 광일초등학교(2004년 동광초등학교와 남일초등학교가 통합) 자리에 세워진 학교다. 1936년 당시 학급수 21개, 남녀학생 1천19명의 부산 최대 초등학교였다.
26. 성공회 주교좌 성당(대청동)
27. 부산헌병대(부산근대역사관 맞은편 인디안상설매장)
부산 중구 대청동 2가에 있었던 부산헌병대(釜山憲兵臺)는 조선 사람의 사상검열을 담당했던 악명 높은 건물이다. 1911년 9월 벽돌 건물을 신축하여 일본군 대구헌병대 부산분대 건물로, 일본군 부산헌병대로 승격해 계속 사용됐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기 전만해도 부산헌병대에서는 독립운동관련자 등을 주로 취조하고 고문했지만, 이른바 ‘태평양전쟁’이라고 불렸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부산 헌병대에서 민간인들의 사상 단속까지 도맡아 숱한 부산시민들이 헌병대에 끌러가 곤욕을 겪었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한때 우리 국군이 인수하여 제6헌병대 중대본부 건물로 쓰기도 했다. 1987년까지 이 일본군 부산 헌병대 벽돌 건물이 남아 있다가 헐려 없어지고 바로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28.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부산근대역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은 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지점이 현재의 대청동으로 이전한 뒤 1929년 오이케정미소 였던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신축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특수 국책회사다. 토지조사를 한다는 핑계로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민의 토지와 인력을 수탈하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점령국으로 부산에 진주한 미 24군단 6사단 숙소로 사용되었다. 1949년 미국 해외공보처 미문화원으로 개원하였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는 미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으며 1998년 7월 10일 부산시민의 반환운동으로 부산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29. 조선은행 부산지점(한국은행 부산지점)
조선은행 부산지점은 1910년 4월에 개설되었다. 철저한 식민지은행으로 은행권 발행을 비롯한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와 보통은행의 업무를 겸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식산은행이 커지면서 그 지위가 낮아졌다.
30. 용두산공원
초량왜관이 위치해 있던 곳으로 일제는 1915년 11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3만평 가량의 용두산 공원을 만들었다. 산 위 정상을 이단으로 만들어 평지를 조성했고, 맨 꼭대기인 현재 부산타워가 있는 곳에 용두산신사를 세웠다.
용두산신사(龍頭山神社)에는 각종 기마상과 석등, 해태상 등 신사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있었다. 용두산은 공원이면서 한편으로 황국신민화를 위한 각종 집회들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했다. 1933년 12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일장기 게양대(102척)가 세워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교육계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 되어가면서,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용두산공원은 시간의 층이 겹겹이 쌓여 있다.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를 담은 초량왜관 표지석은 용두산 공원이 초량왜관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1951년 5월 20일부터 만 4년 동안 용두산 공원에 주둔했던 해병대사령부의 역사를 나타내는 해병대주둔기념비에서 한국전쟁의 냄새를 맡는다. 1955년 만든 충무공 이순신 상의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한때 그의 아호를 따서 운남공원으로 불렸던 용두산 공원은 그렇게 정치적이었다. 용두산 공원의 상징과도 같은 충무공이순신상 옆에는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31. 부산공립유치원(용두산공원 동편 자락 음식점 공원집 옆)
중구 동광동 3가에 위치한 일본의 고위 관료 및 부잣집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던 부산 최초의 공립유치원이다. 1936년께 신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목구조에 흙벽으로 지었다.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전면과 배후가 거의 같은 모양이다. 해방이후 시인 노산 이은상의 동생 이동희 씨가 원장을 맡아 1983년 유치원 운영을 중단할 때까지 업무를 관장했다. 그 뒤 사찰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모텔 신축을 위해 버려져 있는 상태다.
32. 백산상회(동광동 백산기념관)
백산상회는 안희제선생이 독립운동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립했다. 이 백산상회를 통하여 막대한 자금이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되었다. 그러던 중 백산무역이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라는 것을 눈치챈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결국 회사는 1927년 문을 닫았다.
33. 한성은행 부산지점(백산기념관 옆 신우지업사)
34.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 부산지점)
35. 부산우편국(현 부산우체국 뒷 블록)
1910년 3월 25일 준공한 부산우편국 건물은 당시 부산세관? 부산역사? 부산상품진열관 등과 더불어 부산항 도심지에 새로 등장한 현대식 건물로서 이름이 높았다.
현재 중앙동 부산우체국 위치에서 대청동 방향으로 한 블록 위에 위치했던 부산우편국은 전형적인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이었다.
화강석 위에 벽돌을 쌓아 흰색과 빨간색의 대비가 두드러졌다. 2층은 홍예창으로 하고 지붕은 만사드 양식으로 돼 있었다. 9각형 드럼 위에 돔을 올렸고, 좌우 끝에는 첨탑을 세웠다. 여타 작은 출입구 측면에는 단개주를 붙였던 우아한 건물이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불에 타 소실됐다.
36. 부산저금관리소(광복동 새부산타운)
초량왜관 시절 삼대청 가운데 동대청이 있던 장소에 일본인 상업회의소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선전할 상품진열관으로 쓸 목적으로 1904년 12월 25일 신축해 1905년 4월 16일 정식 개관했다. 부산에서 건축된 본격적인 서양식 건물의 시초로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3층 벽돌 건물로 좌우에 뾰족한 원뿔형 지붕을 올린 독특한 외관인데다 규모가 커 당시 부산항에서 제일의 건물로 불렸다. 중앙 입구의 아치는 2층까지 닿았는데, 그 좌우에 3층까지 쌓아올린 원탑형 구조가 엄격한 좌우대칭과 장중한 아름다움을 준다. 층마다 외관 구성을 달리했는데, 1층은 화강석으로 여러 개의 폭선을 돌리고, 2층은 단순한 벽면에 미닫이창을 내고, 3층에는 아케이드 형식의 연속창을 내어 그 중앙부분에 석조난간을 붙였다. 1906년 4월 열린 조선최초의 박람회인 일한상품박람회 등이 열렸다.
1927년부터 부산저금관리소로 사용됐다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우체국이 불타자 임시로 사용되기도 했다.
37. 태평관(광복동 주민센터 옆)
38. 보래관(국민은행 광복동점)
39. 송정좌(광복동 시티스폿앞)
40. 부산극장(중구 남포동)
41. 행관(광복동 향촌다방)
42. 부산도서관(옛 부산부청)·(광복동 입구 부촌식당·아로마모텔)
조선시대 초량왜관의 수장이 머물던 관수가(館守家) 자리에 일제는 부산부를 다스리던 부산부청 건물을 지었다. 부산부청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일제의 관리관청인 영사관(1880년)과 이사청(1906)으로 일본에게 중요한 관공서의 지위를 계속 누렸었다.
1909년 일제는 지금의 용두산공원 밑에 연면적 321평의 주현관 상부에 발코니를 갖춘 르네상스식 목조 2층 건물로 부산부청사를 신축했다. 그러다 부산부청이 용미산 자리의 신청사로 옮겨가면서 1937년 9월부터 이곳은 부산부립도서관이 됐다. 1층에 접수실, 신문열람실, 아동열람실을, 2층에 일반열람실, 특별열람실 등을 두었고 3만 여권의 장서를 갖췄다. 하지만 1938년 2월 9일 불이 나서 2층 건물이 모두 탔다.
43. 장수통(광복로)
왜관 시절 사쿠라가와라 불린 하천이 지나던 곳에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하천을 메우고 도로를 조성해 일본인 거리로 조성한 곳이다. 지금의 광복로.
44. 상생관(광복동 입구 한국투자증권 부산지점)
45. 미나카이백화점(부산롯데타운-롯데백화점 신축현장, 옛 부산시청 별관)
1937년 9월 용미산 터에 부지 700평, 지상 5층으로 신축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던 고급백화점이다. 5층까지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두 대가 설치돼 있었다. 양복점 모자점 가구점 생필품점 완구점 음식점 등이 있었고, 일본서 건너온 신식 공산품에서 조선서 생산된 농산물과 온갖 물산들이 즐비했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건물로 사용됐고, 그 이후 부산시청 별관으로 이용됐다. 1998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옮길 때까지 엘리베이터가 사용됐다.
46. 부산부청(롯데부산타운-롯데호텔 신축현장)
부산시청이 연제구로 옮겨가기 전까지 사용했던 청사는 일제 때부터 부산부청으로 사용됐다. 1910년 일제강점과 더불어 부산부를 다스리던 부산부청은 지금의 용두산공원 밑 부촌식당과 아로마모텔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1933년 공사에 착공, 용미산이 있던 곳을 허물고 청사를 지어 1936년 4월부터 업무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관공서 양식으로 내부에는 엘리베이터를 갖춘 신식 건물이었다.
부산부청이 자리잡고 있던 지점인 용미산은 당시 부산의 중심지였다. 부산부청사 앞 도로는 북항매축 공사와 남항매축 공사로 만들어진 신작로와 부산대교를 통해 영도로 연결되는 부산 교통의 대동맥이기도 했다.
47. 중앙어시장(부산롯데타운 뒤)
1911년 수산물 수출입장으로 개장한 중앙어시장은 카시이 겐타로우가 설립한 부산수산주식회사에서 운영했다. 얼음공장과 냉장시설을 비롯해, 소금창고, 수산물 염장고, 건어물 창고 등을 갖추고 있었다. 경매장에서는 수산물 도매시장의 역할을 하여 밤낮으로 붐볐다.
48. 자갈치건어물시장
1934년 11월 영도다리가 개통되면서 바로 옆에 조성된 시장이다. 2층 건물들이 일본식 건물(적산가옥)의 형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데, 눈썹지붕 처럼 좁은 처마를 달아내거나 꽃모양을 넣은 철제 보호난간을 창문마다 달아놓았다.
49. 영도다리
1932년 3월 가설공사가 시작되어 1934년 11월 완공된 부산대교(영도다리)는 큰 배가 드나들 때면 상판을 올리도록 설계된 도개교(跳開橋)다. 길이 214.63m, 폭 18m, 교량면적 3천948.2㎡, 도개부분 30.3m, 들어올리는 각도 80도, 들어올리는 속도는 고속 1분30초, 저속 4분이다.
처음엔 20분씩 하루 7번을 들었지만 1935년 6월 25일부터 15분으로 단축했다. 범선의 경우 도개교 아래를 통과할 때 예인선이 끌고가도록 명문화했는데, 15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박은 30m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속력은 시속 5해리를 지키도록 했다.
1934년 11월 23일 준공식에는 구경꾼이 5만명이나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부산 인구가 15만 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개통기념으로 받은 찹쌀떡 하나씩 손에 쥔 사람들이 몇 번이고 다리 위를 오갔고, 그날 밤늦도록 제등행렬이 이어졌다.
영도다리에 귀신이 붙어 설계자가 죽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야마모토 우타로가 영도다리 준공을 앞둔 1934년 4월 부산으로 오기 위해 관부연락선을 기다리다 병으로 시모노세키에서 죽는 바람에 완공된 영도다리를 보지 못했다. 공사 인부 가운데 17명이 사고로 죽었고 41명이 부산을 당했다.
늘어나는 교통량과 수도배관의 매설로 1966년 8월 31일 오후 4시 10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부산대교의 다리는 들리지 않게 됐다.
50. 봉래각(옛 백제병원·초량동 467번지)
동구 초량동의 부산역에서 중앙로를 건너 택사스거리로 가는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5층 벽돌건물은 1930년 최용해가 근대식 병원으로 지은 백제병원이 출발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 벽돌로 지어진 이만큼 큰 건물이 없었다.
최용해는 동척 부산지점에서 3만원을 빌리는 등 건축비 6만원을 마련했다.(당시 영도다리 노동자 임금 55전). 건물을 세운 최용해는 김해 명지 태생으로 일본에서 학교를 나와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개인적으로 종합병원을 처음 열었다. 원장은 외과의인 최용해가 맡았고, 의료진도 독일인, 일본인들까지 초빙해서 당시 부립병원과 철도병원을 능가할 정도였다.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의사와 간호원 등이 30여명을 헤아렸고, 병원 침상수도 40개가 넘었다. 병원은 날로 번창하였으나, 병원 건물을 신축할 때의 부채와 병원운영에 따른 경비 지출이 과중하여 경영에 큰 어려움이 따랐다. 여기다 최용해가 부산경찰서 간부의 주선으로 행려병자의 시체 1구를 인수받아 해골표본으로 만들어 무심코 5층 병실에 보관해 둔게 화근이 됐다. 정당한 수속을 밟지 않고 진짜 사람의 가죽을 벗겨 해골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져갔고, 인륜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방을 받자 내진객이 급격히 줄어들어 마침내 병원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최용해는 1932년 그의 나이 39세때 친구에게 가산 정리를 맡기고, 야간도주를 하다시피 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떠난 뒤 건물은 동척에 의해 중국인 양모민에게 넘어갔다. 양모민은 이곳에 봉래각(蓬萊閣)이란 중화요리점을 차렸다. 중국요리집으로 바뀐 봉래각은 중국 상권이 집중된 청관거리에 있어서 중국 한국 일본사람으로 흥청거렸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양모민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1942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아까즈끼 부대가 봉래각을 인수해 장교 숙소로 사용하다, 해방 후에는 부산의 치안담당 본거지인 치안대 사무소가 된다. 한국전쟁 후 봉래각은 개인에게 불하돼 3층으로 꾸민 신세계예식장으로 변했다. 신식예식장으로 이름을 높이던 이곳이 빛을 잃어갈 무렵인 1972년 화재가 나서 건물 내부를 모두 태웠다. 불이 난 뒤 부산시에서는 뼈대만 남아있는 건물이 도시미관을 해친다고 철거를 종용했지만, 워낙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철거비용이 엄청났다. 결국 5층 부분만 철거하고 4층은 온전하게 남아 지금은 여러 상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상가시설로 유지되고 있다.
51. 남선창고(초량동 393-1번지)
1910년 부산상인 정치국(鄭致國)을 중심으로 부산 최초로 1천여평이 되는 해산물 보관 창고를 세웠다. 명태고방이라 불린 이 창고는 1천평이나 되는 떡논 넓은 대지에 붉은 벽돌로 벽을 두르고 서까래와 기둥들은 나무를 써서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였다. 함경도에서 물자를 가져온다고 해서 북선창고(北鮮倉庫)라 불렀다. 내부는 통칸으로 배수구 시설 등이 완벽하게 되어있고, 온도가 항상 일정해 바깥 기온과 무관했다. 함경도의 특산물인 명태를 비롯하여 해산물을 해상을 통하여 선박으로 부산항까지 운송하여 와서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여 경상도와 충청도 등 각 지방으로 보급했다. 1914년 8월 경원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 가는 화물이 부산을 경유할 필요가 없게 되자 물주들은 원산으로 돌아가 그곳에 북선창고를 세웠다. 함경도에 돌아가지 않은 오남근 장사국 등이 떠난 사람들의 주식을 양도받아 남선창고주식회사를 창립해 부산의 북선창고를 남선창고로 개명했다.
명태고방이 생긴후부터 해방직전까지 이 창고에는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명태를 시작으로 화공약품, 합판, 신발, 러시아 상인의 짐 등 부산경제의 흐름을 묵묵히 껴안고 있는 공간이었고, 은행과 주요 상거래에 그대로 통용된 국내 최초의 창고증권 발행한 곳이기도 했지만, 2009년 4월 완전히 철거됐다.
52. 철도병원(초량 한국화장품 부산지사 옆)
1900년 초 타카노가 설립해 해방 이후 미군이 철거할 때까지 부산부립병원 다음 가는 큰 병원이었다. 현재 위치는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근처로 옛 침례병원 근처의 시멘트 계단은 철도병원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개인 병원임에도 근대성의 상징인 철도의 명칭을 차용해 병원 이름으로 사용했다. 실제 이 병원은 철도국과 촉탁관계를 맺어 발전하게 된다. 초량역 앞에 위치한 까닭에 철도를 이용한 농어촌 지역 환자들이 이 병원을 많이 이용했다.
53. 철도청 관사(정란각·수정1동 1010번지)
1939년 철도청장 관사로 지어진 목조 2층의 고급 일식 건물이다. 일본 무사 계급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인 쇼인즈쿠리(書院造)라는 건축 양식을 나타낸다. 액자를 걸거나 도자기를 진열하기 위해 만든 2층의 도코노마를 비롯한 내부 공간, 목조 가구,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 반2층의 공간을 두어 문간방 역할을 하도록 한 것도 특징이며,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석축은 돌 가장자리를 따라 한 번 더 다듬은 뒤 고급스러운 모접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그외에 꽃장식의 일본식 석등, 건물 모서리의 화려한 장식 등이 일제강점기 부산 지역 고급 주택의 단면을 보여준다.
54. 부산진일신여학교
호주 선교사에 의해 1905년 신축된 2층 벽돌 건물이다. 정면 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은 장식이 없지만, 전면에 벽돌의 긴기둥을 2층 처마까지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서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형태였다. 1층 벽체는 네 군데의 창둘레의 벽돌 외에는 전부 석재로 돼 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선교를 위한 교육시설로 서민풍의 건물이었다.
일신여학교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였던 만큼 교사와 학생의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1일 손수 만든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학교 아래 정공단길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군중들 수백 명이 합세한 이날의 만세시위는 부산지역 3.1운동의 효시가 됐다.
55. 정공단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정발과 그를 따른 군민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6년(영조 42) 부산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순절지인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에 설치하였다.
단 앞에 ‘정공단(鄭公壇)’이라 씌어 있는 비가 세워져 있다. 서쪽에는 정발과 그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을, 동쪽에는 정발의 첩 열녀 애향(愛香)을,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시고 있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 용월(龍月)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향사계가 해산당하고 제단은 폐쇄되었으며 유물과 비품도 몰수당하였다.
1945년 11월에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고 1948년 비석을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이때 옛 비석을 되찾아 현재 2개의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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