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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전통혼례

전통혼례

 

유래와 의미

 

음/양
결혼은 세상 이치의 2가지 근본 요소인 음과 양의 완전한 결합과 균형을 의미합니다 : 은 어둠과 여성을, 은 밝음과 남성을 각각 의미합니다. 종종 결혼식을 해질 무렵에 치르는데 이는 밝음(낮)과 어둠(밤) 사이의 균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푸른색은 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을 상징합니다.

기러기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은 새 신랑과 신부를 나타냅니다. 혼례식의 전안례 부분에서 신랑은 장모에게 기러기 한 마리를 바칩니다. 기러기는 부부가 결혼생활에서 지켜야할 몇 가지 가치를 상징합니다

  • 기러기는 일생동안 같은 짝을 지킵니다. 한 마리가 죽어도 다른 한 마리는 나머지 일생동안 새로운 짝을 찾지 않습니다.
  • 기러기는 위계질서를 잘 지킵니다. 하늘을 날 때에도 그들은 비행 편대와 조화를 확실히 유지합니다.
  • 기러기는 어디를 가든지 그들의 존재를 남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의 자손들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수컷과 암탉(하나는 푸른 천에 싸여있고, 다른 하나는 붉은 천에 싸여있음)이 결혼식 탁자 위나 아래에 놓여 있는데 그의 의미는 닭과 아침에 관련된 상징성에 있습니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결혼이 그러해야 하듯이, 하루의 시작, 밝고 신선한 출발을 의미하고 또한 혼례날 찾아오는, 그러나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입니다. 혼례식장에 수탉을 두는 것은 악귀가 사라져 신혼 부부에게 해를 입히지 말도록 해 달라는 희망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2번째 의미로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중시하였던 다산(多産)에의 희망입니다. 암탉이 달걀을 많이 낳으므로 신부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희망입니다.

 

 

전통혼례절차

 

전통혼례절차는 서로의 혼례의사를 타진하는 의혼, 혼약이 이루어져 사주를 보내고 연길을 청하는 납채, 신부용 혼수와 혼서 및 물목을 넣은 혼수함을 보내는 납패, 그리고 혼례를 치루는 친영의 네가지 절차로 이루어진다.

 

전통혼례절차

의혼 납채 납폐 친영
중매 사주 혼서지 전안례
  연길 채단 교배례
      합근례

 

 

친영(親迎)

전통적으로 혼례식은 신부의 집에서 치러졌습니다. 신랑은 통상 조랑말을 타고, 그의 하객이나 종들은 걸어서 신부의 집 혹은 혼례식장으로 갔습니다. 하객들은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만 신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엄숙한 표정으로 있어야만 했습니다.

 

전안례(奠雁禮:기러기를 드리는 예)
나무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의 인도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갑니다. 신부집에 도착하여 기럭아비가 신랑에게 기러기를 주면 신랑은 기러기를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장모에게 두 번 절하면 장모는 기러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옛날에는 살아 있는 실제 기러기를 드렸다고 함.)

 

교배례(交拜禮)
종종 이 때 처음으로 신랑 신부가 서로를 보게됩니다. 신랑 신부 각각 2명의 동료가 이 절차 내내 도와줍니다. 우선, 신랑이 혼례탁자 동쪽으로 걸어가면, 신부가 서쪽으로 갑니다. 신랑을 돕는 사람들이 신랑을 위해 멍석을 깔면, 신부를 돕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혼례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봅니다.

신랑 신부를 돕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의 손을 씻어 줍니다. 손을 씻기는 의미는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를 정갈히 한다는 상징입니다. 동료의 도움을 받아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2번 절하면 역시 동료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랑이 한 번 절합니다. 다시 신부가 신랑에게 2번 절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한 번 절합니다. 무릎을 꿇고 서로 마주보는 것으로 이 절차가 끝납니다. 절을 하는 의미는 서로에 대한 허락의 약속입니다.

 

 

합근례
절차는 지역적인 차이로 2가지의 변종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동료들이 술잔을 신랑 신부에게 전달해주면서 신랑 신부가 같은 술잔으로 마시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신랑 신부가 표주박의 각각 반쪽으로 마시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새로운 부부의 인연과 조화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표주박의 각각의 반쪽으로 술을 마시는 것은 그 반쪽이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표주박이듯이 신랑 신부도 각각은 반쪽이며 합쳐졌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선, 신랑을 위하여 조그만 잔에 술을 따르면 신랑이 술을 마십니다. 다시 신부에게 한 잔 따르면 신부는 입술만 축이거나 마시는 척만 합니다. 그러면 술을 다시 신랑에게 따라주고 신랑이 재차 마십니다. 신부에게 다시 따르면 신부는 재차 입술만 축이거나 마시는 척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3번 절합니다: 부모에게 한 번, 조상에게 한 번, 하객들에게 한번.

 



 

혼례식 후

 

폐백(幣帛)
혼례식이 끝나면 곧장 신부는 시부모를 만납니다. 이 절차는 안방에 병풍을 치고 하는데 신랑 아버지가 동편에 앉고, 어머니가 서편에 앉습니다. 신부가 시부모에게 4번 절하여 시댁과 시댁의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충절의 뜻을 표합니다. 이 때 시부모에게 간단한 음식을 올리는데 이를 폐백이라 합니다.


 

           

 

신방
신랑 신부는 신부집에서 이 날을 위해서 특별히 치장한 방에 머물게 되는데, 과거엔 방 밖에는 친지와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방 문의 한지를 뚫어 방안의 광경을 몰래 구경합니다. 표면상으로는 신부가 낭패하여 도망가지 않을까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종종 신랑이 신부보다 어렸기 때문에 무었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어린 부부가 어울리는 것을 돕기 위해 양가의 몸종들이 혼례복의 맨 겉옷을 벗기고, 신부의 몸종이 신랑의 저고리를 벗기면 신랑의 몸종이 신부의 저고리를 벗겼습니다. 몸종들이 자리를 피해주면 신부가 부탁을 안 해도 신랑이 신부의 나머지 옷을 벗겼습니다.

 

우귀(于歸)
3일 후에 신랑 신부는 신랑 부모의 집으로 갑니다. 신랑은 자신이 타고 온 조랑말을 타고 가고 신부는 신랑의 몸종들이 가마에 태워 데려갑니다. 신랑 부모 집에 다다르면 마을 이웃들이 행렬에 따라왔을지도 모르는 모든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빨간 콩, 목화씨, 소금을 뿌렸습니다.

 

현구례(見舅禮)
신랑 부모의 집에서 모든 신랑 가족들에게 신부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폐백의 절차와 유사하지만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신랑혼례복
 
신랑은 친영을 위하여 사모관대(紗帽冠帶)로 장속한다.
사모관대란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은 다음 각대를 띠고 목화를 신은 옷차림을 말한다.
사모관대는 조선조 벼슬아치의 관복 중 평상복에 속하는 것으로서 초기에는 당상관에 한했으나 이후 당하관에게도 착용이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단령포의 색과 혁대의 장식 재료에 의하여 품계를 가리었고, 또한 흉배에도 도안의 구별이 있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신랑의 나이에 이미 벼슬길에 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당시 혼인을 인륜(人倫)의 대사(大事)라 하여 비록 가장 낮은 품계(九品)의 것이긴 하더라도 특별히 배려하여 예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단령은 녹포였고 여기에 단학 흉배를 가식하였으며 흑각대를 띠었다. 이 차림은 서민층 혼례 때에도 허용되였다.



단령
단령은 관직자가 평상복으로 입던 옷으로, 직품에 따라 홍색,청색,흑색 등의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혼례 때에 입던 단령은 주로 청색계통이었다.

사모
사모는 원래 직품(職品)을 가진 자가 평상복에 착용하던 것이나, 직품을 갖지 않은 자라도 혼례때에는 이를 쓰는 것이 허용되였다. 재료는 검정색 실이며 뒤쪽에 붙은 양쪽 날개에는 구름 무늬를 넣었다.

각대
단령을 입은뒤 허리에 두르는 띠.

흉배
단령에는 흉배를 다는데, 보통 두 마리의 학이나 구름 등의 모양으로 수를 놓았다.

목화
목화는 원래 조선조 때 문무백관이 평상복에 신던 신발인데, 혼례 때에는 서민들이 신었다.
 
신부혼례복
 

신부혼례복은 혼인날 교배례를 거행할 때의 복장으로 염의를 착용하였는데 염의는 사서에 ‘활옷’이라 설명하고 있다.활옷은 원래 궁중에서 의식이 있을 때에 왕비가 입던 대례복 이였으나 후에 서민의 혼례복으로 사용되였다. 숭고함과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련꽃, 모란꽃, 십장생 등을 가득히 수놓아 만든 활옷은 앞길이 짧고 뒷길이 긴 모양으로 소매 끝에는 색동을 대고 흰색 한삼을 덧붙인 것으로 주로 사대부가에서 입었다.
일반인은 활옷대신 원삼을 착용하였다.원삼은 그 색에 따라 깃도 같은 색이었으며 소매에는 다홍과 황색의 량색 색동에 달렸고 소맷부리에는 한삼을 달았다. 계급에 따라 금박을 넣기도 했으며 족두리를 쓰는 것이 항례였다.


대대    
홍색 공단에 심을 넣어 만들어 금박을 찍는다.
활옷, 원삼위에 앞가슴에 대대의 중앙이 오도록 대고 양쪽으로 돌려 묶어 늘어뜨린다.

앞댕기  
쪽 찐 비녀에 감아 앞으로 드리운 것으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꽃무늬로 금박을 하고 끝에 구슬을 꿰어 달았다.

도투락 댕기  
활옷이나 원삼을 입을 때에 화관이나 족두리에 맞춰 머리 뒤로 늘어뜨리는 큰 댕기로 검은 자주색 비단에 자수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치마
스란치마는 소례복에 입고 대란치마는 대례복에 입었다.
무늬가 찍힌 스란 단을 한층 붙인 것이 스란치마이고 두 층 붙인 것이 대란치마이다.

족두리  
원래 몽고녀인이 외출할 때 쓰던 일종의 모자였으나 고려 말 우리민족지방에 들어온 뒤로 왜소해져 머리장식으로 변하였다.
궁중이나 량반가에서 의식용으로 소례복에 썼으며 영정조에 이르러 얹은머리가 쪽찐 머리로 개혁되면서 널리 보급되였다.
사치방지를 위해 모두 흑색에 장식을 제한하였다.

화관
활옷이나 당의를 입을 때에 사용되였고 일반 서민들은 혼례 때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