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상륙작전과 한국 해병대
'한국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최초의 상륙작전...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불씨를 지핀 전투"
해병대는 6.25전쟁 당시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으로‘귀신 잡는 해병’이란 신화 탄생시킨 통영상륙작전 전승 61주년 기념행사를 지난 8월17일 경남 통영시 무전동 원문공원 일원에서 열었다. 오전에 열린 전승 추모행사에서는 참전용사를 비롯하여 해병대 제1사단장,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 통영시장과 주요 기관장, 현역장병 150여명 등이 참석해 그 날의 감격을 되새겼다.
오후에는 원문공원 내에 새롭게 건립한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광장에서 기념관 개관식이 열렸다. 기념관(지상 2층, 건축면적 316㎡)에는 당시 중령으로 해병부대를 진두지휘했던 김성은 장군(전 국방부장관)의 유품(遺品)과 해병대 주요장비 및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광장에는 6.25전쟁 당시 해병대가 사용하던 상륙장갑차와 M-47 전차 등을 상설 전시하여 기념관을 찾은 국민들이 해병대의 용맹함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안보교육장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통영상륙작전 경과
북한군은 1950년 6월25일 전면 기습남침한 후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한국군은 퇴각을 거듭하다가 7월16일경 낙동강에 방어선을 가까스로 구축했다. 한국은 국토의 90% 이상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무력화하기 위해 7사단을 통영 방향으로 진격시켜 거제도를 점령함으로써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고자 했다.
북한군 제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 대대 약 650명이 1950년 8월16일 경남 고성을 무혈점령했다. 저녁에는 통영 입구인 원문(猿門)고개에 진출하였고 8월17일 새벽에는 통영시가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을 건너서 거제도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만약 이렇게 되면 마산과 진해는 해상으로부터 봉쇄되고 적(敵)의 지상포 사정권내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해군은 급히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고 8월17일 20:00시에 통영읍(현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長坪里)해안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해병 제1대대가 기습상륙을 감행했다. 작전에 함정 총 7척(703함, 901정, 302정, 307정, 312정, 504정, 512정, FS평택호)과 20여척의 어선이 투입되었다. 함정은 협조된 공격계획에 따라 통영항구 정면에서 함포사격을 육지로 다음날 아침까지 가했다. 이것은 해병대의 진격방향을 적(敵)이 모르게 하기 위한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상륙군 제2중대는 8월18일 새벽에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의 진격을 차단했다. 3중대와 7중대는 통영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해 적군 100여명을 사살했다. 이날 오후에 통영을 완전히 탈환했다. 원문고개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이자 통영방어에 있어서 전술상의 요충지여서 해병대는 9월20일까지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상륙작전과 원문고개 방어전에서 한국군은 적(敵) 사살 469명, 포로 86명 그리고 많은 화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적(敵) 대대장, 작전참모 등 지휘관 전원이 사살되었다. 작은 어선 3척을 타고 집단으로 해상으로 도주하던 잔적(殘敵)도 해군 504정과 312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반면, 한국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47명에 불과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의의(意義)
이 통영전투는 한국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무엇보다도 부산 교두보(橋頭堡)의 측방위협을 제거했다는 점과 암담(暗澹)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불씨를 지핀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컸다. 그 뿐만 아니라 작전상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 장병들에게는 승리의 신념을 심어 준 전투였다. 전원이 일 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은 진동리(鎭東里)작전에 이어 통영상륙작전에서 또다시 크게 전공을 이룩한 김성은 부대에 대하여 외신기자(뉴욕 헤럴드트리뷴지의 마거리트 히긴스)는 ‘귀신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통영상륙작전(1950.8.17)과 인천상륙작전(1950.9.15)의 성공을 통해 작전환경 상 상륙작전이 방어와 공격에서 가장 효과적임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군은 통영상륙작전의 성공을 교훈삼아 ‘한국적 상륙작전 개념’ 발전에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한국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主)임무로 하는 준비된 국가 전략군으로서 국가안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konas)
김성만(예비역 해군중장, 해병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전 해군작전사령관)
통영상륙작전보도(국제신보)-1950.9.1
부산일보 보도기사-1950.8.26
http://blog.naver.com/mc341/70094775531
[관련기사]
한국 해병대의 산증인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말하는 ‘6·25’
-50년 8월 18일 시작된 통영상륙작전은 우리 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인민군은 우리 군의 거센 저항으로 육로가 저지당하자, 거제도를 거쳐 바로 부산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짰습니다. 거제를 적에게 내주면 마산과 진해는 발이 묶이고 부산 역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8월 16일 인민군이 통영을 장악했지요. 해병대 김성은 부대장은 해군과 양동작전을 펼쳤습니다. 해군이 통영 남쪽에 집중적인 함포사격을 하면서 상륙하는 것처럼 적을 속이는 사이 해병대가 뒤쪽으로 진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북한 전력이 월등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지만 작전은 성공했습니다(당시 뉴욕헤럴드트리뷴의 종군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이 작전을 보도하면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후 해병대 애칭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 도민일보 http://news.nate.com/view/20110624n22091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
'통영'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벽화로 유명한 동파랑 마을? 한려수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
훈터지지기는 통영하면,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이었던 '통영상륙작전'이 생각난답니다. 역시 훈터지기답죠?^^
오늘은 여러분께 '통영상륙작전'에 대해 소개해드릴게요.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
통영지구전적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군 7사단이 진해, 마산 등의 병참 기지와 군항을 봉쇄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1950년 8월 17일,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통영읍 동북단 장평리 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18일 새벽, 해병 제 2중대는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조기 확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차단하였고 해병 제 7중대는 통영 시가지를 감제하는 망일봉을 사전에 점령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섬멸하였습니다.다음날 8월 19일,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해군 통제부 방어대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지원받아 통영 시가지를 총 공격하였고, 북한군을 완전 소탕하고 통영을 탈환하였습니다.
탈환 이후 원문고개에서 수차례 걸친 공방전이 있었으나, 북한의 집요한 공격을 저지, 격퇴시키며 우리 군은 통영을 사수하였습니다.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소개해드린 안창관 대령이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대원과 함께 500여명의 적을 사살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당시 뉴욕타임즈는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고 한국 해병대의 활약상을 보도하였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병대의 별칭이 '귀신잡는 해병'이 되었답니다.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참전용사들 중 2명이 2012년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통영상륙작전 뿐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등 해·육상 주요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손원일 제독은 2012년 9월 6.25 전쟁영웅에,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하여 해병대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4척의 적 보급선과 400여명의 적군을 살상한 이상수 공군 소령은 2012년 10월 전쟁영웅에 선정되었답니다.
통영상륙작전은 대한민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임과 동시에 낙동강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 측면을 지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입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보다 한 달 앞선 작전이기에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전투랍니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만 거듭하던 우리 국군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통영상륙작전. 전쟁과 무더위에 지쳐가던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줬던 통영상륙작전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다큐로 보는 '귀신잡는 해병'
한국전쟁 통영상륙작전 참가자 육성·사진 담아 오늘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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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7T103145 | 수정시간: 2009-01-11 [21:27:29] | 10면
'귀신잡는 해병'의 신화를 만들어 낸 한국 해병의 통영상륙작전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경남 통영시는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기록한 '아름다운 승리-통영상륙작전, 귀신잡는 해병'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27일 시청 강당에서 시 관계자와 해병전우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를 가졌다.
50분 분량의 이 기록영화는 통영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고 김성은(2007년 5월15일 작고) 전 국방부장관의 생존 당시 육성과 전투사진 등 소장자료와 참전용사 및 지역민 인터뷰 등으로 구성됐다.
또 해병대 최초 상륙지역인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와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망일봉, 원문고개, 통영 시가지 등의 모습도 담았다.
해병대 통영지구 상륙작전은 1950년 8월 17일부터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해병 제1대대가 용남면 장평리 바다를 통해 상륙, 통영과 거제도를 점령하려던 북한군 7사단을 무찌르는 개가를 올린 전투.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보다 한달 가까이 앞선 이 작전은 한국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으로 매년 통영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작전은 당시 뉴욕타임스가 한국 해병대의 활약상을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고 표현 한데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이 영화는 이날 시사회에 이어 내달 17일 통영시 도남동 관광단지에서 열리는 통영상륙작전 제57주년 기념식에서 첫 상영될 예정이다. 김정완기자 jwkim@
경남 지역 격전지 참전자들의 생생 증언
2010-06-25 [11:15:00] | 수정시간: 2010-06-28 [10:33:58] |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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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마산시 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 탑 높이 18m, 청동상 높이 2.9m의 이 전첩비는 해병대사령부가 국군과 유엔군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92년 12월 건립했다. 이성훈 기자 lee777@ |
60년전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린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두 전투가 경남지역에서 벌어졌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을 탄생시킨 통영상륙작전과 최후의 방어선을 지켜낸 마산 진동리지구전투가 그것이다. 두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됐지만 그때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여 만에 북한 인민군은 하동,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어요. 마산이 뚫리면 전략 요충지인 진해는 물론 낙동강 최후 방어선마저 무너질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류승석(80·6·25참전유공자회 마산시지회장·사진)씨는 "국군과 유엔군이 사활을 건 대공방전을 벌인 진동리지구 전투가 없었더라면 6·25 전쟁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학교 다니다 학도병 자원
군번도 못 받고 전장 누벼
진동전투서 동료 절반 전사
공군 입대 12년간 더 근무
청춘 바쳤지만 연금 못 받아
생활고 유공자 지원 아쉬워
류씨는 1950년 7월13일 1차 학도병으로 자원해 교복을 입은 채 마산 완월초등학교에서 불과 1주일여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마산 마포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학도호국단 감찰부장을 맡고 있었다. 학도호국단에 배속돼 있던 예비역 장교가 "호국단 간부들부터 학도병으로 우선 자원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자 류씨는 10여명의 친구들과 함께 자원했다.
"7월20일께 낡고 헐렁한 군복으로 갈아 입은 뒤 박격포탄 1개를 짊어지고는 전투가 한창인 전북 남원으로 이동했으나 인민군에 밀려 순천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어요. 순천에서는 실탄도 없는 일제 소총을 지급받아 외곽 초병근무를 서고 있던 중 인민군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요."
류씨는 순천에서 주민의
도움을 받아 사복으로 바꿔 입고 25일께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학도의용대에 편입됐다. 그는 전투경험이 있는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주일 가량 특수교육을 받고 적진의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북한군 복장을 한 채 진동전투와 함안전투에 각각 15명씩 배치됐다.류씨는 "마산시 진북면 지산리와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가 세워져 있는 지점의 중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덕곡천)이 우리 아군의 최후 저지선이었다"며 "인민군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개울가에 매설해 놓은 대전차 지뢰를 수없이 밟고 지나 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적진에 투입됐던 15명 가운데 진동전투가 끝났을 때 7∼8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면서 "진동에서 1개월 정도 체류한 뒤 미군에 인계돼 미 25사단으로 배속됐다"고 덧붙였다.
류씨는 1952년 공군으로 입대, 12년 간 복무한 뒤 1964년 10월에 공군 상사로 제대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3년을 포함해 모두 15년 간 복무했으나 군 복무기간이 20년이 되지 않아 연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달 초 참전유공자들과 전적지를 순례하면서 6·25전쟁 당시 부대가 주둔했던 전북 남원의 용성초등학교를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지뢰를 밟아 크게 다쳤으나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숨진 동창(이치조 씨)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경남도 내 6·25참전유공자는 등록회원 1만199명과 미등록자 3천여명 등 총 1만4천여명으로 추산된다.
류씨는 "참전유공자 대부분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다 모두 고령이라 참전수당 현실화 등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성훈 기자 lee777@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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